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는 작은 음식입니다. 반면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명이 먹은 것은 큰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라는 적은 음식으로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한 기적의 덕분입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게 하신 후에 급히 제자들을 재촉하여 내어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여 있던 수많은 무리를 흩으셨습니다.
22절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제자들을 급히 보내십니까? 왜 모여 있던 군중들을 순식간에 흩어 버리신 것입니까? 위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세력이 갑자기 나타난 위기가 아니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 6:14-15절은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아로, 세상 임금으로 삼아야겠다는 혁명적 분위기가 지금 무리들 가운데 역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처럼 먹고살기 어려운 때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을 수 있는 이 분만이 우리의 왕으로 만든다면 , 아니 세운다면 분명히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 이십니까? 나에게 물질적으로 풍요함과 고통을 덜어주신다고 육적인 면에 치우쳐서 주님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민중을 사랑하십니다. 부자의 편에 있기보다 가난한 자 편에, 소외계층에 함께 계십니다. 그들과 함께 먹었고 그들과 함께 나누었고 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창녀와 세리와 소외계층인 과부와 고아에게 애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한번도 민중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끌려 다니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자신을 왕으로, 정치적 메시아로 삼으려는 것을 미리 아시고 먼저 제자들을 흩어 버리신 것입니다. 흥분을 잘하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민중들보다 먼저 배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무리들을 설득하여 조용히 해산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를 해산시키신 후 조용히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23절에 “무리들을 보내신 후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서 계시더니”
예수님은 위기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 전 먼저 기도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하셨으며 사람의 숫자와 무리의 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의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쁘고 일이 많을수록 더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쫓길수록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수많은 청중과 수많은 인기와 함성 소리 가운데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떠나고 장소를 떠나서 무릎꿇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흥분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24-25절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먼저 떠난 제자들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건너편에 가기 위해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진 지점에 도달하였을 때 갑자기 돌풍이 일어났습니다. 이 현상을 지중해에 가끔 발생하는 특별한 현상으로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는 강한 바람 때문에 한치 앞을 볼 수 없고 몇 시간 노를 저어야 일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밤 사경은 새벽 네 시에서 여섯 시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초저녁 무렵에 떠났습니다. 그런데 밤 사경에 때까지 고생했다는 것을 보면 이 제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지치고 기진 하였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포자기에 빠진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죽게 된 것입니다. 축복과 고난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침례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병이 낫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그 다음 순간에 죽게 되는 경험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겪는 축복과 고난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모든 것이 평안하고 축복이었는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풍랑과 파도에 덮여 꼼짝 못하는 경우가 인생의 단면입니다.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우리에게 위기와 고난이 닥칠 때 우리의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또 계신다 할지라도 꼭 주무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위기와 고난과 아픔이 나에게 와야 합니까? 왜 내가 이것을 겪어야 합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25-26절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지르거늘” 밤 사경에 폭풍 속에서 절망하고 지치고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캄캄한 때에 주님은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기의 존재를 알고 버릴 때 주님은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고전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반드시 고난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시험을 이길 수 없다면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마 8장의 풍랑 때에는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워서 풍랑을 잠잠케 하였지만 지금은 주무시는 예수님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맙시다. 이제 밤 사경이 되어서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놀랍게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피할 길을 주신 것입니다. 시험을 감당 못할 때에는 피할 길을 주시는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에 쫓겨 잠을 잘 수가 없어 밤 네 시까지 고민하며 고통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밤 사경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사랑입니다. 모두 다 잠자고 쉬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오셔서 불의의 고난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방법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고, 희생의 대가의 여부를 초월하여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또한 주님은 인간의 절망의 때에 정확하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험을 모두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질 않을 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얼마나 주님을 찾으며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이 밤 사경이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의 절망과 패배는 곧 하나님의 소망과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면 하나님은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교만이 꺾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는 물밀 듯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고통과 두려움이 빠져 있을 때 흔히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 혹은 나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제일 가까이 계십니다. 건강한 자식에게는 부모가 멀리 있을지라도 병들어 죽어 가는 자식에게는 부모가 가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이 부모가 옆에 있는 것을 모르는 까닭은 병이 너무 심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 속에, 고난 속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죽어가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움직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