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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중국 국제페리 진황도 욱금향호를 타고 중국을 가다 (제1국제여객터미널가기....)
이 글은 2007년 12월7일부터 12월 13일 까지 중국 진황도-열하(승덕)을 여행한 감상노트이다. 전에 개인적으로 블러그에 올린 내용도 있지만. 요즘 새로이 중국의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는 진황도와 열하(승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다시 새로이 여행기를 올린다. 동영상도 같이 올리려 했는데...요즘 플래시를 배우고 있어서 이 과정이 끝나면 동영상 편집을 마무리 지어 올려 볼 예정이다...부분적으로 가편집한 동영상 장면들은 창피함을 무릎 쓰고 올려 볼 생각중이다......
1, 한국-중국 국제페리 여객선을 타고 중국을 가다 (제1국제여객터미널가기....)
(1) 인천 제1국제여객터미널 그리고 연안부두가기
한국에서 진황도를 가기 위해서 국제여객선으로 직접가는 선편과 북경, 천진, 심양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이 있다. 진황도만 방문하기 위한 일정이라면 항공편을 이용하는 건 상당히 시간적으로나 여객비용이 비효율적이다.
북경과 천진공항에서 진황도 시내까지 허비시간 없이 직접 소요되는 시간은 3~4시간 정도이다. 중국의 교통 전산시스템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고 중국 인민들 대다수가 아직은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지라 당일 교통편을 구하는 건 외국인으로서는 여간 힘들지 않다. 중국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동한다 치더러도 필자의 소견은 그리 권하고 싶지 않다.
흔히 인천 영종도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인천 제1국제여객터미널을 이용하는 자료만 적어 보겠다.
서울에서 인천 제1국제여객터미널까지 찾아 가는 방법 중 제일 편한 방법이, 서울역 광장에서 염천교 방면으로 조금 걷다 보면 파출소 앞에서 인천으로 가는 삼화여객이 있다. 연안부두행 버스를 타시면 1시간 20분 정도 걸려 연안부두 종점에서 하차 하면 옆에 국제여객터미널이 눈에 들어온다. 단점은 1시간에 한대만이 운행된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놓치기 쉬운 버스 중에 하나이다. 요금은 교통카드 이용시 2000원, 현금 승차시는 2500원이다.(2006년 기준)
전철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동인천역에서 24번 시내버스 제물포역에서는 33번 인천 시내버스(900원)나 택시(6000원내)를 타시고 연안부두 옆 제1국제여객터미널로 가자고 하면 편안히 손님을 모신다. 주의할 점은 반드시 택시를 이용할 때 연안부두 옆, 국제여객터미널을 밝혀야 한다. 종종 제2국제여객터미널로 손님들을 모시고 가는 경우가 있다.
경기도지역 특히 성남(버스요금 3900원), 수원, 안산 안양(버스요금 2700원)에 계신분들은 구 인천터미널인 용현동행 시외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연안부두행 인천 시내버스인 33번과 36번이 자주 다닌다. 약 20~30분 정도 소요된다. 택시를 이용할 경우에는 4000원 선이다.
제1국제여객터미널 도시별 중국행선지
단동, 대련, 영구, 진황도, 석도, 연태,
제2국제여객터미널 도시별 중국행선지
천진, 위해, 청도,
(2) 여객터미널에서 시간 보내기가 지루하다고 짧은 시간 인천어시장을 이용해 보자
연안부두와 제1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인천어시장은 걸어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일행이 모두 같은 선실을 사용한다면, 주변의 인천어시장 이용을 권하고 싶다.
4인을 기준으로 1만원 씩 걷는다면, 광어와 우럭을 곁들여 푸짐한 모듬회와 소주를 선내에서 즐길 수 있다. 1만5천원을 걷는다면 회와 면세가격으로 고급 포도주 또는 양주를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을 것이다.국제여객 터미널 주변에는 다양한 횟집들이 모여있다. 초밥, 벤댕이 회무침,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삭힌 홍어, 날치 알 등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삭힌 홍어는 선내에서 먹기에는 문제가 되겠지만. 선상에서 바다를 전경으로 한, 한 잔의 소주와 한 점의 회는 언제나 선상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이다.
(3) 한국-중국 국제 페리 여객선과 진황도 욱금향호의 매력.(1)
4년 전 추석 연휴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항공편이 매진되어 한-중 페리 국제여객선을 이용하여 단동으로 들어가 진황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국제 페리 여객선의 매력과 진황도의 매력에 빠져, 배를 타고 진황도를 자주 방문하였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친구들을 내게 묻는다.
친구 “또 중국 가니”
본인 “음~”
친구 “어디 가는데”
본인 “진황도”
친구 “진황도가 어디에 있는데”
본인 “북경하고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야... 옆에 천진도 있어서 가기 편해...”
친구 “음~ 난 처음 들어보는 도시인데 비행기로 몇 시간 정도 걸리는데”
본인 “뭔 놈의 비행기는.... 배타고 들어 간다”
친구 “배~”
본인 “진황도는 비행기 직항로는 없어.... 국제여객선이 다니는데 한 24시간 걸려”
친구 “뭐~ 24시간... 난 안가고 만다”
사람들은 배를 이용해 중국이나 일본을 간다면 원시인으로 본다. 왜 19세기에나 이용하는 해상 운송수단을 이용 하냐고 다그친다. 그리고 21세기 초스피드를 사는 현재에 비행기로 1~2시간 거리의 목적지를 24시간이나 걸려서 간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다들 비행기 타고 북경을 통해 들어가라고” 말하지만 “천만에 말씀” 그들이 모르는 소리다. 후에 진황도를 들어가는 교통편을 통해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북경을 통해 진황도를 들어가는 소요시간과 국제여객선을 타고 소요되는 시간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국제 여객선을 이용하여 중국을 24시간이나 걸려 간다는 것은 나를 지치게 하였다. 특히 일행도 없이 홀로 하는 선박여행은 여행의 시발부터 나를 고단하게 한다. 특히 일면식도 모르는 타인과 섞여 하룻밤을 같이 보내야 한다는 것은 지금도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다.
