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숭하올 천지만물의 대주재이신 분이 당신들을 창조하셨으니, 모두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
"당신네는 두려워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당신네는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
형리는 정약종의 말을 가로막고, 나무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였다. 이 신앙의 증거자는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머리를 누이면서,"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사형 집행인은 겁을 먹고, 자신이 없이 칼을 내리쳐서, 목이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자,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보라는 듯이 손을 벌려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처음 자세로 되돌아가
마지막 칼을 받아, 2월 26일(음력)에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정약종의 나이는 41세였다.
정약종(1760~1801)은 1801년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고,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됐다.
그는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그곳 네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정약종은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의 아들 약현(若鉉), 약전(若銓), 약종, 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다.
정약종의 가족은 모두 순교해 대가 끊겼다.
두번 째 부인 유소사(柳召史, 세실리아 1768~1839)과 큰 아들 정철상(丁哲祥 ?~1801)
딸 정정혜(丁情蕙 1791~1839) 둘째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이 순교했다.
정약종은 손이 끊겼다. 이들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은 1984년 5월 성인에 올랐다.
이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고 순교한 정약종은 지난 2014년 복자로 추존되었다.
정약종은 천주 신앙만이 진리라는 믿음에 한치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조상제사 폐지로 양반사회가 술렁이건,
형제들이 관직에 오르건 동요하지 않고 신앙에 정진할 수 있었다.
"저는 아버님 제사를 모실 수 없습니다."
맏형 약현은 "아버님이 그토록 천주교를 멀리하라 타일렀거늘, 그것을 끝내 버릴 수 없단 말이냐?"
하며 약종을 꾸짖었다.약종은 형의 질타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결심을 굳힌 터였다.
"저는 형님이나 아우처럼 벼슬길에 나간 것도 아니고…. 천주는 천지의 임금이요 큰 아비이니,
초야에 묻혀 천주를 섬기고 교리를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명망 높은 가문 후손인 정씨 형제는 누구보다 일찍 천주교에 눈을 떴다.
1780년대 천주교를 이끌었던 신자들이 지금의 서울 명동인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정약전·정약종·정약용·윤지충 등 10여 명의 신자가 둘러 앉은 가운데 이벽이 강론을 하고 있다.
1984년 화가 김태가 그린 그림으로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784년 겨울 한양 수표교 부근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될 때 약전과 약용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약종도 2년 후 형 약전한테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정씨 형제는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 발각돼 고초를 겪고, 이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외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조상제사를 폐한 죄로 1791년 신유년에 참형을 당하자 천주교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약전과 약용은 다시 문과에 급제해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약종은 달랐다. 형제들이 천주교를 택하는 것을 보고 잘못된 교리라며 배척했으나,
어느 순간 자신이 찾아 헤맨 철학적 진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깨닫고 오로지 거기에 매달렸다.
약종은 형제들과 달리 애초부터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과거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문예 공부에 거리를 두고 도교에 빠져 들기도 했다.
진리 탐구에 뜻을 둔 그의 학문적 열의와 신중함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약종은 벼슬과 권세에 대한 미련을 버린 터라 아내와 아들 철상(가롤로)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그의 형과 아우만이 마재 강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근심어린 시선으로 약종을 배웅했다.
마재 강 건너편 양근 분원으로 이주한 약종은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하층민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교리를 가르쳤다.
충청도 출신 머슴 임대인(토마스)과 천민 출신 최기인 등에게 천주 신앙을 전했다.
불평등한 봉건적 신분제를 복음의 평등사상으로 타파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맏아들 철상, 둘째 아들 하상(바오로), 딸 정혜(엘리사벳)에게도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황사영(알렉시오)은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한 백서(帛書)에서 약종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세상일은 도무지 관여하지 않으며 특히 철학과 도덕 공부를 좋아했다. 그는 몸이 아프거나 배가 고프거나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였고, 교리에서 한 부분이 모호하게 되면 식욕도 잃고 잠잘 생각도 잊은 채 그침 없이 탐구하여
끝내는 그것을 밝혀내고야 말았다. 말 위에 있든 배 위에 있든, 깊이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무지한 이들을 보면 그들을 가르치는 데 온 정성을 다했는데…."
약종은 1794년 무렵부터 한양에 자주 올라와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했다.
당시는 교황청의 조상제사 금지 조치로 인해 양반층 신자들이 천주교에 등을 돌리고, 대신 양반 특권을 포기한 사람들이나
중인 이하 신분층 인물들이 교회를 이끌어갈 때였다. 약종은 천주 신앙만이 진리라는 믿음에 한치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조상제사 폐지로 양반사회가 술렁이건, 형제들이 관직에 오르건 동요하지 않고 신앙에 정진할 수 있었다.
정약종은 갑술옥 사건(1694)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떠나기 시작한 양반 계층인 남인의 계보 속에서 성장하였다.
남인파의 실권은 정약종과 형제들로 하여금 학구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가정은 당대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그의 형인 정약전(1758-1816)과, 동생인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정약용은 학문 연구 생활 중에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입교하여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한국 지성사에 있어서 손꼽히는 인물이다.
정약종은 강직한 성품과 함께, 뛰어난 통찰력과 꾸준한 탐구력을 지닌 청소년으로서 시문과 경서에 능통하여
당시의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정약종은 유교 철학의 주자학과 노장(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에 심취하였다.
곧이어 주자학이 지나치게 공리공론에 치우쳤고, 도가가 허무맹랑한 사상임을 깨닫고 반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학문․사상적으로 방황하던 그에게 찬란한 빛을 던져 준 것이 바로 천주교 신앙이었다.
27세 때인 1786년 3월 중형인 정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천주교 교리에 접하게 된 정약종은 즉시 도교를 버리고
천주교 신앙에 잠심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오랫동안 갈구해 오던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진리가 이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이나 도술, 옥황상제라는 말은 허망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쏟아 천주교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는 입교하여 더욱 천주교리를 연구함으로써 교리지식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1791년 신해(辛亥)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냉담했어도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됐으며 세례 후에는 교리를
연구하고 가족을 가르치는 데 전심했다.
오랜 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했다.
이 책은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됐다.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정약종을 초대 회장에
임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