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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장 허무영(虛無影)의 사(死)
수만에 이르는기마어림군.
햇빛을 받아 섬뜩한 반사광을 토해내는 도(刀)와 검(劍), 그리고 장창(長創)의 숲이 자아내는 위용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관병들이란 대개 무공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철갑과 기마로 무장된 그들의 공세는 쉽게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차 안으로부터 다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마대장군(馬大將軍)은 명을 받들라!"
"하명 하소서."
기마병들 속에서 장군(將軍)의 의장을 갖추고 긴 지휘검을 소지한 자가 나섰다.
그의 이름은 마초(馬楚), 오군도독의 직속수하이자 어림군의 총수(總首)였다.
"그대는 전군에 명을 내리되, 구주동맹의 무리들을 제거하고 소림사를 초토화시켜 황명이 얼마나 지엄하신가를 알게 하라."
"존명!"
마초는 고개를숙여 보이고는 지휘검을 뽑아 들었다.
창!
검명(劍鳴)이 울리며 긴 지휘검이 햇빛 속에서 섬광을 발했다.
이제 그 검이 허공에서 내리 떨어지기만 하면 수만의 기마병은 그대로 조수처럼 소림사를 쓸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맹렬한 말발굽소리가 흙먼지와 더불어 대지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우렁찬 대사자후가 중인들의 고막을 때렸다.
"멈춰라--!"
한 마리의 붉은 준마가 나는 듯이 대장군 마초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상에는 준수해 보이는 흑의청년이 타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 청년이란 바로 허무영이었다.
그는 마초의 면전에 이르자 고삐를 잡아 당겨 말을 멈춘 다음, 낭랑하게 외쳤다.
"황상의 칙령(勒令)이오! 대장군 마초 총수는 속히 받드시오."
마초의 눈에 언뜻 의혹이 스쳤으나 그야말로 불문곡직이었다.
그는 곧바로 지휘검을 거두더니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숙연한 자세로 구배(九拜)를 올렸다.
너무도 창졸지간의 일인지라 군웅들은 물론 기마병들도 모두 숨을 죽인 채 마초가 하는 양을 지켜 보고 있었다.
허무영도 역시말에서 내렸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하나의 첩지를 꺼내 마초에게 읽어 주었다.
"어림총군에게 명하노니, 즉시 철수를 하도록 하라. 짐의 일시적인 판단착오로 말미암아......."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앞서 어림군에게 내렸던 칙령이 그릇된 것이니 취소한다는 의미였다.
마초는 미간에깊은 주름을 잡았다.
두 가지의 엇갈리는 칙령이 그로 하여금 때아닌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마차 안의 음성이 침착하게 말했다.
"마장군, 그를 이 곳으로 오라 이르게."
허무영은 마초의 중개를 기다리지도 않고 스스로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불과 몇 보 되지 않는 거리였으나 그 몇 보를 떼어놓는 동안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져 갔다.
하지만 확실히지금 허무영의 표정은 예전에 가졌던 그 특유의 허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단호하게 읽혀지는 한 가닥의 결의가 어려 있었다.
마차 안으로부터 예의 음성이 물었다.
"무영, 어찌 된 일이냐?"
"반도독, 연극은 그만 두시오. 당신의 음모는 백일하에 드러났소. 황상께서도 당신이 사사로이 관군을 움직여 강호를 제패하려 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철군령을 내리신 것이오."
"닥쳐라! 네 놈은 지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겠소이다."
허무영은 입가에 비릿한 냉소를 떠올렸다.
"당신께도 특별히 칙령이 내려졌소."
"뭣이?"
"대명의 오군도독이라는 지위는 이제 당신의 것이 아니오. 당신은 파직되었소. 뿐만 아니라 황상을 기만한 죄로 삼족(三族)을 멸하라는 황명이......."
"미쳤구나!"
날카로운 음성이 허무영의 말을 끊어 버렸다.
슉!
마차 안으로부터 시뻘건 기류가 폭출되어 허무영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러나 허무영은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듯 재빨리 신형을 틀어 그 공세를 피했다.
"놈을 죽여라! 놈이야말로 황상을 기만하고 있다."
마차 안의 음성은 대노해 있었다.
마초는 어찌 처신해야 할지 도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허무영이 내민첩지는 절대로 가짜가 아니었다.
옥새가 선명하게 찍혀 있으되, 그것은 늘상 그가 보아오던 것과 똑같았다.
반면에 반도독의 명도 이대로 일축시켜 버릴 수만은 없었다.
