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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테스형, 나훈아>
1970년대 혜성같이 등장한 나훈아와 남진은 용호상박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갔다.
두 사람의 눈부신 활동이 1970년대를 ‘2인 가수시대’로 이끌었다.
기실 팬클럽으로 형성된 팬덤(fandom)시대는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위 ‘오빠부대’의 인기몰이로 가요계가 좌지우지되는 꿈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심지어 이들의 극심한 경쟁관계가 팬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만큼 두 사람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대중가요에 대한 사회적 열기도 한껏 고조되었다.
나훈아와 남진은 동반자이면서도 경쟁자였다.
엇비슷한 나이에 동시대를 풍미하면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경쟁자로 활동하며 1970년대 가요계에 활기를 불어 넣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캐릭터로 무장한 채 경쟁관계를 구축했다.
남진이 팝스타일의 트로트와 화려한 무대매너를 자랑했다면,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스타일에 꺽기창법과 차분하고 조용한 음색으로 청중을 사로 잡았다.
남진이 밝고 경쾌한 템포가 특징이었다면, 나훈아는 향수와 추억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서정적 창법이 특색이었다.
공교롭게도 부산 출신 나훈아와 목포 출신 남진의 대결은 영호남의 경쟁심리를 자극해서 대중들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좋은 의미에서 경쟁자가 있어야 발전하는 법,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어서 내가 있었다’는 철학자 플라톤의 말처럼 나훈아와 남진은 서로가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라이벌 관계의 가수가 대중가요를 이끌어가던 시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1970년대 대중가요의 쌍두마차, 나훈아와 남진은 서로 경쟁하며 한국가요의 전설과 신화를 구축해 갔다.
나훈아는 1947년 부산에서 무역상인 아버지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최홍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뒷산에 올라 친구들과 기타치며 노래하길 좋아했고, 특히 피아노 솜씨는 일품이었다.
이러한 소질이 그를 작곡가로 입신하는 동기가 되었다.
1965년 형을 따라 상경했다. 서라벌예고 시절인 1965년에 <약속 했던 길>이라는 노래로 이른 나이에 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고1의 어린 나이로 가요계에 등장한 것이다.
그의 공식 데뷔로 평가받는 곡은 <천리길>이다.
물론 대중들에게 주목받은 곡은 1968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었다. 이 노래를 통하여 그는 인기가수의 반열에 오른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이들도 따라 부르는 장안의 화제곡이 되면서 그는 탄탄한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강촌에 살고 싶네>, <님 그리워>가 연속 히트하고, <가지 마오>로 1971년 KBS 가요대상을 거머쥠으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고향역>, <고장난 벽시계>, <울긴 왜 울어>, <잡초>, <갈무리>, <무시로> 등등 기라성 같은 명곡을 내놓으며 명실공히 나훈아는 한국의 트로트 황제로 떠 오른다.
이어서 <물레방아 도는데>(73), <애정이 꽃피는 시절>(77) 등을 내놓으며 197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등극한다.
그밖에 <청춘을 돌려 다오>, <땡벌>, <홍시>, <영영>, <해변의 여인> 등 주옥같은 작품으로 1970-80년대 한국 ‘가요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가 취입한 곡이 2600여 곡에 이르고, 200여 장의 앨범을 낸 것만 봐도 가요황제로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writer)의 재능을 발휘하여 자작곡이 무려 800여 곡에 이른다.
1976년 무명가수이던 심수봉을 인기가수로 등극시킨 곡이 <여자이니까>라는 사실만 봐도 그의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알 수 있다.
그는 블루스와 민요를 트롯에 접목하여 서정적이고 애상적인 명곡들을 빚어 냈다. 누가 들어도 익숙한 히트곡만 120여 곡을 갖고 있다.
<갈무리>, <홍시>, <영영>, <잡초>, <땡벌>, <무시로>,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등 노래 이름만 들어도 나훈아의 위력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
2006년 노래 반주기 회사 통계에서 나훈아의 곡이 노래방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MBC 10대 가수상(1981), 대한민국 환경문화 가수대상(2007), MBC 명예의 전당 가수(2001), 대한민국 연예예술 특별상(1996) 등 대상을 수여받았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견고한 음감, 중저음에서 고음으로 뻗어가는 유려한 가창력에 있다.
무엇보다 간드러진 꺾기창법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통해 애절한 정서적 파동을 빚어낸다.
