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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유럽의 성격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는 고대 로마 제국의 몰락과 게르만족의 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역사무대는 지중해로부터 유럽대륙으로 변하고 게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문화와 크리스트교, 그리고 게르만적 요소가 새로운 역사 환경속에서 융합하면서 새 시대를 이룩해 나가게 되는데, 이를 중세 봉건사회라고 한다. 중세 봉건사회의 성격은 정치적으로는 지방 분권적인 사회이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농노제를 바탕으로 한 농촌사회이며, 종교적으로 봉건사회와 밀접하게 결합한 중세교회가 발전하였다.
이 시대 봉건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봉건제도와 장원제도인데, 이러한 제도는 중세 시대에 새로 만들어 졌다기보다는 민족이동 전의 로마 사회와 게르만 사회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봉건사회의 특징적 구조인 주종제도와 장원제도, 농노의 처지, 종교 문제에 있어서 중세 교회의 발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2.로마제국의 멸망(476년 서로마 멸망)의 원인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를 호수로 삼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3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여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로마 제국도,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모든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로마의 멸망 원인은 크게 내적 요인과 외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내적인 요인으로는 황제권의 급격한 약화와 귀족 사회의 사치와 향락을 꼽을 수 있다. 로마의 변방을 지키던 군사령관이나 속주의 총독들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들어와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군인 황제 시대(235-285)이후 로마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귀족들은 거의 매일 향연을 열고 속주에서 들여온 값비싼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등 건전한 생활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외적인 요인으로는 로마 변경에서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게르만족이 경작지와 생필품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로마 영내로 침범하였으며, 동방에서는 사산 조 페르시아가 일어나 그 세력을 로마의 영역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러한 외부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군대에서 이탈리아인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속주에 속한 군인이거나 아니면 로마 영내로 들어온 게르만 용병들이었기 때문이다.
3.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
게르만족의 이동
게르만족은 발트해 연안과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거주하면서 일찍부터 남하하여 로마의 국경선인 라인강 동쪽, 다뉴브강 북쪽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로마 제정기에 게르만족은 부족사회를 형성한 단계에 있었고, 촌락에 거주하면서 농경·목축·사냥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문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로마의 변경지대로 이주한 게르만족은 3세기경부터 로마문화의 영향을 받고 로마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개인적, 집단적으로 로마군에 들어와 군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5세기에는 게르만 출신의 로마군 사령관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민족이동이라고 알려진 게르만족의 로마영내로의 대대적인 이동은 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훈족(Huns, 匈奴)의 압박 때문이었다. 훈족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고트족을 침략하자 그에 밀린 서고트족이 로마 제국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게르만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200년 동안 게르만의 여러 부족은 로마 제국 영토 안에 많은 왕국을 세웠다. 게르만족 이동의 혼란 속에서 더욱 쇠약해진 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 출신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였다.(476년 ) 그러나 훈 족의 침입이라는 외적인 요인 말고도 게르만 내부에서 이미 이동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척박한 토지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에게 땅을 깊게 파서 씨를 뿌리는 심경법이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나자 더 많은 경작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로마 제국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변방의 수비가 소홀해지자 로마 영내로의 침입이 용이해져서 대규모 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프랑크 왕국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들이 단명에 그친 반면 프랑크 왕국만은 유럽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발전을 계속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원주지를 버리지 않고 팽창형태로 이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뿌리가 튼튼하였다는 점, 둘째로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였으므로 로마 시민이나 교회와 마찰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끝으로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 비잔틴이나 이슬람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등을 들 수가 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
봉건제도는 일정한 의무수행과 이에 대한 봉토수여로 성립되는 주종제도와 기사의 장원에서 나타나는 농노제에 입각한 장원제도를 종합하는 말이다.