그러나 부담 속에서 반드시 얻는 소득도 만만치 않으리라... 현재 초스피드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주변에서 얻어야 하는 많은 사실들을 잃어 버렸거나, 스쳐 지나갔다. 항공편으로 인천서 2시간 거리의 북경을 가면서 우리는 기내에서 나오는 기내식과 기내 방송을 듣다 보면, 우리 옆 좌석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체 목적지에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중 국제 페리 여객선의 매력은 탑승 시간이 24시간 소요되는 만큼 지치고 짜증도 나겠지만 다양한 중국 정보를 취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
그럼, 한-중 국제 페리 여객선 특히 진황도 욱금향호를 중심으로 페리여행의 장단점을 개인적 시각에서 면밀히 분석해 보겠다.
단점
1, 선박 아니 여객선을 타고 인천에서 중국으로 간다면 산동성 단동 대련은 17시간, 천진 진황도 영구 연운항은 24시간 정도 소요된다 선박 페리 여행의 상품은 보통 3박4일, 4박5일, 6박7일 7박8일 정도의 상품으로 구성되는데 선상에서 이틀을 보내야 한다. 비행기에 비해 이틀 정도 여행일정을 길거리에 허비하는 단점이 있다.
2, 한-중 국제 페리 여객선은 보통 두 가지 종류로 나눠진다. 배의 특성은 일반실로 분류하는데 다다미선실이 전용인 배와 침대 선실 전용인 배이다. 톱클래스 선실은 모두 침대로 분류되어 있다. 진황도 욱금향호는 일반 선실이 4인1실 침실로 되어있어 다른 배에 비해 아늑한 편이다. 그러나 선실을 같이 이용하게 되는 승객들과 마음이 안 맞을 경우에는 24시간이란 시간이 지옥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중국의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을 찾는 중국인들과 조선족 승객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도 많고 이들 중 국제여행의 에티켓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은 터라, 당혹감이 많이 든다. 일예로 중국 부부가 일반인으로 탑승했는데, 첫 외국나들이의 두려움인지 남편이 쓰고있는 남자들 선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3, 선박을 이용할 때 가장 절대적인 조건이다. 악천후일 때 비행기도 짙은 안개와 바람에 이착륙이 통제되듯이 배도 마찬가지로 통제 된다. 그러나 통제의 기준선이 있고 공해상에서 돌발적인 악천후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비행기는 이동시간이 짧아 악천후로 인한 고통도 짧고 우회하여 비켜가지만, 배는 정해진 항로를 따라 운항하기 때문에 24시간 동안 높은 파도에 시달리며 가야한다. 배를 자주 타는 사람도 이 고통을 참기 어려운데 처음 타는 사람들은 그 고통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장점
1, 앞에서 운항 소요시간이 너무 길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사교성이 좋은 신분들은 같은 선실의 승객이나 배를 정기적 이용하는 상인들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다. 24시간의 무료한 시간을 동행하면서 일반 사회에서는 만날 수 없는 그들과 이국으로 가면서 마음적 공감대를 갖는다면 10년 지기보다 더한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다. 첫 중국방문 여행객이라면 중국에 대해, 그리고 목적지와 경유지에 대한 소상한 정보들을 시간과 돈을 안들이고 모을 수 있을 것이다.
2, 내 친구는 20회 이상 비즈니스 문제로 중국을 다녔지만 비행기와 호텔에서만 생활한 터라 그의 닫혀 진 중국생활은 시각도 닫히게 하였다. 전문적인 비즈니스 개념에서의 시야만 확보했지 전체적인 중국을 이해하는 폭도 좁았고, 오히려 편협 된 시각으로 중국을 이해하는 오류를 낳게 되었다. 나는 4년간 중국을 오고간 시간 속에서 느꼈던 점을 하나만 우선 말한다면 중국으로 들어갈 때 선박을 이용하고, 중국내 지방을 이동할 때는 기차를 한국으로 돌아 올 때는 비행기를 이용하라고 권한다. 이 세 개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서 중국을 이해하는 폭이 10% 정도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중 국제 페리 여객선을 이용하면 양국 간의 크기는 작지만 소상인들의 보따리 경제교류 현장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24시간의 지루한 시간 동안 상인들의 애환과 중국에서의 실패담을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지 모른다. 중국에서 기차 여행은 중국 일반 시민들의 삶의 모습과 습성을 인지하게 될 것이고, 비행기로 귀환은 21세기 더욱 가까워질 한-중간의 교류수단이 어떻게 변모할지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중국으로 가는 첫발을 배에서 보낸다면 소중한 정보를 얻는 곳이 이곳만한 곳이 없으리라......
