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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찬송가 96장 ( 구 94장 ) / 히브리서 7 : 1 - 13
● 다함께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찬송가 96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1절 – 13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믿고, 늘 친밀하게 동행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는 놀라운 성경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통독으로 읽어 보신 분들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대로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준비합니다. 내용이 참 복잡합니다. 율법과 예수님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 아래 살아보지 않았기에, 히브리서의 내용이 이해하기 힘들고 지루해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비교하면서 전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전에 먼저 구원받을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완벽합니다만, 그 율법 조항을 완벽하게 다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에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요제, 소제, 화제 등 복잡하고 많지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속죄제사와 또 하나는 감사제사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제사 제도의 중심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는 지파로 레위 지파를 따로 떼어 “너희는 전문적으로 온전히 성전 봉사만 하라!” 고 정해 주셨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개인적 소유나 성공을 꿈꾸지 못하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하며 살았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역할에는 제사만 아니라 중보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속죄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 제도를 폐하시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흠 없으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 한 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이후 다시는 율법에 의하여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전혀 없어졌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당연히 대제사장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어버린 지 오래여서 왕도 없었고, 예언도 그쳤던 때입니다. 오직 남은 것은 율법과 제사장 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대제사장이시고,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폐하셨다는 말씀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인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성경의 근거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신비한 존재인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복을 받고, 또 십일조 헌금을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이 참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멜기세덱 제사장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워두셨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곧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요, 다음으로 살렘 왕인데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정의의 왕이며 동시에 평화의 왕이십니다. 사람들도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정의가 가진 한계입니다.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와 사랑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지만, 평화를 사랑하다가 정실에 흐르고 부패가 일어나고, 불의한 일도 용납하는 경우, 역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정의와 완전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굳이 의의 왕, 평화의 왕이라 함은 완전한 의, 완전한 평강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7장에 완전하다는 단어가 네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은 불완전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드렸던 제사도 당연히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11절) 만일 그 제사직으로 완전한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아론의 계통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다른 제사장이 생겨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은 자신도 죄에서 온전하지 않았기에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속죄 제사를 드리기를 반복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 19절에 보면, 구약의 계명은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게 되었고,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기에 폐하였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신앙생활하는 것을 종교생활이라고 합니다. 종교생활의 특징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으니 겉으로 꾸미며 삽니다. 결코 기쁨에 이르지 못합니다. 열심도 충성도 있지만, 계속 죄를 짓고 또 용서받는 일만 끝없이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고 삽니다. 이러한 불완전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종교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멘!
그리고 오늘 본문 24절, 25절에 보면 예수님을 레위 지파 제사장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장직을 영구히 간직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 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늘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생활을 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고도 율법생활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랑하라, 용서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말씀은 알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이처럼 율법적인 종교생활만 하는 이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없이 교리로만 믿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 -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고해 성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부에게 나를 대신하여 내 죄를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두려움에서 자유함으로, 근심에서 기쁨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말씀대로 살고, 죄짓지 않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도 용서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를 먼저 용서해 주십니다. 사랑하게 해 주시고 기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감동적인 만남이고 동행함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R. 프르스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유명한 설교가이기도 합니다. 어느 주일 예배시간이 다 되었는데, 목사님이 안 나오십니다. 부목사님이 찾아가서 밖에서 들어보니 말소리가 들렸답니다. 그래서 “누구와 대화 중인가보다, 대화가 길어지는구나.” 그래서 조심스러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답니다. 잠시 후에 가보니 여전히 대화를 하고 있어서 가만히 엿들어 보았답니다. "당신이 안가시면 나도 안갑니다." 하며 누군가에게 사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도 궁금하여 문을 살며시 열고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준비는 다했지만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교회 강단으로 가시지 않으시면, 저 혼자 갈 수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주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 나 지금 어디어디를 가는데 주님이 함께 가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가겠습니다. 직장에 가지 않겠습니다. 일하러 가지 않겠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집에 안 가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기도하고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생활을 하지 않고, 은혜생활을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과 한 몸으로 연합된 복을 받았습니다. 이 보다 더 친밀함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가운데 우리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한 구원자이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은혜를 누리시는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살아가시고 주님과 함께, 행복한 동행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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