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부터 마트며 어시장 식욱점 방아깐으로 해서 장을 보고 전날은 정성스럽게 제수를 준비 해서 이곳저곳 묘사를 지내야 할 위치에 따라 혼란이 없도록 박스를 구해다 포장을 나누고 하는 일이 간단치는 않다.
그렇게 해서 당일 묘사가 이루어지고 나면 숙제를 한 것처럼 한결 홀가분 하다.
옛날 부터 이 일을 서로 하지 않으려 하니 준비를 하고 챙기는 일에 대해서 순번을 정해서 돌아가며 유사를 맏아 일을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일 마져도 여의치가 않다.
살기가 각박해진 탓도 있고 종교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면면이 돌아 보면 맡길 만한 사람도 없고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는게 현실이다.
어떤이는 하기 좋은 말로 지가 좋아서 하는 일 이라며 비아냥이 썩인 말투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사람도 있다고들 하지만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해서 하는 것이다.
짐은 나누면 반이 되고 마음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니 조상님을 추모하고 덕업을 기리는 자리 당장의 이익이나 호사가 현재화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마음으로 조금씩 이지만 이 무거운 짐을 나누었으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누가 해도 해야할 일이면 내가 하고 언젠가 해야할 일이면 오늘 하자는 가르침을 마음에 담으면 마음에 부담은 한결 줄어 들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기원부터 생과 사가 완전히 밝혀지고 문명이 인간이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하루가 다르게 진보 해가는 요즘 사람이 신의 존재나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런 과학의 힘으로 모든게 명명백백하게 밝혀 졌지만 조상을 모시는 제사나 묘사를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 부모님이 그렇게 해왔고 거슬러 올라가 언제 부터 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 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순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묘사나 제사는 과거에는 신의 존재를 믿었다면 현재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기 보다 생각을 달리해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선조님에 대한 고마움과 덕업과 을 기리는 전통 문화로 생각하고 계승 발전 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자손은 직장을 따라 전국으로 흩어지거나 멀리는 해외 까지 흩어져 살고 있으니 과거 농경 사회와는 달리 일가 친척이라 해도 얼굴을 마주하기 슆지 않은 것이 현실이므로 이런 전통 문화 행사를 계기로 얼굴 이라도 마주 할 수 있는 날로 의미를 부여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묘사나 제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감당 해야 할 누구나의 일일 수도 이겠지만 부모님의 무관심과 나 자신의 무관심으로 이런 행사에 익숙치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중일을 챙긴다는 것은 서열화된 일족 사회에서 쉬운일은 절대 아니다.
어떤 일에 대해 서로간에 생각이 달라 자칫 의견 대립이 있으면 서열화 된 일족 사회에서 숙질간에 또는 형과 아우 간에 얼굴을 붉힐 수 일도 있거니와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 될 수도 있고 그로 인한 마음에 상처는 쉬이 회복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중의 일은 개인의 의견이 존중되는 것도 중요 하지만 철저하게 다수의 의견이 존중되고 소수의 의견이 양보를 하는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한다.
서열이 높거나 나이가 많다고 내 생각이 소수 임에도 불구하고 내 의견을 관철을 할려고 강요를 하거나 언성을 높이다 보면 생각이 다른 다수의 사람들로 부터 반목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씨족 사회의 일이란 합리적으로 운영이 되기보다 특정 입김이 센 사람의 독선에 의해 운영되기 싶다고도 한다.
묘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어떤 불편함을 해소 하고자 이런저런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 것을 해소 하고자 하는 제안은 번번히 벽에 부딛혀 다음으로 미루어 지게 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문중 행사가 어떻게 발던하고 진행 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소임을 다 하면 되는 것이다.
애써 현실을 부정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 내가 할 수 있을때 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하면 되는 일이다.
묘사(墓祀) 매년 음력 10월 1일 부터 10월 20일 사이 일 년에 한 번 5대조 이상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중 의례로 시제, 시향,시사, 묘제 라고도 하며 명절에는 차례를 지내고 가을에 묘사를 지낸다.
원래 묘사는 시제라 하여 1년에 4회 봄,여름.가을.겨울 해서 철마다 한번씩 제사를 올렸으나 조선 초기 그 병폐가 심하다 하여 지금의 가정의례 준칙처럼 그 절차를 간소화 하여 가을에 한번으로 간소화 했다고 한다.
묘사는 4대 봉사 기준으로 고조 까지느 기제사로 모시고 5대조 이상은 산소마다 찾아다니며 지내고 한 번에 못 지낼 경우 날짜를 나누어 지내기도 하고 분담을 하여 산소마다 제관을 나누어 지내기도 한단다.
묘사를 지내기에 앞서 그 산소의 제일 윗대 산소 옆에 포·떡·고기등의 음식을 차려 놓고 산신제를 먼저 지낸 뒤 묘사를 지내기도 한다.
묘사가 끝이나면 음복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옛날 살기가 팍팍했던 시절에는 동내 아이들이 묘사떡을 얻어 먹으러 오면 그 아이들에게 적은 양이라도 떡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는데 그 시절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먹꺼리가 넉넉치 않았지만 그 것도 나눔의 미덕 이었던 것이다.
어릴적 기억이다. 작은 산골 마을 이산 저산 어느 문중의 산소 마다 묘삿 날을 기억했다 허리에는 작은 떡받이 수건 하나 묶어달고 묘사 떡을 얻어먹으러 다니며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일희일비 했던 아련한 추억이 기억 저퍈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