1. 주종제도와 주종관계의 특징
주종제도
중세에는 기사들간 계서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하위 기사 B는 봉신이 되어 상위 기사 A를 주군으로 섬겨 충성을 맹세하고 군역을 비롯한 봉사를 제공하는 한편, 주군B는 C를 봉신으로 삼아 보호하고 토지를 주어 부양하는 것을 주종관계라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C는 C보다 더 낮은 하급 기사인 D의 주군이 되고, B는 B보다 더 높은 상급 기사 A의 봉신이 되면서 위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아래로는 봉신을 갖지 못한 기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군―봉신간의 상하관계는 평면적인 구성이 아니라 국왕을 정점으로 하고 봉신을 갖지 못하는 평기사를 저변으로 하는 피라미드형의 계서제를 형성하였다. 즉 국왕을 정점으로 백작(count)이나 공작(duke) 등의 중간단계를 거치면서 폭이 넓어지고 그 가장 아래에는 평기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서제에 포함되는 모든 기사들은 평기사를 포함하여 모두가 전사인 동시에 봉건적 토지보유자로서 봉건적 지배계급에 속하고 있었다. 봉건사회의 인적 구성을 상징하는 말에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주종관계로 봉건적 계서제를 구성하는 사람은 바로 이 '싸우는 사람' 즉 전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종제도로서 전사계급의 결속이 이루어졌다.
주종관계의 특징
중세 유럽 사회에서 보이는 이러한 주종관계의 특징은 주군―봉신간의 관계가 상호간을 자유인으로 간주한 쌍무적 계약관계라는 것이다. 즉, 주군과 봉신은 기사 상호간의 상하관계이긴 하지만 예속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자유인 사이의 사적인 계약관계로서 어느 한쪽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주군의 의무는 힘을 다하여 자신의 봉신과 그의 토지를 보호하는 것이고 봉신의 가장 큰 의무는 전쟁시 주군을 따라 종군하는 것이었다. 또한 봉신은 주군에 대한 경제적인 의무도 있었다. 봉신은 주군이 포로로 잡혀갔을 경우의 몸값, 주군의 큰 아들의 성년식이나 큰 딸의 혼인식, 새로운 성의 축조에 따르는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2.장원제도와 농노의 처지
장원제도
[그림] 중세 기사들의 성채
주종제도로서 결합된 봉건적 지배층은 다 같이 전사인 동시에 토지소유자였다. 봉신이 주군으로부터 받은 토지를 봉토라고 하는데, 이러한 봉토는 대개 장원으로 조직·경영되었다. 계서제에 포함된 전사들은 모두 장원의 영주였다. 장원은 보통 촌락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 한 장원에 두 개 이상의 촌락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고, 큰 촌락일 경우 두 개 이상의 장원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장원은 중세사회의 일상적인 현실생활이 영위되는 기본단위였다. 장원의 중심부에는 장원을 관리하는 영주관이 있으며 영주관과 인접하여 교회와 제분소·제빵소·창고 등의 시설물이 있다. 그리고 농민의 집들은 도로변에 나란히 모여 있으며 그 주변에는 경작지와 공동목장이 있다. 경작지는 영주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로 이분되어 있었는데, 대개 영주 직영지는 예속 농민들의 부역 노동으로 경작되었으며, 보통 삼포제로 경작하였다. 삼포제란 토지를 춘경지, 추경지, 휴한지로 나누어 3년에 한번씩 농토를 휴한지로 남겨두는 것이다. 즉 한번 곡물을 수확한 밭의 비옥도는 현저히 떨어지므로 몇 년 동안 경작하지 못하고 목초지로 이용하는 것이다. 영주 직영지는 보통 경작지의 3분의 1 또는 2분의 1 정도였다. 토지는 넓은 땅덩어리가 아니라 지조(地條: 띠 모양의 좁고 긴 땅 조각)로 이루어졌는데, 영주의 지조는 농민 보유의 지조와 섞여 있었다. 각 지조의 경계에는 밭두둑만 있을 뿐 울타리가 없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넓은 들판은 가축을 풀어 놓는 방목장이 되었다.
