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고는 이복(異腹)이지만 영조형은 음악을 해서인지 인성이 참으로 좋다. 시쳇말로 "법없이도 살"
사람이다. 이복 형제자매들이 많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정을 나누고 사는 사이는 맏형밖에 없다.
나머지 이복 형제자매들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살고 있다. 하기야 이제 와서 살갑게 살아 갈 기회도
없거니와 이역만리 미국에서 모두 살고 있으니 만나기도 어렵다.
김씨스터즈가 미국에서 성공해서 잘 한 일은 오빠, 언니, 동생들을 모두 미국에 이민으로 불러 들여
살게 한 것이리라. 변호사를 써서 체류기간, 영주권 취득 등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줬을 터이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을 것 같다. 그 걸 숙자가 해결한 걸 보면 형제 자매들이 우러러 볼만...
그래도 영조형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미군부대에서 공연하는 패키지 쑈(Floor Show)를 위해
편곡도 하고 그랬었는데, 미군부대 쑈가 부진해지자 '예그린악단' 공연용 음악을 편곡도 하고
했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편곡의 편자도 못 꺼내 들겠다는 것이다.
영조형의 소감 ㅡ " 내가 미국에 1971년도에 와보니 내수준의 음악은 이곳 중학교수준도 안되어서
놀랬었다. 역시 옛말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더니 너무도 좁은 우물안에서
살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한국의 음악이 옛날이나 별로 변한것이 없구나.
요즈음 젊은 아이들이 거의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들을 추는것을보면 발전이 더디다. 이제는 영어를
잘 하는것도 아니고 한국말도 어떤 때는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많은 얼치기가 되어있단다."
미국은 인구도 많고,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피이노도 있고 악기를 가까이 접하면서 자라난 사람
들이라 음악실력이 엄청나더라는 것이었다.
마치 무술을 한답시고 강호에 나갔지만 고수가 너무 많아 하다못해 '김씨스터즈'의 밴드를 위한
곡의 편곡도 언어장벽까지 겹쳐 기권을 하고 말았다고 했다.
남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즈도 몇 번 김씨스터즈의 남동생이라니까 무대에 섰지만 그 게
끝이었다. 이 들이 최후로 도착한 곳은 라스 베가스의 카지노의 딜러가 되는 것이었다.
헌데 유독 영조형은 딜러의 길을 밟지 않고 '술집'을 경영했었다. 헌데 장사도 안되는 집을
인계맡아 잔뜩 빚만 지고 망해 버렸다.
그렇게 살기를 접고 이 번에는 라스 베가스의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몇 년을 보내고 보내고 하다 보니 어느새 80이 훌쩍 넘고 이젠 85세 ㅡ
하느님한테 의지하는 나이가 되었다. 영조형은 화성학도 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기타 코드
화음을 잘 친다. 한인교회에 나가서 전기기타로 반주를 치며 교회에 봉사하는 건
자기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 ㅡ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더라면 담배연기 자욱한 카지노안에서 딜러하다가 벌써 죽었을 것 같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국에서 살면서 장수할 수 있었는데, 모계혈통이 좋지 않아 유전인자가
좋지 않아 근난시의 눈을 비롯해 대머리 유전인자까지 달고 나와 인생 넘버 텐이 됐다.
그래도 마지막의 바램은 김해송의 유전인자가 조금이라도 섞였다면 나도 외롭지 않게
되기 위해 이제라도 기타(Guitar) 지판(指板)이 속성 숙지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생부는 호색한으로 12名의 씨를 뿌려 놨다니 칭찬을 해야 할지 욕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1950년 7월에 월북을 했다니 얼마나 무책임한 가장인가?
아무러나 음악을 좋아 하는 유전자는 타고 났으니까 고독사는 하지 않을 것 같으니
이를 감사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