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은 전시즌 2위를 기록했던 뉴캐슬이 시어러의 합류로 화룡점정을 찍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첫시즌에는 31경기 25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또다시 2위에 그치며 우승에 실패했고, 그 다음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하여 17경기 2골에 그치고 팀의 성적 역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이후 뉴캐슬이 감독교체 등으로 인해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우승후보에서 중하위권팀으로 곤두박질하는 사이에도 시어러는 꾸준히 득점을 올렸으나 1969년 페어스컵 (現 UEFA컵) 우승 이후로 메이저급 트로피 획득에 실패한 뉴캐슬 팬들의 갈증을 풀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0-2001 시즌에는 또한번의 심각한 부상으로 선수생활의 위기까지 갔으며,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국가대표팀 은퇴를 택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대부분의 축구 팬은 시어러, 그리고 뉴캐슬의 전성기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명감독 바비 롭슨의 조언으로 시어러의 플레이 스타일을 크게 일변했다.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빠른 스피드와 뛰어난 패스플레이에 기복 없는 득점능력까지 보유했지만 무릎이 박살나며 스피드가 급감해버렸다. 동시대 최고 스트라이커 호나우두와 비슷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시어러는 호나우두와 다르게, 부상으로 쉬는 기간 동안 바비 롭슨의 조언에 따라 열심히 운동해 몸을 불려 타겟 스트라이커로 완벽히 변신했다. 원체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뛸 때도 축구 자체를 보는 눈은 뛰어났기에 타겟으로 변신해서도 공간을 읽고 동료를 활용하거나 동료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플레이가 준수한, 프리미어리그 최상급 타겟 스트라이커가 되었다.
이후 웨일스 출신의 준족 스트라이커 크레이그 벨라미와 황금콤비를 이루며 2001-2002 시즌 37경기 23골로 재기하여 팀의 우승도전을 이끌었다. 뉴캐슬은 이후 세 시즌 동안 꾸준히 국내리그와 유럽에서 우승에 도전하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아 번번히 고배를 마실고 말았다. 시간은 흘러 결국 롭슨 감독과 벨라미 모두 팀을 떠났고 뉴캐슬은 다시금 하향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점점 들어가는 나이와 어수선한 주변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어러는 계속 뉴캐슬을 최전방에서 한결같이 이끌었고 계속 한결같이 골을 넣었다.
막장감독의 대명사 그레엄 수네스아래에서 뉴캐슬은 강등위기에까지 몰리기 시작했고, 2004-2005 시즌 종료 이후 은퇴를 결심했던 시어러는 마땅한 대체자가 보이지 않았던 팀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한시즌을 뛰기로 한다. 뉴캐슬 팬들은 이 마지막 한 시즌 동안 시어러가 고향팀의 유니폼을 입고 트로피를 손에 쥘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마지막 기회는 FA컵에서 찾아왔다. 불안정한 리그성적에도 불구하고 FA컵에서는 원정에서 아스널을 격파하는 등 선전했고, 결국 8강에 오르나 첼시 원정이라는 난관을 만나게 되었다. 시어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뉴캐슬에서의 트로피를 안겨주기 위해 팀은 혼신을 다해서 뛰었으나 첼시의 막강한 수비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1-0으로 석패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달여 뒤였던 2006년 4월 17일, 시어러는 라이벌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페널티골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훌리오 아르카의 거친 태클에 무릎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당하며 시즌, 그리고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숙적 선더랜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선수생활을 마감한 모습은 역시 "시어러답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거 같다.
결국 2006년 5월 11일, 시어러는 은퇴기념경기를 갖고 모든 축구팬들의 축복 속에서 현역생활을 마무리한다. 그가 뉴캐슬에 남긴 것은 395경기 206골, 0개의 트로피, 그리고 셀수없이 많은 추억이었다.