농노의 처지와 공동체적 관습
장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대부분의 농민은 농노였다. 농노들은 고대의 노예와는 달리, 토지와 가옥 등 약간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 시민과는 다르게 중세의 농노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재판권·치안권·징세권 등을 행사하는 영주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부역이나 현물 지대 외에 각종 공물을 납부하고, 인두세·결혼세·통행세 등의 여러 세금을 부담하였으며, 제분소와 제빵소 같은 영주의 독점 시설을 이용하고 대가를 지불하여야만 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역시 영주 직영지를 위한 노동력의 제공이었다. 이 부역은 평균해서 일주일에 3일 정도였다. 중세는 '신앙의 시대'로서 일요일은 노동하지 않았으므로 농민은 노동 시간의 절반을 영주를 위하여 바쳤던 것이다. 이 밖에도 농민은 영주의 자녀 혼인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공납을 바쳐야 만 했다. 이처럼 농노는 여러 가지 신분의 제약을 받는 예속적인 존재로서, 독일에서는 농노를 가리켜 '뿔없는 소'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한편 장원의 영주는 토지를 완전히 소유했다기 보다는 상위 군주로부터 토지 사용을 허락받은 일종의 임대인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성격 속에서 장원 안의 농노는 공동체적 관습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경작권의 보장이다. 영주는 자기가 보유한 장원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지만 그것은 농노가 새로운 영주를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농노는 토지에서 추방될 수 없었던 것처럼 토지를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3. 불입권과 지방 분권체제
봉건적 주종 관계는 일대일의 계약 관계였기 때문에 봉신은 주군의 주군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주군은 봉신의 봉신에 대해서는 의무수행을 요구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위의 주종관계에서 처럼 A의 봉신은 B이고, B의 봉신은 C라고 하자. 이 때 A는 C에게 의무를 강요할 수 없고, C도 A에게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봉건 사회의 국왕은 주군중의 최고라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었고, 왕권이 취약하였다. 또한 주군 A가 봉신인 B에게 봉토를 수여할 때 B는 자신이 받은 봉토에서 행정, 사법을 포함하여 광범한 자치적 통치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불입권이라고 한다. 따라서 B는 자신의 영토에서 A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이 토지 수여자인 기사들 각자에게 수여됨으로써 국가권력은 봉건적 지배계급인 기사들에게 광범위하게 분산되고 그리하여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제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중세 교회의 발전
1. 동서 로마교회의 분리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로마 교회는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6세기 말부터는 게르만족의 포교에 힘써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비잔틴 황제 레오 3세가 성상(聖像) 숭배 금지령을 내리자(726), 성상을 인정하여 게르만 인들을 포교하고 있던 로마 교회는 이에 반대하여 동서 교회의 대립이 날카로와 졌다. 로마 교회가 비잔틴 황제를 대신할 보호자로서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프랑크 왕국이 로마 교회를 적극 지지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 크리스트 교회는 비잔틴 황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그리스 정교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 교로 분리되었다(1054).
2. 교황권의 성장
수도원과 교회의 개혁
[그림] 클뤼니 수도원
로마제국 초기 심한 박해에도 크리스트교의 교세는 날로 확장해갔다. 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큰 재산을 소유하게 되고 이에 따라 세속화 현상이 일어났다. 10세기 초의 교황은 로마 귀족의 우두머리에 불과하였고 독일 황제나 귀족들이 교황을 임명하였다. 이렇게 교황이나 고위성직자를 세속제후가 임명하는 것은 당시 노르만족 등의 이민족의 침입에서 교회와 성직자가 살아남기 위해 세속제후의 보호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는 교회를 세속화하고 성직자의 기강을 붕괴시켰다. 이렇게 교회의 세속화와 성직자의 타락에 대한 개혁 운동이 10세기 초기에 설립된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싼 국왕과 교황의 대립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친 혼란 속에서 성직자들은 강력한 국왕에게 의지하려 하였다. 국왕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성직자를 지명하고 임명까지 하게 되었다. 교회의 개혁자들은 이러한 국왕의 성직자 임명권에 도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왕권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그레고리 7세(1073-1085)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성직자 임명권 문제를 둘러싸고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그레고리 7세는 주교선출에 관해서 하인리히 4세에게 간섭하지 말도록 편지를 보내고, 주교와 수도원장은 왕으로부터 임명 받지 말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권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여 교황에게 황제를 폐위시킬 권한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하인리히는 독일내의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그레고리를 '찬탈자'로 규정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그레고리는 곧 하인리히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였다.
