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그 이름 또한 "호남의 한(恨)"을 상징한다. 해태 타이거즈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목포의 눈물"이 한동안 경기장에 울려펴진 뒤 호남사람들은"김대중"을 연호했다. 호남인들은 그렇게 "한(恨)"의 상징성을 외치며 한풀이를 했다. 호남인들의 가슴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한 한의 정서는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1967년 6월 목포역 광장. "유달산아 네게 넋이 있다면, 영산강아 네게 뜻이 있다면 이김대중을 버리지 말아다오~."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열기에 출마한 고 김전 대통령은 목포시민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패기 넘치는 젊은 정치인 김대중의 낙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개도 발엔 고무신을 신고 입엔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금권,관권선거가 횡행했다.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탓이다. 그러나 목포시민은 당시 여권의 돈을 거부하고 김 전 대통령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4년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지난 197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돼 서울 장충단 공원에 운집한 100만명의 군중에게 "정권교체"를 외쳤다. 그 외침은 독재에 저항하고 있던 피끓는 젊은이들을 자극했지만 정치인 김대중과 호남인에겐 "비운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호남의 차별과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1973년 8월 일본으로 망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도쿄의 한 호텔에서 괴한에게 납치됐다가 기적적으로 생환(生還)했다. 1980년 5월 김 전대중과 호남의 차별과 고통은 정점에 달했다. 5,17 계엄령을 확대한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을 내란죄로 긴급체포했고 이에 항의하며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던 광주시민들은 무참히 짓밟혔다. 김 전 대통령은 사형수가 됐고 광주는 "폭도의 도시"가 됐다.김 전 대통령의 역경은 고스란히 호남 차별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시절 호남은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개발독재의 과실을 맛보지 못하고 고립된 공간으로 남았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23년만에 4차선 도로가 된 호남고속도로는 호남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다. 신속성과 대량수송을 목적으로 건설되는 고속도로는 최소 4차선이어야 하지만 1973년 호남고속도로는 2차선으로 개통됐다. 곧바로 교통량이 폭주해 4차선 확장이 불가피했지만 정부는 외면했다. 2차선인 호남고속도로는 대량 산업을 뒷받침하는 신속한 대량소통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산업기반이 취약한 호남지역은 고속도로 개통 이후 물자는 북에서 남으로, 자금과 이윤은 남에서 북으로 역류하는 현상을 빚고 있었다.즉 호남고속도로가 호남에 부(富)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남의 부를 유출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산업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물자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이로 말미암은 물자의 범람은 소비도시의 병폐를 조장했다. 이 지역 소비시장의 과실은 역외로 유출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 상공인들은 정부에 도로 확장을 끊임없이 건의했고 1986년 대전~광주간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됐고 10년 이후인 1996년 담양 고서~순천 구간이 겨우 4차선 고속도로가 됐다. 23년 동안 "2차선 고속도로"로 남아있던 곳에서는 숱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회적 차별도 심했다. 얼마나 차별이 심했던지 서울에서는 "전라도 티"를 내기 쉽지 않았다. 호남 출신에게 지역안배를 구실로 돌아오는 감투는 체신부장관, 농림부장관, 철도청장이 고작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경우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 395명 가운데 호남 출신은 전체의 10.2%인 41명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영남 출신 차관급이상 고위 공직자는 173명으로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는 43%를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꿈과 야망을 지닌 젊은이들은 고향을 숨기게 됐다."호남의 한"은 매번 선거때마다 "호남 몰표"로 이어졌다. 호남사람들은 김 전 대통령이 호남의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온 김 전 대통령이 왜곡된 한국 정치,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민주화 세력분열로 고배를 마셨다. 1992년에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3당 야합"으로 인해 또다시 대선에서 패했고 호남은 더욱 고립됐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5,18의 처절한 고통을 끌어안기 위해 호남인과 함께 했다. 1988년 5공 청문회를 통해 "5월 학살"의 만행의 일부가 드러났다. 이후 김 전 대통령과 5,18 유가족 등은 신군부의 5월 만행에 대한진상 규명을 위해 함께 투쟁했다. 지난 1997년 기나긴 투쟁 끝에 5,18 주범들이 반란과 내란죄로 기소됐고 민주화운동기념일로 확정됐다. 국제통화기금(IMF)한파가 몰아치던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집권에 성공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것이다. 호남은 압도적인 지지(광주 97.3%, 전남 94.6%, 전북 92.3%)를 했다. 당시 호남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울었다. 한맺힌 지난 세월에 대한 설움과 정치,사회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란 기대감이 교차했다. 일부 호남인들은 차별과 소외의 세월에 대한 과도한 보상을 받으려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지역 안배 인사를 먼저 생각했다. 군부독재 정권의 잘못된 과오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호남 역차별"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김 전 대통령은 또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햇볕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결과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호남에 잘못된 유산을 남겼다는 평도 받았다. 지역할거 정치구조에서 "일당독주"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호남정치권은 동교동계의 "가신정치" 틀에 갇히게 됐다. 김 전 대통령 아들 3형제의 흠결은 호남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일반화시키고 왜곡된 정치 사회구조를 바로잡는데 헌신해온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업적은 역사가 정당한 평가를 할 것이다.호남은 차별과 소외를 받았지만 김 전 대통령과 항상 함께 했다.
