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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정조 23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검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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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52권, 23년(1799 기미 / 청 가경(嘉慶) 4년) 7월 10일(병인) 2번째기사
연경에서 돌아온 정사 구민화 등이 문견 별단을 올리다.
1. 천초(川楚) 7024) 의 교비(敎匪)7025) 가 아직까지 섬멸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화신(和珅) 이 군사정책을 잘못 운용하여 각 군영이 관망만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화신 이 죽자 즉시 명을 내려 사천 총독(四川摠督) 늑보(勒保) 를 경략 대신(經略大臣)으로 삼아 각 군영으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도록 한 결과 정월 이후로 적의 괴수 다섯 사람을 사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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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시절 연경의 정치상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중국의 호북, 호남, 사천지역에서 백련교도의 후신인 '천리교도'로 추정되는 '교비'들의 난이 지속되어 중국조정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볼 내용이 바로 '천리교'라는 종교의 등장입니다. <야후 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천리교의 난'을 19세기 초 '청나라'의 '하북성'부근에서 발생한 민중반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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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중국 청(淸)나라 때 직례(直隷;河北省)·허난[河南(하남)]의 2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천리교도의 반란. 천리교는 백련교(白蓮敎)의 한 분파로서 화베이[華北(화북)]지방 일대에 팔괘교(八卦敎)·영화교(榮華敎)·백양교(白陽敎) 등의 이름으로 민간에 퍼져 있었다. 반란은 임청(林淸)·이문성(李文成)이 주도하였는데, 부하들은 농민·상인·예인(藝人)·환관(宦官) 등이 대부분이었으며 교도들이 입교할 때 바친 돈으로 무기를 마련하여 군사훈련을 하였다. 9월 15일 반란을 일으킬 예정이었으나 사전에 이문성이 잡혀가자 임청 단독으로 7일 봉기, 화쉬안[滑縣(골현)]성을 습격하였다. 이에 구출된 이문성은 <대명천순 이진왕(大明天順李眞王)>이라 칭하고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깃발을 내걸었다. 베이징[北京(북경)] 쯔진청[紫禁城(자금성)] 내까지 침입한 임청은황태자의 반격으로 체포되어 참수당하였고 이문성의 군대도 그해 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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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야후백과>에서 '천리교'의 기원을 이야기 하면서, 이 종교는 위의 난과 거의 유사한 시기에 일본에서 기원하였다는 알 수 없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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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天理敎)
일본의 나카야마 미키[中山美伎(중산미기)]가 1838년 창시한 슈고신도계[習合神道系(습합신도계)]의 종교. 나라현[奈良縣(나량현)]의 한 지주부인이던 나카야마가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가지(加持)를 하던 중 신탁(神託)을 받아, 스스로 삼천세계를 구원할 원신(元神)이라 하며 포교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안산(安産)·치병(治病)의 주술을 행하며 인류 창조신 덴린오[天輪王(천륜왕)]의 신앙을 전파하였는데, 정부의 박해를 받아 수차례 감옥생활을 하였다. 1887년 나카야마가 죽자 목수 출신의 이부리 이조[飯降伊藏(반강이장)]가 뒤를 이어 교주가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국가정책에 적극 협력한 공이 있어 1908년 교파신도(敎派神道)의 한 파로 독립을 공인받았다. 1907년 이후에는 나카야마가(家)에서 신바시라[眞柱(진주)]를 전승하고 있다. 천리교는 죄악의 근원인 욕심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며 신에게 노력을 바쳐 감로대(甘露臺;참다운 평화의 천지)를 건설할 것을 목표로 한다. 본부가 있는 덴리시[天理市(천리시)]는 하나의 종교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문화활동도 활발하다. 한국에는 1901년 처음 소개되어 1917년 천리교포교관리소가 설립되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광복 후의 반일사상으로 교세를 확장하지 못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일국교 정상화, 종교의 자유에 힘입어 신도수가 40만(1985)에 이른다. 경전으로 《천리교원전》 《교조전(敎祖傳)》 《대한천리교원전》 등이 있다.
---------------------------------------------------------------------------------------------------------- 윗글의 내용을 그대로 요약해 본다면, 이 종교는 병을 고치는 신비한 힘이있고, 청일/러일 전쟁당시 국가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는 기록도 나타납니다. 그 만큼 당시 일본의 국가운영에 많은 힘을 보탠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1901년에 전파되어 포교소가 설립되는 등 여러가 많은 활동이 있었고,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까지 이어져 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천리교가 한국에 전래된 시기를 보다 앞선 1893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전세계에 200만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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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일본어: 天理教)는 일본 나라 현 텐리 시에 본거지를 둔 신흥종교이다. 에도 시대인 1838년 나라 현의 농민 여성인 나카야마 미키에게 천리왕명(天理王命)[1]이 내려 츠키히노야시로[2]로 화하여 이후 포교에 힘쓰게 되었다고 한다. 신토의 일종으로 자리매김하는 의견도 있으나, 교리나 신앙생활에 있어 차이가 크다. 전 세계에 약 200만 명 가량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그중 일본 내에 150만 명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1893년 이래로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7만여 명의 신자가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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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중국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백련교도의 후신인 천리교는, 일본에서 발생한 백련교도의 일파이며, 이들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시 일본이라는 근대국가 성립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는 바로 조선의 운명과 시기적으로 정반대의 운명을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해 보아야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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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평전국 전후엔...중원에 수십개의 상제교 계통 종교들이 난립합니다...왜놈들도 이 상제교의 계파 중 한 계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당시 청나라를 뒤흔든 종교는 상제교(배 상제회)입니다...천리교가 왜놈들이 창시한 건지 뭔진 증거가 없으나...그래봐야 이 상제회의 수십 종파들 중 하나일 뿐이란 겁니다...그리고 직례(현 만주)는 난이 발생고 청에 진압되는 핵심 투쟁지이지...그 주요 고정 것점은 신장성일대 남으론 사천성으로 나옵니다...젤 나중에 진압된 곳도 이곳입니다.
김선생님...새해 더욱 건강하십시오.
선생님도 여러가지 많은 일들 성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대한천리교 사이트를 들어가보면(http://www.chollikyo.or.kr/chollikyo/history.html). 천리교의 교주가 태어난 시기가 1778.4.18일로 정확히 기술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