시어러가 은퇴한 이후로 뉴캐슬은 공격력이 눈에 띌 정도로 떨어졌고, 이는 뉴캐슬이 08-09 시즌에 강등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
감독
마지막 시즌인 2005-2006 시즌부터 코치를 겸직했으며 은퇴 이후 지속적으로 뉴캐슬 감독 취임설이 나돌았다. 현직 감독들이 직접 불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시어러 감독설" 은 뉴캐슬의 고정 떡밥이 되었고 시어러 역시 언젠가는 뉴캐슬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차례 뉴캐슬의 감독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러는 BBC 축구해설가로 남아있었고 방송인 생활에 만족하는 듯 했다.
그런데...
뉴캐슬이 강등 위기에 직면한 2008/2009 시즌 막바지, 결국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죠 키니어 감독 대신 시어러가 구원투수로 투입된 것이다. 시어러의 지휘 하에 뉴캐슬은 잠시 향상된 경기력을 보이며 강등을 피하는 듯 했으나 그동안 쌓여온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2009년 5월 24일, 데미안 더프의 자책골로 아스톤 빌라에 무력하게 1-0으로 패하며 16년간의 프리미어리그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시어러 본인은 팀에 잔류하여 재승격을 도모할 계획이었으나 구단주 마이크 애쉴리와의 의견차이로 인하여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뉴캐슬은 크리스 휴튼 감독대행 체제로 2부리그에서의 첫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고, 시어러는 BBC로 돌아갔다.
새로 부임한 휴튼 감독이 팀을 승격시킨 후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지금은 시어러의 위치가 좀 어중간해져 버렸다. 그도 그럴듯이 뉴캐슬을 제외하고는 팀을 강등시킨것 외에는 경력이 일천한 감독에게 기회를 줄 팀이 흔할리는 없다. 하지만 본인이 재도전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고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워낙에 명망이 높은 인물이고 선수 시절부터 지도력 하나는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에 공석이 생긴다면 시어러에게 도박을 걸어볼 팀이 생기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플레이 스타일
힘, 스피드, 결정력을 모두 갖춘 완성형 스트라이커. 사우스햄턴 시절에는 우월한 피지컬과 유스시절 미드필더로 뛴 경험을 살린 쳐진 공격수로서 득점보다는 팀플레이에 중점을 두었으나 블랙번 이적 이후에는 순간스피드와 탁월한 위치선정을 100% 활용하는 전형적인 골잡이가 되었다. 블랙번 시절까지의 시어러는 거의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완벽한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뉴캐슬에서 당한 두번의 부상, 특히 대표팀에서 은퇴하게끔 만든 두번째 부상으로 인해 스피드가 급격히 저하된 후로는 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플레이스타일을 180도 바꿔 상대 수비수들을 괴롭혀 팀메이트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타겟맨으로 변신했고, 이 때 날카로운 공간돌파가 특기였던 전성기의 벨라미와 완벽한 콤비를 만들어냈다.