전라도의 恨,희망… 그가 있어 행복했다 1997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이 국립 5,18민주묘지 신묘역 준공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모진 풍상에서 우릴 보호했던 거목 슬플때나 기쁠때나 함께 울고 웃어 시련기마다 호남은 든든한 버팀목.....
■ DJ와 5,18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5,18의 인연은 각별하다. 1980년 5월21일 신군부는 "광주학살"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김대중(DJ)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다. 80년대 초 "서울의 봄"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유린한 신군부는 26인의 민주인사를 학원 선동과 부정축재 혐의로 일사천리로 체포, 수감한 지 4일만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전격 발표했다. 한순간에 반국가단체 수괴가 된 김전 대통령은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구명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교황까지 나선 국제적 압박을 견디다 못한 신군부는 결국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1982년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지난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와 명예 회복이 이뤄졌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재심을 청구해 2004년 결국무죄를 선고받았다.
5,18은 김 전 대통령을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갔지만 결국 그의 정치적 자산으로 남았고 민주화 운동가로서 그의 위상을 더욱 높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김 전 대통령도 "광주 정신"의 상징인 5,18에 대한 애정을 끊임없이 드러냈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29선언으로 사면된 뒤 당시 망월동 5,18묘역을 첫 참배한 뒤 통한의 눈물을 흘렸고 이후 야당총재, 전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5,18묘지를 꾸준히 참배했다.
1996년 대선 후보일 때에는 5,18묘지 준공식에 참석해 방명록에 "영원한승리"라는 글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8월 27일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처음 참배하면서 용서와 화해의 완결 그리고 사회통합을 강조했었다. 퇴임 이후에는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국립 5,18민주묘지를 꾸준히 참배했다. 2005년 9월 "추모 5,18민주영령", 2006년 6월 "민주주의는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2007년 10월"불멸의 위업 영혼불망"이라는 글을방명록에 남겼다.민주당 광주시당 관계자는 "김 전대통령은 항상 5,18영령들과 함께 하며 정치고난 등을 이겨왔다면서 "5.18 정신과 김 전 대통령은 호남인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된 지 12년 만에야 고향 하의도를 방문했다. 뒤늦은 금의환향.하지만 축하를 받기에는 나랏일이 너무 바빴다. 외환위기를 벗어나야 했고 "망국병"인 지역 감정도 해소해야 했다. 남북 화해의 노둣돌도 놓아야 했다.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그이지만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고향방문이었다. 수구초심이었다.지난 4월24일 고향으로 가는 쾌속선 안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 전 대통령, '나로호'와 남다른 인연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나로호'의 인연도 남다릅니다. 나로우주센터 건설과 나로호개발이 모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 시작됐습니다. 우주강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작업은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세계에서 13번째로 지어진 나로우주센터는 김 전 대통령 취임 3년째인 지난 2000년 12월 첫 삽을 떠 9년 만에 완공됐습니다. 오늘(19일) 발사를 앞둔 '나로호' 역시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습니다. '나로호' 개발은 김 전 대통령의 퇴임 2개월을 앞두고 시작됐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우주기술개발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크셨고, 나로우주센터 개발 역시 그분이 대통령 재임 시 착수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 나로우주센터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 막바지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정문 입구에는 김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조기가 걸렸습니다. "연구원들도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님이 우주 개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해주신 꿈을 받아서 성공함으로써 그분의 유지를 받는 것도…." 나로호 발사를 앞두고 들뜬 분위기였던 이곳 주민들도 애도 속에 발사 성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씨앗을 뿌린 고인은 갔지만, 나로호는 그 꿈을 안고 오늘(19일) 우주로 힘차게 비상합니다.