그 역시도 황제의 칙령을 받고 움직였을 뿐더러 평소 마초 자신이 그림자를 자청하며 수족처럼 따라 왔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
다시금 대지에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며 일대의 기마병들이 소실봉 위로 질주해 왔다.
그 기마의 숫자는 일견하기에도 최소한 일만여 명에는 이를 듯한 대군이었다.
<황(皇)>
각 대마다 수십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그 깃발에도 황금색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다만 어림군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깃발의 바탕색이 선홍색이라는 점이었다.
"오오! 저 깃발은.....?"
"자금성의 어영친위대(御營親偉隊)다. 우우우......."
어림군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을 때였다.
어영친위대의 선두에서 자색복장의 한 장군이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황명이다! 속히 철수하라! 만일 병기를 버리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반역자로 보고 이 자리에서 처단하겠다."
어림군은 그 말을 듣자 일제히 병기들을 땅에 내던져 버렸다.
마초 또한 지휘검을 풀어 놓고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철군해라!"
어림군들은 마침내 차례로 기수를 돌려 산아래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정녕 그것은 뜻하지 않은 전환이었다.
허무영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써 상황이 일거에 뒤집어져 버렸던 것이다.
"죽일 놈!"
마차 안으로부터 다시 붉은 광망이 번뜩 일더니 핏빛을 띈 기류가 가공할 속도로 허무영을 휩쓸어 갔다.
"헉!"
허무영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도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지라 핏빛 기류에 여지없이 적중 당하고 말았다.
펑!
"으윽!"
검붉은 선혈이허공에 피무지개를 그렸다.
이와 더불어 튀어 오른 것은 잘려진 그의 팔이었다.
아니, 말이 잘려진 것이지 그의 팔은 어깻죽지부터 거의 짓뭉개져 있었다.
"아미타불! 잔인한 수법이로다."
원광선사의 불호성에 비로소 정신이 든 구파일방의 영수들은 대로하여 일제히 쌍장을 떨쳐냈다.
쿠우우우--!
열 명의 절정고수들이 쏟아낸 잠경은 막강한 기세로 마차를 쓸어갔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울리더니 또 다시 한 줄기의 혈류가 쏘아져 나왔다.
콰르르릉--!
굉음이 울리자쌍방간의 잠경이 충돌한 곳에서는 흙덩이가 패여 나와 허공에 비산했다.
동시에 마차는 산산조각이 나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휙!
부서진 마차속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솟구쳐 오르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산허리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미타불! 실로 무서운 장력이었다."
원광선사를 위시한 구파일방의 수뇌들은 흔들리는 어깨를 겨우 진정시키며 밀려나려는 기세를 바로 잡았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불신의 빛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들 십인이 떨쳐낸 장세로 말하면 대해를 뒤집고도 남을 만한 위력이 있었으나 단 일인의 공격에 꺾이고 만 것이다.
그들이 망연히반무독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쿵!
둔탁한 음향이울렸다.
그제서야 십인은 시선을 허무영에게로 돌렸다.
그는 땅에 쓰러진 채 혼절해 있었다.
한 팔이 잘려져 나간 충격도 그렇지만 극심한 내상까지 입었기 때문이었다.
딩... 딩......!
고즈녁한 풍경소리가 바람을 타고 허공 중에 흩어져 갔다.
그 풍경 사이로 보이는 달은 밝은 빛을 뿌리며 점점 원형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수많은 별무리가 풍경 소리 가득한 소림사의 야경을 더욱 신비롭게 비춰 주고 있었다.
허무영.
그가 깨어났을때 창을 통해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처마 아래 매달린 예의 풍경이었다.
조금 후에는 그 위로 떠 있는, 만월에 가까운 달도 보였다.
그의 귀로 한 가닥 다감한 음성이 들려 왔다.
"깨어났구려, 허형."
허무영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그의 침상가에는 네 명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진일문을 비롯해 만박노개와 취화상, 그리고 원광대사 등이었다.
"진형! 언제 돌아 왔소?"
반색을 하는 그에게 진일문은 감격이 배인 미소를 전했다.
"우선 허형께 감사부터 드려야 할 것 같소. 허형이 아니었다면 구주동맹은 벌써 와해 되었을 것이오. 아니, 구파일방의 존속조차도 보장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진일문은 허무영의 남은 한 팔을 부여 잡았다.
"그 동안 허형이 무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으며, 또 어느 정도로 분주히 뛰어 다녔는지 모두 들었소. 당금 무림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허형 덕분이오."
허무영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칭찬이 과하니 도무지 몸둘 바를 모르겠소. 미처 반가워 할 겨를도 없지 않소?"
"허형......."
