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동인 우리문화 답사회 자료집
- 서해의 절경 변산반도를 찾아서 - (전북 부안 )
차 례 1. 답사 일정표 / 답사지역 지도∙∙∙∙∙∙∙∙∙∙∙∙∙∙∙∙∙∙∙∙∙∙∙∙∙∙∙∙∙∙∙∙∙∙∙∙∙∙∙∙∙∙∙∙∙∙∙∙∙∙∙∙∙∙∙∙∙∙∙∙∙∙∙∙∙∙ 2 2. 전라도 부안현∙∙∙∙∙∙∙∙∙∙∙∙∙∙∙∙∙∙∙∙∙∙∙∙∙∙∙∙∙∙∙∙∙∙∙∙∙∙∙∙∙∙∙∙∙∙∙∙∙∙∙∙∙∙∙∙∙∙∙∙∙∙∙∙∙∙∙∙∙∙∙∙∙∙∙∙∙∙∙∙∙∙∙∙∙∙∙∙∙∙∙ 4 3. 부안군의 유물유적 ∙∙∙∙∙∙∙∙∙∙∙∙∙∙∙∙∙∙∙∙∙∙∙∙∙∙∙∙∙∙∙∙∙∙∙∙∙∙∙∙∙∙∙∙∙∙∙∙∙∙∙∙∙∙∙∙∙∙∙∙∙∙∙∙∙∙∙∙∙∙∙∙∙∙∙∙∙∙∙∙∙∙ 8 4. 내소사∙∙∙∙∙∙∙∙∙∙∙∙∙∙∙∙∙∙∙∙∙∙∙∙∙∙∙∙∙∙∙∙∙∙∙∙∙∙∙∙∙∙∙∙∙∙∙∙∙∙∙∙∙∙∙∙∙∙∙∙∙∙∙∙∙∙∙∙∙∙∙∙∙∙∙∙∙∙∙∙∙∙∙∙∙∙∙∙∙∙∙∙∙∙∙∙∙∙∙∙∙∙·13
5. 개암사……∙∙∙∙∙∙∙∙∙∙∙∙∙∙…∙∙∙∙∙∙∙∙∙∙∙∙∙∙∙∙∙∙∙∙∙∙∙∙∙∙∙∙∙∙∙∙∙∙∙∙∙∙∙∙∙∙∙∙∙∙∙∙∙∙∙∙∙∙∙∙∙∙∙∙∙∙∙∙∙∙∙∙∙∙∙∙∙∙∙∙∙∙19 6. 반계유형원유적지∙∙∙∙∙∙∙∙∙∙∙∙∙∙∙∙∙∙∙∙∙∙∙∙∙∙∙∙∙∙∙∙∙∙∙∙∙∙∙∙∙∙∙∙∙∙∙∙∙∙∙∙∙∙∙∙∙∙∙∙∙∙∙∙∙∙∙∙∙∙∙∙∙∙∙∙∙∙∙∙∙∙∙∙∙22 7. 반계수록∙∙∙∙∙∙∙∙∙∙∙∙∙∙∙∙∙∙∙∙∙∙∙∙∙∙∙∙∙∙∙∙∙∙∙∙∙∙∙∙∙∙∙∙∙∙∙∙∙∙∙∙∙∙∙∙∙∙∙∙∙∙∙∙∙∙∙∙∙∙∙∙∙∙∙∙∙∙∙∙∙∙∙∙∙∙∙∙∙∙∙∙∙∙∙∙∙∙∙∙∙23 8. 유형원선생묘∙∙∙∙∙∙∙∙∙∙∙∙∙∙∙∙∙∙∙∙∙∙∙∙∙∙∙∙∙∙∙∙∙∙∙∙∙∙∙∙∙∙∙∙∙∙∙∙∙∙∙∙∙∙∙∙∙∙∙∙∙∙∙∙∙∙∙∙∙∙∙∙∙∙∙∙∙∙∙∙∙∙∙∙∙∙∙∙∙∙∙∙∙∙25 9. 염전∙∙∙∙∙∙∙∙∙∙∙∙∙∙∙∙∙∙∙∙∙∙∙∙∙∙∙∙∙∙∙∙∙∙∙∙∙∙∙∙∙∙∙∙∙∙∙∙∙∙∙∙∙∙∙∙∙∙∙∙∙∙∙∙∙∙∙∙∙∙∙∙∙∙∙∙∙∙∙∙∙∙∙∙∙∙∙∙∙∙∙∙∙∙∙∙∙∙∙∙∙∙∙∙∙∙∙26 10. 부안 죽막동제사유적∙∙∙∙∙∙∙∙∙∙∙∙∙∙∙∙∙∙∙∙∙∙∙∙∙∙∙∙∙∙∙∙∙∙∙∙∙∙∙∙∙∙∙∙∙∙∙∙∙∙∙∙∙∙∙∙∙∙∙∙∙∙∙∙∙∙∙∙∙∙∙∙∙∙∙∙∙∙∙∙∙28 11.동인우리문화답사회일정표.............................................................................31 운영진 총무 : 오정세 (010-7753-3411)/손진성(019-302-7469) 강사 : 차 민 (011-354-9538) 1. 답사 일정표 / 답사지 지도
07:00 사당역 출발 15:00 반계유형원유적지 10:00 개암사 16:00 곰소항과 염전 11:00 부안군제사유적-수성당 17:00 출발 12:00 중식 20:30 서울도착 13:30 내소사
題邊山蘇來寺(제변산소래사)
정지상(鄭知常)
古徑寂寞縈松根 옛 길은 적막하여 솔뿌리 엉겼는데
天近斗牛聊可捫 하늘이 가까워 북두칠성 만질 수 있네
浮雲流水客到寺 뜬구름 흐르는 물 따라 객이 절에 이르고
紅葉蒼苔僧閉門 붉은 단풍 푸른 이끼 속에 중은 문을 닫았구나
秋風微涼吹落日 가을 바람 다소 차갑게 지는 해에 불고
山月漸白啼淸猿 산 달 점점 맑아오니 잔나비 맑게 운다
奇哉厖眉一老衲 기이하다, 수북한 눈썹의 한 늙은 중이여
長年不夢人閒喧 오랜 세월 인간 세상 꿈꾸지 않았구나
2. 전라도(全羅道) 부안현(扶安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古阜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흥덕현(興德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萬頃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었는데, 신라 때 부령 혹 계발(戒發)이라고도 칭한다. 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보안(保安)을 겸임하였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 보안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부령감무로 겸임하게 하였으며, 신우 때에 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보안을 다시 부령에 합쳤고, 15년에 또 나누었다가 8월에 다시 합쳤으며, 다음해 7월에 또 나누었다가 12월에 두 현을 또 합치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익년(翌年)에 흥덕진(興德鎭)을 파하여 본현에 옮겨서 부안진(扶安鎭)이라고 부르고, 병마사(兵馬使)로써 판사(判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규례대로 고치어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개화ㆍ부령(夫寧)ㆍ계발(戒發)ㆍ보안ㆍ낭주(浪州)ㆍ흔량매ㆍ희안. 【성씨】【부령】 김ㆍ장(張)ㆍ황(黃)ㆍ이(李)ㆍ신(辛), 심(沈). 내성(來姓)이다. 보안 한(韓)ㆍ송(宋)ㆍ황(黃)ㆍ호(扈)ㆍ안(安)ㆍ임(林)ㆍ임(任). 고촌 호(扈). 【풍속】 풍속은 단자(蜑子 중국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와 같다. 이규보의 시에, “습속은 남방 단자와 많이 같으니 현으로 된 것이 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된 줄 어느 누가 믿으랴.” 하였다. 【형승】 변산천부(邊山天府) 이규보의 시에,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불리면서, 긴 재목 잘 뽑아 동량(棟樑) 재목에 대비하네.” 하였다. 강산청승(江山淸勝) 앞 사람의 시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瀛洲)ㆍ봉래(蓬萊)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산천】 변산 보안현에 있다.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인데,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 혹 변산(卞山) 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돌아다니다가 변(邊)으로 되었다 한다. 변한(卞韓)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있고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싸여 있으며,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궁실과 배의 재목은 고려 때부터 모두 여기서 얻어 갔다.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였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았다 한다. ○ 이규보의 기에, “변산은 나라 재목의 부고(府庫 창고)이다.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한 나무 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가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퍼져서, 그 머리와 끝의 둔 곳과 밑 뿌리와 옆구리의 닿은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우강(禺强 신의 이름이다. 《장자(莊子)》에 우강을 얻어 북극(北極)을 세웠다 함.)이 힘써 옮긴 뜻 상상하니, 까마득한 몇 만년 땅의 주축(主軸)을 누르기 위함일세. 성루[譙樓]는 바로 높은 푯말[標]과 맞섰고, 바다는 이내 짙은 안개 걷혀 시원하다. 울창한 좋은 재목 일천 봉우리에 모였고, 소담한 보찰(寶刹 큰절)은 뭇 마귀(魔鬼)들도 알고 있네. 산 가운데 몇 개의 황망한 일은, 춘경(春卿 이규보의 자)의 백 마디 시 끌어 냄일세.” 하였다. 행안산(幸安山)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석불산(石佛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바다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동진(東津) 통진(通津)이라고도 한다. 벽골제(碧骨堤)와 눌제(訥堤)의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된다.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사포(沙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장신포(長信浦)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유포(柳浦)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덕달포(德達浦)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굴포(堀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구도(鳩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위도(蝟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30리이며, 어량(魚梁 살을 매어 고기를 잡는 장치)이 있다. ○ 설문우(薛文遇)가 시어(侍御) 최함일(崔咸一)이 위도로 귀양가는 것을 전송한 시에, “곧은 절개라야 참 오부(烏府 어사대)인데, 변변찮은 내 재주로 치관(豸冠 어사)을 더럽혔네. 