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성종의 명으로 1478년 편찬된 우리 나라 역대 시문선집. 130권과 목록 3권 합 45책. 우리 나라 한문학의 갈래의 전범이 되고 있다.
유형 |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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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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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시문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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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14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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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책수 | 133권 45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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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규장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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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78년(성종 9)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徐居正)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
서지적 사항
본문 130권, 목록 3권, 합 133권 45책. 활자본·목판본.
내용
당시 대제학이던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 등을 포함한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 책 이외에 또 신용개(申用漑)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과 송상기(宋相琦)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 등 세가지가 있는데,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은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을 비롯,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약 500인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하였다. 목록 상권 첫머리에 서거정의 서문과 양성지의 「진동문선전(進東文選箋)」이 실려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제시해서 ‘사리(詞理)가 순정(醇正)하고 치교(治敎)에 도움되는 것’을 선택하였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시문이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극성해졌다고 보고, 역대의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글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내용을 보면, 권1∼3은 사(辭)·부(賦), 권4·5는 오언고시, 권6∼8은 칠언고시, 권9·10은 오언율시, 권11은 오언배율, 권12∼17은 칠언율시, 권18은 칠언배율, 권19∼22는 오언절구·칠언절구·육언절구, 권23∼30은 조칙(詔勅)·교서(敎書)·제고(制誥)·책문(冊文)·비답(批答), 권31∼45는 표전(表箋)·비답, 권46∼48은 계(啓)·장(狀), 권49∼51은 노포(露布)·격서(檄書)·잠(箴)·명(銘)·송(頌)·찬(贊), 권52∼56은 주의(奏議)·차자(箚子)·잡문, 권57∼63은 서독(書牘), 권64∼95는 기(記)와 서(序), 권96∼98은 설(說), 권99는 논(論), 권100·101은 전(傳), 권102·103은 발(跋), 권104는 치어(致語), 권105는 변(辯)·대(對)·지(志)·원(原), 권106은 첩(牒)·의(議), 권107은 잡저, 권108은 책제(策題)·상량문, 권109∼113은 제문·축문·소문(疏文), 권114는 도량문(道場文)·재사(齋詞), 권115는 청사(靑詞), 권116∼121은 애사(哀詞)·뇌(誄)·행장·비명(碑銘), 권122∼130은 묘지(墓誌) 등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되도록 많은 문체를 망라하여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하였다. 문체의 종류로 보면 55종에 걸쳐 있어 중국 『문선(文選)』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는 단 1편의 작품만 있는 노포(露布)와 같은 것도 설정되어 있어 당시로서 자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되도록 다량을 선취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김부식(金富軾)·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이제현(李齊賢)·이곡(李穀)·이색(李穡)·이첨(李詹)·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이 책의 편찬 직전까지의 인물들을 차례로 싣고 있다. 29인의 승려와 약간의 무명씨를 포함, 500인 가까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작품만 가지고 등장한 작가가 220여인에 이른다.
이는 당시 문헌의 인멸로 그들 작품의 전부가 전해지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우리 문학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인식 아래 한두편의 작품도 포괄하여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시는 약 4분의 1 정도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는 문(文)이다. 문 가운데에도 조칙·교서·제고·비답·주의·차자·첩·책제 등 정교(政敎) 관계 문장과 표전·축문·소·도량문 등 의례성(儀禮性)이 강한 문장에 해당되는 것이 1,130편 가량 된다.
특히, ‘표전’ 하나만 460여편으로 전체 작품수의 10%를 넘어서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표전의 내용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주로 임금에게 축하나 감사를 올리는 경우나 사양할 경우, 진상할 때에 올리는 의례성이 강한 글이다.
이를 통하여 『동문선』의 선문(選文) 방향이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각적(館閣的) 문학관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교국가의 관찬서(官撰書)이면서 도량문·재사·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儀禮文)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지배층의 이념이 철저하게 유교적이지는 않았다는 반영이 된다.
동시에 그 내용이 대부분 국가와 임금, 귀족의 복을 빌어주는 의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와 같은 통치층의 권위를 장식하는 효용에서 실려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들 작품의 거개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된 화려한 문장이어서 전체적으로 형식미를 추구하고 있는 선정기준을 엿보게 한다.
작품의 선정에 있어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예로 최충헌(崔忠獻)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한 시문이 많이 실려 있고,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塔銘), 그리고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元曉)의 일련의 불서의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혜심(慧諶)·일연(一然)·보우(普愚) 등 쟁쟁한 선승(禪僧)들의 선시(禪詩)는 거의 한편도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작품 선정자의 미의식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동문선』은 관료귀족의 미의식에 맞는 화려하고 호부(豪富)·숭엄(崇嚴)한 미, 우아·온유의 미에 지배되어 있으며, 비장미(悲壯美)나 골계미(滑稽美)의 범주에 드는 것은 드물다. 거의 철저하게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포괄적으로 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완성되어 유포되자 성현(成俔)은 “이것은 정선(精選)한 것이 아니고 유취(類聚)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수광(李睟光)도 “『동문선』의 채선(採選)은 범위는 넓으나 주선자(主選者)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취사(取捨)되었다.”며 공평성이 부족함을 비평하였다.
후대의 이러한 비난은 정치적인 안정에 만족하는 관학적인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동문선』의 전집적(全集的)인 성격을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풍부한 양을 남겨 당시의 문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후세에 커다란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의 우리 나라의 문학자료를 나름대로 집대성하였다는 의의와 함께 우리의 문학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후대에 주자학적 문학관에 의해 경직된 선집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신라·고려 시대의 기록과 도교·불교 관계자료의 중요성은 지대한 것이다. 1478년에 을해자로 펴낸 초간본이 있고, 1482년 갑인자로 찍은 재인본이 있다.
연대는 미상이나 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측되는 을해자본 번각본(飜刻本)이 전하고 있으며, 1615년(광해군 7)에 임진왜란으로 거의 인멸되었으므로 서적교인도감(書籍校印都監)에서 재인하였다고 한다.
규장각도서에 있는 목판본은 어느 때의 간본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미 간행되었던 활자본을 대본으로 해서 판각(板刻)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15년 고서간행회에서 번인본을 간행하였으며, 1966년 경희출판사에서 영인본을 내었고 1968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본을 내었다.
참고문헌
- 『한국의 명저』-동문선-(이경선, 현암사, 1969)
- 『한국의 고전백선』(김규성, 동아일보사, 1969)
- 『국역동문선해제』(김두종, 민족문화추진회, 1968)
- 『동문선해제』(이우성, 경희출판사, 1966)
- 「동문선의 편찬동기와 사료가치」(허흥식, 『진단학보』 56, 1983)
- 「동문선의 선문방향과 그 의미」(이동환, 『진단학보』 56,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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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