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롭게, 그 길에서 나누고 베푸는 淸靜心을 배우다 광주전남수미산산악회와 떠난 가야산 해인사
萬物同根 色心不二 色卽是心 色卽是空 (만물동근 색심불이 색즉시심 색즉시공)
‘무아’에서는 ‘윤회’가 결코 나올 수 없다 ‘3독심’을 다스리는 맑은 삶의 정진
입력날짜 : 2013. 12.04. 00:00
가야산은 대가야의 시조설화가 서려있는 산으로 예부터 해동의 10승지 또는 조선 8경의 하나로 이름높은 산이다. 가야산은 6가야국의 主山으로서 상아덤은 용기골에서 정상에 오르는 도중에 우뚝 솟아있는 성스러운 봉우리이다.
만물은 원래부터 한 뿌리이니 몸이 있으니 마음도 있고 몸은 마음에 의해서 의도되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마음이 없는 몸은 물질이니 굳이 몸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서로 관계하고, 서로 의존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해체하고, 서로 재구성되며 변화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고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다 하였다. 즉 인지와 행동은 분리돼 존재하는게 아니라 서로 관계하고 함께 진행되는 것이라고 붇다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은 동일한 존재의 다른 표현이며 존재를 어느 차원에서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고 하셨다. 일찍이 당나라 헌종때 대전보통 선사는 “연못을 만들면 달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달은 찾아든다”고 하였다.
가야산 칠불봉(1,433m)과 우두봉(1,430m) 정상에선 회원들.
범부가 아는 법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리가 될 수는 없다. 범부는 입장이 바뀌면 마음이 달라진다.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되는 바에 따라 행동하니 앞뒤가 맞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범부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좋은 믿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진리의 세계로 이끈다. 무한한 자비를 행하는 것이 성인들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일이며, 자신이 가진 사랑과 자비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물에 통달하여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러 유능하고 정직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다. 마음이 진실해지면 일체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은 가르침은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잘 익은 과일은 따기도 좋으니 맑고밝은 구슬은 이미 마음 안에 있으니 수행으로써 찾을 따름이다.
2천500여년 전 인도에서는 몸과 마음, 개인과 집단, 사람과 자연등을 분리하지 말고 총체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붇다의 가르침이 있었다. 즉 모든 존재는 개별인자가 조건에 따라 결합(緣)하여 새로운 현상을 만든다(起)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건이 바뀌면 존재의 형식, 본성, 특성도 변하기에 이런 존재의 물리적 특성을 空이라고 한 것이다.
고대 인도의 종교 문헌인 베다에서 철학적 사유 부분을 묶은 것이 ‘우파니샤드’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야말로 고대 인도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파니샤드’의 핵심 가르침은 ‘범아일여’와 ‘윤회사상’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범아일여’라는 브라흐만(범)과 아트만(아)이 하나라는 주장인데, 이것을 거꾸로 선 나무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하늘에 뿌리를 둔 브라흐만이라는 나무에 수없이 뻗어 있는 잔가지들이 아트만인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아트만이 윤회의 고리를 끊고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 해탈이라고 가르친다.
가야산 칠불봉(1,433m)과 우두봉(1,430m) 정상에선 회원들.
바로 이 우파니샤드 사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온 종교 사상이 불교이다. 붇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브라흐만도 아트만도 본디 없다는‘무아’(無我)사상에 있다. ‘我(아트만)’라는 자기동일적 실체, 곧 ‘영원한 나’가 없으므로 윤회도 없다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자아란 “오온(내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이 결합해 발생한 일종의 효과”일 뿐인데 이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고통이 생겨나므로,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윤회사상’을 불교의 핵심 교리로 보는 것은 불교가 중국에 이식된 직후 초기의 승려들이 불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했다고 말한다.
이 무아의 논리를 극한에서 구현한 사람이 인도의 나가르주나(용수, 150-250)보살이다. 나가르주나 사상은 ‘空’이란 말로 집약되는데, 이 空으로써 나가르주나는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空’사상을 밀고 나가면, 모든 것은 다 인연(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에 따라 임시적으로 생겨나고 다시 흩어질 뿐이다.
보물 264호.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제작시기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짐작된다.