지방분권화된 정치체제에서 자신의 영지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던 세속제후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중앙집권을 싫어하였으므로 이 사건에 있어서 황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표면화하였다. 따라서 107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의 주재 하에 귀족과 주교로 구성된 국회를 소집하여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076년 말에 교황 그레고리는 이 국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오는 도중, 교황을 만나러 알프스를 넘었던 하인리히와 카노사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황제 하인리히는 죄를 인정하고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다. 교황은 3일간을 기다리게 한 후 하인리히를 용서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이 후,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때 영국에서 聖 안셀모와 국왕 헨리 1세 사이에 타협안이 마련되었고, 교황의 승인도 받았다(1107). 그 내용은 주교는 교회내에서 선출하되, 주교로 취임하기 전에 국왕에게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국왕으로부터 봉토와 이의 관할권을 수여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타협이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성립되었다. 성직자 임명권 문제 해결 이후에 교황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중세 도시와 대학
1.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중세의 도시는 대략 12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발달하였다. 대외적으로 십자군 원정은 원거리 무역의 번창을 가져왔고, 대내적으로 농업 생산력은 도시 발달의 한 요인이 되었다. 10세기 말부터 이민족의 침입이 사라지면서 유럽 사회는 안정을 찾는다. 또한 나무가 아닌 철제 농기구와 말을 이용한 심경법을 통해 잉여 농산물이 증대되었다. 잉여 생산물은 상품이 되어 시장에 나오고 상인들이 시장 주변에 모여 살게 되면서 도시는 점점 확대되었다.
[그림] 중세도시의 모습
중세 도시는 자치권을 누렸다. 길드를 중심으로 뭉쳐서 무력 투쟁 끝에 자유를 획득하기도 했고 거래를 통해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사기도 했다. 도시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매입할 경우에는 특허장이라는 이름의 문서를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농촌에서 장원 안의 농노들이 영주의 간섭 아래 있을 때 도시의 시민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농노가 도시로 도망갔을 때 1년 하루 동안 붙잡히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2. 중세 대학
유럽에서 대학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에 걸친 학생 또는 교수 조합(길드)으로부터 출발하였다. 13세기 초에 왕이나 교황에 의한 허가장에 의해서 대학은 법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교수와 학생에게는 통상적인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는 특권(병역의 면제 등)이 부여되었다. 대학은 주교의 관찰을 벗어나 있었으며, 학생징계 권한은 교수단에게 위임되었다. 즉 중세 대학은 국가나 종교 권력에서 벗어난 자치단체였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은 로마법 강의와 교회법 강의로 그 기반이 마련되어 전 유럽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파리 대학은 노틀담 교회의 부속학교로 출발하여 교사들이 길드를 형성함으로써 설립되었다. 볼로냐 대학이 법학으로 유명한 반면 파리대학은 신학연구의 총본산이 되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은 1167년에 헨리 2세가 파리에 있던 영국 학자에게 귀국령을 내리면서 그 기틀이 잡혔다. 캠브리지 대학은 옥스퍼드와 파리에서 이주해 온 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 설립 연대는 확실치 않다. 13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많은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3세기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14세기에는 독일에도 대학이 설립되었다.
봉건사회의 붕괴
11세기에 이루어진 중세사회의 전반적인 안정을 배경으로 중세 유럽은 봉건적인 농촌 경제와 길드에 바탕을 둔 도시 경제가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12·13세기에는 크리스트교적이며 봉건적인 중세문화의 꽃이 만발하였다. 그러나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는 붕괴 내지 해체의 길을 걷게된다.
14·15세기 봉건 경제는 전반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하고, 심각한 기근과 흑사병 장기간에 거친 대전쟁이나 농민반란 등이 발생하여 장원제도가 붕괴하게 된다. 이 시기 경제발전의 위축은 인구증가의 압박 때문인 것 같다. 즉 새로운 개간지가 고갈됨으로써 인구 증가의 압박을 소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14세기 중엽에 발생한 페스트의 일종인 흑사병은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전체를 휩쓸었다. 그 결과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되었다. 또한 농촌에서는 농노가 부역대신 화폐지대를 바치게 되고, 농노의 부역이 사라지면서 영주 직영지는 임대지로 대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봉건제도의 한 축이었던 장원제도가 붕괴되었고, 농민은 점차 농노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도시에서도 부유한 상인과 금융가들이 폐쇄적 도시귀족으로 변함으로써 도시의 하층민 내지 노동자의 폭동과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길드적인 도시경제의 틀이 흔들리게 되었다.
정치면에서 봉토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가 깨어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13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던 교황권도 14세기에는 교회의 대분열 등으로 쇠퇴하고 카톨릭 교리에 도전하는 이단설이 등장하였으며, 종교 개혁의 선구적인 움직임도 나타났다.
첫댓글 사갈탱이님, 많은 유익한 자료 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네요.
수고하셨네여...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