|
|
|
|
|
|
|
|
|
1924. 01. 06 |
전남 신안군 하의면(荷衣面) 후광리(後廣里)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둘째 아들로 출생. ‘後廣’은 그의 아호가 되었다 |
|
1933. 04 |
하의국민학교에 입학 |
|
1937. 04 |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 |
|
1939. 04 |
목포상업학교(5년제, 현 전남제일고등학교)에 입학 |
|
1944. 03 |
목포상업학교 졸업 |
| | | | |
|
|
|
|
|
|
1944. 03 |
목포상고 졸업과 함께 목포상선회사에 취업. 이후 회사 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 사업가로 활동 |
|
1945. 08 |
8.15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이자 곧 탈퇴 |
|
1946. 04 |
목포 신민당 지부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여 탈퇴 |
|
1946. 04. 9. |
차용애 여사와 결혼, 슬하에 홍일, 홍업 두아들을 둠 |
|
1948. 10. |
목포일보 사장으로 1950년 10월까지 활동 |
|
1950. 06 |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사업관계로 서울 출장중에 6.25를 맞아 걸어서 목포로 귀가 |
|
1950. 09 |
공산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에 탈출 (첫 번째 죽을 고비) |
|
1951. 03. |
목포해운회사(흥국해운) 사장에 취임. 같은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 |
| | | | |
|
|
|
|
|
|
1961. 05. 13 |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민의원 보궐선거 출마, 당선. 4번째 도전에 성공하였으나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함 |
|
1962. 05 |
이희호 여사와 재혼. 슬하에 홍걸 |
|
1962. 07 |
소위 ‘이주당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 |
|
1963. 07 |
민주당 재건에 참여, 대변인 |
|
1963. 11 |
6대 국회의원 선거, 목포에 출마 당선, 민주당 대변인 |
|
1964. 04 |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 |
|
1965. 05 |
민중당 대변인 |
|
1966. 08 |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 겸 정무위원 |
|
1967. 02 |
통합야당 신민당 창당. 신민당 정무위원, 대변인 |
|
1967. 06 |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의 집중적인 ‘김대중 낙선 전략’에도 불구하고 목포에서 당선 |
|
1967. 08 |
‘분노의 메아리’ 출판 |
|
1968. 06 |
신민당 원내총무로 지명되었으나 의원총회에서 부결. 김영삼 의원 원내총무 당선 |
| | | | |
|
|
|
|
|
|
1970. 01. 24 |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 선언 |
|
1970. 09. 29 |
신민당 전당대회 후보 경선에서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 |
|
1970. 10 16 |
대통령 후보 기자회견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미소중일 4대국 보장, 비정치적 남북교류 허용, 통일론, 예비군 폐지’ 제창 |
|
1970. 11. 13 |
‘내가 걷는 70년대’ 출간 |
|
1971. 02 |
미국 방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풀브라이트 상원 외교위원장 등 미 정계 지도자들과 회담. 귀국길에 일본 방문 |
|
1971. 04. 18 |
장충단 공원 유세 |
|
1971. 04. 27 |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46% 득표), 박정희 당선 |
|
1971. 05. 24 |
8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차 지방 순회중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함(두번째 죽을 고비) |
|
1971. 05. 25 |
8대 국회의원 전국구 당선 |
|
1971. 12 |
저서 ‘대중경제론’ 출간 |
| | | | |
|
|
|
|
|
|
1972. 07. 13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외신 기자회견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제창 |
|
1972. 10. 13 |
신병치료차 일본 체류중, 유신 계엄선포로 망명생활 시작 |
|
1972. 10. 18 |
일본 동경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 발표 |
|
1773 |
미국, 일본 언론과 한인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 반대 활동을 전개 |
|
1973. 07. 13 |
미국에서 일본 방문 |
|
1973. 08. 08 |
‘동경납치 살해미수 사건’ 발생. 중앙정보부 요원에 일본 그랜드 호텔에서 납치 당해 수장될 위기에서 극적 생환(세번째 죽을 고비) |
|
1973. 08. 13 |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함 |
|
1973. 12 |
저서 ‘독재와 나의 투쟁’ 일본어판 출판 |
| | | | |
|
|
|
|
|
|
1974. 08. 22 |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반독재 선명야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적극 지원 |
|
1974. 11. 27 |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 |
|
1975 |
선거법 위반 혐의(63년 대통령 선거 관련)로 1년형 선고 |
|
1976. 03. 01 |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8년 선고 |
