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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62세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돌아오다가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돌게 했다. 마치 그가 지난 18년 동안 이뤄놓은 '한강의 기적'을 눈에 담아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 전날, 대통령은 청와대 뜰을 거닐다 낙엽 하나를 줍더니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오동나무 낙엽 하나가 가을이 깊어감을 알린다고 했는데…."
제9대 대통령 취임식 다음 해인 1979년, 유신체제의 위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8월에는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 조치에 항의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은 9월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박정희에 대한 지지 철회"를 미국에 요구했고, 여당은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결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유신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18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현장을 지켜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는 강경 진압을 고집한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에게 큰 반감을 품게 됐다.
26일 오후 6시 5분,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김재규·차지철과 함께 만찬 자리에 앉았다. 40분쯤 지나 자리를 빠져 나온 김재규는 부하들을 불렀다.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각하까집니까?" 김재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7시 40분, 박정희가 합석한 가수 심수봉의 반주로 모델 신재순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김재규는 욕설을 내뱉으며 차지철의 팔에 권총을 발사했다. "뭣들 하는 거야!"(박정희) "경호원, 경호원!"(차지철)
김재규는 4, 5초 동안 머뭇거리다 정좌한 채 눈을 감은 박정희의 가슴에 총을 쐈다. 김재규의 부하들은 대기실과 주방에서 경호원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총이 고장 나 김재규가 밖으로 나간 사이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했다. "각하, 괜찮습니까?" 등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그대로 앉은 채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괜찮아…." 잠시 후 부하의 권총을 빼 들고 와 차지철을 쏜 김재규는 대통령의 머리 50㎝까지 총을 들이댄 뒤 방아쇠를 당겼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