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사적 제202호)에서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에 짓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면...
인조의 부모 무덤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왔다.
경기도 김포 풍무동에 건설 중인 아파트... 인조의 부모의 무덤에서 바라본 아파트.
이 무덤에서 바라보이는 저 아파트를 부셔야 하는가?
인조의 아버지(원종)가 왕이냐?
조선조 27대 왕 가운데 인조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다.
인조의 아버지(원종 서기;1580 ~ 1619년)가 왕이라면 그게 조선조 몇번째의 왕이냐?
'왕릉'이라는 표현이 웃낀다.
조선은 1919년 8월 29일에 일본한테 나라를 조용히 넘기지 않았던가?
이로서 이씨조선은 막을 내렸고, 왕족들은 일본한테 극진한 대접을 받지 않았던가?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일본제국한테 대든 왕족이 있었던가?
조선조에서 별로 혜택을 보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을 받쳐서 일본한테 저항할 때 이씨조선 왕족들은 독립운동을 했는가? 없다. 오히려 일본의 편에 서서 호의호식했다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을 게다.
* 대한제국 황실은 현대 대한민국의 광복과 발전에 있어서 손톱만큼도 공헌이나 기여한 바가 없으며, 저항은 커녕 일본 제국에서 구황족의 신분으로 대접받으며 살아왔다.
1) 논란이 된 왕릉뷰 아파트는 검단신도시 4-1구역으로 3개 아파트 단지 19개 동이다.
이 3개 단지는 장릉에서 각각 213m, 375m, 395m 떨어져 있다.
인조의 아버지 원종이 누구인가?
2) 원종은 후궁의 소실이었기에 왕세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아들 인조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는 데 몰두했다. 서자이고 왕세자 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사후에 임금으로 추증하느냐는 신료들과 정면 대결하면서 10년 가까이 정쟁을 벌였다.
3) 서인 세력과 손잡고 인조반정(1623)을 일으켜 공빈 김씨 소생의 삼촌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것도 드라마틱하지만 인조반정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반란(1624)으로 한양을 벗어나 공주로 피난을 떠나기도 하였다.
정묘호란(1627)때는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결국 형제의 의를 맺고 和戰하였으나 다시 병자호란(1636)으로 남한산성에서 대항하다가 조선 임금중 유일하게 청나라 황제에게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지구)에서 항복을 하는 굴욕을 당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 볼모로 보내는 등 모진 고초를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광해군 폭정에 동생 능창군이 유배 가서 자결하고 아버지 정원군(추존 원종)은 화병으로 원통하게 죽은 사연이 있다.
그러나 인조임금이 후대에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로는 두 아들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냈다가 큰아들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2달만에 죽어 인조가 살해(독살)했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소현세자빈 강빈을 직접 사사(사약을 내려서 죽였음)하였으며, 그 아들들 셋(당시 12살, 8살, 4살)을 제주에 유배보냈다가 다음해 봄에 큰손자 석철이 죽고, 그해 12월 둘째 석린도 죽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병자호란을 일으킴)는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고 셋째아들 경안군은 효종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 사관의 기록도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죽게하였다고 기록한다. 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무덤 역시 ‘원’(園)으로 부르지 않고 묘로 명명하였다.
인조는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없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서삼릉)
*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꼬리를 물고...
4) 1636년(인조 14) 12월, 청나라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치고 내려왔다.
인조가 누구인가?
서기1636년 12월에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서 한양으로 내려왔다.
인조는 경기도 남한산성(현재는 성남시 소재)으로 급히 피난갔으나.. 한 겨울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는 항복했다.
서울 송파구 송파나루터 인근의 삼전도(현재의 삼전동, 송파나루터)에서 청태종한테 아홉 번 굽신거리며 절을 올렸다.
삼궤구고두례(三궤九叩頭禮) 또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는 청나라 시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
그 기록을 새긴 비석이 있다.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
이런 역사적 사실이 쪽팔렸을까?'삼전도비'라고 개칭하여 부른다.
위 공덕비에는 이런 명칭은 전혀 없다! 빗돌에 이런 명칭을 전혀 새기지 않았기에... 그런데도 '삼전도비'? 웃긴다.
한강에 있는 섬 삼전도(한강 개발 뒤에는 삼전동이 되었음)에 세웠다고 해서 '삼전도비'냐?
대청황제공덕비 : 삼전도비라고 칭하나 웃낀이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서호 '잠실호수교' 북쪽 도로를 살짝 비킨 곳에는 '삼전도비'가 있다.
이 비석과 거북좌대는 한강에 내던지고, 꺼내서 세우고, 다시 내던지고, 다시 꺼내서 현재의 위치에 보존한다.
* 단, 비 가림 시설물은 설치했으나 비석, 좌대의 규모에 비하여 무척이나 초라하다.
치옥의 역사라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기억해야 하니까...
5)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왕족’이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일본 군부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는 17살이던 1913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한국인으로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영친왕 이은, 의친왕 이강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 그리고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한 죄로 2차 대전 이후 교수당한 홍사익 중장 등 4명뿐이다.
이후 영친왕은 1931년 8월1일 대좌(대령)로 진급해 보병 59연대장으로 부임했고, 1938년 7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뒤, 1939년 8월 근위보병 제2여단장, 1940년 5월 오사카 사단장을 거쳐 1940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해방 이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은 1947년 10월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창씨명으로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에 동화되기도 했다.
* 위 영친왕 이은 : 고종의 아들이며, 일본 천황의 사위.
* 위 이건 : 모모야마 켄이치로 일본인으로 귀화
6) 대청황제 공덕비 비문 내용은 대략 어리석은 조선 왕이 위대한 대청국 황제에게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자 황제께서 타일러 납득시키니 양심에 가책을 받아 크게 반성한다.
또한 위대한 대청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하며 조선은 대청국 황제의 큰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이 굴욕적인 삼전도비는 높이 395Cm, 너비140Cm로 규모가 꽤 큰 편이며 처음 건립될 때에는 송파진(松坡津:현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삼밭 나루터 언덕 위에 우뚝 세워졌다가 지금은 송파대로변으로 옮겼다.
2021년 현재의 사진 : 대청황제공덕비 / 일명 삼전도비
참고 : 조선조 왕릉(42곳, 남한 40곳, 북한 2곳)
위 자료들은 인터넷에서 퍼왔다.
진위 여부는 각자가 알아서 해석하기 바란다. 나는 소개하는 차원에서 인용했을 뿐이다.
이씨조선이 멸망한 지도 벌써 110년이 더 넘었다.
왕도 아니고, 고작 왕의 아버지 무덤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우대를 해야 하는가?
지금은 새로운 세상이다. 국민이 주인인 세상 2021년이다.
집 없는 국민(서민)이 살아야 할 집(주택, 아파트 등)이 혐오스러운 무덤보다 먼저이다.
특히나 건설 중인 이 아파트는 위 무덤이 소유하는 땅도 아니다. 개인/업체의 사유지다.
위 아파트건물이 눈에 거슬리면 위 무덤을 파묘해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거나 또는 화장해서 공원묘지 등 납골당에 안치하면 된다.
역사책을 다시 읽어 보라.
참고 :
왕조시대에는 무덤에도 그 격이 있었다.
陵 - 왕과 왕비의 무덤만이 해당한다.
* 인조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다!
園 -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왕의 후궁의 무덤이 해당된다
墓 - 능과 원을 제외한 모든 무덤이 해당되며 왕자, 공주, 정승, 일반인의 무덤이 여기에 해당한다.
2021. 1. 10. 토요일.
나중에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