하늘이 내린 재능도 뛰어났으나 하나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팀의 요구,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변화에 맞춰서 매번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 낸 것이 시어러의 대단한 점이라고 불 수 있겠다. 이러한 적응을 위한 피나는 노력 덕에 그는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모든 면에서 흠잡을 곳이 없었으나 한가지 상징을 꼽자면 역시 강슛. 박스 어떤 각도에서도, 어떠한 불편한 자세에서도 날렸던 총알탄같은 슈팅은 지금의 디디에 드록바를 연상시킨다. 힘과 정확도를 겸비한 그의 슈팅은 특히 패널티 상황에서 빛났고, 거의 항상 변함없이 골대 우측 상단으로 차넣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날카로운 공을 찼기 때문에 골을 놓치는 바가 없었다. 클럽에서도 국대에서도 항상 패널티를 전담했으며 뉴캐슬에서 득점한 206골 중 총 45개가 패널티였다.(페널티킥 득점 비율이 높아 시어러를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득점능력이 무시되거나 의심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은퇴 후에는 미국의 유소년 캠프에 초청되었다가 시범삼아 차본 패널티를 선방한 중학생 골키퍼의 손을 부러트리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그걸 막은 골키퍼도 대단하고, 어린아이 상대로 전력으로 공을 찬 시어러도 참 대단하다;
그밖에 정신적인 측면으로도 자기관리는 물론 리더로서 타고난 기질을 발휘하여 특유의 카리스마로 혼란스러운 뉴캐슬의 라커룸을 휘어잡았다. 다소 완고하고 원칙주의적인 측면이 있어 몇몇 선수 (선수시절 벨라미, 감독 때 바튼)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의 명성 앞에 녹아내리고 시키는데로 잘 따라갔다. 그밖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성격으로,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로이킨을 "저 ㅄ은 뭐임?"이란 표정으로 내리깔아 보면서 퇴장까지 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승부욕도 강해서 훈련중에도 동료들과 즉석 프리킥 대결 등의 경쟁을 즐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등은 일등이고, 이등이나 삼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고향 클럽에 충성을 바치느라 커리어적으로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실력과 품성만으로 본다면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에는 최고의 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나우두가 기술적이고 화려한 축구로 90년대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라면, 시어러는 "방법이 뭐든간 닥치고 골은 넣는" 스트라이커의 표본이다.
기록
프리미어리그 역대최다 득점자 (283골)
뉴캐슬 유나이티드 역대최다 득점자 (206골)
프리미어리그 한시즌 최다득점기록 (31골)
프리미어리그 시즌 최다득점자 (1994-95, 1995-96, 1996-97)
프리미어리그 10주년기념 "최고선수상"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해트트릭 (17세 240일)
유로 96 최다득점자 (5골)
연도 |
소속 |
경기 |
골 |
경기당 득점율 |
1987-88 |
사우스햄튼 |
5 |
3 |
0.6 |
1988-89 |
사우스햄튼 |
10 |
0 |
0 |
1989-90 |
사우스햄튼 |
26 |
3 |
0.12 |
1990-91 |
사우스햄튼 |
36 |
4 |
0.11 |
1991-92 |
사우스햄튼 |
41 |
13 |
0.32 |
1992-93 |
블랙번 로버스 |
21 |
16 |
0.76 |
십자인대 부상 |
1993-94 |
블랙번 로버스 |
40 |
31 |
0.78 |
1994-95 |
블랙번 로버스 |
42 |
34 |
0.81 |
1995-96 |
블랙번 로버스 |
35 |
31 |
0.89 |
1996-97 |
뉴캐슬 |
31 |
25 |
0.81 |
1997-98 |
뉴캐슬 |
17 |
2 |
0.12 |
발목인대 부상 |
1998-99 |
뉴캐슬 |
30 |
14 |
0.47 |
1999-00 |
뉴캐슬 |
37 |
23 |
0.62 |
2000-01 |
뉴캐슬 |
19 |
5 |
0.26 |
발목인대 부상 재발 |
2001-02 |
뉴캐슬 |
37 |
23 |
0.62 |
2002-03 |
뉴캐슬 |
35 |
17 |
0.49 |
2003-04 |
뉴캐슬 |
37 |
22 |
0.59 |
2004-05 |
뉴캐슬 |
28 |
7 |
0.25 |
2005-06 |
뉴캐슬 |
32 |
10 |
0.31 |
총합 |
프리미어 리그 |
559 |
283 |
0.51 |
20년 선수생활 중 경기당 0.5골을 넘은것만 8번. 경배하라.
첫댓글 우리의레전드bb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
SAS는 영국 특수 부대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콤비여서 그런 별명이 붙었죠..ㅎㅎ
근데 프리미어쉽 최다 득점은 283골이 아니라 260골입니다. 사우스햄튼 시절은 프리미어쉽 출범이전입니다. 프리미어쉽은 92년에 출범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