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
‘대(大)아프리카누스’라고 불린다. 명문 스키피오가(家)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전쟁 초기의 장군 P.C.스키피오의 아들이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에 참전한 후, BC 210년 사인(私人)인데도 집정관 대행의 대권이 부여되어 스페인의 카르타고군(軍)을 격파하였는데, 그 때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BC 205년 집정관으로서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공격을 결의하여 스스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갔으며, BC 204년 아프리카에 군대를 진격시켰다. BC 202년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의 칭호을 얻었다. 그 후 제2차 마케도니아전쟁(BC 200~BC 197)이 시작되자 호구총감(戶口總監), 원로원 수석으로서 친(親)헬레니즘정책을 취하며 로마 정계를 지배하였다. BC 190년 동생과 함께 군을 지휘, 소아시아에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대접전을 벌였으나, 귀국 후 보수파인 대(大)카토 일파의 반격을 받아 실의 속에서 죽었다.
한니발: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 제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에서 에스파냐로 갔으며,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며,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의 전단(戰端)이 열렸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湖畔)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BC 216년 칸나이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用兵術)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援軍)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大)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도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그후 카르타고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어 로마에 대한 보복기회를 노렸으나, 정적(政敵)에 의해 시리아와의 통모(通謀)를 획책하고 있다는 통고가 로마로 보내졌기 때문에, BC 196년 그는 시리아로 피신하였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함께 로마군과 싸웠으나, BC 190년 안티오코스군이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 패배하자, 그는 다시 소아시아의 비티니아로 피신하였으며, 로마가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함에 이르자 자살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대왕, 피로스와 비견되는 고대사상 굴지의 전술가였다.
출저:백과사전
한니발 vs 스키피오
과연 누가 이길까?
나는 단연히 한니발이라고 말한다.
물론 스키피오에게 대패했지만, 그에게 자마 회전에서 가장 크게 문제였던 것은
기병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로마와 누미디아가 동맹국이 되었으니 더 이상 누미디아 기병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스키피오의 기병은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의 병사와 합쳐 6천, 한니발은 고작 4천...
이랬기 때문에 한니발이 스키피오보다 더 많은 병력을 가졌어도
그가 질 수 밖에 없었다.
위의 그림은 다른 블로그에서 퍼온 사진이다. 나도 어디서 퍼온 건지 까먹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위 그림은 자마 회전의 로마 군단과 한니발 군대의 배치도이다.
위에 연하게 칠해진 라인은 스키피오(Scipio) 군대, 진한 라인은 한니발(Hannibal)이다.
스키피오 라인 중앙의 제일 앞의 Velites(벨리테스)는 로마 경무장 보병, Hastati(하스탈리)는
신병인 중무장 보병, 그 뒤의 Principes(프린키페스)는 Hastati보다 경험 많은 로마 중무장 보병,
맨 뒤의 Triarii(트리알리)는 스키피오의 최정예 중무장 보병이다.
스키피오 라인의 양 옆의 Numidians은 당연히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대이다.
한니발에게도 누미디아 기병이 있었겠지만 역시 기병의 병력은 로마보다 적었다.
한니발의 군단을 보자.
맨 앞줄에는 Alaphants, 다들 알다시피 코끼리 부대, 그 다음은 비주력 부대, 갈리아인들이었고,
그 다음은 카르타고, 아프리카 부대, 가장 뒤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최정예 부대였다.
양 싸이드에는 누미디아 기병과 카르타고 기병이 있다.
로마 군단을 보면 하스탈리의 간격마다 벨리테스가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 것은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에 대비한 스키피오의 속셈이었다.
로마 중무장 보병 한 소대마다 중간에 비어있는 공간에 벨리테스를 배치함으로서
코끼리 부대가 올 때 벨리테스를 하스탈리 앞쪽으로 재빨리 이동시키려던 것이었다.
그래서 벨리테스는 하스탈리보다 조금 앞쪽에 위치해있었다..
조금 쉽게 이해시키려고 그림을 그렸다.
이런 식으로 배치하니까 앞에서 보면 로마 군단이 쭉 이어져 보이는 것 같다.
한니발의 공격 시작~ 하면서 코끼리 부대가 먼저 진군했지만,..
아래 그림을 보시라.
로마 경무장 보병이 중무장 보병 앞으로 피했다.
로마 보병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코끼리 부대에 의한 로마 군단의 혼란은 막았다.
앞에서 보면 비어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이것이 스키피오의 전략이었다.
방향을 틀려고 해도 코끼리는 계속 앞으로만 갈 뿐이다.
코끼리는 경무장 보병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여 한니발의 혼란 작전은 실패하였다.
갈리아인과 카르타고, 아프리카 병사들은 돌격하였지만 로마 중무장 보병에 의해
무참히 말살되었다. 도망치려 했지만 한니발의 이탈리아 병사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매우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로마 병사들이 지쳤을 거라고 생각한 한니발은 곧바로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였다.
이 즈음에 기병간의 싸움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병력에선 한니발 쪽이 많았지만 기병은 로마가 많았다.
게다가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병사들까지 있었으니 카르타고 양쪽 싸이드는
계속 밀리기만 했다. 기병간 싸움은 로마의 우세 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 스키피오는 곧바로 진형을 바꾸었다. 한니발의 최정예 부대 앞에서 진형을 짜라니...
스키피오 이외의 장군들은 생각도 못했을 방법이다. 하스탈리 뒤 쪽에 있었던
프린키페스, 트리알리를 전선에 투입시킨 것이다. 스키피오는 포위 작전을 노린 것이었다.
분명히 자마 회전은 로마의 우세 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의 기병을 몰아내었다.
로마 기병은 즉각적으로 한니발 부대의 뒤를 공격했다.
사방으로 포위된 한니발 부대는 자마 평원에서 전멸당하였다.
한니발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구출하였고 하드루메툼으로 도망쳤다..
그는 두고두고 로마에 복수할 생각을 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만약에 한니발이 자마 회전에서 승리하였다면
한니발은 또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누빌 수 있었을까?
로마가 제국주의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카르타고가 이 때부터 멸망의 길을 걸었으니..
나는 카르타고보다 로마가 더 불쌍하게 생각될 뿐이다...
좋은 자료이길래 네이버에서 퍼왓습니다 ^^
첫댓글 만약 제가 한니발이었다면 양날개에 코끼리를 배치했겠네요
흠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 코끼리와 기병이 어떻게 격돌할지 궁금하군요. 누미디아 기병의 성격상 스커미시로 나갔을테니 코끼리가 무용지물이 됐을지도...
오 흥미롭군요 좋은자료 ㄳ
원래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였을겁니다. 로마시를 코앞에 두고 본국으로 지원병을 요쳥했더니 본국 사람들이 한니발의 공적을 시기하여 겨우 기병 사천에 코끼리 37마리 정도, 그리고 보병 이만정도만 보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스페인에 있는 동생에게 지원병을 요쳥했고 동생은 고심한 끝에 출전 결정.
그러나 참전을 알리는 소식병이 로마군에 의해 잡히고 로마군은 스페인쪽으로 돌아가서 군대 준비를 끝마치지 않은 한니발의 동생군단을 전멸시켜 버리고 그 상태에서 바로 카르타고로 쳐들어갔죠.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눈 앞의 로마시를 두고 본국을 도와주러 가야만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