3, 혼자가 아닌 일행이나 단체가 왔다면 선박 페리 여행이야말로 더 좋은 것이 없다. 24시간 동거숙하며 친구들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친구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그리고 삶이 바빠 못 다한 참다운 이야기들을 꽃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여인들끼리 선상 여행 솔직히 더 바랄게 없는 추억의 시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올해 STX 회사는 크루즈를 빌려 사원들의 단합대회를 선상에서 가졌다. 그들은 배를 타고 중국 곳곳을 답사하며 사원들의 단합된 모습과 중국을 이해하는 지식 공유의 시간을 가졌다. 배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타박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로 여행 목적의 프리젠테이션을 가진다면 중국을 이해하는 정보들로 오히려 늘어진 시간들이 채워질 것이다.
2, 한-중 국제여객선 인천-진황도 욱금향호에 승선하다.
(1) 제1국제여객터미널
(1) 제1국제여객터미널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은 21세기 한-중 양국간에 교통수단으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1년전부터 새롭게 단장하였다. 한-중국을 오가는 국제여객선의 주된 손님은 여행객과 국제여객선을 이용하여 한-중 양국 간에 소무역을 하는 보따리 상인들이 주된 이용층이다. 여행객들과 보따리 상인들의 충돌은 거의 없지만 인천 여객터미널의 개보수를 거쳐 여행객들의 안락한 여행과 보따리 상인들의 생업과의 이해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터미널 청사 측의 의지를 확인 할 수 있다.
국제여객터미널에는 한-중 양국을 오가는 여객선사의 매표창구가 늘어져 있다. 진황도행 욱금향호의 매표창구는 왼쪽 두 번째 창구로 단동 여객선 옆에 위치하고 있다. 창구에는 배의 주된 이용객인 보따리 소상인들로 창구는 매우 복잡하다. 홀로 개인이 표를 구입할 때는 번잡스러울 수도 있다. 상인들은 표를 구입하고 나서야 화물을 붙일 수 있기 때문에 창구에서 이상스럽게 법석 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생업이다 보니 조금 이해하고 넘어가자...단체로 배표를 구입하신 분들은 수협 앞에서 대부분 모인다. 여행사 직원이나 안내자가 표 구입에 관한 일을 도맡아 주시기 때문에 개인 승선자 중심으로 배표 구매요령을 적어 보겠다.
(2)배표 구입요령
성수기에는 한-중 양국을 오고가는 여객선들이 거의 만원이다. 미리 예매를 통해 배표를 구입하여야 한다. 비수기에도 많은 단체 손님들이 이용할 경우에는 진황도, 영구배와 같이 승선인원이 작은 여객선은 자리가 모자라기 다반사다. 미리 전날 선사에 전화를 걸어 배표를 구입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가)진황도 욱금향호 매표창구에 먼저 여권을 내민다. 매표 직원은 여권의 유효기간과 중국비자의 유효기간을 확인한다. 중국비자의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없을 경우에 진황도에서는 선상비자 발급이 안되기 때문에 발권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선상비자가 발급되는 항로는 단동 대련 연태 위해 천진이고 청도는 조건부 초청비자가 발급된다.
(나)매표 직원이 여권과 비자 유무를 확인한 다음, 선편의 편도와 왕복 이용요금에 따른 운임을 말한다. 운임은..... .
객실등급 |
객실운임(₩) |
객실운임(RMB) |
객실수 |
Royal Suite(2인실) |
250,000 |
1,950 |
2 |
Suite Class(2인실) |
180,000 |
1,400 |
14 |
First Class(4인실 |
115,000 |
900 |
79 |
유류할증료(편도 7000원/왕복 14,000원)+인천항만세(2,200원)
운임에는 유류할증료와 한-중 양국에 항만세를 별도로 지불하여야 한다. 왕복시에는 10%의 할인이 가능하고 소아나 장애자 국가유공자의 할인율은 진인해운 홈페이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다) 진황도 배편을 왕복으로 구입했다면 요금은 23만원에서 10%로 할인된 207,000원+왕복 유류할증료 14,000원+인천항만세 2,200원= 총 223,200이다. 중국쪽에서 항만이용료 30위안은 별도이다.(* 솔직히 비싸다는 느낌이 든다. 홀로 가는 여행이라면 난 비행기 쪽을 택하겠다. 개인적으로 초창기부터 진인해운 욱금향호를 꾸준히 이용한 터라 상인 대우를 받는다. 30%~40%의 할인 혜택을 받아 개인적으로 욱금향호를 이용하고 있다. 단체이용객이 아니라면 굳이 비행기 운임과 큰 차이가 없는 여객선을 이용한 중국 여행은 권하고 싶지 않다.)
(라)여객선 이용시 매력은 중국으로 가지고 가는 화물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50kg 이상 가능하고, 중국에서 제한된 물건이 아니라면 보따리 소상인에게 부탁하여 일정액의 운임료를 지불하면 중국으로 물건 반출은 무제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운임을 지불하면 매표 직원이 여권과 함께 배표를 준다. 배표는 4색깔의 구분선으로 되어 있다. 노란색 한 장은 출국장에서 선사직원에게, 붉은색 한 장은 배에 승선하기에 앞서 승무원에게, 녹색 한 장은 선실 사용의 권리를 보장받는 승객용이고, 또 다른 파란색 한 장은 왕복 이용시 리턴 표이다.
국제여객터미널내에 있는 수협이다. 이곳은 토요일에도 업업을 하므로 터니널에 직접와서 환전을 하여도 불편이 없다. 단체여행객 손님들은 이곳 수협 앞을 약속 장소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3)출국장에 서다.