"연락이나 하고 올 일이지, 그동안 진형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르오. 아무튼 이처럼 눈부신 모습으로 돌아와 주니 감사는 오히려 이 허모가 해야 되겠소."
진일문은 내심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허무영의 표정에서는 예전의 짙은 허무감 따위는 접할 수가 없었다.
나름의 극기(克己)를 통해 승화(昇華)된, 본연의 그를 내비치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에게 취화상과 만박노조를 가리켰다.
"내 허형에게 당대의 기인 두 분을 소개해 드리리다."
허무영도 벌써부터 그들 두 사람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것은 기이한 행색과 범상치 않은 기도를 마주 하고 보니 꼭 꼬집어 연상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형께서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이 분들이 저 유명한 우내삼기(宇內三奇) 중 두 분이시오."
"으음!"
허무영은 안면에 은은한 놀라움을 떠올렸다.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두 분께서 허형을 보고자 직접 찾아 오셨소."
허무영은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쌍기어르신네들께 말학후진 허무영이......."
"험!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없다."
만박노개는 진일문에게 그리했듯 허무영의 인사도 거부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동안 허무영을 노려 보았다.
그리고는 일말의 감탄이 깃든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크치 과연 쓸만한 녀석이로다! 이 놈, 노부를 사부로 모실 생각은 없느냐? 내 네 놈이라면 개방을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진일문이 곁에서 거들었다.
"축하하오, 허형. 이 분은 내가 간청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제자 삼기를 사양하셨었소. 그런데 허형께는 오히려 자청해서 권하시다니, 정녕 놀라운 안목이지 않소?"
만박노개가 짐짓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이 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어찌 저 놈을 도화살이나 잔뜩 끼고 있는 네 놈과 비교한단 말이냐?"
"하하하...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두 사람은 농담을 통해 허무영의 자질과 드높은 충혼(忠魂)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무영도 이 점을 알아 차리고는 곧 깊숙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르신의 말씀, 각골하도록 고마움을......."
그의 말은 또 중간에서 잘렸다.
"클클... 네가 입문하겠다고 말하니 우리는 이제 사도지간이 되었구나. 구배 따위는 안해도 된다."
"어르신, 죄송합니다만 제 뜻을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엉?"
"저는 한쪽 팔이 없는 불구자입니다. 개방의 절기를 익힐 수 있는 형편도 되지 못하거니와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지난날의 오류를 대신해 제가 구상했던 몫을 다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거절을 하겠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감히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이 말학후진은 아직 계획을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구속 받을 입장이 못됩니다."
"허형......."
진일문의 눈이일순 몹시도 흔들렸다.
그의 심중에서는 바로 이런 우려가 일렁이고 있었다.
'허형의 계획이란 또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것은 절대로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만치 허무영을 아끼기 때문이다.
팔 하나를 잃고도 모자라 또 무슨 일인가를 벌이고자 하니 그로서는 차라리 허무영이 만박노개의 휘하에 머물러 주었으면 싶은 것이었다.
허무영이 정색을 하며 진일문을 응시했다.
"진형, 도와 주시오. 나라는 위인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어르신께 말씀드리고 근신을 허락받아 주시오."
그것은 실로 완곡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만박노개도 이쯤 되자 어쩔 수가 없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삼, 사일은 순식간에 지났다.
허무영의 상처도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그 이면에는 소림사를 위시하여 구파일방의 배려가 컸다.
허무영으로 인해 존망의 위기에서 벗어난 그들은 온갖 영약을 아끼지 않고 그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조용한 실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로써 천마신궁이 쓰고 있던 위선의 탈은 벗겨진 셈이오."
허무영의 음성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탁자에는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술이 있어야 제격이었으나 불문의 성지인 소림사에서는 무리한 일일 뿐더러 작금의 형편상 당사자들이 사양을 했기 때문이었다.
허무영은 잔을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황상을 배알하고 천마신궁의 음모를 고해 올렸소. 황상께서도 처음에는 믿지 않으셨으나 내가 제시한 증거를 일일이 확인하시더니 마침내 결단을 내려 주셨소."
진일문이 답했다.
"실로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구려, 허형."
"후후... 죽음을 각오하면 못할 짓이 무엇이겠소?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거늘, 목표를 향해 뛰다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영광이외다. 자, 그 얘기는 이쯤 해 두고......."
허무영은 미간을 모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오. 천마신궁은 비록 근거지를 잃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그 무서운 힘만은 건재하오."
이 점은 진일문도 동감이었다.
사실 그는 천마신궁이 이번 일을 기화로 되려 본격적인 혈겁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이 부분 때문에 내심 중압감에 시달려 온 터였다.
