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양정(峨洋亭)
아양정은 풍류를 하기 위해 김기남이 지은 정자로, 오늘날 정읍풍류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아양이란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친구 종자기(鍾子期)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말이다. 백아가 거문고를 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을 타면 종자기는 옆에서, "참으로 근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峨峨乎若泰山)"라고 말하였다. 또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기가 막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구나(洋洋兮若江河)" 하고 감탄하였다. 고 한다. 여기서 ‘峨’와 ‘洋’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정자가 언제 지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양동천비의 내용으로 미루어 1927년 8월에 완공된 것 같다. 아양정은 1927년에 지어져 1950년까지 정읍 풍류의 요람으로 영화를 누리다가 1963년에 헐리게 된다. 영구 보존을 위하여 당시에 귀한 시멘트로 지붕을 이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유지 보수에 어려움이 많아 헐게 되었다고 한다.
아양정 입구에는 이 골짜기가 아양동천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이 서 있던 길을 비석거리라 불렀다. 현재 비석이 서 있는 곳은 세 번째 옮긴 곳이다. 처음에 서 있던 곳에서 30m쯤 뒤로 옮겨 세운 곳이 아래 사진에 있는 곳이다. 그곳도 길이 나면서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된 것이다.
아양동천 가운데 아양정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아양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개의 정자가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二樂亭이요, 왼쪽에는 洗心亭이 있었다. 이요정 옆에 초가 한 채가 있었으며, 세심정 가는 길목에도 초가가 한 채 있었다. 이 초가에서는 아양정에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살았다. 아양정은 두승산을 바라보고 지어진 기역자 집인데 산쪽를 향하여 기역자로 꺾여 있다. 한옥의 몸채에 지붕은 시멘트로 덮고 몰타르(아부라)를 발랐다. 아양정 입구에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옆에는 아양계원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한 기 있었다. 亭의 오른쪽 앞에 매실 나무 한 구루 있었는데, 그 매실나무 앞에 石友別壯이라는 자연석에 새긴 비석이 한 기가 있었다. 亭의 왼쪽 옆에 큰 연못이 하나 있고 뒤에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 옆에는 두꺼비 조각상과 동추라고 새긴 자연석 비석이 있었다. 두꺼비상은 비 몸체로 만들어진 것으로 두꺼비상 위에 세웠던 비석은 찾을 수가 없다. 우물에서 좀 떨어진 곳에 미륵상이 하나 서 있는데, 김기남은 그 앞에서 풍류를 하곤 했으며, 방에도 부처를 모신 절방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아양계원비는 김기남 부인이 사망하였을 때 비석이 서 있는 자리가 명당이라고 해서 부인의 묘를 쓰기 위해 현위치에 옮겼다고 한다. 묘는 후에 다시 자리가 나쁘다고 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흔적이 없다. 현재의 비석들은 장손자인 김복현이 2005. 6월에 정비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아양정 가는 길 - 현재 정읍사공원에서 호남고등학교 가는 길목, 소방서 앞
아양동천 입구 - 조그맣게 보이는 비석 두 기는 길이 나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아양동천비가 비석거리에 있던 모습
오른쪽 비석 : 峨洋洞天 -앞 丁卯(1927) 八月 拾七日 立, 石友精樓 - 뒤
왼쪽 비석 : 峨洋別庄勝蹟碑, 丁卯 十一月 立
뒤에는 비를 세운 사람들 이름이 있다.
同情人-李成初 金成汝 宋正圭 金益守 金石珍 柳應三 朴在浩 鄭在根 楊錄洙
峨洋別庄勝蹟碑 양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傳哉石友 전하리 석우의 아취! 亭起峨洋 정자를 아양에 지었구나
埴萬株樹 온갖 나무를 심고 開一鑑塘 연못 하나 만들었네
螺黛翠聳 푸른 봉우리에 둘러싸여 蜂房詩香 방마다 시향이 가득하고
鹿栽再壁 산기슭에 울타리, 벽을 새로 발라 牙琴更張 거문고를 다시 펼쳤도다
江山得氣 강산이 기운을 얻어 雲物增光 경치 더욱 빛나고
每擬陟岵 산등성이 오를 때마다 幾切懷常 그대 생각 간절하네
松茂栢悅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露白麓蒼 맑은 이슬에 산이 더욱 푸르니
芳名不朽 변치 않을 아름다운 이름 地久天長 영원히 빛나리라
아양정이 서 있던 자리 김복현씨가 집이 서 있던 자리를 보여주고 있다.
석우별장-아야정 앞, 매실나무 옆에 서 있던 비석
우물 옆에 있던 두꺼비상
우물 옆에 서 있던 비석(동리)
뒤뜰에 있던 미륵상
아양계원명록- 아양계원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정비해서 한 곳에 모아둔 비석들
아양계원명록과 미륵상
김복현: 김기남의 장손자, 현재 미국거주( 김복현 씨의 구술을 토대로 아양정에 대해 기록한 것 임)
김기남
김기남(金箕南)은 字는 京文이요, 號는 石友로 광산인이다. 1889. 12.14일에 相泰(김평창이라 함)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서자)로 태어나서 相喆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955. 8.17일에 인민군에게 잡혀가 사망하였다. 생부인 상태는 사헌부감찰을 거쳐 평창군수를 역임했으며 통정대부비서원승지에 이르렀다. 김기남은 학문에 열중하여 出仕에 뜻을 두었으나 경술국치를 당하여 왜정에서 벼슬하는 것은 치욕이라 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한다. 이 때가 21세 때이다.
김기남이 언제부터 풍류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생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생부인 김상태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김평창은 식사를 할 때에도 악공들이 항상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식사 시간이 매우 길었다고 한다. 김기남은 시를 짓고 음악을 실제 연주했으며 진정으로 음악을 즐겼던 향유자다. 처음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을 논할 벗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1927년에 아양별장을 짓고부터 본격적인 풍류를 시작한 것 같다. 아양정을 짓고 정자 주위에 많은 나무를 심고 풍광을 갖춘 후에 선비들을 불러 학문을 논하고, 풍류객들과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낸다. 현재 이화가든 자리에 본가가 있었는데 본가에는 가지 않고 별장에서 거의 생활을 하였다 한다.
김기남의 모습
아양정 연못가에서 찍은 사진 - 코트를 입고 서 있는 사람이 김기남(김기남 손자인 김대현 소장)
김기남이 사용했던 장롱, 장롱에 새겨진 글은 김기남이 지은 것이다.(김행련 소장)
영모재(김평창이 마련한 재각)에 새겨진 김기남의 글 (1915년)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다섯 째 줄 "비석을 있다"를 "비석이 있다"로 해야 하지 않아요? 남상숙
내용이 좀더 구체적으로 업? 그레이드? 된것 같네요.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이곳이 아니면 어디에 가서 이런 자료를 구경 할수나 있겠습니까....
뒤늦게 선생님의 글 읽으며, 다시 공부 중에 있습니다. 자료의 중요성을 다시 절감합니다. 그런데, "相喆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985. 8.17일에 인민군에게 잡혀가 사망하였다."에서 여러번 읽어야 했습니다. 인민군에 잡혀가 죽은 사람이 김상철인것 맞나요? 그리고 '1985년에 인민군에게 잡혀갔다'는 말씀에 대해 당시의 시대 배경이 궁금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1985년이 아니라 1955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