수놓은 비단같은 재주야 어찌 같으랴만 배 속에 들어 있는 보배 서로 쏟았었네. 성대(盛代)에서 보탠 것은 비록 없지만, 동료들은 모두 다 높이 보았네. 임금을 착하게 하려는 마음 버리지 못해, 나라 걱정에 두 귀밑털 헛되이 쇠는구나. 간사한 무리들은 장우(張禹) 따위가 많은데, 서로 알아주는 비간(比干) 같은 이는 너무 적다. 이 때에 갈라져서 그대는 가고 나는 머무르니, 어느 곳에서 평안함을 물을 것인가. 시루는 깨어졌는데 누가 애석해 하나. 하늘은 높아도 듣기는 어렵지 않다네. 용천(龍泉)은 도리어 옛 옥터로 돌아갔는데, 위도(蝟島)는 이 새 벼슬이로다. 두 곳에는 외로이 둥근 달 떴는데, 조각배엔 한 낚싯대로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이니, 잘 가서 먹는 것 조심하게나.” 하였다. 계화도(界火島) 현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와 연결된다. 우진암(禹陳巖) 변산 꼭대기에 있다. 바위가 둥글면서 높고 크며 멀리서 보면 눈빛이다. 바위 밑에 3개의 굴이 있는데, 굴마다 중이 살고 있으며, 바위 위는 평탄하여 올라가 바라볼 수 있다. 【토산】 조기[石首魚]ㆍ오징어[鳥賊魚]ㆍ청어ㆍ은어[銀口魚]ㆍ홍어(洪魚)ㆍ준치[眞魚]ㆍ웅어[葦魚]ㆍ붕어[鯽魚]ㆍ숭어[秀魚]ㆍ갈치[刀魚]ㆍ새우ㆍ조개[蛤]ㆍ게[蟹]ㆍ굴[石花]ㆍ송이[松蕈]ㆍ모시[苧]ㆍ죽전(竹箭) 도이곶(都邇串) 및 모든 섬에서 난다. ㆍ사기그릇(磁器). 『신증』 사슴. 【성곽】 읍성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8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2개 있으며, 동쪽 서쪽 남쪽 3면에 모두 성문다락[譙樓]을 세웠다. 『신증』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6천 4백 5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6개 있다. ○ 김종직의 시에, “천길 산봉우리 누관(樓觀)이 기이하여 억지로 쇠약하고 피로한 몸 이끌고 높은 곳에 의지했네. 금을 녹여 낸 듯한 해는 군산도(群山島)에 떨어지고, 흰 것을 묶어 세운 듯한 연기는 벽골피(碧骨陂)에 비꼈어라. 몸이 반 공중에 있으니, 눈 가는 곳이 멀고, 시는 일만 형상 더듬자니 술잔 놓기 더디구나. 능가산은 예로부터 천부(天府 하늘이 마련한 창고)로 불렸는데, 오늘날 쇠잔한 용모 대할 줄 어찌 기약했으랴.” 하였다. 【관방】 금모포영(黔毛浦營)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인. 【봉수】 월고리산 봉수(月古里山烽燧) 현의 서쪽 7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무장(茂長) 소응포산(所應浦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점방산(占方山)에 응한다. 점방산 봉수(占方山烽燧) 현의 서쪽 61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월고리에 응하고 북쪽으로 계화도(界火島)에 응한다. 계화도 봉수 북쪽으로 만경현 길관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곧 성의 남쪽 문루(門樓)인데, 서쪽으로 변산(邊山)을 대하고,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며, 동쪽과 남쪽은 큰 들을 임하였다. ○ 이행(李行)의 시에, “높은 봉우리는 석보(石堡)를 이고 섰고, 상위(象緯 하늘)는 누 가운데 닿았네. 바다 위 돋은 해는 벌겋게 물결 흔들고, 구름에 잠긴 산은 푸른 것이 공중을 찌른다. 옷 가다듬고 세속 먼지 털어버리니, 탈태하여 신선 궁에 오른 듯하네. 해질 녘에 긴 수풀 아래서는, 두 겨드랑이에 신선한 바람 스며든다.” 하였다. ○ 허종(許琮)의 시에, “높은 누 바람불어 흥취가 유유한데, 해 저문 들 밖에는 말 한 필 오는구나. 아득하게 외로이 뜬 배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대에게 부탁하여 같이 타고 봉래산 찾아가련다.” 하였다. 청원루(淸遠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현감 성수겸(成守謙)이 세웠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소쇄(潚洒 산뜻하고 깨끗한 모양)함이 참으로 팔영루(八詠樓)와 같은데, 순식간에 지어진 화려한 누각 성후(成侯 성수겸을 말한다)에게 하례한다. 외딴 마을 조석(潮汐)은 시 읊는 소리에 응하고, 먼 산의 구름 안개 바라보는 속에 걷혀진다. 공무를 벗어나서 마음 놓고 술잔 잡는데, 무더위 힘 없어지니 어느덧 가을이네. 돌아가기 허락 받은 병든 손이 맑은 흥에 취하여, 바다 머리 장기(瘴氣)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였다. 김영(金瑛)의 시에, “바다 산 1천 리에 웅장한 누 있는데, 태수(太守)의 재명(才名), 곽세후(郭細侯)이네. 3월이라 들꽃은 혼연(渾然)히 떨어지려 하는데, 한 주렴의 봄 안개는 전부 걷히지 않는구나. 작은 연꽃 화장하고 처음으로 물에 뜨고, 푸른 대엔 우수수 유달리 가을 기운 모였어라. 담담한 아지랑이, 방초(芳草) 우거진 물가에서 미인(美人)들은 공연히 바라보다 몇 번이나 머리 긁었나.” 하였다. 망해대(望海臺) 변산에 있다.『신증』 개풍루(凱風樓) 김종직의 시에, “개풍루 위 마음대로 올라와 보니, 발해(渤澥 서해) 동쪽 빈 터는 지형 더욱 깊숙하네. 낚싯대 두 길쯤 솟은 해는 불그스레 은은하고, 천 두락 맑은 못은 푸른 것이 침침하다. 거민(居民)들은 고기잡이의 이익을 다투어 찾는데, 게으른 손은 상궐(象闕 하늘같은 대궐)에만 마음이 달려 있네. 당발(棠發 감사를 말함) 2년에 무슨 일 하였나. 난간에 의지하여 그런대로 세상 마음 씼었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부흥역(扶興驛)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동진원(東津院) 동진 언덕에 있다. 수세원(手洗院)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금설원(金設院) 현의 남쪽에 있다. 【불우】 소래사(蘇來寺)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것인데, 크고 작은 두 소래사가 있다. 【교량】 동진교(東津橋) 동진 위에 있다. 신우(辛禑) 초년에 왜선(倭船)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배를 대어 적현(狄峴)을 넘어서 부령현(扶寧縣)을 노략질하고, 동진교를 헐어서 우리 군사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가 변안열(邊安烈) 등과 더불어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군사를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마침내 크게 승리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현의 동쪽에 있는데, 둘레가 5백 척이고, 안에 샘이 6개 있다. 보안폐현(保安廢縣)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고촌향(鼓村鄕)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신덕소(申德所)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신증』【명환】본조 소효식(蘇效軾) 【인물】고려 김구(金坵) 희종조(熙宗朝)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문장이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매양 표문(表文)을 짓는데, 일을 따라 문장을 꾸민 것이 모두 이치에 맞았다. 원 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악(王鶚)이 매양 표사(表辭)를 볼 때마다 반드시 잘 했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얼굴 보지 못함을 한하였다.『신증』본조 성중엄(成重淹)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가 되었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연산조(燕山朝)에 사화(史禍)를 만나 귀양갔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지금의 임금 초년에 부제학을 추증하였다. 