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낙동강 중사도
어느새 임인년 한 해가 저무는 끝자락 성탄절을 맞았다. 세밑에 찾아온 동장군으로 아침 기온은 영하권이다. 당국에서는 연일 외부 활동 시 체온유지에 유의하고 도로 결빙이 예상되니 운전 및 보행에 유의하십사는 문자가 날아왔다. 아침 식후 대중교통으로 얼마큼 이동한 산책을 나서려고 아파트단지를 벗어났다. 퇴촌교에서 창원대학 삼거리로 나가 김해로 가는 97번 버스를 탔다.
시내를 관통해 남산버스터미널에서 창원터널을 지나니 장유 신도시였다. 예전 농사를 짓던 들판이 창고나 상가로 바뀐 거리를 지나 시내로 들어 김해문화원 앞에 닿았다. 경전철 수로왕릉역에서 사상 방면으로 가는 객차를 타고 불암역에서 내렸다. 불암역은 부산광역시 대저역과 선암다리를 사이에 둔 경계였다. 낙동강 본류에서 나누어진 서낙동강의 물길이 흘러오는 지점이었다.
평소 걸어서는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서낙동강 둘레길로 들었다. 서낙동강은 본류에서 삼각주가 형성되면서 강의 한 갈래가 서쪽으로 치우쳐 흐르는 물길로 지도에도 뚜렷하게 나오는 강 이름이다. 녹산을 거쳐 명지로 흘러 을숙도 하굿둑 바깥 다대포에서 낙동강 본류와 다시 만나는 셈이다. 불암동까지는 김해시였고 샛강 신어천이 흘러온 다리 너머는 부산 강서 가락동이었다.
불암동의 서낙동강 강변에는 지역 특산물인 장어구이 식당이 즐비했다. 강물이 호수같이 잔잔해 카누경기장과 함께 카누협회 본부도 있었다. 강 건너 부산 대저는 농사와 함께 공장과 창고 시설물이 빼곡했다. 간간이 공항 활주로를 이륙한 비행기가 서울로 향해 날아올랐다. 물결이 일지 않는 강 언저리는 추위에 몸을 움츠린 오리와 물닭들이 젖은 깃을 햇살에 말리고 있었다.
신어산에서 발원해 흘러온 신어천 하류에 시만교가 있었다. 시만은 가락동의 첫마을인데 빗돌에 새겨 놓은 한자어의 변이가 특이했다. 처음엔 기름진 충적토라 농사가 잘되어 숟가락 시(匙)에 가득 찰 만(滿)을 썼더랬다. 이것이 먹을 식(食)자 식만으로 바뀌었다가 근래에 시 시(詩)자 시만(詩滿) 바뀌었다. 글을 아는 선비가 많다는 의미였지만 지금도 ‘밥만개’로 불리는 동네였다.
시만교를 건너니 중사도(中沙島) 가는 길이 나왔다. 중사도는 서낙동강 하중도 모래섬에 사람이 살면서 형성된 촌락이었다. 다리를 건너기 전 중사도 유래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낙동강의 퇴적물이 쌓인 ‘치동’으로 불린 섬이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점용해 농사를 짓다가 떠난 이후 황 씨를 비롯한 농가들이 봄 무와 대파와 화훼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했다.
가락과 녹산 일대는 50여 년 전 경남 김해에서 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 강서구가 되었다. 행정구역은 광역시일지라도 전형적인 농촌 모습을 유지한 한적한 시골이었다.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긴 모래섬을 에워싼 제방 따라 농로를 겸한 산책로엔 보안등도 제대로 갖추어지질 않은 외진 곳이었다. 한때 거룻배가 오갔던 도선 나루터가 나오고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어망도 보였다.
중사도 둘레길 따라 모래섬을 한 바퀴 걸으니 멀리 사방으로 둘러친 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지나온 용제봉은 신어산으로 건너와 낙남정맥이 멈추었다. 강 건너는 부산 금정산 산세는 백양산에서 승학산으로 이어졌다. 농로를 겸한 둑길에는 휴일을 맞아 나처럼 외지에서 찾아온 산책객을 드물게 볼 수 있었다. 외부와 통하는 하나뿐인 다리까지는 산행처럼 원점 회귀 코스였다.
중사도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 바깥으로 통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니 아까 지나왔던 신어천 하류 시만교였다. 다리에서 불암동 강변 장어구이 거리를 지난 경전철 불암역에 이르니 점심때가 되어 끼니를 해결할 식당을 찾아 들어 어탕으로 요기하고 사상 기점을 출발해 오는 경전철을 탔다. 시청과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난 수로왕릉역에서 내려 창원으로 돌아가는 98번 좌석버스를 탔다. 22.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