나가르주나의 ‘空’사상은 중국 불교로 이어지는데, 특히 이 ‘空’사상을 제대로 감득해 펼친 사람이 임제종의 비조인 임제 선사(?-867)이다. 임제선사는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실체나 본질에 대한 모든 집착을 산산히 부셔버리라고 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다. “본디 해탈이란 다른 어떤 것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으로 서게 되는 경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小空經에 의하면 공은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비어있다는 의미로써 특정한 의미나 존재가 해당 공간에 실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둘째는 일체의 존재는 고정불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붇다는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이 법칙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것이다.
오염된 물질세계는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정화할 수 있지만 오염된 마음공간은 오직 자신만이 맑힐 수 있다. 사회구조를 평등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만드는 것 못지않게 마음을 맑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물질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항상 그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 중심에는 욕망, 이기심, 분노, 적대감, 원망, 서운함, 편견, 선입관, 가치관 등 3독심이라고 일컫는 마음오염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도 좋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절제하는 것 역시 현명하다고 하겠다. 즉 이기심을 충족시킬 것이 아니라 만족지수를 높이고 욕망, 편견 등의 지수를 낮추는 것 역시 삶을 한층 품위있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면 좋겠다.
붇다도 하지 못한 3가지가 있다.
가야산 산행에 나선 광주전남수미산산악회 회원들 단체사진.
첫째는 다른 사람의 행위결과를 대신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사람을 막가파라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직접 막가파라에 들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며, 셋째는 인연없는 중생은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다.
산행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힘듦을 대신 힘들어 할 수 없고, 정상을 대신 올라줄 수 없으며, 대신 아파해 줄 수도 없다. 또 스스로 포기하는 자 애써 정상에 오르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공존과 배려로 힘듦과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으니 이 또한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받는 인과의 현상인 것이다. 산행은 육신을 힘들게 하는게 아니다. 육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편이며, 삼독심으로 찌들어 가고 오염된 마음을 자연 속에서 치유하는 것이다. 산은 육신의 건강함을 자랑하고 타인과 경쟁하는 장소가 아님을 바로 안다면 이 또한 지혜심이라 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닐성 싶다.
병원에 가서 아픈 몸을 치료하는 것을 이기적이라 할 수 없듯이 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고 3독심으로 요동치는 마음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도록 정진하는 것은 삶의 본질이다.
자신이 잘 사는 것만으로도 관계맺는 다른 존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삶을 맑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것이야 더 말할나위가 있겠는가! 자연을 청정하고 맑은 향기가 나도록 가꾸는 것이 우리들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가치있는 일이듯이 마음오염원을 비워내어 道果에 다다름도 자신뿐만이 아니라 관계맺고 있는 많은 존재들에게도 행복을 증득케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 광주전남수미산 산악회가 계곡과 능선을 넘나들며 느끼는 힐링(healing)산행이다. 가야산 칠불봉(1,433m)과 우두봉(1,430m)을 이렇게 힐링하며 기약없이 늦가을만 남겨두고 떠나왔다.
‘상아덤’의 전설
울긋불긋 오색으로 옷을 갈아입힌 단풍,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계속되는 오르막의 서성대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만물상의 황홀함에 빠져든다.
6가야국의 主山으로서 이곳 상아덤은 용기골에서 정성에 오르는 성터에 우뚝솟아 三里登이라고도 하며, 가망 사백리의 聖峰이다.
옛 가야산에는 늙고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 착한 마음을 지닌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女神이 살고 있었다.
여신은 백성들의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 주기로 큰 뜻을 품고 정성을다하여 소원을 빌자, 여신의 정성을 가상히 여긴 하늘신 이질하가 어느봄날 오색 꽃구름 수레를 타고 이곳 상아덤에 내려와 부부가 되어 옥동자를 낳았는데 형의 얼굴은 아버지인 천신을 닮아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불그레 하였으며, 아우의 얼굴은 어머니인 여신을 닮아 갸름하고 흰편이었다. 형의 이름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 하였고, 아우는 뇌질청예(惱窒靑예)라 하였는데, 형 뇌질주일은 자라서 대가야국의 첫 임금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아우 뇌질청예는 금관 가야국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
첫댓글 교수님 잘지내시는지요?도반님들과 산행하시는 모습이 부럽습니다.덕분에 불교공부도하고 전국의산을 구경하고
특히 가야산을 올려주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감사합니다.매일 정진하시고 수행하시는 교수님을 생각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