허무영이 말이다시 이어졌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진형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을 것이오."
"그럼 그것 말고 달리 방도라도 있소?"
"내가 한 사람을 만나리다. 그 때까지 진형은 여하한 도전에도 응하지 말고 기다려 주시오. 부탁이오."
진일문은 안색을 굳힌 채 진중하게 물었다.
"허형이 만나고자 하는 자는 누구요?"
"왕중헌."
"아!"
그의 놀라움에반해 허무영은 계속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힘을 빌릴 생각이오."
"정녕 놀라울 뿐이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허형은......."
진일문의 얼굴에는 일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허무영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씨익 웃었다.
"기왕에 돕고자 나섰으니 마무리도 확실해야 하지 않겠소?"
"으음......."
진일문은 격정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내 삶이 전반적으로 하잘 것 없는 허수아비 놀음이었던 만큼 죽음만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싶소."
허무영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것을 알자 진일문은 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진형께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해 보시오."
"사매에게 전해 주시오. 쓰레기 같은 이 허모가 인간을 찾는답시고 그 일가를 파멸시키지 않았소? 부디 용서해 달라고......."
허무영은 말꼬리를 흐트리더니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진한 고통이 깃들었다.
진일문은 나직히 탄식을 불어냈다.
'허형, 당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卑下)시키지만 당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풍경을 흔들며 지나갔다.
그러자 풍경은 예외없이 맑고도 신비로운 소리가 울려 주었다.
딩딩...
디딩.......
그 고운 음색은 대보찰의 장엄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두 청년의 가슴 속에 형언키 어려운 인상을 심어 놓았다.
흔들리는 풍경의 위로는 뭉게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쏴아아아--
밀려오는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대황하(大黃河).
이른바 중원의젖줄인 이 강은 대륙을 굽이치고 돌며 황토를 운반하다가 그토록 색이 누렇게 떠 버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대황하는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석양빛을 받아 산야와 대비되는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일말의 감동마저 불러 일으키는 장관이었다.
그런 대황하에한 척의 범선(帆船)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떠 있었다.
허무영이 그 배에 오른 시각은 노을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피빛을 띄우고 있을 때였다.
"사부, 부디 이 제자를 거부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마도 두 번 다시 이렇게 청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허무영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안색이 핼쑥해져서인지 입고 있는 흑의가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화려한 선창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동정심을 유발시킬 정도였다.
선창의 윗자리에는 호피가 깔린 태사의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한 인물이 태산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허무영의 사부인 왕중헌(王中軒)이었다.
"관대한 처분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요구만 관철된다면......."
왕중헌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허무영의 격앙된 음성에서 진가(眞假)를 알아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윽고 탐색전이 끝났는지 냉소적이고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입술이 열렸다.
"배짱이 두둑한 놈이다. 무영, 너는......."
허무영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보이는 모습은 어떨지 모르나 제자는 지금 비참합니다. 저는... 천마신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호오! 네가 그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고?"
허무영은 하기곤란한 말을 꺼내듯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사부께 배척 당하고 나서 제자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의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역시 저를......."
"그래서 황군을 끌어 들여 천마신궁을 치게 했단 말이지?"
"제자에게도 오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왜 그리 하지 않았느냐?"
"제자가 사부를 해할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천마신궁 측에서는 애초부터 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부는 제 일거수일투족, 모르는 부분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건 맞다. 묻겠다, 너는 내가 두렵느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물론 이전처럼 공경하지도 않을 테고?"
왕중헌다운 심문(?)이었다.
그러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 공언만은 아니듯 그를 압도하는 것이 바로 허무영의 응수였다.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제자는 그 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왕중헌의 입가에 일순 기소가 스쳤다.
"좋다! 네가 만일 나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일장에 쳐 죽였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사제지간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요구를 말해라. 나를 왜 찾아 왔느냐?"
"먼저 사부께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정보?"
왕중헌의 눈에야릇한 기광이 일렁였다.
이후로 한동안 허무영은 음성을 낮추어 무엇인가를 얘기했고, 그것은 왕중헌의 냉면(冷面)을 수 차례나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제자가 알고 있는 천마신궁의 실세입니다. 여기에 제자가 지니고 있는 계략을 가하신다면 사부께서는 능히 그들을 병탄하고 천하무림을 통일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 전에 내게 보여 다오."
왕중헌은 불쑥손을 내밀었다.
"내가 너를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타의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서약이라면 맞겠지. 이 사부는 너의 남은 한 팔을 원한다."
