봄부터 여름 동안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대로 밖에 나가서 큰 숨을 들이마시니 차가운 기운의 흙 내음이 맡아졌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흙에서 풀 향기가 나는 듯했는데 새벽녘에 맡아지는 이 흙 내음은 땅이 한기를 받아들이는 찬 서리 향이었습니다.
도시에서 살 때는 문명이 주는 공간 안에서 계절이 언제 변하는지 귀로 듣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연에 살다보니 몸의 모든 감각기관이 동물처럼 예민하게 열리면서 날씨 변화를 좀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 눈을 통해서 들리는 소리에 나 자신도 놀라지만, 이 또한 자연 앞에서는 자연스러움이겠지요.
가을로 접어드는 이른 새벽 시간을 평화롭게 갖고 싶어서 따뜻한 차 한 잔 손에 감싸들고 먼동이 트는 훤한 방향의 하늘을 보았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던 별빛은 밝아오는 아침빛에 희미한 존재를 보이고, 벌써 산을 넘었어야 할 초승달은 아직 배를 채우지 못한 채 앞산 새벽하늘에 걸려 있습니다. 이렇게 오두막 위로 밤새 지나가는 별들과 달의 길에도 겨울이 오고 있음을 내게 일러줍니다. 그리고 다가올 긴 겨울밤, 우주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신 앞에 나 홀로 존재하는 그 극심한 고독과 적막함을 느낄 때 눈부신 달빛은 작은 오두막 창가로 스며들어와 어두운 밤을 아침까지 잘 보낼 수 있도록 안내해 줄 것입니다.
땅 위로 가을 이슬이 내려앉은 찬 서리 향을 온몸으로 맡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고 나니 나의 시선에 앞마당에 심어놓은 콩대와 옥수수대가 들어옵니다. 아! 오늘도 이 많은 일들을 언제 다 하지? 자연의 생명체들에 속해서 함께 살다 보면 해야 할 일이 끝도 없어서 차라리 할 일이 안 보이든지 이런 삶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잠겨봅니다. 그리고 계절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바빠질 몸을 생각하니 그동안 억척스럽게 일했던 내 몸이 측은해졌습니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닌데 하루 동안 할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하기로 마음먹고, 오늘은 우선 밭에 열린 열매들을 모두 수확하기로 했습니다.
고추대에 주렁주렁 열린 고추들, 그리고 토실한 피망들, 숲의 찬 기운에 빨갛게 익지는 못했어도 한낮의 햇살에 꽃을 피우고 찬 서리 맞으며 열매를 맺은 파란 토마토를 보고 있자니 작은 열매 하나하나의 소중함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맛으로 장아찌와 피클을 담가서 지인들과 나눠 먹기로 했습니다.
토마토 장아찌 담그는 법 : 화이트 와인과 간장을 끓여서 토마토에 붓습니다. 하루를 지내고 토마토를 거른 물만 2∼3번 다시 끓인 후 식혀서 효소와 양조식초를 입맛에 맞게 넣어줍니다.
식초절임 : 그야말로 소금 약간과 양조식초에만 절여서 맛이 들면 이탈리아식 해산물 샐러드에 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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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토마토 피클 ⓒ용서해 | 호박밭으로 내려가 보니 종자 씨 받으려고 놔둔 늙은 호박이 많은 씨앗을 품고 잘 늙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속을 긁어내고 호박씨를 골라내며 껍질을 까서 맛도 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고 왜 호박씨에 대놓고 말하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까는 씨라면 해바라기씨도 있는데……. 암튼 밭에 주저앉아 호박씨 까먹는 재미에 엉덩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핑계 김에 다음 할 일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자연적 순환을 따라가려고 힘든 몸을 위해 노래 한 가닥 흥얼거리며 다시 일어납니다.
바싹 마른 옥수수대와 콩대에서 나온 옥수수알과 콩알들을 망에 넣어 선선한 곳에 걸어놓고 그동안 이파리만 솎아먹던 근대를 뿌리째 캐냈습니다. 인분으로 키워 뿌리째 먹는 근대국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약초 향 가득한 숲속의 음식입니다. 알아보니 근대 뿌리에서 산소질산이 나와서 혈압과 심장질환에 아주 좋다고 하는데, 땅이 좋으니 어떤 것을 심어 먹어도 약이 되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심으로 근대 뿌리 된장국에 밥 말아 먹고 다시 밭으로 가서 나머지 일을 마저 했습니다.
작년에 감자를 캐지 못하고 뒀는데 해가 지나니 돌 감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호미를 흙에 대기도 전에 알 감자들이 굴러 나와서 몇 이랑 안 되는 밭이었지만 수확량이 무척 많았습니다. 고구마는 실험 삼아 몇 줄 심었는데 내일로 미룰까 하다가 서리 맞으면 단맛이 떨어진다는 말이 기억나, 내친김에 캐어보니 크기가 큰 것은 몇 알 안 되고 작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은 저녁에 밥할 때 함께 넣어 고구마밥을 짓기로 했습니다.