『신증』【효자】본조 송세정(宋世貞)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빨아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묘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더니,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정문을 세웠다. 이성간(李成幹) 젊었을 때 어머니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빠니 병이 곧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이 있었는데, 몇 년 동안 밤낮으로 시약(侍藥)하고, 옷을 벗지 않았다.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 보았고, 죽자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문랑(文郞)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앓는데,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최필성(崔弼成) 어머니가 유종[乳癰]을 앓는데 입으로 빠니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백약(百藥)이 무효하고, 의사의 말은, “박쥐가 있으면 고칠 수 있다.” 하였다. 때는 추운 겨울이라 구하여도 얻지 못하여 울면서 하늘에 호소하니, 박쥐가 저절로 나오므로 잡아 약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과연 나았다. 후에 또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보았고, 죽자 매우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상으로 벼슬을 내렸다.【열녀】본조 김씨(金氏) 일찍 남편을 여의었는데, 부모들이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김씨는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물에 빠져 죽으려 하니, 부모들이 그만 두었다. 김씨는 한평생 흰 옷을 입고 제사를 받들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동도(東道) 끝이 5리. 서도(西道) 끝이 10리. 남상(南上) 끝이 10리. 남하(南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상동(上東) 끝이 10리. 하동(下東)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상서(上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하서(下西)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일도(一道) 북쪽으로 끝이 10리. 이도(二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염소(鹽所)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 소산(所山)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건광(乾光)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입상(立上)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입하(立下)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좌산내(左山內)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70리. 우산내(右山內)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60리. ○ 고촌향(鼓村鄕)은 남쪽으로 27리이며, 신덕소는 동쪽으로 5리이다. 【성지】 우금성(禹金城) 우금암(禹金巖) 기슭에 있다. 둘레는 10리인데, 묘향사(妙香寺)가 그 안에 있다. 점모포진(點毛浦鎭)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성지(城池)는 지금은 폐했고 창(倉)이 둘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인.혁폐(革廢) 격포진(格浦鎭) 서쪽에 있으며 변산(邊山) 서쪽 기슭 끝 바닷가에 있다. 조수가 차면 호수를 이루고 썰물 때는 갯바닥이 된다. 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숙종 4년 성을 쌓은 후에 감영(監營)에 속하게 하고, 제방(堤坊)을 쌓고 물을 막았는데, 헌종 9년에 폐했다. 옛 군영(軍營) 장신포(長信浦) 남쪽에 있다. 국초(國初)에 부안현에다 진을 두었을 때에 영(營)을 둔 곳이다. 【창고】 창(倉) 5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북쪽으로 10리. 해창(海倉) 서쪽으로 30리. 사창(社倉) 남쪽으로 3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동쪽으로 15리. 김제와 전주로 통한다. 【교량】 대교(大橋) 서쪽으로 10리. 중교(中橋) 위와 같다. 장교(長橋) 남쪽으로 10리이며 동진 상류이다. 【토산】 대[竹]ㆍ옻[漆]ㆍ뽕[桑]ㆍ감ㆍ호두ㆍ잣. ≪참고문헌≫ 신동국여지승람 제34권
3. 부안군의 유물 유적 선사시대유적으로는 변산면의 대항리패총(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과 하서면 석상리의 부안구암리지석묘군(사적 제103호)을 비롯해 보안면 영전리, 상서면 감교리, 하서면 백련리 등지에 고인돌군이 있으며, 보안면 상입석리에는 보안입석(전라북도 민속자료 제6호)이 있다. 성곽으로는 조선 태종 때 축성된 부안진성(扶安鎭城)과 상서면 감교리의 우금산성(禹金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등이 남아 있다. 성지로는 백산면 용계리의 백산성지(白山城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1호), 주산면의 사산리토성지·소산리산성, 고려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계화면 창북리의 염창산성(廉倉山城)·수문산성, 동진면 당상리의 구지산토성지, 행안면의 역리산성 등 13개의 산성이 있다. 이 군은 예부터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안포·검모포진(黔毛浦鎭)·격포진(格浦鎭)·여섭포(勵涉浦)·위도진(蝟島鎭) 등 진과 포가 많다. 또, 북쪽의 만경지역과 남쪽의 점방산(占方山)을 연결하는 계화도봉수대·월고리봉수대·점방산봉수대 등도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진서면 석포리에 내소사(來蘇寺, 옛이름 蘇來寺)를 비롯해 692년(신라 신문왕 12) 부설선사(浮雪禪師)가 창건한 월명암(月明庵), 상서면 감교리에 개암사(開巖寺)·개암사대웅전(보물 제292호) 등이 현존한다. 절터로는 변산면 중계리의 부안실상사지(扶安實相寺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와 등운사지(登雲寺址)·영은사지(靈隱寺址)·백운사지(白雲寺址) 등이 있다. 특히, 내소사일원(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은 경관이 빼어나며, 경내에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동종인 내소사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이 있다. 그 밖에 상서면에 있는 청림리석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과 내소사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내소사설선당과 요사(來蘇寺說禪堂─寮舍,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등이 유명하다. 유교문화재로는 부안읍 서외리에 부안향교대성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서원으로는 부안읍 연곡리의 도동서원(道東書院)과 옹중리의 옹정서원(甕井書院), 상서면 가오리의 동림서원(東林書院)과 감교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보안면 영전리의 유천서원(柳川書院)이 있고, 사우로는 부안읍의 노휴재(老休齋), 계화면의 계화재(繼華齋), 하서면의 효충사(效忠祠)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위도면 진리에는 위도관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가 있다. 그리고 하서면 청호리에 고희외문중유물(高曦外門中遺物, 보물 제739호), 보안면 우동리에 부안김씨종중고문서(扶安金氏宗中古文書, 보물 제 900호)가 보관되어 있고, 보안면 남포리에는 채홍국 등이 중심이 되어 정유이창동맹을 맺고 왜병을 맞아 싸운 사실을 기리는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가 있다. 