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골포 연안으로
저무는 한 해와 함께 십이월 끝자락 넷째 수요일이다. 전날 친구네 선산으로 올라 표고버섯을 키울 참나무를 자르는 일손을 도왔더랬다. 벌목 작업을 조심스럽게 했는데도 한순간 위험에 직면한 적 있었으나 잘 넘겼다. 톱으로 자른 나무 둥치가 쓰러지면서 내 무릎을 살짝 스쳤으나 가벼운 찰과상에 그쳐 밤새 잠을 편히 자고 이튿날도 아무런 이상 증상이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다.
아침나절은 집에 머물며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책을 펼쳐 읽었다. 고전 연구가 조윤제가 쓴 ‘다산의 마지막 공부’였는데 다산 정약용이 남긴 저술보다 저자의 해박한 고전 서책 해석 역량에 감탄했다. 저자는 신문방송학을 공부해 대기업 마케팅실에 근무하기도 했으나, 이후 출판계 몸담아 동양 고전 연구를 탐닉해 문리가 트인 대가였다. 앞으로도 그의 왕성한 저술이 기대되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건너편 상가 안경점에서 안경을 세척하고 원이대로로 나가 창원대학을 출발해 용원으로 가는 757번 버스를 탔다. 시내를 관통한 버스는 안민터널과 진해구청을 거쳐 동진해로 향해 웅천을 지난 웅동 의곡에서 내렸다. 영길만 언덕으로 난 해안을 따라 걸으니 모텔과 찻집들이 나왔다. 바깥 바다는 신항만 매립지였고 거가대교가 보였다.
웅동에서 안골포로 가는 연안의 첫 마을은 안성이었다. 포구 밖은 매립이 되고 있었으나 수로처럼 남겨진 좁을 바다에 어선이 몇 척 보였다. 날씨가 흐려 바닷물은 쪽빛이 아니었으나 윤슬로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안성마을을 지나 안청마을이 나왔는데 안골포까지는 ‘안’자 돌림 마을이 이어짐이 특색이었다. 나는 여태 그곳 일대 연안 포구를 여러 차례 다녀 지형지물은 익숙했다.
해안선 따라 아스팔트가 포장된 자동찻길은 예전엔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 보행이 불편했으나 근래는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갓길을 넓혀 보도가 확보되어 산책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부산 강서 을숙도에서 명지 신도시를 거쳐온 남파랑길은 진해 용원에서 ‘안골포길’로 명명되었다. 안청마을도 작은 포구였고 안골포는 그보다 더 큰 포구였으나 신항만 매립지로 쪼그라졌다.
안골포는 신항만이 들어서기 이전은 규모가 큰 어항으로 거제로 뜬 뱃길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배후에는 용원 신도시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다. 신항만이 들어서면서 안골포 앞바다는 상당 수면이 매립되어 바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안골포는 겨울이면 근해에서 양식한 굴을 실어와 까는 작업은 지금도 여전히 성업이었다. 연안 막사마다 굴을 까는 손길이 분주했다.
겨울 한 철 안골포에서는 진해만에서 양식한 굴이 건져져 모여드는 포구였다. 석화라고 불리는 껍데기까지 붙은 굴은 부녀들의 손길에 까여져 무게를 달아 포장해 수산회사나 소비자에게 택배로 보냈다. 굴을 까는 막사에는 그날그날 다른 경매 시세에 따른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막사 안에는 화목 난로를 피워 굴을 까면서 굴구이를 찾는 손님이 오면 앉을 식탁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안골포 마을 뒤 야트막한 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쌓은 안골왜성 성터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 곁의 바다에 치우친 야산은 깔아뭉개 매립지 토사로 썼으나 왜성의 산마루는 남겨 놓았다. 그 성터마저 뭉개버림이 좋은지, 마이너스 역사 현장을 온전하게 보존함이 옳은지 선뜻 판단되질 않았다. 안골왜성은 몇 차례 올라가 봤기에 성곽이 둘러친 산기슭을 따라 용원으로 향해 갔다.
신항만 배후 택지는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었고 신설된 학교들도 보였다. 용원 어시장 장터에는 제철을 맞은 대구가 가득했다. 다른 어패류와 활어들도 펼쳐져 손님을 기다렸다. 장터를 둘러보다 대구는 덩치가 너무 커서 발길을 돌리고 아귀와 청어를 한 무더기 샀다. 주인 할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해체해 깨끗하게 씻어 아이스박스에 담아 끈을 묶어주어 운반이 쉬웠다. 22.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