왕중헌은 섬뜩한 말을 너무도 가볍게 내뱉고 있었다.
허무영은 입술을 악물고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사부께서는 정녕 그렇게 해야만 이 제자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렇다."
"그럼 드리겠나이다. 대신 사부께서는 약속해 주십시오."
"말해 보아라."
"반드시 천마신궁을 괴멸시켜 제자의 한을 풀어 주십시오."
왕중헌의 눈에비로소 안도가 스쳤다.
그것은 바로 허무영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야수적인 집념이 그의 심중에 가로놓여 있던 최후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이 놈은 진정으로 나를 원하고 있구나. 아마도 한 팔을 잃게 되기까지 심상치 않은 사연이라도 있었던 모양인데.......'
왕중헌은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구체적인 것은 추궁하지 않았다.
물어 보았자 허무영이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으므로........
"네 스스로 팔을 잘라라."
"알겠습니다."
허무영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츳!
예리한 섬광이허공을 갈랐다.
촤아아--!
피보라와 더불어 하나의 팔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이는 목적 달성을 위해 허무영이 치뤄야 했던 엄청난 댓가였다.
왕중헌.
그는 허무영을떠나 보낸 뒤, 갑판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의 수중에는 한 마리의 흰 비둘기가 들려져 있었다.
왕중헌은 작은동관(銅管)을 비둘기의 날개에 묶었다.
"천마신궁은 명조의 반역도로 몰려 있은즉 설사 중원무림을 정복한다 해도 관부로부터 끊임없이 핍박을 받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노려 그들을 회유해야 한다. 그들과 힘을 합치면 대륙 정복도 그만큼 손쉬워질 테니까. 그런 다음 엣센에 넘기면, 그들 정도는 알아서 주물러 줄 수 있겠지."
그는 계속해서독백을 이어갔다.
"무영! 과연 대단한 놈이다. 그런 복안까지 미리 짜 가지고 나를 찾아 왔다니. 물론 협상이 순조롭지 않을 때에는 애초의 전략대로 그들을 쳐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하겠지만."
왕중헌은 팔을펼쳤다.
그의 팔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가 힘차게 비상하더니 선박 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런 연후, 비둘기는 곧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하나의 점으로화해 까마득히 사라져 가는 비둘기를 응시하며 왕중헌은 떨림이 깃든 음성으로 외쳤다.
"엣센이시여! 때가 왔소이다. 이제 또 한 번의 밀지가 날아가게 되면, 그 때에는 이 중원대륙에 위대한 푸른 이리의 위업을 다시 건립하실 수 있을 것이오."
푸른 이리란 곧 원(元)의 상징이었다.
"네 놈이 감히!"
쩌르르릉.......
굉음이 허공에울릴 정도로 큰 외침이었다.
대전(大殿).
너무도 방대해하나의 광장을 연상시키는 규모였다.
정면은 본 바닥보다 약 다섯 계단 정도 높았고, 그 곳에는 황금빛이 찬연한 태사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흡사 용상(龍床)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그 태사의에는지금 격노한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반무독(盤武獨).
과거 명조의 오군도독 시절에는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절대적인 권력과 더불어 병부의 힘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던 인물이다.
그의 앞에 다른 한 인물이 부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의 몰골은 한 마디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양팔이 모두 잘라져 나갔으며 눈까지 퀭하니 들어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
허무영이었다.
대체 그가 어떻게 이 곳에 나타난 것인가?
사실 이 곳은 태호(太湖) 근역에 위치한 서동정산(饍庭山)이었다.
조정으로부터 숙청을 당하게 되자 천마신궁은 곧바로 이 곳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태호의 넓은 물줄기를 이용하여 천연적인 요새를 구축했던 것이다.
허무영은 비장한 얼굴로 반무독을 응시했다.
"불초를 당장에 죽이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 곳까지 찾아 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 마디 들으시는 것도 그리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외다."
반무독은 사실은근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설마하니 그가 이처럼 대담하게 자신을 찾아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럼 들어 보겠다만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어차피 목숨을 구걸하러 온 것은 아니외다."
"그 각오가 매우 마음에 드는구나."
허무영은 반무독의 조소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꺼냈다.
"불초가 신궁의 일을 황상께 품한 것은 불초 또한 한인(漢人)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상하구나. 어디 네 놈만 한인이었더냐?"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이 일은 한조(漢朝)의 운명과 관계된 것이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 온 것이외다."
"무슨 헛소리냐?"
"근자에 이르러 강호무림의 변화에는 실상 오랑캐의 음모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뭣이? 오랑캐라고?"
