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나루에 번창하였던 송파장의 상상화-송파문화원제공
현재 석촌호수 서호(西湖) 남쪽 언덕에 송파장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15대 향시(鄕市)로 손꼽혔던 송파장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까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었다.
이렇게 시장이 번창할 즈음 장판에는 되쟁이, 마쟁이(되나 말로 곡식을 되어주는 직업) 임방꾼(배에 화물은 싣고 푸는 직업),
잡심부름꾼, 술집 운송점(마루하치: 화물창고와 주문처) 선원 연초가공 신탄상 우시장 같은 갖가지 직업과 거상(巨商) 거부(巨富)가 많았다고 한다.송파장의 물건 시세는 배오개(梨峴)시장이나 칠패(七牌)시장보다 값이 헐하였다.
원래 송파장은 매월 5일 10일15일…에 장이 선다. 그렇지만 그 전날부터 전국의 장꾼들이 모여들고, 또 장날 다음날에도 물건을 실어 내느라고 며칠씩 붐볐기 때문에 날마다 장이 서는 주요 상설장시(常設場市)로 꼽혔다.
송파장의 옛 모습을 회고하는 한 대담을 통해 전성기의 송파장을 그려보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장날이면 한강을 통해 80여척의 배가 송파나루에 정박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던 말행상(馬行商)들이 몰리지요”
“송파장은 소(牛) 시장으로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럼요, 3남지방에서까지 소장사들이 이곳까지 소를 끌고 올라와 거래했고, 또한 서울의 푸줏간 주인들이 소를 사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었지요”
“그렇다면 서울 종로의 시전상인들이 송파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텐데…”
“물론이죠. 영조 34년(1758)에 시전상인들이 그들이 파는 물건과 송파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이 같으므로 해마다 이익이
줄어 타격이 크자 항의가 대단했죠. 그래서 시장 감독기관인 평시서(平市暑)에서 시전상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송파장을
폐지할 것을 조정에 여러 번 건의했지요”
“그랬던가요”
“그렇지만 광주유수(廣州留守)가 송파장의 폐지를 적극 반대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논의를 계속하다가 결국 폐지하지 않기로
결정했지요”
1930년대 송파나루의 모습
조선 후기 한강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경강(京江)상인들이 조선 상권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정부의 세곡(稅穀)과 양반지주층 소작료의 임운(賃運)활동에 종사하던 경강상인들이었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송파나루의 송파장 상인과 지금의 의정부 근처 다락원장 상인들과 결탁하여 독점적인 상권의
특혜를 누렸던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일대)의 시전(市廛)상인을 압박하였다.
이들 두 지역의 상인들은 금란전권(禁亂專權)에 규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 두 시장이 시전에 비해 거리가 멀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소상인들에게는 거리가 장애가 되었다.
이들 소상인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해 비교적 먼 거리에 찾는 소상인들을 유인하였다.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가 바로 양대 볼거리로 두 시장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도성안에 있던 칠패시장(지금의 중앙일보 근처)와 배오개시장(지금의 광장시장)의 소상인들을 주로 불려들였다.
이들은 금란전권 밖에서 물건을 사다가 시전에서 산 물건과 섞어팔면서 단속의 눈길을 교묘하게 피했다.
원래 모든 물품의 생산자나 지방에서부터 물품을 운반해 온 자가 한양에서 그것을 판매하고자 할 때는 관아에서 인가된 시전에
가서만 팔 수 있고, 다른 데서는 팔 수 없었다. 다른 데 가서 처분하면 이를 난전(亂廛)이라 하여 처벌하였다.
이른바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 때 이런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긴급 조처, 신해통공(辛亥通共)이 나왔다.
이에 힘입어 송파장은 경강상인과 함께 상권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송파장터에서 서울의 사상인과 현지의 상인들이 서로 결탁하여 상설시장을 이루고 있다 하였지만 사실상 송파장터의 상권을
쥐고 있던 것은 서울의 민간상인들이었던 것 같다.
19세기 초엽에 한강변에 근거를 둔 대규모 사상인의 한 사람이었던 손도강(孫道康)은 양주와 광주 등지의 부자들에게서 자금을
조달하여 직접 원산에 가서 이른바 '전선 상매(全船商買)'를 해왔다. 순조 4년(1804)의 어느날에도 어물 30여 바리(駄)를
운반해 오다가 이를 취체하려는 서울의 어전상인들을 오히려 구타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서울의 큰 부자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30년(1754)에서 영조 34년 사이에 송파장이 조정(朝廷)에서 거론되었다.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 홍상한(洪象漢)은
“서울의 간세(奸細)한 무리들이 송파에 살고 있는 부랑자들과 작당하여 각종 물화를 모아 시장을 크게 열어 삼남과 동북지방의
장사치들을 유인해서 마음대로 사고 판다.”고 하였고,
“서울 근처의 시장은 사평(沙平), 광나루, 누원, 금암(黔巖) 등지에도 있지만 송파가 가장 심하다. 이곳에 사는 백성의 무리들이
서울 안팎의 젊은 패 및 난전상인들과 결탁하여 삼남지방, 북도(北道), 영동의 상인들을 유인해 모두 이곳에 모인다. 명색은 한달에 여섯 번 장을 연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각전(各廛) 물건들을 마을에도 쌓아두고 매일 장사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송파장이 서울 시전의 특권적 상업에 위협을 주니 시전을 보호하기 위해 송파장을 규제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에도 송파장에서 서울로 가는 어물을 독점해 값을 마음대로 조정한다고 몇차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송파는 각 지방 상품을 집결시켜서 항상 시장을 여는 상업도시였고, 서울의 특권적 상업에 위협을 주는 서울근교의 상업도시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1900년대 초 한강에 철교가 놓이고 철도가 운행되면서 한강가 경강상인들의 상거래활동은 크게 타격을 받는다.
이 무렵 송파장도 경기가 후퇴하면서 아주 위축된다.
일제는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고 모든 생활필수품을 배급제로 하는 통제경제를 실시한다. 이 여파로 송파장은 더욱 위축된다.
일제는 1920년대 숭인동 동묘(東廟) 부근에 대규모 우시장(牛市場)과 도축장을 새로 연다. 이때 송파장의 상인들이 이곳으로
옮겨간다. 송파장은 쓸쓸해져 갔다.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시장과 300여호의 가옥이 흙탕물에 떠내려간다.
송파 마을주민들은 남쪽의 가락동으로 이전하여 새로 마을을 이루는 등 송파시장은 큰 타격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