그의 곡들은 대부분 차분하고 조용한 노래로 서정적인 애상조를 띠고 있는데 이러한 아우라(aura)를 꺾기창법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카리스마 넘치는 위력적 포훠먼스(performance)와 무대매너는 그를 가요황제로 등극시킨 최고의 무기였다.
자기 개성이 분명한 곡을 부르며 그것을 위력적인 퍼모먼스에 실어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퍼모먼스 아티스트’라고도 부른다.
그야말로 나훈아의 공연은 카리스마 넘치는 매혹적 공연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긍지와 명예심이 대단했다.
고위급 인사가 초대해도 이에 응한 적이 없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 이건희 사장의 초청을 거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나는 대중예술가다. 나는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노래를 부른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 만큼 자신의 노래, 대중가요에 대한 긍지가 높았던 가객(歌客)이었다.
그리하여 ‘소리꾼, 딴따라’로 부르던 대중가수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았다.
나훈아는 2005년 <고장난 벽시계>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공연도 2006년 12월 공연으로 영영 가수로의 활동은 ‘고장나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역경을 이겨내고 2017년 <남자의 일생>을 발표하고 2016년 전국 순회 컨서트로 11년 만에 가요계로 복귀하였다.
2018년 이후 ‘청춘 어게인’ 전국투어 컨서트를 성황리에 개최하여 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2020년에는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에서 <테스형>을 불러 큰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5년 1월 마지막 은퇴공연으로 공식적으로 가수의 길을 접었다. 대작 <테스형>으로 한국 가요계의 '영원한 테스형'이 된 것이다.
나훈아는 조용하고 서정적인 창법을 구사한다.
애절하면서 한맺힌 듯이 토해내는 토운은 정서적 파동을 일으켜 공감대를 증폭시킨다.
특히 그는 간드러진 꺽기 창법으로 트롯을 맛갈나게 살려내는 귀재였다.
조용하고 잔잔한 토운과 리듬은 향수와 추억을 자극하는데 효과적이다.
<고향역>과 <물레방아 도는데>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다양한 포즈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매너가 가요황제로 군림하는데 일조하였다.
고유한 색감의 가창(歌唱)과 무대의 위력적인 퍼모먼스는 나훈아를 가요계의 레전드(legend)로 만들었다.
간드러진 특유의 꺽기창법에 청중들은 속절없이 애잔한 서정미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나훈아는 스스로 작곡, 작사도 하는 이른바 싱어송 라이터다.
그가 부른 2600여 곡 중 800여 곡이 자작곡이었으니 작곡가로서 나훈아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스스로 부를 노래를 자기취향에 맞게 작곡함으로써 노래가 한층 더 빛을 발했던 것이다.
<갈무리>, <땡벌>, <사랑>, <사나이 눈물>, <자갈치 아지매>, <영영>, <홍시>, <무시로>, <잡초> 등이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애절하며 한맺힌 가락으로 읊조려 슬픔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나훈아의 노래들, <물레방아 도는데>, <머나 먼 고향>, <고향역>은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이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애를 환기시킨다.
자리를 잡지 못한 타향에서의 서러움과 소외감을 토로하며 넉넉한 고향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60-70년대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우울한 그림자와 비관적인 정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훈아는 1970년대 사회적 초상화를 음악적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경쟁관계를 형성하며 나훈아와 남진은 1970년대 가요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갔다.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둘의 경쟁관계는 한국가요의 발전을 위해서 큰 활력소가 되었다.
한국 가요사는 나훈아-남진 커플 이전과 이후로 대별되는 획시기적(epoch-making)인 의미를 갖는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경쟁관계는 상호작용을 일으켜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 활력소가 되었던 것이다.
타인에게 자극을 주며 자신이 발전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한국가요가 크게 진전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훈아-남진의 우정과 경쟁은 희랍시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격려하고 자극을 주며 희랍 철학사를 새롭게 써 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훈아-남진은 한국 가요계의 플라톤이자, 아리스토텔레스였던 것이다.
가요계를 공식 은퇴했지만 나훈아는 한국 가요계의 ‘불멸의 전설’로, ‘영원한 테스형’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시대 그러한 가요황제와 함께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자 축복이다.
ㅡ설날에 문천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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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복덩이님도
먼 훗날 전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류원정님은 조만간 정상에 우뚝설꺼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