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이사도라
우리 집 재산 목록 1,2,3호는 선풍기, 트랜지스터 라디오, 전화, 그리고 TV순으로 이어진다. 매 학기 초 가정 환경조사를 실시하였던 그 시절, 조사에서 전화만 등재하여도 그 집은 부자 취급을 받았다. 5학년 때 전화를 놓았으니 믿을 것은 못되지만 우리 집은 1967년부터는 부자 축에 낀 편도 된다. 우리 집 재산 목록 중에서 제일 장수한 재산은 선풍기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오래 같이 살기는 했지만 선풍기만은 못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들어와서 장가를 가서도 여럿 해 우리 가족에게 시원한 바람을 선사했으니 족히 30년은 넘는 긴 세월 우리의 여름을 담당했던 선풍기다. 구조라 해야 N극과 S극을 번갈아 하는 식의 유도전동기에 날개가 전부이니 단순해서 그러하기도 하였겠지만 그래도 무던하게 버텨준 선풍기다. 고장이 나서 버린 것도 아니고 덜덜거리다가 끝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금성사의 스타 마크가 들어간 선풍기다. 110볼트라 나중에 쓰는데 불편했지만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잠잠히 본가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야무지게 만들어 회사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선풍기. 오래된 회사(신일 아니면 한일)가 지금도 그대로 존속하는 것을 보면 역시 물건은 제대로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집 아이보다 나이가 많은 선풍기. 당시 더위를 많이 타던 아버지가 제일 아끼던 선풍기는 매년 아버지가 손수 갓을 벗기고 깃을 딲고 기름을 쳐 생생하였는데 우리는 가까이 다가서지도 손도 대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여름 철 내내 아버지가 선풍기 바람을 쐰 것은 아니다. 휴가 때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 고작 며칠 틀던지 아니면 손님이 오면 선사용으로 제공을 할 때 주로 애용을 했을 뿐이다. 모시고 살았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일지 모른다. 당시 비싼 전기 값 때문이다. 전기 값이 비쌌다보기보다는 우리 형편상 그러했다는 말이 또한 맞는 말이다. 당시 진공관 라디오(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케이스의 ‘제니스 라디오’나 사각형 나무통 속에 진공관이 촘촘히 박힌 금성라디오 )가 나오던 때인데 우리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사들였다.
라디오 본체만한 로켓트 밧데리를 부쳐 달고 고무줄로 칭칭 감아 한 몸체로 한 일제 파나소닉 라디오는 대단한 성능이었다. 그 시절은 한 여름 온 식구가 평상에 나와 앉아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거나 라디오를 정중앙에 모시고 메르데카 배나 킹스컵 축구중계를 듣곤 했다. 엄마는 어쩌다 포도나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나왔다는 복숭아를 챙겨 오기도 했지만 옥수수나 고구마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콕에서 이광재가 중계방송을 해드리겠습니다. 그 방송 첫 멘트가 나오면 청취자들은 저절로 애국심이 솟는 듯 했다. 이광재 아나운서나 임택근 아나운서. 게임에서 지면 국제심판의 편파적인 판정 때문이라는 식으로 '애국적 중계'를 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말끝이 약간 치켜 올리는 듯한 목소리로 뉴스가 일품이었다. 나는 5시에 송승환이가 하는 어린이 프로도 곧 잘 들었다.
요즘 가정주부들이 TV 드라마에 몰려 들 듯 엄마가 저녁상 설거지를 끝낸 어스름 무렵이면 라디오에서는 ‘동심초’나 ‘이 생명 다하도록’ 같은 연속극이 흘러나왔다. 엄마와 누나는 이별을 앞두고 한껏 감정을 돋운 남녀의 목소리에 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선반이나 경대 위, 대청마루에 ‘모셔놓고’ 들었던 당시의 라디오는 지금 같은 누름단추가 아니라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었다.
치직거리는 잡음 섞인 방송조차도 잘 나오지 않아 팡팡 치고 이리저리 다이얼을 맞추느라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라디오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친구'였다. 솜씨 좋은 형들은 부속품을 사다가 라디오를 조립하기도 했다. 그 시절 라디오의 꽃은 바로 연속극이었다. '아낌없이 주련다' '빨간마후라'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은 나중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라디오 연속극이다. 그때처럼 성우가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을까.