여권과 배표를 받고 난 3층 출국장으로 갔다. 3층은 새롭게 단장한 출국대기실과 흡연실이 나를 반기다. 출국 대기장에는 출국 보딩을 알리는 시간표가 개시되어 있다. 오전 11시 30분 개표 시간이다. 이맘때면 출국장에는 출국하려는 여행객과 상인들로 만원을 이룬다. 출국장 대기 줄 앞에는 항상 상인들로 붐빈다. 특히 조선족분들과 한족분들인데. 이들 중 몇 명은 항상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 재입국 비자를 신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부류는 한국이나 중국으로 개인적으로 허가된 면세품 반출 물건을 먼저 구입하려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상인들 분이다.
드디어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먼저 선사직원에게 티켓 중 노란부분을 짤라 제출한다. 출국하는 내외국인 앞에 엑스레이가 막아선다. 여기서 엑스레이는 승객의 안전을 해치는 위험품반출과 외화반출을 막으려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이때 고가의 개인 소지품이 있어 재입국할 때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관세 공무원에게 신고하면 반출 신고서를 써준다. 출국할 때 신고한 물건은 재입국 제한에서 해제된다.
(4)이미그레이션 앞에서
변경 이미그레이션 앞에만 서만 항상 옛 생각이 난다. 80년대 초반만해도 단수여권내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었다. 학창시절 개인적으로 열망했던 해외 배낭여행을 그리워 했던게 엊그제인데 지금은 제주도 가는 것보다도 쉬운 세상이 되었다. 2년 전만해도 출입국 신고서를 썼어야 하는데 요즘 IT 인프라가 발달되어서 여권만 내면 출국 수속이 완료 되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5)아~ 면세점
자~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들이 있다.... 면세점이라 다 같은 면세점인가?
국제여객터미널 면세점의 주 이용객은 보따리 소상인들이다 보니 다른 면세점 보다는 주류 품목이 상당이 싸다. 양주 발렌타인 17년산은 35,000원~37,000원선 인천공항에서는 51,000선이다. 발렌타인 30년산은 199$로 한화로 약 180,000원선이다 진황도 욱금향 선내에서는 200.000원에 판매되고 있다. 담배도 담배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약 11,000~12,000원선이다. 공항에서는 17,000원~18.000원선이다 인천-위해를 오고가는 위동페리는 승객 중에 일반여객 손님들이 많아서 그런지 주류가격이 상당히 비싼편이었다.(참고하세요)
그렇다면 국제여객터미널 면세점이라고 다 좋은가? 여자분들은 아쉬워 할 것이다. 속칭 말하는 명품들...명품 화장품이나 명품 악세사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자분들이 아쉬워 할 부분...! 만약 구입하시고 싶다면 비행기편을 이용하라~.... 그l리고 중국은 명품 짝퉁이 판치는 곳...짝퉁 명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또 하나 명심할 것, 중국 공항면세점을 이용할 때도 주의 또 주의 공항면세점에도 짝퉁이 있다는 것. 직원도 짝퉁인지 모르고 판다는 것. 중국에서의 명품구입은 삼가 하자~.
국제여객터미널 면세점을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상식하나 배를 이용할 시 중국 항구에는 면세점이 대부분 없다. 그리고 배에 있는 면세점 보다. 인천 여객터미널에 있는 면세점이 싸다는 걸 명심하시길 바란다. 가능한한 출국할 때 인천국제여개터미널 면세점을 이용하기를.... 자~ 난~ 선물할 발렌탄인 30년산 양주와 더원 담배 2보루를 구입했다.
이미그레이션과 면세점을 빠져나오자 출국장과 진황도 욱금향호를 잇는 셔틀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진황도 욱금향호가 버스와의 거리는 3분, 버스에서 내리자 먼저 승선을 기다리는 일반여객들과 상인들이 승선사다리를 올라서고 있었다. 자~이제는 배 승무원에게 승선표 한 장을 내밀자~ 상단에 빨간색깔이 있는 부분을 짤라 주면 된다. 이제 남은건 승객 소지용인 녹색 색깔의 표와 파란색인 리턴표 두장이 남았다. 나도 승선사다리를 올라서고 있었다.
2, 진황도 욱금향호를 타고 서해에 서다(상)
진황도 욱금향호의 정확한 건조 년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네덜란드에서 영구 자정향호와 함께 건조된 쌍둥이 배이다. 대만이 네덜란드에 전투함 발주를 냈는데, 중국의 강력한 반대해 부딪혀 네덜란드는 대만으로부터 전투함 수주를 포기하고 이에 상응한 댓 가로 여객선 두 척을 중국으로부터 발주 받았다. 이 여객선이 지금 인천-진황도, 영구를 오고가는 국제여객선이다.
드디어 배에 승선하였다. 욱금향호의 주 출입문은 주 로비가 있는 5층에 있다. 그러나 인천항이 조수 간만의 차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승하선 입구가 4층 컨테이너션 통로와 7층 배 갑판에서 승하선 하는 경우도 많다. 욱금향호에 승선하여 표를 가지고 5층 로비 안내 데스크로 가 녹색 승선표를 내밀면, 여자 승무원이 객실 열쇠를 준다. 같은 선실을 쓰는 일행이 먼저 탑승하였을 때는 열쇠를 먼저 가져간다.
5층에 있는 안내데스크이다. 한국말이 가능한 중국측 선원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선실에서 쓰는 화장지, 비누 등이 구비되어 있다.
식권도 여기서 판매하며, 안내방송이 필요할 경우 데스크에서 문의하면 된다.
