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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캄보디아 국제결혼 가족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사갈 (서울 )
시어머니는 든든한 친구이자 '큰언니' 같은 존재이다.항상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이주여성 마리벨(오른쪽)과 시어머니 |
케냐인 생부, 인도네시아 계부 밑에서 자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우리말로 하자면 '다문화가정'에서 자란 아이였다. 우리나라에선 매년 결혼하는 부부 10쌍 중 1쌍이 국제결혼으로 이런 가정을 꾸린다. 이미 10만 가구를 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필리핀, 베트남, 중국 등에서 스무 살을 겨우 넘긴 꽃다운 신부들이 한국행을 꿈꾸고 있다. 대부분 '코리안 드림'이란 이상을 품고 이 땅을 밟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상당수의 이주여성들이 가난과 질병, 사회적 편견, 언어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필리핀 이주여성 마리벨 에스 더블린(38)씨의 사정도 비슷했다. 마리벨이 한국에서 산 8년은 눈물과 한숨이 엇갈린 세월이었다. 모국 필리핀보다 더한 가난, 거기다 시부모와 남편이 얻은 병은 마리벨의 웃음을 앗아갔다.
마리벨은 필리핀 북부의 섬 반타야에서 태어났다. 형제만 12명. 마리벨은 넷째였다. 부모는 농사일과 막노동을 전전하면서 식구들을 겨우겨우 먹여 살렸다. 마리벨도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에 나섰다.
필리핀에서 바비큐, 필리핀식 볶음밥을 파는 식당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했다. "희망이 없었어요. 매일 가난했고 영원히 가난할 것 같았어요." 마리벨은 '가난'이란 단어를 힘들게 발음했다.
마리벨은 교회에 다녔다. 어느 날 교회에서 '한국 남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고 했다. 마리벨은 교회 목사의 '한국 남자가 부지런하고 돈을 잘 번다'라는 말을 듣고 선을 보기로 결심했다.
맞선 자리에서 마리벨은 지금의 남편 남재일(45)씨를 만났다. 마리벨과 남씨는 3일 만에 결혼했다. 마리벨은 2000년 2월 부산에 도착했다.
"춥고 무서웠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혼자 낯선 나라에 왔다는 생각에 처음엔 잠이 오지 않았어요."
시아버지 남영희(72)씨와 시어머니 김선옥(64)씨는 부산 서구 남부민동에서 40년 동안 20평 남짓한 슬레이트집에서 살았다.시부모는 가난이 몸에 깊게 밴 집에 시집 온 마리벨이 마냥 고마웠다. 시부모는 마리벨을 딸처럼 대했다.
"외국인 며느리요? 처음엔 꺼렸죠. 하지만 마리벨의 품성과 됨됨이에 요즘은 이웃들이 '아들 장가 잘 보냈다'고 말해요." 시어머니 김씨의 말이다.
시부모와 남편, 마리벨은 자갈치시장에 있는 '푸짐한 집'이란 밥집에서 일을 했다. 밥은 시부모가, 설거지는 남편이 하고, 마리벨은 배달을 했다. 말 그대로 '패밀리 레스토랑(?)'이었지만 벌이는 시원찮았다.
대부분 손님은 자갈치시장 상인들인데 2천원짜리 국수와 2천500원짜리 정식을 팔아 봐야 하루에 3만~4만원, 한 달 벌이는 100여만원에 불과했다. 하루 일하면 하루 먹고, 하루 쉬면 하루를 굶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릎이 안 좋던 시아버지가 관절염으로 눕고 말았다. 잇따라 시어머니도 디스크로 식당 일을 못하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 그나마 옆에서 든든히 자기를 지켜주던 남편마저 올해 2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남편 몸의 반이 마비되면서 입도 돌아갔다. 남편은 한 달간 병원에 입원했다. 마리벨은 낮에 일하고 밤에 병원에서 남편을 돌봤다. 울고 싶었지만 울 시간도 없었다. '나마저 흔들리면 이 가정은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마다 마리벨은 친정 엄마가 한국으로 떠날 때 했던,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떠올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었다. 다행히 서구청으로부터 의료비 200만원을 지원받았다. 남편은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나아졌고 요즘은 같이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볼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
마리벨은 일곱 살 아들 승혁이와 세살배기 딸 진선이를 두었다. 마리벨은 승혁이는 영어교사가, 진선이는 발레리나가 됐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마리벨은 요즘 통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잔다. 이 통장에 1천원도 저금하고 1만원도 넣는다. 이제 겨우 100만원을 넘겼다. 마리벨은 이 돈으로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아이들에게 예쁜 옷도 사 줄 생각이다. 불편한 남편의 몸도 고칠 생각이다. 돈이 더 모이면 조그마한 아파트도 사서 친정 식구를 초대하고 싶어한다.
"제 꿈은 선생님이었어요. 이제 그 꿈을 이룰 수는 없겠죠. 가난 때문에 포기했지만 내 아이는 꼭 꿈을 이뤘으면 좋겠어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저도 그 말을 믿습니다."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