"그렇소이다. 만일 도독어르신께서 계획대로 구주동맹을 제거했다면 일월맹이 가장 좋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토를 넘보는 이민족 역시도 바라던 일이었소이다."
반무독은 일단말문이 막혔다.
천마신궁이 아무리 황제를 피해 이곳까지 왔다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림이 일월맹에게 멸망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허무영은 더욱안색을 침중하게 굳혔다.
"이 음모의 주역은 왕중헌이외다. 일월맹도 현재로선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다고 봐야 합니다. 혹 알고 계셨소이까? 왕중헌이 오랑캐의 주구라는 것을?"
"왕중헌이!"
"그렇습니다. 그는 엣센이 보낸 척후입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엣센의 밀명을 받고 중원에서 활동해 왔소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바로 원의 부활이었습니다."
"으음!"
"과거에 있었던 삼성림의 내분도 실은 그 자에 의해 주도되었소이다. 신궁의 궁주님과 마찬가지로 워낙 뒤에서만 움직였기 때문에 표면상 드러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그, 그럴 수가!"
"이번에도 왕중헌은 그런 방식을 취했었소이다. 그는 신궁이 황군을 움직여 중원무림을 치게 한 뒤, 혼란을 틈타 대륙을 정복한 다음 엣센에게 넘겨 줄 작정이었습니다."
"감히!"
"왕중헌은 그 동안 암중으로 황군과 구주동맹의 충돌을 부추켜 왔으며, 신궁은... 후후... 그 자에게 이용을 당했을 뿐입니다."
"으음......."
반무독은 충격이 컸던듯 그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해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네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무엇이냐? 설마 하니 그 달변으로 본좌를 우롱하기 위해 온 것만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지금 왕중헌이 이곳으로 오고 있소이다."
"뭣이? 놈이 감히 우리를 치겠다는 것이냐?"
반무독은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노가 극에 달한 나머지 그는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에 반해 허무영은 여전히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자는 우선 협상을 청해 올 것입니다."
"그래 놓고 안 되면 무력을 쓰겠다는 것이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외다. 그는 늘상 교활하게도 최소한의 힘을 들여 최대한의 수확을 얻으려 하는 자입니다."
"흐음, 본좌는 그 자보다 네가 더 궁금하다. 너는 어째서 본좌에게 그런 사실들을 소상히 알려 주는 것이냐?"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 역시 반도독 어르신과 같은 한인이라고. 그 이상 더 절실한 이유도 있소이까?"
"좋다. 네 말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만 일단 접수하기로 하지. 그렇다면 원하는 댓가도 없단 말이냐?"
허무영은 씨익웃었다.
"솔직히 저도 한 가지 바라는 바는 있습니다."
"설마 그것이 목숨은 아니겠지?"
"제가 지금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왕중헌에게 남은 팔마저 잘린 마당에 살아 남은들 무슨 희망이 있겠소이까? 다만 죽기 전에 빈사매를 한 번 볼 수 있다면......."
허무영은 고의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든 격정만은 가식이 아니었다.
아니, 그가 이 곳에서 쏟아낸 말들 중에는 추호도 거짓이라곤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반무독.
허무영이 말했듯 그도 한인이었다.
그것은 그가 중원제패의 야망을 달성하든, 못하든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으음, 본좌가 큰 실수를 할 뻔 했구나. 신궁의 궁주이신 아버님을 천하의 주인으로 받들고자 하는 뜻은 작금에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오랑캐의 발호는 절대 용납치 못한다."
이어 그는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좋다. 빈아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겠다. 단, 네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다. 대신 내치지는 않을 테니 스스로 자결을 해라."
"감사합니다."
허무영은 간단히 목례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업( 業)의 야망은 경원할지언정 반무독에게만은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 그였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방금 전에야 찾아냈다.
'반도독, 당신과 나는 결국 동족(同族)이 맞구려. 후후후.......'
촤아아아--!
푸른 물살이 연신 수십 줄기로 갈라지며 화려한 포말의 제전을 이룬다.
수면 위에 긴 포물선을 그리며 태호의 서동정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수십척의 대선단(大船團)이었다.
각기 돛을 세 개 이상 달고 있는 범선(帆船)들이 한창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선두에 위치한 범선, 그 갑판에는 한 인물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호발부동한 자태로 서 있었다.
그 자는 중년에 이른 문사로써 손에 섭선을 들고 있었다.
행색은 평범하되 기도만은 범상치 않은 인물, 바로 왕중헌이었다.
가르며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그 숫자가 자신이 이끌어 온 선단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는 것도.......
반무독.
그는 분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전면을 응시했다.