욱금향호의 선실은 4층과 6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4층은 보따리 소상인분들이 주로 이용하고 6층은 일반 여행객들이 이용한다. 참고로 3층에는 승무원들 숙소가 있다. 일반실은 1선실 4침대로 구분되어져 있다. 한-중국을 오가는 다른 국제 여객선에 비해 선실 내부는 넓은 편에 속한다.
위의사진의 6층 선실 복도이다
아래 사진은 일반선실로 1실 4침대로 꾸며져 있다. 짝수 번호는 아래층, 홀수 번호는 윗층이다.
일반선실의 욕실
욱금향호에 걸려 있는 시계는 중국 쪽 기준으로 맞춰져 있다. 배의 지분 구조가 중국 쪽이 많고 승무원도 사무장을 빼고는 모두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이나 한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배 사무의 중심은 중국 쪽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국의 기준시간은 한국보다 1시간 늦다.
승무원 중 두 세명 정도만 한국어를 구사한다. 배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한국어를 모르는 승무원이 많아도 배를 이용하는데는 큰 어려움은 없다. 그래도 다른 한-중국 국제여객선에 비해 한국어 구사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점은 아쉽다.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시 30분. 보딩 후 1시간이 지나자 배가 출항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때로는 컨테이너 선적 작업으로 2~3시간 늦춰지는 경우가 있다. 국제여객선인 만큼 선사에서 각별히 신경을 써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12월 7일 배는 12시 30분을 기해 맞춰진 출항에 시간에 따라 기동하기 시작했다.
아~ 처음 국제여객선을 타 봤다고요.... 나 같이 개인적으로 배를 많이 이용하는 사람들은 배를 타는 감회는 별로겠지만 여러분과 같이 여객선 이용이 쉽지 않고 처음타시는 분들은 앞으로 24시간의 운항시간을 맘껏 느껴야 할 것이다. 이런 경험은 여러분의 인생이란 시계추에서 그리 흔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 말이 필요 없다. 7층 갑판으로 올라가 보자~.
7층 선박 갑판으로 올라가면 먼저 짠 바다냄새가 코를 적신다.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의 뒷모습과 인천 남항의 전경이 확 트인 시야로 들어온다. 날씨 좋은날이면 영종도가 뚜렷이 보이고 공사중인 인천대교 위로 항공기들의 이착륙 직전의 활공을 목격하게 된다. 11월부터 시작된 공사의 백미인 인천대교 상판을 얹히는 관경도 목격할 수 있다. 배는 영종도 실미도를 지나 팔미도에 들어선다.
맨위 사진은 인천국제여객터미널의 뒷모습과 남항 선적장이다.
인천 남항을 빠져 나오면 시야에 요즘 한창 공사중인 인천대교가 보인다.
11월부터 상판작업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완공되면 인천항 주변의 최고의 백미가 될 것이다.
요즘 새롭게 부각되는 인천 송도 신도시이다. 멀리서 봐도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게 보인다.
인천대교와 함께 인천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을 것 같다.
팔미도는 인천 내항으로 선박의 출입이 기준이 되는 주요한 곳이다. 이곳에서 배의 항로를 선도하는 바다의 파일럿 도선사가 승하선하는 곳이다. 배가 출항하기에 앞서 맨 마지막에 승선하는 분이 도선사이다. 도선사는 비행기로 따진다면 항법사와 관제사의 2중 역할을 담당하는 바다의 파일럿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항구에 입출항하는 국내선박 1000t, 외국선박 500t 이상의 선박이 부두에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도록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것이다. 팔미도를 기준으로 도선사들의 승하선을 돕기 위해 거대한 선박에 따라 붙는 파일럿 초계정의 모습과 도선사들의 승하선 모습이 최고의 백미다. 참고로 말한다면 도선사들은 국내에서 연봉기준으로 항상 빅 5안에 들 정도 고부가가치 높은 전문직종이다.
도선사들이 승하선 기준이 되는 팔미도이다.
도선사들의 근무하는 모습들이다.
이 동영상과 사진은 지난 여름에 찍은것인데, 참고가 될 것 같아 올려 보았다.
또 하나의 도선사 동영상 조선일보에 소개된 "도선사의 하루" 동영,<- 클릭
1시간 정도 출국 대기시간과 1시간 정도의 출국 수속을 마치고 선실 침대에 앉으면 피로와 긴장감이 일순간에 풀린다. 그제서야 배고픔을 느낄 수 있다. 선내에서 방송으로 점식 식사를 알리는 멘트가 흐른다. 시계는 오후 1시 넘어서고 있다. 배고픈 배를 어루만지며 욱금향호 식당으로 갔지만, 식권이 없어 배식 판을 받을 수 없다.
식권은 5층 로비 안내실에서 판매되고 있다. 가격은 5000원 솔직히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개 단체 손님은 패키지 상품에 선내 식사가 제공되고 있어서 따로 구입할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 탑승한 경우에는 식권을 구입해야 한다. 앞으로 음식 맛에 대해 이야기 하겠지만 선내 음식은 가격에 비해 질이 상당히 떨어진다. 배에 탈 때 마다 식사 해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부분이다.
6층 식당
다른 국제여객선에 비해 욱금향호의 식단을 평가해 보기로 하자. 진황도배는 다른 여객선에 비해 승선인원이 작은 편이다. 만선이 340명 선으로 이중 60%가 상인들이다. 배를 이용하는 일반 승객의 비율이 영구 자정향호와 함께 상당히 떨어진다. 위해 골든브리지호는 승객이 700명선에 달할 정도로 대형 여객선이다. 보따리 상인은 약 400명 정도 되지만 일반승객의 탑승인원도 만만치 않다. 단동페리는 요녕성 집안의 고구려 유적과 압록강과 백두산 관광으로 1년 사계절 내내 단체여행객으로 만선을 이루고 있다.