또한, 하서면 백련리에 왜몰치(倭歿峙), 보안면 우동리에 반계선생유적지(磻溪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계화면 계화리에 간재선생유적지(艮齋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하서면 청호리에 고홍건신도비(高弘建神道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부안읍 봉덕리에 이매창묘(李梅窓墓,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등의 유적이 있다. 고가옥으로는 줄포면 줄포리에 부안 김상만가옥(金相万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0호)이 있고, 도요지로는 고려백자의 요지로 알려진 보안면의 부안 유천리 도요지(사적 제69호)와 주산면의 사산리 와요지(전라북도기념물 제40호), 소산면의 백자요지, 진서면의 부안 진서리 도요지(사적 제70호), 보안면의 우동리 분청사기 도요지, 상서면의 감교리 분청사기 도요지 등이 있다. 그 밖에 부안읍 서외리의 부안 서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8호), 동중리의 부안 동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9호)·남문안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8호), 내요리의 돌모산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 계화면 궁안리의 쌍조석간(雙鳥石竿,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7호), 백산면의 죽림리석장승(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0호), 변산면 격포리에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8호) 등 민간신앙과 관련된 문화재가 있다. 또, 변산면 격포리의 채석강(彩石江,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적벽강(전라북도 기념물 제29호) 등지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천연기념물은 부안도청리의 호랑가시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2호), 부안격포리의 후박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3호), 부안중계리의 꽝꽝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4호)이 변산면에 집중되어 있고, 이 군에서만 볼 수 있는 변란(邊蘭) 등이 자생하고 있다. 4. 내소사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무왕 34) 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靑旻)이 대웅보전을 지어 중건하였고, 1604년(인조 18) 청영(淸映)이 설선당과 요사를 지었다. 1902년 관해(觀海)가 수축한 뒤 1983년 일주문을 세우고 198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으며, 1986년 천왕문을 짓고 설선당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1987년 봉래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8년 요사인 진화사(眞華舍)를 건립하였다. 1995년 수각(水閣)과 종각을 짓고 범종을 조성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하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현존하는 당우 및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괘불 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요사채, 설선당(說禪堂)·보종각(寶鐘閣)·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 1)에 완공되었는데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 중기의 대표작이다. 못 하나 쓰지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법당 내부의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등의 그림도 일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 하고,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그때의 일화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동종은 1222년(고종 9) 변산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든 종인데, 1850년 땅속에서 발굴된 뒤 이 절로 옮겨졌다. 그리고 법화경절본사경은 조선 초기에 이씨 부인이 망부(亡夫)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한 글자를 쓰고 한 번 절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필사한 것이다.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설선당은 인조 때 승려의 수학장소로 건축되었고, 봉래루는 1414년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하였으며, 현재 산문(山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입구의 지장암(地藏庵)과 절 후방 1.5㎞ 지점에 청련암(靑蓮庵J)이 있다. 절 일원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 上(文化財管理局, 1977), 韓國의 名山大刹(國際佛敎徒協議會, 1982), 전통사찰총서 9(사찰문화연구원, 1997).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무왕 34) 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靑旻)이 대웅보전을 지어 중건하였고, 1604년(인조 18) 청영(淸映)이 설선당과 요사를 지었다. 1902년 관해(觀海)가 수축한 뒤 1983년 일주문을 세우고 198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으며, 1986년 천왕문을 짓고 설선당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1987년 봉래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8년 요사인 진화사(眞華舍)를 건립하였다. 1995년 수각(水閣)과 종각을 짓고 범종을 조성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하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현존하는 당우 및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괘불 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요사채, 설선당(說禪堂)·보종각(寶鐘閣)·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 1)에 완공되었는데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 중기의 대표작이다. 못 하나 쓰지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법당 내부의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등의 그림도 일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 하고,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그때의 일화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동종은 1222년(고종 9) 변산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든 종인데, 1850년 땅속에서 발굴된 뒤 이 절로 옮겨졌다. 그리고 법화경절본사경은 조선 초기에 이씨 부인이 망부(亡夫)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한 글자를 쓰고 한 번 절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필사한 것이다.