그 곳에서는 왕중헌이 거대한 선단을 이끈 채 이쪽과 거리를 계속 좁혀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반무독은 겁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전신을 통해 불같은 투지를 끓어 올렸다.
"왕중헌! 지금까지는 천마신궁을 잘도 희롱했다만 이젠 네 쪽에서 그 댓가를 지불할 차례다."
반무독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 보았다.
그의 뒤를 따르는 선단의 옆에는 약 십여척의 쾌속정(快速艇)이 바짝 따라 붙으며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쾌속정에는 각기 두 사람씩 타고 있었으며, 별다른 특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반무독의 입가에는 예사롭지 않은 미소가 스쳐갔다.
'왕중헌, 죽음은 네가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너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네가 거느린 무리가 어떻게 수장되는지도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그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그의 범선은 다른 범선을 앞지르더니 왕중헌의 선단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끝내 내 제의를 거부할 작정이오?"
"왕중헌, 그보다 당신은 잊은 것이 하나 있다."
두 척의 범선이 약 오장여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었다.
그리고 두 범선의 선두에서는 왕중헌과 반무독이 서로를 노려 보며 공간을 격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약 일다경의 시간 동안 왕중헌이 얻은 것은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마침내 최후의 한 마디를 던졌다.
"반도독, 당신은 이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의 결과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소?"
"물론이다. 방금 전에 내가 하려던 말도 역시 그것이었다."
반무독은 기세를 높이듯 가슴을 활짝 폈다.
"왕중헌, 당신은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한인이라는 것을. 내 일찍이 천하제패의 원대한 뜻을 품게 된 배경도 실은 중토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십만리 금수산하를 오랑캐 따위의 손아귀에 넘겨 줄 것 같은가?"
왕중헌은 냉소했다.
"허허... 거 참, 눈물겨운 애국심이로소이다."
이제 대화는 막을 내렸다.
남은 것은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일뿐이었고, 그것은 양자의 입장이 같았다.
"반도독, 내 한 가지 선물을 드리겠소."
왕중헌은 말과함께 불쑥 손을 들었다.
터터텅......!
이는 왕중헌을태운 범선의 옆구리에서 원형의 목판이 열려지면서 난 소리였다.
동시에 그 곳에서 약 십여 개의 구멍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시뻘건 화염을 뿜어냈다.
콰쾅--! 콰르르릉--!
하늘을 뒤엎을듯한 물기둥이 여기저기 치솟고, 처절한 비명이 태호를 진동시켰다.
그로 인해 반무독의 선단에 포함된 범선 한 척이 삽시에 선체를 반이나 날려 버려야 했다.
그 가공할 사태에 반무독은 아연실색했다.
설마하니 상대가 선포까지 장착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놀라움에서 일탈하자 곧 용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토해냈다.
"형제들이여, 각자 흩어져라! 그리하여 이 땅을 집어 삼키려는 오랑캐의 무리를 태호 속으로 전부 처박아 버려라--!"
반무독의 신형은 비쾌하게 왕중헌을 덮쳐갔다.
그 사이, 그의 쌍장은 허공에 길게 호선을 긋고 있었다.
콰아아아--!
시뻘건 기류가가히 태산을 쪼갤 기세로 왕중헌을 쓸어갔다.
"그것이 소위 광화비전의 무공이오?"
왕중헌도 냉소와 함께 우장을 뻗어냈다.
그러자 그의 우장에서 는 회백색을 띤 기류가 발출되었다.
콰쾅--!
굉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그 반탄력을 이기지 못해 두 사람의 신형은 똑같이 뒤로 밀려 났다.
"핫핫핫! 대단하다, 왕중헌! 그대의 무공이 이 정도라면 이 반무독도 속시원히 분노를 떨쳐낼 수 있으리라!"
반무독은 재차쌍장을 휘두르며 왕중헌을 덮쳐 갔다.
왕중헌 또한 뒤질세라 그와 마주 격돌해 갔다.
콰르르릉! 콰쾅--!
두 사람이 쌍장을 휘두를 때마다 격렬한 폭음이 일었다. 그들의 신형은 곧 홍, 백의 기류에 휩싸인 채 어지럽게 얽혀 돌아갔다. 도시 누가 누구인지 구별조차 할 수가 없었다.
콰콰쾅--! 쿠르르릉--!
그들의 전권 밖에서도 싸움은 속개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리며 화염이 솟구쳤다.
그러던 한순간, 격전의 와중에서 왕중헌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왜냐하면 뜻밖에도 자신의 선단 쪽이 위경에 처해 있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공력이 깃든 그의 외침에 반무독은 일순 멈칫했다.