위해 골든브리지호와 단동페리의 선내 식당의 주 고객은 일반인들이 주 고객인데 요리와 맛과 질은 천차만별이다. 내가 탑승해 본 한-중 여객선 중 위해 골든브리지호가 맛과 서비스 부분에서는 최고였다.(아직 청도, 천진 배는 타 본적이 없지만, 혹자들은 청도 여객선이 가장 음식 맛이 좋다는 이들도 있다.) 반면 항상 만원인 단동 페리는 음식의 질과 서비스에 있어서 최악의 경우였다. 배도 협소하고 다다미 좌석이라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 석도 위동페리로 대체되어 서비스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배가 바뀌기 전까지는 최악의 여객선이었다.
위해 골든브리지호 다음으로 연태 향설란호의 음식도 괜찮은 편이었다. 진황도 욱금향호와 영구 자정향호는 쌍둥이 배로 모양과 운영체계도 상당히 흡사하다. 두 배 모두 선내 음식 수준은 평균이하다. 배도 작지만 규모에 비해 일반승객의 탑승률이 떨어져서 그런지 음식에 대한 선사의 관심이 미흡한 것 같다. 조리장도 중국인 관계로 한국 특유의 깊은 맛이 음식에 베어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음식 맛을 평가 한다면 음식에 정성이 없다고나 할까!,...개인적으로 중국인 조리장과도 친한데..그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적는 것이니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자~이제 식사를 마쳤다. 아니~ 피곤해서 선실에서 깜박 조는 바람에 식사 시간을 놓쳤다고요... 아니 음식이 미흡하여 젓가락질 몇 번 못해 배가 허전하다고요! 진황도 욱금향호에는 면을 파는 스낵코너가 있다. 식당 폐점 30분후 개점한다, 인심 넉넉한 한국인 조리장 손끝과 한국재료에서 나오는 맛깔스런 칼국수, 김밥, 만두, 만둣국, 우동, 전복죽, 소고기죽, 라면 샌드위치 등이 우리들의 허전한 배를 채워준다. 김밥 1500원, 라면 2000원, 김밥+라면 세트메뉴는 3000원, 그 외 모든 메뉴는 3000원 선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식단을 해결하는 곳이다. 그러나 분식을 자주 먹으면 실증이 난다. 단순하게 한번만 진황도 욱금향호를 이용하는 분이라면. 식당과 스낵코너를 이용하는데, 그럭저럭 입맛을 맞출 수 있다.
5층 스낵코너
음~ 지금까지 진황도 욱금향호의 음식세계를 공유했다. 이 밖에 무슨 시설이 있는지 하나 둘씩 찾아 나서 보자.
(가) 선내식당
(나) 스낵코너
(다) 매점 : 지상의 24시간 편의점과 비교하면 무난하다. 식사시간에 곡기를 놓치셨다면 이곳에서 컵라면 등 여러 가지 스낵을 팔고 있다. 또 간단한 한국 상비약이 구비되어 있다.
(라) 비디오극장 : 2시간 마다 영화 틀어진다. 24 시간 동안 운항하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 주는 공간이다.
(마) 도서관 : 선내의 금연실로 도서관이라기 보다는 휴게실에 가깝다. 만화책 잡지책 신문 이 배치되어 있지만 여러 사람에 의해 정독되는 관계로 많이 분실되었다. 만화책 질의 짝이 맞지 않는가 하면! 기간이 많이 지난 신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근래 들어 바둑과 장기를 두시는 분들로 공간이 채워지고 있다.
5층 도서관(휴계실).
(바)성인오락실
(사)노래방 : 노래방은 배의 층 면적의 1/4을 차지할 정도 넓은 공간이다. 중앙에는 무대 스테이지도 마련되어있고 개인이나 4~6인 정도가 모여 노래를 즐길 수 있는 방도 준비되어 있다. 1시간의 기본 이용료는 2만원이다. 중앙 홀은 단체손님이 이용할 경우 제공된다. 주 메뉴는 백숙 닭도리탕, 골뱅이 무침으로 12000원~15000원이다. 주류로는 양주 소주 맥주가 준비되어 있다. 소주 3000원, 캔맥주 1500원이다. 개점시간은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다.
5층 노래방 겸 주바이다.
(자)면세점
6층 면세점
(차)수영장 : 7층 갑판에 설치되어 뜨거운 여름날 더위를 식히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즐긴다. 여름에는 간이 썬텐 침대도 제공되고 있다.
7층 갑판에 있는 옥외수영장이다. 여름에는 승객들로 붐빈다.
(카)사우나 : 최고 두세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는 간이 사우나 시설이 4층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 상인분들이 이용하고 있어 일반 여행객들이 사용하기에는 불편하다.
(타)의료실 : 의료실이 구비되어 있지만 중국의사는 양의사 수준 보다는 중의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단순 응급조치 정도가 아닌 이상 한국-중국 육지에서 치료받는 것이 좋다.
(파)식수대 : 뜨거운 찻물과 식수를 제공하고 있다. 선실이 있는 4층과 6층에 있다.