텃밭에서 농사가 잘된 것 중 하나가 야콘입니다. 종묘상 주인이 추운 데서 잘될 거라며 거저 준 모종을 몇 개 심어본 건데 큰 키로 자란 줄기를 뽑아보니 고구마처럼 생긴 것이 아주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흙을 털어내어 맛을 보니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특이했습니다. 며칠 볕에 두고 익히면 단맛이 더 강해진다기에 소쿠리에 담아 볕 좋은 곳에 두었습니다.
밭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바삭 마른 토마토 가지덤불을 걷어내자 노르스름한 것이 보였습니다. ‘어? 오이네?’ 정말 놀라운 수확이었습니다. 놀라움을 억제하지 못한 채 얼른 오두막으로 가져가 썰어보았더니 씨앗은 맺지 못하고 수분만 약간 모자란 듯 노랗게 늙어버리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순전히 이 오이 하나 때문에 오늘 텃밭에서 수확한 여러 가지 열매들을 넣고 당장에 더덕물김치를 담기로 했습니다. 마치 술래잡기에서 찾은 오이 한 개와 야콘, 가을배추, 고추, 마늘, 양파, 피망, 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야생 더덕 몇 뿌리 캔 것을 강판에 갈아서 마늘과 생강을 무명천 주머니에 넣고 숲속의 맛과 향이 우러나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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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덕물김치 ⓒ용서해 |
간단하게 물김치를 담그고 다시 밭으로 가서 추위에 잘 견디는 삼초와 부추를 캐고, 쪽파는 뿌리만 남기고 모두 낫으로 베었습니다. 왠지 된서리가 곧 올 것 같아서 대파도 뽑아서 밭의 흙을 담은 통에 꽂아 따뜻한 아궁이 옆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부지런히 하루를 움직여서 오늘 할 일을 거의 마치고 나니 어느새 하늘에는 붉은 노을빛이 돌고 있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 지을 준비를 하면서 앞마당에 심어놓은 예쁜 꽃씨들을 채취했습니다. 산작약 씨, 내년에도 아름다운 시와 노래가 되어줄 분꽃 씨, 아빠하고 나하고 부르던 채송화 씨를 한지에 싸서 내년 봄에 심으려고 잘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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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꽃씨 ⓒ용서해 | 다음날, 오두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산 아래 들판에 가보니 서리 맞은 가을 냉이가 뿌리에 향을 가득 머금고 돋아나 있었습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식물들의 순환적인 탄생 순서가 어쩌면 그리도 정확한지요. 마치 잘 짜인 계절 시간표에 따라서 자연의 시계가 도는 듯, 숲의 많은 식물들은 정확한 순서대로 줄넘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려줍니다.
“꼬마야 꼬마야 뒤로 돌아라. 돌아서 돌아서 땅을 짚어라. 짚어서 짚어서 만세를 불러라. 불러서 불러서 하늘을 보아라. 꼬마야 꼬마야 잘 가거라.”
저도 따라서 노래 부르며, 식물들이 난 자리에 쓰러진 덤불은 낫으로 벤 뒤 쇠갈퀴로 긁어내어 과실나무가 얼지 않도록 수북하게 덮어주고, 억센 나뭇가지들을 태운 재는 나무의 웃거름으로 뿌렸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농사지을 텃밭을 위해서 그동안 모아둔 퇴비를 한 켜 더 뿌리고 나니 올 한 해 흙과 함께 살았던 나의 삶도 서서히 겨울잠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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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 |
사람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3년 전, 1,100고지 깊은 숲으로 들어오면서 호스피스 요리의 근본에 대한 답을 찾을 때까지 여기서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이 근본에 대한 질문은 우리의 몸이 어디서 왔는지 성경에 쓰인 생명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분명한 것은 몸의 주인이 흙으로 만들었으니 마지막엔 당연히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열매를 따 먹은 사건으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쫓아내실 때 지으신 이는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응답 없는 질문의 꼬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무엇일까?”
원시림 같은 숲, 빼곡하게 솟아난 풀, 나무, 흙, 돌, 바람, 구름, 물은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역할을 감당합니다. 풀 한 포기, 한 그루 나무의 뿌리, 가지에 돋은 겨울눈, 바싹 말라서 떨어지는 낙엽과 열매도 제 몫을 다하는 진실함을 보여줍니다. 진실함이란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다가 자신이 떠날 때와 떠날 곳을 자연에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땅 어딘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순으로 돋아나고 줄기로 변하여 다시 열매를 맺기 위해서 꽃을 피웁니다. 다양하게 피어난 꽃들은 매혹적인 빛깔과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기도 하고, 어떤 식물은 이파리를 꽃처럼 보이게 위장하여 곤충을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지으신 이가 허락한 종족 번식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이겠지요.