그 찰나, 왕중헌은 재빨리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리며 사위를 훑어 보았다.
전황을 깨달은 그는 대경했다.
"이, 이럴 수가?"
왕중헌의 선단이 쏘아대는 선포에 의해 반무독의 선단은 어느덧 반이나 날아간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는 왕중헌의 선단 또한 그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쾌속정 때문이었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돌진해 무작정 범선과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범선 한 척이 여지없이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쾌속정 안에 화약을!'
그의 내심을 알아 차린 반무독이 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 왕중헌, 어떤가? 저 정도면 그대의 선포에 못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왕중헌이 대노하여 반무독을 덮쳐갔다.
두 사람의 신형은 또 다시 허공에서 격돌했다.
콰르르릉--! 콰쾅!
굉음이 울리는가운데 시뻘건 혈무와 잿빛 강기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가일층 기세를 더 했다. 그들은 아예 허공에서 내려 서지도 않은 채 경천동지의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소선(小船).
태호를 뒤집어엎는 혈전조차도 아득하게만 보인다.
그들과 멀리 떨어진 채 물결이 흔들리는 대로 선체를 내맡긴 한 척의 배가 있었다.
그 배의 갑판에서는 허무영이 한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물끄러미 해상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이로써 내 할 일은 마친 셈인가?"
"사형."
여인, 즉 반희빈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이미 허무영의 얼굴에서 짙은 죽음의 기운을 읽어 내고 있었다.
이는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허무영의 몸무게가 무거워져 가는 것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그의 전신에서 지탱할 기력이 빠져 나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흑! 사형이 이처럼 죽어가야 하다니......."
반희빈은 종내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 순간, 허무영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 나왔다.
복용했던 독이 효력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허무영은 흐릿한 눈길로 그녀를 돌아 보았다.
"사매, 나는 기쁘오. 내 죽음 곁에 그대가 있어 주어서......."
반희빈의 슬픈눈은 곧 놀라움을 떠올렸다.
"사형!"
그녀는 비명을지르며 허무영을 안았다.
갑자기 허무영이 다리가 풀렸는지 쓰러지려 했던 것이다.
허무영은 입가에 고소를 떠올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역시 따뜻하군. 사매의 손은......."
"사형......."
죽음이 임박해있어서일까? 허무영은 더 이상 본심을 속이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는지 그는 잠시 침묵 했다.
반희빈은 그의몸을 갑판 위에다 조심스럽게 뉘였다.
그녀의 손끝이 은연 중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엇갈린 사랑, 그 비애(悲哀)가 이 순간 반희빈의 가슴에 깊은 상흔을 새겨 놓고 있었다.
자신은 그의 사랑을 거부했다.
아니, 그랬다기보다는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마침내 반희빈은 조용히 오열했다.
알 수 없는 죄의식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아 버려 흘러 나오는 눈물을 도시 어떻게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허무영의 메마른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사매... 용서하시오. 그대에게 짐이 될 줄을 알면서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소. 나는... 그대를 사랑했었소. 진심으로......."
"사형!"
반희빈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 말을 내심으로 몇 번이나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허무영이란 존재는 분명 사랑할 만한 상대였다.
일세의 기남아(奇男兒)로써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그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허무영은 다시더듬더듬 음성을 흘려 냈다.
"이 싸움을 결말을 보지 못한다는 것 뿐....... 일월맹... 구주동맹의 진형... 어떻게 될는지....... 진형과 사매, 두 사람을 위해... 거기까지는 해결해 주고 싶었는데... 안타깝......."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한 차례 격렬하게 몸을 떨더니 힘없이 목을 뒤로 꺾었다.
"사형--!"
반희빈은 그를안은 채 절규했다.
"당신, 절대로 이렇게 죽어갈 수는 없어요! 내가, 당신이 사랑한다던 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울부짖음이 호상(湖上)에 긴 메아리를 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태호를 휘감은 혈전으로 인해 묻혀 버리고 말았다. 격렬한 그녀의 흐느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기를 한참여.
울음을 그친 반희빈은 허무영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젊음을 불사르고 스스로 산화해 버린 한 고독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 경건한 의식은 허무영의 입술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오랫 동안 지속되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사자(死者)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기원했다.
'가세요, 사형. 영원한 해방과 휴식이 있는 곳으로.......'
첫댓글 즐감
즐감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감동이 몰려오는군요, 사랑.......
오호 ! 애재라...
오호 ! 통재라~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요
쟴남니다
쟴남니다
잘 보았습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마지막 입맞춤 감동 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