김수현의 '저 눈밭에 사슴이'도 인기였다. 이미자가 구성지고 정감어린 목소리로 불렀던 '총각선생님'은 같은 제목의 연속극 주제가였다. 연속극이 시작되면 온식구가 성우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마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인양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다.'태권동자 마루치 정의의 주먹에 파란 해골 13호 납작코가 되었네…'. 아이들은 '태권동자 마루치'에 홀딱 빠져 있었다.
'손오공'도 참 재미있게 들었던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아버지는 샛바람 시원한 툇마루에서 성우 구민씨의 '전설따라 삼천리'나 오승룡씨의 '오발탄', 11시55분이면 '어이타 북녘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로 시작되는 '김삿갓 북한방랑기'를 들었다. '재치문답'은 '재치박사'로 불리는 남녀 패널들이 나와 퀴즈, 놀이, 재치 경쟁 등 다양한 게임을 진행하는 공개 방송이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라디오로 스스로 국보 제 1호라 하는 양주동박사를 그때 알았다.
한국남. 안의섭씨 등이 단골 재치박사로 출연했다. 장소팔. 고춘자씨가 따발총처럼 쏟아내던 만담도 오랫동안 인기를 누린 오락프로였다. TV가 드물었던 1960년대와 70년대 초엔 라디오 연속극에서 희로애락을 연기하던 성우의 인기가 대단했다. 구민. 고은정. 오승룡. 장민호씨 등은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고은정씨는 영화에서 엄앵란씨 목소리를 도맡았기 때문에 같은 인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 라디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능이 좋았다. 밭에 들고나가 축구나 권투 같은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집 마루에 있던 라디오가 어느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경찰에 신고하다고 동네를 다니며 떠들었는데 그 효과를 보았는지 저녁 무렵 라디오가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당시 누나나 형들이 즐겨듣던 패티김. 하춘화. 김상진.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미화. 바니걸스. 김상희. 남진. 나훈아의 노래때문 탐이 난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혹여 내가 그 당시는 전혀 몰랐던 임국희. 최동욱. 피세영. 이종환씨 같은 디스크자키가 진행하는 심야음악 방송때문인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에는 왠지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밤 10시만 되면 감미로운 멜로디와 함께 이종환씨의 달콤한 목소리가 청소년들의 마음을 감싸주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최고 인기의 심야방송이었다고 한다. 내가 들을 때는 폴모리아의 '이사도라'가 울리면서 시작되던 '밤의 플랫폼'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0시의 다이얼' 같은 프로그램으로 전국의 청소년들을 라디오 앞에 불러 모았다.
그 무렵 나도 그러했지만 또래 아이들은 시험공부를 할 때도 라디오를 틀어놓았고 이불 속에까지 갖고 들어가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가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웬즈데이 차일드' '예스터데이' 같은 먼 이국의 노래가 왜 그리 좋았던지. 진행자에게 이런저런 삶의 사연들을 털어놓는 외로운 사람들은 또 왜 그리 많았는지. 심야의 달콤한 음악과 사연을 들으며 한밤중 깨어있는 사람들만의 동류의식이나 유대감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남진. 나훈아. 이미자만 알고 지내던 청소년들은 심야프로를 통해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 국내의 포크 가수들을 비로소 알게 됐다. 당시 안양유원지는 삼촌이나 형님의 야외전축을 몰래 들고나가 '울리 불리'나 '상하이 트위스트'에 맞춰 신나게 개다리춤을 췄다. 텔레비전, 컴퓨터 등에 익숙한 영상시대. 그러나 라디오에는 보여 주는 것이 결코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가 있었다.
귀와 가슴을 활짝 열고 들었던 라디오. 머리맡에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었던 그 '옛친구'의 향기가 나는 그렇게 그립다. 밤 9시 40분쯤 하던 '절망은 없다.' 라는 프로 , 그 덕분으로 산간을 개간하고 기술을 연마하여 오늘날의 광복을 맞은 것은 아닐까. 오늘은 왠지 당시 동아방송 밤의 플랫포음에 나오는 폴모리아 연주 음악 이사도라 여운을 날리며 '안녕하세요 김세원입니다.' 라고 하는 바람같이 흐르던 여릿한 목소리로 시작한 밤의 음악들이 다시 듣고 싶어진다. 흐르던 여릿함은 가는 세월 따라 그대로 기다림으로 남아 마음 속에서 여전히 물결을 이룬다. 내 머릿결이 흰색으로 변하였듯 팝이란 말 앞에 올드란 말이 붙기는 하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