그러다가 얼마 전 문득 이 자연스러움에서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받았던 시선의 유혹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탐스럽게 보였던 그 유혹도 인간의 종족 번식을 위한 원초적인 자연스러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이는 안타깝게도 사람을 자연스럽게 종족을 번식하며 살 수 있는 땅으로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마음에서 들려왔습니다(<창세기> 3장 23절 :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그러나 하느님이 책망하신, 사람의 잘못은 그 후에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서 은밀함을 감춘 것에 있지 않았을까요? 만약 에덴의 두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은밀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더라면 어땠을까요? 지으신 이가 코에 불어넣은 생기로 생령이 된, 그분의 맑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드러낸다는 것 그 한 가지만으로도 사람의 육체가 이 땅에서 무엇이냐의 의미는 그분과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동안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운 은밀함을 가렸듯이 내 방식의 합리화로 나의 은밀함을 치장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지으신 이 앞에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근본된 흙의 의미를 알았으니까요.
흙은 풀을 돋아나게 하고 나무를 성장시키고 바위를 그냥 그 자리에 있게 하는 것처럼, 제 몸에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어지고 씨앗이 맺어지고 나면 언젠가 내 몸은 흙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래서 지으신 이가 지금도 제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흙이니 그 흙의 존재로서 다하고 나면 나로 생령이 된 너의 영혼은 다시 내게 돌아오고 네 몸은 흙으로 돌아가리라”라고.
내 삶의 마지막 축제
예술가의 존재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내게 선물로 주셨던 어느 분과의 마지막 임종의 인연으로 시작된 호스피스 봉사자의 길. 그리고 숲에서 홀로 지낸 3년여의 세월은 제 삶을 지키면서 고독함, 외로움, 홀로 가야 하는 두려움, 내 존재가 묻히는 어둠을 견뎌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가장 소중한 가족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고 견뎌내야 했던 시간은 참으로 암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묵상 중에 죽음의 안내자가 된 주님의 길을 따라 가기 위해 나의 가진 것은 잃어야 했고, 이 모든 것을 내가 겪어야 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나마 내게 위로가 됐던 것은 “네 길에 들어섰다”라시며 주님이 가까이 계셔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저에게 ‘가족’의 부재는 평생 눈물을 흘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하여, 오늘도 그 무엇에 두 손 모으며 기도합니다.
누구의 잘못도 없다. 그러니 죄도 없다. 용서도 없다. …… 오직 신 앞에 두 손 모으다 울 뿐, 오!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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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마지막 축제 ⓒ용서해 |
제 삶을 하느님께서 모두 이루셨다는 위로는, 삶을 견뎌내는 동안 제 마음에 감사와 화해, 용서, 사랑을 품게 해주셨고, 이제 그분께서는 저를 플루티스트의 제자리로 다시 돌려보내셔서 상처를 입은 모든 이들을 위한 치유 콘서트를 앞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친구로 만나주시기에 내 아픈 상처를 드러낼 수 있고 나를 아프게 하고, 누군가를 아프게 했던 나를 향해 그 상처의 치유는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이제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저와 어느 분과의 사랑은 내 영혼에 생기와 생명이 되어 호스피스 음악과 음식으로 ‘삶의 마지막 축제’를 여는 플루티스트 용서해로 돌아가길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1,100고지 숲에서 머물렀던 오두막과 소유했던 토지를 (소유, 계획, 판단이 없는) 삼무곡 공동체 수도회의 ‘서해수도원’으로 하느님 앞에 내려놓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저의 원시적인 경험들로 아픔의 고통 속에 있는 여러분과 만나기를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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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수도원 ⓒ용서해 |
용서해의 요리 산책 연재를 마치며
우리는 오늘 하루를 더 살고 싶어 하며 떠나는 분들의 그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소중한 오늘 하루, 나의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흙과 같이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가서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진정한 진리로 우리가 거듭나길 소망해 봅니다.
그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글쓰기가 쉽지 않았고, 또 가능한 한 숲속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만으로 음식을 만들었기에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흙과 함께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 요리와 경험의 이야기가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1년 동안의 글을 마치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인연이 된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용서해 교향악단에서 24년간 활동한 플루티스트. 호스피스 센터에서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 봉사를 했고, 이들이 먹는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호스피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환자와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용서와 화해, 평화 속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이야기를 담은 저서로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 2012)가 있다.
이번 회로 ‘플루티스트 용서해 셰프의 요리 산책’ 연재를 마칩니다. 1,100고지 숲속 내음 가득한 요리와, 축제 같은 삶 이야기를 들려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