|
1977. 03. 23 |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옥고 |
|
1977. 05. 07 |
진주교도소 수감중 접견제한에 항의, 단식투쟁 |
|
1977. 10. 31 |
진주교도소 수감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 |
|
1977. 12. 22 |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 수감 |
|
1978. 09. 06 |
서울대병원 이송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제한, 운동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 |
|
1978. 12. 27 |
옥고 2년 9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 |
|
1979. 04. 04 |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선생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 공동의장으로 반독재투쟁에 앞장, 3차례 연행 |
|
1979. 12. 08 |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 사태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자택연금에서 해제 |
| | | | |
|
|
|
|
|
|
1980. 02. 29 |
사면, 복권 |
|
1980. 03 |
YWCA에서 9년만에 대중연설. 그후 사회단체, 대학의 초청으로 전국 순회 시국강연 |
|
1980. 05. 13 |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시국성명을 통해 학생 시위 자제 호소 |
|
1980. 05. 16 |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공동기자 회견, 시국수급 6개항 제시(계엄령 해제, 정치범 석방, 정치일정 연내 완결 등) |
|
1980. 05. 17 |
동교동 자택에서 체포, 구속, 고문 조작 수사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 민주화 운동 발발 |
|
1980. 09. 17 |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네번째 죽을 고비) |
|
1980. 12. 04 |
2심에서 사형 확정 |
|
1981 |
부루노 크라이스키(Bruno-Kreisky) 인권상 수상 |
|
1981. 01. 23 |
국제적 구명 여론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 |
|
1982. 03. 02 |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 |
|
1982. 12. 16 |
복역중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 |
|
1982. 12. 23 |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집행정지로 미국 망명 |
| | | | |
|
|
|
|
|
|
1983. 01. 08 |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월세 아파트에 일가족 정착 |
|
1983. 01. 31 |
‘뉴스위크’지 회견,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 |
|
1983. 02 |
미국 방송, 신문, 잡지 회견, 교민초청행사 참석 재미 ‘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창설, 교포사회의 모국 민주회복 운동 주도 망명중 미국 학계, 종교계, 사회단체들로부터 초청 강연 |
|
1983. 05. 16 |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 |
|
1983. 06 |
워싱턴, 뉴욕 등에서 김영삼 단식투쟁 지원 데모 |
|
1983. 09 |
하버드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 |
|
1984. 01 |
미국 유니언 신학대학교 국제위원회 고문(뉴욕) 미국 국제고문자 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미네아폴리스) |
|
1984. 12 |
전두환 대통령에게 귀국의사를 밝힌 서한 발송 (전두환,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4자회담 제의) |
|
1985. 02. 08 |
망명 2년 3개월만에 당국의 반대와 주위의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 김포 공항에서 대인접촉이 봉쇄된 채 격리, 가택연금 2.12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 돌풍의 중심 역할 |
| | | | |
|
|
|
|
|
|
1985. 03. 06 |
정치활동 규제자 추가 해금(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등 16명). 사면 복권이 안돼 여전히 정치활동 금지 |
|
1985. 03. 18 |
김영삼씨와 야권통합을 합의하고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수락 |
|
1985. 06. 17 |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과 민주화 요구 공동 발표문 채택 |
|
1985. 11 |
저서 ‘대중경제론’(한 영어판) ‘행동하는 양심으로’ 출간 |
|
1986. 02. 12 |
신민당•민추협 중심 대통령 직선제 개헌 청원 1백만인 서명운동 시작 |
|
1986. 07 |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 되었으나 당국에 의해 저지 |
|
1986. 11. 15 |
전두환 정권이 자진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대통령 선거 출마하지 않을 용의가 있음을 선언 |
|
1987. 04. 08 |
김영삼씨와 신당 창당 선언 |
|
1987. 04. 10 |
가택연금(동교동 자택 외부인 출입금지, 집 주위에 12개의 초소와 기관원 감시 사옥 설치) |
|
1987. 06. 25 |
장기연금 해제 |
|
1987. 07. 09 |
사면 복권(‘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자 등) |
