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벌목공이 되어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이런저런 부류의 다양한 운전기사들을 접한다. 때로는 그들의 사고와 의식 수준에서 평생 교직에 종사했던 내가 본받을 부분도 있었다. 한번은 여항산 기슭의 둔덕으로 가는 농어촌 버스가 종점을 앞둔 골옥방에서 배차 시간을 맞추느라 시동을 끄고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승객이라곤 외지인인 나와 둔덕에 사는 마지막 손님인 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기사 나이는 오십 중반으로 헤아려졌다. 농어촌으로 운행하는 기사는 시골 노인네들이 어느 마을에서 타고 내리는지까지 훤히 알아 그 할머니와도 안면이 익은 듯했다. 기사는 시골의 어르신을 태울 때는 좌석에 편히 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며 하차도 재촉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은 조실부모해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대할 때면 저승에 계신 부모님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날 나는 둔덕 종점에서 내려 미산령을 넘으면서 한동안 그 버스 기사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전쟁통도 아닌데 내 나이보다 젊은 기사가 부모를 일찍 여읜 안타까운 사정을 알 길 없었다. 배움의 끈이 길고 짧음을 떠나 성장기 이후 운전직으로 입문해 제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에 고개를 숙일만했다. 도서관에서 펼친 책보다 더 값진 깨달음이었다.
올봄 정년을 맞은 이후 누가 나보고 당신은 이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고 사느냐 물어온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궁색하다. 그렇다고 옹졸하고 속 좁게 살지 않았지만 변변하게 내세울 거리가 없다. 고작 봄날 산자락을 누비며 채집한 산나물이나 텃밭에서 기른 푸성귀를 이웃과 나눈 정도였다. 여름 산행에서 참나무 숲을 헤집어 찾아낸 영지버섯 조각을 말려 몇몇 지인과 나누기는 했다.
어느 날 창원중앙역에서 밀양 상동으로 가는 열차표를 끊게 되었다. 매표창구 역무원이 내가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경로이시지요!’라며 할인 표를 끊어주어 머쓱한 적 있었다. 내가 농어촌 버스를 이용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연세 든 노인이 탔을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기 앉으셔요!’라 할 때다. 작은 수레에 짐을 가득 채워 타려는 할머니를 도왔던 적도 몇 차례 있다.
퇴직 후 틈날 때 들녘으로 나가 당근이나 감자를 캐거나 풋고추를 따는 일손을 거들까 했다. 땀 흘린 노동만큼 품삯은 당당히 받아 같이 일한 부녀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을 생각도 해봤다. 아니면 품삯을 현지 농산물로 받아 우리 집 찬거리로 삼고 이웃과 나눌까도 싶었다. 어느 날 실제 대산 들녘으로 나가 현지 사정을 살펴보니 내가 일손을 도울 여건이 못 되어 계획을 철회했다.
지난주 화요일은 친분이 두텁게 지내는 대학 동기 일손을 거들었다. 올여름 퇴직한 친구는 시골에 전원주택을 지어 5촌 2도를 구상 중이다. 처가가 있는 의령에 낡은 집을 헐고 새로이 지은 집으로 입주를 앞두었다. 신축한 집의 뒤란에 버섯 종균을 심은 표고목을 세워두고 버섯을 키우려고 참나무를 잘랐다. 표고목이 될 참나무는 북면 상천의 친구네 선산에서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한 주가 지나 친구의 두 번째 벌목 지원을 나섰다. 세밑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이른 아침 동정동에서 친구를 만나 15번 마을버스로 북면 상천으로 향했다. 신천에서 강변 초등학교를 지나다가 명촌에 귀촌한 문학 동인회 회장을 만나 반가웠다. 필력이나 입담이 좋기로 알려진 회장과 시골 할머니들은 면 소재지로 나가고 우리는 소라마을에서 내려 상천고개로 걸어 올랐다.
둘은 볕이 든 산기슭의 가랑잎에 앉자 담금주를 비우면서 벌목 작업을 구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번 잘랐던 김해 김씨 경파 후손 선산 주변의 참나무를 표고목으로 삼기 알맞은 토막으로 잘랐다. 한 그루는 동치가 쓰러지지 않아 토막까지 내지 못한 미완인 채 일을 마쳤다. 상천 산마루에서 봉촌을 지나 마금산 고개를 넘어 온천장에서 갈비탕으로 맑은 술을 잔에 채워 비웠다. 2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