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전 2500발’ 오직 실력만 보고 뽑은 양궁 국대, 33년 세계최강
[도쿄올림픽]
공정한 경쟁이 낳은 女양궁 9연패
25일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하며 올림픽 양궁 단체전 9연패를 달성한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의 안산, 장민희, 강채영(왼쪽부터)이 금메달과 꽃다발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이번이 첫 올림픽 출전이었던 세 선수는 8강에서 결승까지 세 경기 동안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는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도쿄=홍진환 기자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금메달이었다.
25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 출전한 안산(20)과 강채영(25), 장민희(22)는 8강부터 결승까지 단 한 세트도 상대 팀에 내주지 않았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25년 만에 올림픽에 나간 적이 없는 선수들로만 팀을 꾸려 경험 부족이 지적됐으나 퍼펙트하게 정상에 섰다. 상대 팀들은 한국과 경기를 한다는 것만으로 지레 위축돼 실수를 연발했다.
어떤 특혜도 없는 오로지 실력과 원칙에 따른 공정한 선발 과정은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을 이끌었다. 대한양궁협회에 따르면 올림픽 대표 선발을 위해 6개월 동안 5차례 선발 과정을 거쳤다. 대표로 뽑힌 선수들이 선발전에서 쏜 화살만도 1인당 2500발가량 된다. 매일 300발씩 1년에 10만 발을 쏜 선수도 있다. 안산은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49등을 했을 때가 너무 힘들었다.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솔루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2004 아테네, 2012 런던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이성진 본보 해설위원은 “백지 한 장 차이인 선수들이 바늘구멍 같은 대표 선발전을 거치며 강해질 대로 강해진다”며 “이제는 신인 선수들이 더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추세”라고 말했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강채영과 장민희, 안산은 경기 도중 웃고 장난까지 치며 편안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당당하게 선발된 최고 궁사에게는 철저한 준비와 전폭적인 투자가 따랐다. 양궁 대표팀은 도쿄 올림픽 양궁 경기장과 주변 환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진천선수촌 양궁 세트에서 집중적으로 실전 훈련을 했다. 일정하지 않은 흐름으로 부는 강한 바람, 카메라 셔터 소리, 취재진 등의 이동 동선, 양궁장 주변 상공을 지나가는 비행기 소음 등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모두 가정해 훈련을 했다. 대한양궁협회는 ‘도쿄 쌍둥이 세트’ 조성에 1억5000만 원을 투자했다. 해변에 위치한 도쿄 양궁장과 입지 조건이 비슷한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서도 1주일 동안 강한 바닷가 바람에 적응하는 특별 훈련을 했다. 만약에 대비해 지진 상황 대처법까지 연습했다.
강채영은 “대한양궁협회가 올림픽 경기장 같은 환경을 만들어줘 매일 실제 올림픽 경기를 하는 것처럼 훈련을 했다. 진천선수촌 양궁장은 불이 꺼지지 않는 양궁장이었다”고 말했다. 이성진 위원은 “올림픽 전에 경기장을 똑같이 만들어서 훈련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도쿄 올림픽 양궁장이 선수들에게는 집 같았을 것”이라고 했다.
단체전에서 활 쏘는 순서는 평소 훈련 과정에 축적된 수천 발 결과에 따라 각자의 장점을 충분히 살릴 조합으로 결정됐다. 짧은 시간 안에 과감하게 활을 쏘는 안산이 막내지만 1번 주자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김영숙 선임연구위원은 순번별로 선수들에게 명확한 역할을 알려주면서 긍정적 마인드를 갖게 했다.
단체전 9연패를 이룬 신궁 삼총사는 29, 30일 열리는 개인전에 나서 금메달을 놓고 경쟁한다. 랭킹 라운드에서 세 명이 1, 2, 3위를 휩쓸었기 때문에 4강전까지는 한국 선수끼리 맞붙지 않게 된 점도 개인전 우승을 향한 기분 좋은 집안싸움의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3관왕을 노릴 수 있게 된 안산은 “단체전 금메달 목표를 이뤘기 때문에 개인전 욕심은 없다. 재미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장 강채영은 “경기장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BTS(방탄소년단) 노래가 아니라 아쉬웠다”면서도 개인전 의지를 다졌다.
도쿄=유재영 기자
‘2관왕’ 막내… ‘무명 반란’ 둘째… ‘올림픽 한풀이’ 맏언니
[도쿄올림픽]
올림픽 첫 출전 女양궁 3인방의 삶
25일 오후 광주 광산구 광주여대 대학본부 1층 국제회의장. ‘와∼’ 하고 함성이 울려 퍼졌다. 도쿄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러시아 선수들을 6―0으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이번 대회 참가국 전체를 통틀어 첫 2관왕에 오른 안산(20)의 부모는 양손을 하늘로 뻗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어머니 구명순 씨는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에 서준 것만도 고마운데, 2관왕을 해 너무 기쁘다”며 “경기 중 계속해서 산이가 얼굴을 만지더라. 뜨거워서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산이는 ‘애호박 찌개’를 제일 좋아하는데 돌아오면 맛있게 요리해서 먹이고 싶다”고 했다. 함께 경기를 지켜본 김성은 광주여대 양궁 감독도 “안산은 양궁이라는 종목을 즐기면서 노력하는 선수”라고 했다.
안산의 별명은 ‘멍산’이다. ‘멍∼ 때리는’ 경우가 많아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지어준 별명이다. 어릴 때부터 어지간한 일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운동할 때 멘털(정신력)은 좋은 것 같다. 또 키가 커서(172cm) 그런지 바람에도 안 흔들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올림픽에서도 평소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회 첫 금메달을 땄던 24일 혼성전에서 김제덕(17·경북일고)이 연신 “파이팅”을 외치며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안산은 지나치리만큼 차분했다. 잘 쏠 때도, 간혹 실수를 할 때도 거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안산 스스로가 말하는 단점은 “아침잠이 많다”는 것. 훈련이 없는 날은 낮 12시 넘게까지 푹 잔다. 외부 활동보다는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활 이모지와 함께 ‘좋아하는 거 좋아하면서 살래’라는 글귀를 올려놓을 정도로 낙천적이다.
맏언니 강채영(25)은 25일 금메달과 함께 올림픽의 한을 풀었다. 강채영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단 1점 차이로 4위에 머물며 올림픽에 가지 못했다. 당초 국가대표에 승선하지 못했지만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되면서 다시 치른 올해 선발전에서 태극마크 기회를 잡은 장민희(22)도 ‘무명 반란’의 주인공이 됐다.
이헌재 기자, 광주=박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