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설선당은 인조 때 승려의 수학장소로 건축되었고, 봉래루는 1414년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하였으며, 현재 산문(山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입구의 지장암(地藏庵)과 절 후방 1.5㎞ 지점에 청련암(靑蓮庵)이 있다. 절 일원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 上(文化財管理局, 1977), 韓國의 名山大刹(國際佛敎徒協議會, 1982), 전통사찰총서 9(사찰문화연구원, 1997). 1) 내소사 대웅보전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291호.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圓柱〕을 세웠으며 기둥의 밑부분은 그랭이수법을 썼음이 뚜렷하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과 내5출목(內五出目)으로서 기둥 위에는 물론 주간(柱間)에도 공간포(空間包)를 놓은 다포계 양식이다. 주두(柱頭 : 대접받침)는 굽면이 사면(斜面)으로 끊기고 굽받침이 없으며 소첨차(小首遮)나 대첨차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조각되었다. 초제공(初諸工)에서 3제공까지의 살미첨차〔山彌首遮〕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4제공은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내부의 공포(貢包)는 살미첨차가 모두 판형(板形)으로 되어 그 끝에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장식하고 있다. 가구(架構)는 대들보 앞면에서는 평주(平柱)에 걸고 뒷면에서는 내고주(內高柱)에 걸었으며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게 하였는데 종보부터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또한, 양측면의 평주에서는 충량(衝樑 : 대들보의 직각방향으로 얹힌 짧은 대들보)을 내어 대들보 위에 걸었는데, 보머리에는 용이 목어(木魚)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불단 뒤에는 후불벽(後佛壁)이 있으며, 그 좌우의 벽기둥은 대들보에 고정되어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불단 위에는 닫집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건물의 정면 3칸은 모두 정교하게 조각한 소슬빗꽃살창호를 달았고, 측면에는 협문(夾門)을 각각 한짝씩 달았으며 나머지는 벽으로 처리하였다. ≪참고문헌≫ 韓國建築樣式論(鄭寅國, 一志社, 1980), 韓國建築美(朱南哲, 一志社, 1983), 文化財大觀 3-寶物 1-(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2) 내소사 고려동종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에 있는 고려 후기의 종. 1222년(고종 9) 작. 높이 103㎝, 입지름 67㎝. 보물 제277호. 본래 변산에 있던 청림사(靑林寺)의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청림사가 폐사되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856년(철종 7)에 현위치로 옮겼다. 종구(鐘口)가 종신(鐘身)보다 약간 넓고, 정상에는 탑산사종(塔山寺鐘)의 용과 비슷한 용뉴(龍瞿)와 구슬이 붙어 있는 용통(甬筒)이 있다. 천판(天板)과 상대(上帶)가 접하는 계연상(界緣上)에는 이중으로 된 여의두문(如意頭文)의 입상화문장식(立狀花文裝飾)이 있고, 상대와 하대의 문양은 모란이 붙은 당초문대(唐草文帶)가 양주(陽鑄 : 표면보다 도드라지게 나타내는 일)되어 있다. 외곽에도 연주문대(連珠文帶)에 당초문이 양주되어 있고, 중판연화(重瓣蓮花)로 된 당좌(撞座)가 유곽 밑의 네 곳에 배치되어 있다. 종신의 중간에는 활짝 핀 연화가 받치고 있는 구름 위에 삼존상이 네 곳에 양주되어 있다. 본존상은 좌상이고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입상인데, 모두 두광(頭光)이 있고 머리 위에는 수식(垂飾)이 옆으로 나부끼는 보개(寶蓋)가 공중에 떠 있다. 용통에 붙어 있는 구슬과 입화장식에서 고려시대 종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韓國美術全集-金屬工藝-(秦弘燮 編, 同和出版公社, 1980), 韓國鐘硏究(廉永夏,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3)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의 내소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괘불탱. 1700년(숙종 26) 작. 삼베바탕에 채색. 세로 9.95m, 가로 9.13m 보물 제1268호. 화원(畵員) 가선대부(嘉善大夫) 천신(天信) 외 5명의 승려가 그렸다. 당시 승려들에게 관작(官爵)의 품수가 남발되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종2품에 상당하는 가선을 제수받은 천신의 기량은 당대 최고의 불화승(佛畵僧)임을 알려주고 있다. 천신 등이 제작한 불화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작품은 경상남도 쌍계사영산회후불탱(1687년) 및 전라남도 여천 흥국사영산회후불탱(1693년, 보물 제578호)과 의겸(義謙)이 노화승 천신을 모시고 조성한 전라북도 안국사괘불탱(1728년, 보물 제1267호) 등을 들 수 있다. 천신은 전라도와 경상남도 등지에서 당대의 걸작품들을 제작했으며 그 특징은 불·보살상의 얼굴과 머리모양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즉, 둥근 얼굴에 터질듯한 양 볼은 홍조를 띄고 있으며 반달형의 눈썹과 반개(半開)한 눈, 작은 입의 천진한 얼굴은 천신 만이 그릴 수 있는 독보적인 얼굴 표정이라고 하겠다. 이와 유사한 배치구도의 개암사괘불탱(1749년)에는 ‘영산괘불탱’의 명칭이 있고 각 존명은 이 내소사 괘불탱에 밝혀져 있다. 영산교주석가모니불(靈山敎主釋迦牟尼佛) 입상을 중심으로 사대보살(四大菩薩) 입상과 두 불상이 배치된 석가칠존(釋迦七尊) 형식이다. 두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걸친 석가불은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복부에 두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다. 여의(如意)를 든 문수대보살(文殊大菩薩)과 보현대보살(普賢大菩薩)은 측면 전신상이며, 보관(寶冠)에 각기 화불(化佛)과 정병을 모신 관음대보살(觀音大菩薩)과 세지대보살(勢至大菩薩)은 손에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淨甁)과 경책(經冊)을 들었다. 석가불의 두광(頭光) 좌·우에 배열된 불상은 증청묘법다보여래불(證聽妙法多寶如來佛)과 극락도사아미타여래(極樂導師阿彌陀如來)이다. 원형 두광과 거신광배를 지닌 정면 석가불 입상 좌우로 측면향의 권속이 적절한 크기로 배치되었으며, 법의의 원문(圓文)과 가로와 세로로 교차하는 줄무늬 안의 화문(花文) 등 옷문양에 금채(金彩)가 집중되고 있다. 머리는 청색이며 투명한 흑사(黑絲)와 같은 두광(頭光)을 지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제외하곤 녹색 두광을 갖추고 있다. 홍색·녹색·하늘색·흰색·황색의 오방색(五方色)사이에 부드러운 중간색이 혼용되어 화면이 가볍고 밝다. 상단에 마멸 및 가채(加彩)의 흔적이 있는 이 영산회괘불탱은 석가삼존불은 정교한 반면 권속은 대범하게 처리하여 석가불을 강조하고 있다. 둥글게 처리된 형태의 윤곽선이나 삼곡(三曲)자세의 보살상 및 화려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채색 수법은 천신 이후의 대가로 알려진 의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의겸은 이 내소사 괘불탱의 기본 구성을 따르면서 불, 보살의 크기와 배치를 변화시킨 도상을 제작한 바, 경상남도 청곡사(1722년), 운흥사(1730년), 개암사 괘불탱(1749년) 및 전라북도 안국사 괘불탱(1728년), 전라남도 다보사 괘불탱(1745년) 등이다. 《참고문헌》 動産文化財指定報告書 96-97 指定篇(文化財管理局, 1998). 5. 개암사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절. 