6층 식수대
벌써 배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저녁시간을 맞이한다. 배에서는 일몰과 일출을 모두 볼 수 있다. 우리가 육지에서 애써 동해안 바닷가나 서해안 바닷가를 찾아 일몰과 일출을 찾아다닌다. 한-중국 국제여객선을 타게 되면 이것이 아주 특별한 서비스로 제공된다. 다만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항로는 중국 쪽으로 갈 때 이동 방향이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항로가 잡힌다. 일몰은 배 선두에서 이뤄진다. 좀 갑갑한 시야를 주지만 배의 장비들과 어우러져 노을이 환상적인 하모니를 제공한다. 반대로 아침에는 배 선미에서 확 트인 시야로 일출을 만끽할 수 있다. 선상에서도 맑은 해돋이는 그리 쉽게 맛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름이 없는 맑은 날에도 수평선에서 바로 올라오는 해는 물안개에 갇혀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다. 여행 복이 있는 분들이라면 진정한 해돋이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겨울에 갑판 위에 올라가면 날씨도 춥고 바람도 심하지만 만반의 옷차림으로 해를 맞이하라 추운만큼 낮 시간이 짧아, 새벽에 일어나지 않고도 일출을 만끽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여름에 진황도에서 인천으로 오는 편에 찍은 사진이다.
여름에는 선상에서 한가로이 일출을 구경할 수 있다. 한-중국 국제여객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인천에서 진황도로 이동할 때는 선머리에서 노을이 진다.
욱금향호의 시설과 어우러져 멋진 빛깔을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사진만 못하다.
3, 진황도 욱금향호를 타고 서해에 서다(하) 이제 해도 저물고 밖은 어둠으로 뒤 덥혀 있다. 선실에 TV가 제공되고 있는데 국영방송인 KBS1만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각 선실마다.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아 방송은 끊어져서 나오거나 아예 채널을 못 잡는 선실이 대부분이다. 벌써 3년째 변함이 없다. 언제 고쳐질려나..지루하고 따분한 맘에 상인들 중 안면있는 지인들과 함께 노래방에 모여 넷이서 소주를 마셨다. 중국여행 전에는 선내에서 음주를 가능한 피하는 것이 낫다. 여행 때 그에 상응한 피곤의 댓 가를 치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좁은 선실에 상대방에게 술 냄새를 품기는 등 여러 가지로 불편을 끼치기 때문이다. 선실의 일행이 지인인 관계로 실례를 무릎 섰지만 가능한 한 지독한 음주는 피하실 것, 돈 깨지고 몸 망가지고 숙취에 지쳐 여행에서 진정으로 봐야할 것을 건너뛰고, 음~각성하자.... 여행에서의 최대의 적은 알콜이란 걸 우린 명심하자!...나는 이번 술로 혹독한 신고식을 치룬다. 아~ 나도 모르게 여행의 첫 밤을 보냈다. 다음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어제 먹은 술의 숙취가 선실을 진동하고 있다. 다행히 선실의 일행도 같이 마신 터라 이해받는 부분이지만,,,해돋이를 사진 속에 담으려 7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해가 나올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물안개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샛별인 금성이 청명한 하늘 속에서 해를 대신하고 있었다. 40분 정도를 더 기다리자 물안개 속을 헤집고 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물안개 속에서 나오는 해보다 맑은 하늘의 샛별이 더 풍요럽게 느껴졌던 일출이었다.
날씨는 청명하였는데 얕은 물안개로 햇머리가 늦게 올라왔다. 겨울 아침의 샛별 금성이 그 아름다움을 해 대신 뽑내고 있다.
생각보다 늦게 올라온 햇님 아쉬움을 달래며 셧더를 눌러댔다. 욱금향호가 지나 온 뱃길이 일출과 어우러져 물살을 그리고 있다.
날씨 화장한 여름날 찍은 해돋이 영상이다. 속이 더부룩하여 세면은 고사하고 아침식사를 건넜다. 숙취에 못이겨 몸을 침대에 기대고 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벌써 진황도항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창가를 보니 저멀리 진황도항이 선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급히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안내 데스크실로 올라갔다. 중국을 입국하기 전에 반드시 기록해야 하는 입국신고서와 검역신고서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4층 객실 선창으로 보이는 진황도항구의 모습
입항시간이 다가 오면 안내 데스크에 중국 입항을 알리는 게시물이 써져 있다.
중국을 입국할 때 반드시 써야 하는 검역신고서와 입국카드이다. 5층 안내 데스크에서 비치되어 있다.
5층 안내데스크 맞으편에 검역서와 출국카드를 쓰는 양식이 전시되어 있다.
5층 안내데스크에 비치된 위성전화로 3분 1만원이다. 공해 선상에서 급한일이 생기면 한국-중국으로 통화가 가능하다. 전화카드 판매와 전화거는 요령은 안내데스크에 문의하면 상세히 가르켜 준다. 옷을 갈아입고 하선의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갑판으로 올라가 진황도시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몇 번이고 찍었던 피사체 공간이지만 여행기의 흐름을 이으려 진황도항의 풍경을 일부 카메라에 담아내었다.