|
1987. 09. 08 |
17년만에 광주 방문, 망월동 참배. 28년만에 고향인 목포와 하의도 방문 |
|
1987. 10 |
각계 대표들의 지지와 추대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 |
|
1987. 10. 27 |
미국 AFL-CIO에서 수여하는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 수상 |
|
1987. 11. 12 |
평화민주당 창당대회에서 총재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 |
|
1987. 12. 16 |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노태우 당선 |
| | | | |
|
|
|
|
|
|
1988. 04. 26 |
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당선(사상최초로 여소야대 국회, 평민당 제1야당) |
|
1988. 05. 18 |
야 3당 총재 회담, 5개항 합의(5공비리 조사, 광주학살 진상규명 등) |
|
1988. 11. 18 |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 증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조작극이었음을 입증 |
|
1989. 08. 03 |
서경원 방북사건 관련 혐의로 강제구인되어 심야 수사 받음. 불구속 기소 |
|
1990. 01. 08 |
지자제 전면실시 등 4개항 요구하며 단식 |
|
1990. 01. 23 |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야합 반대 투쟁 시작 |
|
1990. 07. 27 |
평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 총재 재선출 |
|
1990. 10. 08 |
‘지자제 실시, 내각제 포기, 보안사 해체’ 등을 요구하며 13일간 단식투쟁. 신촌 세브란스 병원 후송 |
|
1991. 04. 09 |
평민당, 이우정씨 등 재야 구야권 출신등을 영입, 신민주연합당(신민당)으로 재출범 |
|
1991. 09. 10 |
이기택 민주당 총재와 신민당-민주당 통합 선언 |
|
1992 |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
|
1992. 03. 24 |
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당선 |
|
1992. 05. 25 |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 |
|
1992. 12. 18 |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김영삼 후보 당선 |
|
1992. 12. 19 |
정계은퇴 선언 |
| | | | |
|
|
|
|
|
|
1993. 01. 26 |
영국으로 출국, 케임브리지 객원교수로 연구활동 시작 |
|
1993. 07 |
귀국 |
|
1993.
|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출판 |
|
1994. |
미국 내쇼날 프레스 클럽(NPC), 북핵해결을 위한 ‘일괄타결’ ‘카터방북’ 제안 |
|
1994. 09 |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초청으로 ‘강한 의지에 입각한 태양정책’ 주제의 연설 |
|
1994. 12 |
아시아 • 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설립, 상임공동의장 취임 |
|
1995. 07 |
정계복귀 선언 |
|
1995. 09 |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
|
1997. 05 |
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
|
1997. 10 |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합의 |
|
1997. 12 |
이회창 후보, 이인제 후보와 대결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 |
| | | | |
|
|
|
|
|
|
1998. 02. 25 |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취임 |
|
1998 |
UN 인권협회 인권상 수상 |
|
1999. 07 |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수상 |
|
2000. 01 |
새천년민주당 총재 |
|
2000. 06 |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회담. 남북공동선언 발표 |
|
2000. 12 |
노벨평화상 수상 |
|
2002. 02. 24 |
제15대 대통령 퇴임 |
| | | | |
|
|
|
|
|
|
2003. 08. 08 |
만해대상 수상 |
|
2003. 11. 03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개관 |
|
2003. 12. 09 |
칠레 대십자 훈장 수상 |
|
2003. 12. 15 |
‘춘사 나운규 영화제’ 공로상 수상 |
|
2004. 01. 29 |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심판결에서 무죄 선고 |
|
2004. 05. 10 ~19 |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순방, OECD,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 |
|
2004. 06.15 |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한 6.15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특별연설 |
|
2004. 06. 29 |
중국 방문(장쩌민 군사위 주석 등 중국 지도자 면담) |
|
2004. 11. 06 ~14 |
유럽 방문(스웨덴, 로마) 페르손 스웨덴 총리, 참피 이탈리아 대통령과 회담 노벨평화상 수상자 세계정상회의 연설(로마) |
|
2004. 12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방문 2차 동아시아포럼(EAF) 총회 특별연설 |
|
2004. 12 |
주요연설 대담집 『21세기와 한민족』(국영문) 출판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