〔유래 및 연혁〕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4년(무왕 35)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676년(문무왕 16)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이르러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 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1276년(충렬왕 2) 원감국사(圓鑑國師)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 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4년(태종 14) 폐허가 된 것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그 뒤, 1636년(인조 14) 계호(戒浩)가, 1658년 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 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년 승담(勝潭)이 중수하였다. 1913년 화은(華隱)이 선당(禪堂)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해체 복원하였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였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인등전·응향각·응진전·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이다. 예전의 황금전이 바로 지금의 대웅보전이다. 이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또한, 이 바위를 중심으로 한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유민들이 왕자 부여 풍(扶餘淵)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유물로는 1689년(숙종 5)에 조성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인 동종(銅鐘)과 〈중건사적기〉가 있다.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 下(文化財管理局, 1977), 韓國의 名山大刹(國際佛敎徒協議會, 1982), 전통사찰총서 9(사찰문화연구원, 1997). 1) 개암사 대웅전(開巖寺大雄殿)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양식의 건물. 보물 제292호. 장대석 허튼층쌓기의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건물에 비하여 상당히 굵은 민흘림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의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다시 평방(平枋)을 놓고 공포를 짜올렸는데, 어간(御間 : 건물의 중앙칸)에는 3구(三具), 양측 칸에는 2구씩의 공간포를 올린 다포양식이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으로 초제공·이제공·삼제공 모두에 놓이는 살미첨차〔山彌首遮〕의 끝은 섬약한 앙서〔仰舌〕로 되어 있다. 이 전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주두(柱頭)로서, 다포식주두들이 굽면이 사면으로 끊기고 굽받침이 없는 것과는 달리, 주두 밑면을 둥그스름하게 다듬고, 쇠서가 놓이는 자리와 양측 윗부분에 연꽃모양을 새겼다. 또다른 특징은 양측 귀공포와 측면공포의 소첨차·대첨차들이 모두 교두형(翹頭形 : 활 또는 원호형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되어 있으나 어간과 변간(邊間)의 공포첨차들은 모두 밑면을 W자형으로 조각하여 정면의 위계성을 나타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면공포의 W자형 조각이 귀공포의 첨차에서 급작스럽게 교두형으로 바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꽃모양을 새긴 주두들은 어간과 변간의 제공이 놓이는 자리의 상면에 놓고, 귀공포 바로 앞의 공포에서는 제공이 놓이는 자리에만 놓아 귀공포에서의 굽면이 사면으로 끊긴 주두에 단계적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어간 두 기둥선과 맞추어 두 개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여기에 불벽(佛壁)을 만들었다. 천장은 종보 위부터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불단 위에는 정자각(丁字閣) 형태로 된 화려한 닫집을 따로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韓國建築美(朱南哲, 一志社, 1983), 文化財大觀 3-寶物 1-(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2) 우금산성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삼국 시대의 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지정면적 198,875㎡, 둘레 3,960m. 이 성은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떨어진 개암사(開巖寺) 뒷산에 있는데, 현재 수구(水口) 등 시설과 석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변의 길이는 수구에서 동측선이 563m, 울금바위까지의 서측선은 675m, 계 1,238m에 이르며, 동변은 1,010m, 북변은 830m, 서변은 838m로서, 전체의 평면은 북변이 좁고 남변이 넓은 모양이다. 성벽은 약간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그대로 쓰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부여 풍(扶餘淵)을 받들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주류성(周留城)에 비정됨으로써 그러한 사실의 줄거리가 후세에 와전되기도 하였다. 근세에는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이 만났다는 위금암이 우금단이 되고, 소래사가 내소사로 글자가 바뀐 결과를 가져왔으나, 이 곳은 복신(福信) 등의 백제부흥군이 최후까지 충혈을 뿌린 유적지이다. 본래 위금산성(位金山城)이라는 기록은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처음 보이는바 이에 의하면 신라의 장군 위금이라는 사람이 성을 쌓고 적을 막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우진(禹陳)이라는 고성은 삼한시대에 우(禹)·진(陳) 두 장군이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東國李相國集, 東國輿地勝覽, 文獻備考,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硏究(全榮來, 扶安郡, 1976). 6. 반계유형원유적지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실학자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거주하며 연구생활에 몰두하던 유적지. 유형원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덕부(德夫)인데 1622년(광해군 14)에 서울 정릉(貞陵)에서 태어났다. 1653년(효종 4)에 부안현 남쪽 기슭 우반동으로 옮기고 이곳의 지명을 따 자신의 아호를 반계라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이상향을 건설코자 연구하고, 또 몸소 연구한 것을 실생활에 실천해 보았다. 그의 사상과 이념, 이상국가 건설을 위한 구상 등은 우리나라 실학사에 길이 남을 ≪반계수록 磻溪隧錄≫ 26권에 그대로 실려있다. ≪반계수록≫은 1770년(영조 46) 왕의 특명에 의해 간행되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조선 실학파(實學派)의 조종(祖宗)을 이루었는데, 특히 조선의 실학이 이곳 전라도에서 싹트게 된 것도 바로 반계가 이곳에서 많은 후진과 주민 등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는 그가 거주하던 건물은 없고 다만 기와편과 초석만 남아 있다. 1974년 이곳 군민과 정부의 지원으로 ‘반계유형원선생유적비(磻溪柳馨遠先生遺蹟碑)가 그의 유허지에 건립되었다. 1974년 9월 27일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전국문화유적총람2(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7. 반계수록 조선 중기의 학자 유형원(柳馨遠)이 통치 제도에 관한 개혁안을 중심으로 저술한 책. 26권 13책. 목판본. 반계는 저자의 호이며, 수록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 둔 것이라는 뜻이나 이는 저자의 겸사이고 체계가 정연한 저술이다. 