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20일이면 초복이다.
매번 이맘때가 되면, 어릴 적 시골에서 저녁 무렵 모깃불을 피워 놓고, 멍석 위에서 하나 둘 돋아나는 별을 세며, 가족들과 빙 둘러 앉아 수박, 옥수수, 감자 등을 먹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초복을 맞아 일기장(2001년 7월 24일)에 적어 뒀던 글을 다시 여기에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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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방촌동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 어무이께
복날이고 해서 찾아뵙겠다고 전화드렸다.
물론 초등 4학년인 막내 아들 바다를 시켜서였다.
벗씨는 새끼닭 두 마리를 푹 꽈서
삼계탕으로 요리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어무이는 평상시 같으면
"야야, 머하러 더운데 오노?
그만 전화만 주는 것으로 댔다.
묵은 걸로 할 테이께 너거들끼리 잘 묵어라.
전화요금 올라가이 그만 끊재이?!"
이렇게 하실 분인데, 오늘은
"알았다."
하고 말리는 시늉을 하지 않으셨다.
오가는 대화가 뭔가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이 당신의 건강이나 끼니 걱정보다도
며느리걱정, 자식 걱정, 손자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다가
오늘 따라 우리가 간다는 보고에
얼른 보고 싶은 신호만 보내신 것이다.
삼계탕 끓인 커다란 냄비에 수박 한 덩어리를 사고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죄책감으로
흰 봉투엔 조그마한 성의를 담아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이고, 우리 다래, 바다 오나?
머하그로 이 더운데 오노?"
라고 손자들 손을 와락 잡으며 하시는 말씀은
평상시 그대로였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동안 왜 자주 오지 않았느냐는 원망이 담겨 있고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 무진장 반갑다는
깊은 속뜻이 있다는 것을 퍼뜩 알아 챌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평상시 인사법 대로
바싹 마르고 작은 체구의 어무이를 끌어 안고
한 바뀌 빙 돌았지만
미안한 마음에 눈물도 같이 내 가슴 속을
몇 바퀴나 빙그르르 돌았다.
"아이고, 우리 아들!"
"어무이!"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바로 대구 바닥에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어무이 혼자 살게 하고는
교통사고가 나 몇 년째 치료 중인 우리 큰 아들
중 1년짜리 다래 핑계만 대고
자주 인사 드리지 않은 것이 송구스러워
이어갈 말이 별로 없었다.
우리가 밥해 가지고 간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어무이는 벌써 내가 좋아하는 오이에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게 썰고는
찍어 먹을 고추장까지 준비해 놓으셨다.
난 벗씨가 상을 차려 내오자 단숨에 상을 끌어 안고
삼계탕을 한 숟갈 먹고는
고추장에다 오이를 푹 찍어 한 입에 삼켰다.
벗씨의 삼계탕 솜씨 탓이기도 했지만
옛날 장가가기 전 어무이가 해 주시던 음식과 그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났다.
손자들과 아들이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는 것을
어무이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시다가
"난 쬐끔 전에 친구들하고 수박에다가 밥을
얼매나 마이 묵었는지 모르겠다.
배가 아직 꺼질 줄을 모르네."
라고, 그저 혼잣말로 나지막히 중얼거리셨다.
여느 어머니처럼 항상 배부르시다는 그 말씀.
내가 어릴 적에나
내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나 자식 앞에서는 한결같다.
그래도 드셔 보라며 난 어무이께 재촉을 거듭하면서
나온 배가 더 나올 때까지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제서야 어무이는 흐뭇해 하시며 조금 드시는 흉내를 내셨다.
연세가 고희를 훨씬 넘어
이마 주름살이며 머리 색깔이며 모든 면에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동네 할머니이지만
내겐 아직도 어릴 적에 느끼던 어무이 그대로다.
"아픈 데 없재? 회사 생활은 잘 하나?
다래도 아프고 니가 아치로와서 걱정이다."
내가 아직도 젊은 혈기로
이랬다 저랬다 할까봐 또 걱정이셨다.
이런저런 얘기로 오손도손 저녁을 먹자마자 어무이는
"내일 출근해야 되이 빨리 가거라."
하시면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을
금새 떠밀어 내셨다.
만나자마자 벌써
자식이 집에 가서 편히 쉬기를 기원하시는 어무이.
적은 액수나마 우리가 내민 봉투를
세어 보지도 않고 손으로 몇 장 집어
바로 손자들에게 건넨 우리 어무이.
전기요금이 기본요금을 넘었다고
두고두고 아까워 하시던 어무이께서
손자들에겐 아까워 하시지 않고 선뜻 돈을 쥐어 주신
우리 어무이.
옆에 없으면 없는 대로 자식 생각,
있으면 있는 대로 자식 생각,
그저 자식이 어디에 있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로 삼으시는 것 같다.
내일이 복날이 아니었다면
찾아 뵙지도 안 했을 것 같은 아직도 철없는 막내 아들인 나.
돌아 오는 길에, 어무이를 혼자 사시게 하고 떠난다는 것에
자꾸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을
우리 아들 둘이서 눈치챌까봐 감추느라 혼났다.
참고 : 현재 어무이 연세는 76세. 아직도 동구 방촌동에서 혼자 살고 계심. 다래(첫째 아들)는 고3이고, 바다(둘째 아들)는 중3임.
멋진욱 김지욱 서.
첫댓글 멋진 욱 님이 어무이 이야기로 칙칙한 이 아침에 눈가를 촉촉하게 하네요. 어제밤 아버님 제사 지낸후,, 막내동생이 어무이 이야기를 꺼내어서 눈가를 적시게 하였었는데,,,,,,,,
저희 어무이도 방촌동 바로옆 입석동에 사십니다. 제가 입석동 토박인데... 혹시 먼진욱 님도 방촌 토박이? 정말 그렇다면 우리 예전에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기 싸움 한적은 없었는지요... 제 어릴적엔 입석동에 악동들이 많았는데....
전 꼬리 내립니다. 85년도부터 살았으니깐요. 이제 겨우 20년 지났는데. 제가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