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문학관 기행
이 영 숙
태풍이 언제 왔었는지 짐작도 못하게 하는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
각기 다른 삶에서 독서라는 주제로 만난 열두 명의 도전자들이 남원의 명작을 만나러가는 기분 좋은 날이다.
얼마 만에 소풍인지……. 비록 산 것이지만 엄마 손맛의 김밥과 생수를 준비하면서 귀찮거나 힘들지 않고 오히려 할 수 있고 할 게 있는 것이 있어 행복함으로 시작된 여행길이다.
항상 전주 가는 길에 만나는 갈색표지판 ‘혼불문학관’이 그곳이 바로 오늘의 목적지이다.
‘남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놀라움과 기대감이 교차되며 남원 토박이로 좋은 장소 유명한 곳은 안 가본데 가 없다고 자부하던 나를 겸손케 하는 첫인상이었다.
초록빛 잔디와 청명한 하늘 그 사이의 짙은 먹색의 한옥 풍경이 중후하면서도 절제된 우리 전통문화의 무게로 다가와 나를 매료시켰다.
우리는 ‘천추락만세향’이 새겨진 바위와 고풍스러운 누마루 ‘소살소살’을 지나 교육관 ‘꽃심관 사랑실’에서 혼불의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다.
‘혼불’은 1930년대 초 일제강점기 때 남원을 배경으로 몰락해가는 종가의 종부 3대가 겪는 삶의 역정을 그려낸 민족지적대하소설로 작가 최명희님이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 동안 집필한 5부작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집필이후 ‘혼불’이란 단어가 국어대사전에 올라갔으며 그 후 1998년 12월 만51세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미완성으로 남겨져 있는 작품으로 더욱 가치를 높였다.
종갓집 양반가와 하층민 ‘거멍굴 사람들’과의 신분 갈등을 비롯해 그 당시 세시풍속, 관혼상제, 노래, 음식을 작품에 정교하게 묘사하였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여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규식 문화해설가는 작가의 소설 집필이유로 나를 있게 한 근원에 대한 그리움과 뿌리 찾기라고 말하며 소설의 배경이 작가의 고향이자 뿌리인 이곳 남원 사매면이고 중심내용도 작가의 집안을 비유하여 실제 인물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또한 표준어가 아닌 지방방언으로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씌어져 혼불단어집이 따로 있을 정도로 대부분이 남원 방언을 담고 있고 민족적 아픔의 시대적 배경을 통하여 현시대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일까 곳곳에 쓰여 있는 소설의 문장들은 할머니와 동고동락하며 성장해온 나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와 반갑고 정겨웠다.
이윽고 이동한 혼불문학 전시관에는 작가의 육필원고와 유가족이 와서 오열할 정도로 그대로 재현 해 놓은 집필실 ‘성보암’과 여러 소설 배경을 디오라마전시(10장면)로 그 시대의 민속신앙과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투병 중에 찍은 고 최명희님의 환한 모습이 마치 시간을 거슬려 함께 소설 속 여행을 하는 듯하다.
특히 한자 한자 글씨를 쓰는 것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던 작가의 육필원고 앞에선 얼마나 많은 세월을 울고 번민 했을까 뭉클함이 들였고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라는 고인의 말 속엔 남모를 창작의 고통과 작품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느낄 수 있었다.
전날 비가 와서 인지 물이 가득한 소설 속 배경 청호저수지는 청상의 몸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우며 살았던 청암부인이 2년에 걸쳐 만든 저수지로 고고한 기백이 느껴지는 장소이다. 저수지를 뒤로는 거멍굴 떠꺼머리 노총각 춘복이가 강실이를 통한 신분상승을 위해 달맞이를 한 동산이 병풍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저수지 옆 정자에서 각자 준비해온 간식과 점심을 먹고 또 다른 소설 속 배경지인 (구)서도역을 향했다.
‘혼불’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으로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올 때 등장한 역으로 강모가 전주로 유학할 때 기차를 이용했던 곳 이라한다. 서도역은 1932년 지어진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역사로 철거위기에 놓인 역을 보존하여 영상 촬영장로 복원되어 많은 문학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도 초등학생들이 문학 탐방을 와 옛 철길과 역사 안을 둘러보며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 졌다. 잘 보존되고 가꾸어져 더욱 많은 이들이 함께 공감하고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좋은 터전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을 빌어 보았다.
오늘 가을 나들이는 해설자님의 비산비야라는 말에 동감하듯 산과 들녘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내 고향 남원의 사계절을 더욱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풍요로운 하루였고 소설을 접하지 못했던 문외한 나의 모습을 반성하며 완독을 하고 다시금 오리라 결단과 아름다운 이곳을 널리 알리고픈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갑니다.’라고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긴 작가 최명희 선생님 이제 작가는 가고 없지만 그가 말하고픈 이야기와 정신은 남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