이 책은 저자가 관직의 생활을 단념하고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칩거해 52세까지 22년간에 걸쳐 연구한 것이다. 실록 등의 기록에 ≪반계수록≫을 13권이라고 한 것은 그의 개혁안만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적 고찰을 한 고설(攷說)을 제외한 것이다. 경상도관찰사로서 출판의 일을 맡았던 이미(李掉)가 1770년(영조 46)에 쓴 서문과 후학 오광운(吳光運)이 1737년에 쓴 서문이 붙여 있다. 책의 말미에는 저자 자신이 쓴 ‘서수록후(書隨錄後)’가 실려 있다. 본편은 자신의 개혁안과 그에 대한 중국과 우리 나라 고려·조선의 법제에 대한 내용을 다룬 고설이 각각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본편의 편차는 권1·2는 전제(田制), 권3·4는 전제후록(田制後錄), 권5·6은 전제고설(田制攷說), 권7·8은 전제후록고설, 권9·10은 교선지제(敎選之制), 권11·12는 교선고설(敎選攷說), 권13은 임관지제(任官之制), 권14는 임관고설로 구성되었다. 이어 권15·16은 직관지제(職官之制), 권17·18은 직관고설(職官攷說), 권19는 녹제(祿制), 권20은 녹제고설, 권21은 병제(兵制), 권22는 병제후록, 권23은 병제고설, 권24는 병제후록고설, 권25·26은 속편(續篇) 보유편의 군현제로 되어 있다. ≪반계수록≫에 담긴 내용은 현실 법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안정된 국민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지역적인 불균등과 신분적인 특권을 해소해 모든 사람이 자기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사회의 실현에 목표를 둔 대안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주체를 왕의 결단에 둠으로써 당시 권력구조상 실현될 수 없는 것이고 왕조가 새로이 개창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이상안(理想案)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개혁안을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즉 관료에게는 토지의 지급에서도 차등을 두었고, 공직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군역을 면제하는 조처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학자가 일생을 바쳐 연구하는 경향은 후세학자에게 영향을 주어 실학(實學)이란 학풍을 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개혁안은 당시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당시까지의 동양인이 생각했던 합리적인 제도를 폭넓게 수렴해 이상적이면서도 행정에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체계적인 것이었다. 당시 관료들이 조종(祖宗)의 법이라 하여 고쳐서는 안 된다는 수구사상(守舊思想)에 대해 체계적인 개혁을 제시한 점에서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이전에 개혁을 주장한 자들의 부분적인 개혁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1678년(숙종 4) 저자의 친구였던 참봉 배상유(裵尙踰), 1694년 유생 노사효(盧思孝) 등이 개혁안의 실시를 촉구하라고 상소하였다. 1741년에는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영조에게 이 책을 추천하였고, 좌참찬 권적(權淞)이 세자에게 이 책의 간행을 청하였다. 또한 홍계희(洪啓禧)의 청으로 예문관에서 3부를 찍어 사고(史庫)에 보관하고, 신하에게도 반포가 허락되었으며 경상감영에서 출판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동국문헌비고≫에는 이 책의 서명이 법전으로 실렸다. 한편 후학으로는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의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개화기에는 근대적인 한국 사회사상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1770년 경상감영에서 26권 13책이 목판으로 인쇄되었고, 군현제가수록보유편으로 1783년에 경상감영에서 다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고서본은 40여 질이 현전하고 있다. 1954년에 동국문화사에서 영인 되었고 이 영인본에 부록 자료를 추가해 1974년에 경인문화사에서 다시 영인되었다. 한장경의 번역본이 충남대학교에서 4책으로 출판되었고(1962∼1967) 북한사회과학원에서도 완역이 나왔다. ≪참고문헌≫ 磻溪隨錄(千寬宇, 韓國의 名著, 玄岩社, 1969), 磻溪隨錄解題(鄭求福, 景仁文化社, 1974), 磻溪柳馨遠硏究-實學發生에서 본 李朝社會의 一斷面-(千寬宇, 歷史學報 2·3, 1952·1953), 磻溪柳馨遠硏究疑補(千寬宇, 歷史學報 10, 1958), 磻溪柳馨遠의 經濟思想(宋柱永, 西江大學校論文集, 1963), 磻溪柳馨遠의 社會改革思想(鄭求福, 歷史學報 45, 1970), 磻溪柳馨遠의 肯定的 貨幣論(元裕漢, 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 柳馨遠의 階層觀念에 대한 社會學的考察(金彩潤, 公三閔丙壹博士華甲紀念論叢, 1973), 柳馨遠의 官制改革論의 現代的照明-京官職을 中心으로-(宋復, 韓國政治學會報, 1982), 磻溪柳馨遠의 郡縣制論(金武珍, 韓國史硏究 49, 1985), 磻溪柳馨遠의 政治思想-磻溪隨錄을 中心으로-(윤혜성, 梨花女子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86), 晩學堂 裵尙瑜 硏究-磻溪 및 葛菴과의 關係를 中心으로-(李樹健, 嶠南史學 5, 1990), 柳馨遠의 變法論과 實利論(金駿錫, 東方學報 75, 1992).
8. 유형원선생묘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실학자 유형원의 유택. 경기도 기념물 제31호. 정배산(鼎排山) 남쪽 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 뒤로 근래에 묘역을 단장하며 세운 반원형의 둥근 담이 둘러져 있다. 이 묘역의 후방에는 부친인 유흠(柳欽)과 어머니 이씨를 합장한 묘역이 있다. 봉분의 오른 쪽으로 묘비가 있으며 정면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놓여 있다. 장대석(長臺石)으로 계절(階節 :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을 만들고 아래 단에 좌우로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묘비는 1768년(영조 4)에 세워졌는데 판중추부사를 지낸 홍계희(洪啓禧)가 비문을 짓고 썼다. ≪참고문헌≫ 京畿文化財大觀(京畿道, 1990), 龍仁郡誌(龍仁郡, 1989). 9. 염전(鹽田)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바닷물을 농축시키는 자연 증발지. 염전은 간석지에 논처럼 무수히 구획된 공간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도입하고, 이를 햇볕에 쬐어 증발시키기에 필요한 염(소금) 제조 공간을 가리킨다. 인간은 염전 개발을 통하여 필요한 염을 얻고 있고, 염 제조를 위한 산업을 발달시키고 있다. 염에는 암염(岩鹽)과 해염이 있는데, 해염은 염전에서 제조될 때가 많다. 그 중에서 천일염전은 널리 이용되고 있는데, 이는 곧 해수·태양열·풍력 등의 자연력을 이용하여 염을 제조하기 위한 염전이다. 해수 내지 염전에서의 함수 등의 용액은 용매(溶媒)인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용질인 염만을 잘 잔류시키는 이른바 증발법이 중요시되어 왔다. 이 증발법은 태양열을 이용하는 자연증발법과 전오법으로 구분되어 왔다. 천일염전은 제방·저수지·염전내부·염퇴적장·도로 등으로 구성된다. 지형이 평탄한 간석지가 필요하고, 하천에 인접되지 않으며 산지가 없어 통풍 상태가 좋아야 한다. 기후는 비교적 높은 기온과 적은 강수량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염전 적지로서의 조건은 비교적 강수량이 적고 강수 일수도 적으며, 증발량이 많고 일사(日射)가 강할 뿐만 아니라 조차(潮差)가 심한 것, 점토와 사질의 분포와 넓은 간석지의 발달 등이 중요시되므로, 염전은 축조상 유리한 자연조건을 지닌 곳에 입지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황해안은 대체로 염전 축조상의 적지이다. 천일염전에 의한 천일제염법은 해수를 염전 증발지에 도입시키고, 태양력·풍력 등의 자연력에 의하여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포화함수에서 침전되는 결정체를 얻는 제염법이다. 이것은 다른 제염방법과 비교하였을 때 제염 과정에서는 연료의 불필요, 풍부한 원료 이용, 적은 노동력 이용 등이 장점이며, 저지식(低地式)에서는 동력의 불필요, 해수 중의 함유 염류의 농도별 분류에 의한 채취 가능, 시설의 자연적 이용과 영구성 등이 장점이다. 그러나 저농도의 해수 이용 , 거대한 시설 자금의 소요, 국한된 염전 적지, 시설상 넓은 면적의 소요, 제염에 있어서 기상 조건에의 의존, 해충의 번식 등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또, 제염 작업 기간은 해빙기(2월 중순)에 시작되어 결빙기에 종료된다. 우리 나라에서 천일염의 생산기는 4∼10월이고,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인 5∼6월 사이에 연간 생산량의 약 60%가 생산된다. 또, 채염일수는 135∼150일이다. 염의 성수기는 김장용과 간장용으로 수요가 많은 초겨울(11∼12월)과 초봄 (2∼3월)인데, 생산기와 성수기가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특히 영세 제염업자에게는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되고 있다. [종 류] 증발법은 자연증발법과 전오법으로 나누어지고, 전자에는 재래식 염전(입빈식 염전·양빈식 염전)에 의한 제염 방법과 천일염전에 의한 제염 방법, 기타 제염 방법이 있다. 후자는 직화열·증기열·온천열 등을 이용하는 제염 방법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자연증발법에 의한 염전의 개발은 자연적 발달을 그대로 반영해왔다. 그리하여 천일염전 적지로서 황해안에 산재되었던 염전의 총 면적은 한때 1만 정보에 이르렀고, 연간 50만 톤의 천일염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鹽業要覽(專賣廳鹽蔘局, 1955), 鹽白書(商工部, 1964), 鹽業現況과 當面한 緊急對策(大韓鹽業組合, 1978), 新興の朝鮮(朝鮮總督府, 1929), 朝鮮物産案內(朝鮮及滿洲社, 1938), 朝鮮の經濟事情(朝鮮總督府, 1938), 우리 나라 製鹽業의 展開過程 備考(靑坡盧道陽博士 古稀記念文集, 明知大學出版部, 1979), 우리 나라의 鹽業實態調査最終報告書(延世大學校商經大學附設 産業經營硏究所, 1979). 10. 부안 죽막동제사유적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에 있는 삼한시대에서 조선 후기에 걸친 시기의 제사 유적지. 국립전주박물관이 전라북도 서해안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1992년에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제사 유적으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입지 및 주변환경〕 유적은 해안 절벽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 곳 평탄면에 3세기 후반부터 조선시대에 해당되는 다양한 유물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 일대는 바다와 바로 접해 있는 해발 22m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낭떠러지 위로 주변보다 높다. 따라서 직선거리 20km 내의 서해상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 상왕등도(上旺登島), 위도(蝟島), 식도(食島), 비안도(飛雁島) 등의 섬들과 먼 바다까지도 바라보기에 유리한 지점이다. 유적 바로 북쪽에는 육지로 10m 정도 만입(彎入)해 들어온 해식동굴(海蝕洞窟)이 있다. 그 주변으로도 역시 해식동굴이 많이 발달해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근처를 항해하던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곳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적 주변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연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조류가 급한데다가 주변에 섬들이 많아서 조류의 흐름에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물의 흐름이 굉장히 복잡하며, 겨울에는 계절풍이 심하게 불어와 큰 파도를 형성해 항해에는 상당히 위험한 곳으로 평가된다. 한편, 이 곳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 중에서도 최선단(最先端)의 지점이다. 항해술의 제약때문에 연안항해나 근해항해가 일반적이었던 삼국시대에는 서해안 일대의 남북을 잇는 중요한 해상기점이 되어왔으며, 멀리 중국·왜 교류 때에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지점이다. 〔유 물〕 유물은 현대의 해신당(海神堂)인 수성당(水城堂) 바로 뒤편의 평탄면(平坦面)에 8×13㎡의 범위에 약 30cm의 두께로 퇴적되어 있었다. 유물의 대부분은 삼국시대인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유물은 각종 항아리〔壺〕, 기대(器臺), 독(甕), 잔(盞), 배부병(杯附甁) 등의 토기류와 쇠차〔鐵棠〕, 쇠살촉〔鐵鏃〕, 찰갑편(札甲片), 쇠도끼〔鐵斧〕, 말안장조각〔鞍橋片〕, 행엽(杏葉), 동령(銅鈴), 동경(銅鏡), 불명철기 등의 금속유물, 도끼(斧), 거울(鏡), 손칼, 판갑(板甲), 낫, 말 등과 같은 실물을 모조한 석제·토제모조품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소옥(小玉), 곡옥(曲玉), 중국 도자(中國陶磁)가 소량 출토되기도 하였다. 금속유물은 대옹(大甕)의 내부에 넣어져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다. 석제모조품은 좁은 범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한편,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백자가 소량 출토되었다. 이 곳은 예로부터 항해상의 위험한 장소이면서 항로의 중요한 기점이 되어왔고, 바다에서의 해상활동을 감시하기에도 유리한 지점이다. 따라서 항해상의 안전이나 어로와 같은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한편, 종류가 다양한 유물들이 섞인 채 절벽 위 평탄면에 퇴적되어 있었다. 이는 이 곳에서 제사와 같은 일정 목적에 유물을 사용하고 난 후 그대로 폐기하거나 의도적으로 파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곳은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 분명하다. 제사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제사에의 관여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가야의 제사는 해상교섭의 필요성이 증대하던 시점에 국가적 차원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한 것으로 보인다. 해상교류의 길목이나 중요한 기점에서 원거리 항해의 안전이나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위해 제사에는 토기뿐만 아니라 금속유물, 토제모조품, 중국 청자와 같은 특수 공헌물품을 다량으로 사용하였다. 그 외의 제사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이 연안을 통한 이동이나 어로활동과 관련해 별도의 공헌물 없이 소량의 토기만을 사용해 제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제사는 소량의 토기나 청자, 백자 등을 제기(祭器)로 사용해 해상이동의 안전이나 풍어(豊漁)를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제사양상은 현재 우리 나라의 서해안 일대에 남아 있는 해양신앙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와가 출토되고,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수성당(水城堂)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부터는 노천제사(露天祭祀)를 벗어나 실내에서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
출처: 아! 참! 원문보기 글쓴이: 인강
첫댓글 서상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해야하는 일을 이렇게 해주시다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