입항직전 진황도 욱금향호 7층 갑판에서 찍은 진황도항 전경의 일부 드디어 욱금향호는 진황도항에 접안하였다. 중국 측 공안과 세관직원이 입국 인원과 컨테이너 물량을 확인하러 승선하였다. 한 2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방송으로 하선을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5층 로비는 하선하려는 일반여객과 상인들로 혼잡하였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지만 대체로 일반여객들이 먼저 하선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앞쪽에 섰다. 전에는 복잡한 인파에 묻혀 맨 마지막에 하선 하였지만 오늘은 일정이 매우 촉박하다. 산해관의 천하제일관을 급히 서둘러 봐야 하고 오후 5시 승덕행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황도항의 선착장 모습과 부두의 모습이다. 차기편에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진황도는 현재 중국6대 항구로 석탄, 철강석의 집산항이다. 나를 실으려 항구 셔틀버스가 배 선착장에 다가왔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폐차 직적의 캐캐 먹은 버스들이 2008년 북경 올림픽에 맞춰 전부 신형 버스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배는 진황도항의 선착장을 지나 한 10분 정도 느린 속도로 진황도항을 가로 지르기 시작했다. 진황도의 국제 여객터미널은 항구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었다. 약 4년 전 인천-진황도 구간의 국제여객선 페리 항로가 개설 되면서 급히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국제 여객터미널인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호텔을 개조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진황도 국제여객터미널 - 터미널은 부두내에 있지 않고 항구 밖 도심쪽에 위치하고 있다. 셔틀버스에서 하선하여 바로 전자체온계로 내게 열이 있는지 체온을 체크하고 검역서를 제출한다. 드디어 진황도 변경인 이미그레이션 앞에서 중국으로 입국하려 줄지어 섰다. 1년전에 비해 중국의 출입국 직원들이 상당히 정중해 졌다. 진황도도 천진과 함께 북경의 관문 역할을 한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을 맞이하려 다른 중국 변경지역의 출입국 직원들 보다 상당히 공손하고 정중하게 바뀌었다. 처음 이들의 모습에 적잖히 놀라서 여기가 중국인가 당혹감마저 들었다.
진황도 출입국을 관리하는 변경, 이미그레이션이다. 드디어 출국수속을 급히 마치고 이미그레이션을 빠져나왔다. 내 앞에는 보따리 소상인분들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수화물을 받으려 길게 줄을 서있고 컨테이너에서는 물밑 듯이 상인분들이 가지고 갈 수화물을 쏟아내고 있다. 난 중국세관 엑스레이를 통과하고 드디어 중국에 입경한 것이다. 난 국제여객 터미널을 급히 빠져나와 속을 달래려 얼끈한 짬봉 밥을 파는 백납슈퍼로 뛰어 들어갔다.
4, 진황도를 아시나요...진황도에 대해 알아야 할 상식들..... 자~ 짬봉 밥으로 숙취에 찌든 속을 달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계는 12시 30분을 가르키고 있다. 5시까지 산해관성 천하제일관을 관람하고 승덕행 버스에 탑승하기에 매우 시간이 촉박하다. 몸과 마음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잠깐~ 난 진황도에 대해, 남들 보다 조금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혹자들은 진황도에 대해 거의 무뇌한 일 것이다. 단순하게 여행도 좋지만 내가 지나가는 한 곳 특히 애착을 갖는 곳이라면 여러분께 하나라도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도 중요하리라 본다. 여행기에 앞서 내가 진황도에 탐구한 진황도 개요와 역사적 배경에 대해 몇 가지 서술해 보겠다.
진황도는 하북성 남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고도로 하북성 동남쪽 위치하고 있으며, 요녕성(랴오닝성) 경계와 발해만과 접해 있다. 현재는 과거의 흔적들이 거의 사라졌지만. 중국왕조와 부침을 함께 거듭하였던 하북지방의 관문이다. 하북성은 북경을 둘러싸고 있어 한국의 경기도와 같은 지리적 위치를 하고 있다. 진황도는 성격이 경기도의 평택시에 해당된다.
하북성과 요녕성의 경계 지도이다. 하북성 최동단에 진황도시구가 요녕성과 마주 보고 있다.
우리는 진황도란 도시는 물론이고 한국보다 큰 하북성(허베이성)이란 지명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하북성과 진황도를 쉽게 이해하려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본다. “중국=>한국, 하북성=>경기도, 북경=>서울, 천진=>인천, 당산=>안산, 진황도=>평택”으로 볼 수 있는데 평택시와 시 성격과 위치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중국의 성과 시에 대해 비교해 보았지만 중국은 한족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과 13억6천만(2005년 6월 현재) 명의 인구, 남한에 98배에 달하는 면적을 지닌 거대한 대륙에 비교되는 국가이다. 진황도는 현급시다. 여기서 우리가 단순히 진황도를 ‘시’라고만 단정 짓기에는 함정이 있다. 중국의 일개 성은 한국보다도 크고 북경시만 해도 경기도와 비슷한 면적을 지닌 거대한 도시이다. 진황도도 현급시이기 때문에. 면적과 인구가 우리나라의 충청북도와 매우 흡사할 정도로 거대한 면적의 행정력 지닌 도시다. 진황도 현급시는 충청북도를 대칭적으로 바라보면 모양새가 쌍둥이 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형적으로 너무 흡사하다. 충청북도와 진황도 크기와 모양새가 너무 흡사하다. 2007년 1월달에 발간된 하북성 지도책을 참고하면 진황도시 면적은 7867㎢(충청북도 7,431㎢)이고. 인구는 277만명이다. 그중 도시면적은 383㎢, 인구는 76만 명이다. 행정 구역으로 분류하면 진황도는 도심을 이루는 해항구, 산해관구, 북대하구의 3개구와 무녕현. 창려현. 로용현 3개현과 청용만족 1개 자치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평균온도는 10.1℃, 연강우량은 698mm, 습도율은 62%이다 월평균 기온(℃) 및 강수량(mm)
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평균기온 -5.4 -3.7 2.9 10.3 16.8 21.2 24.4 23.9 19.7 12.5 4.6 -2.7 평균강수량 2.9 7.2 8.7 20.0 52.8 135.5 233 126 53.3 35.9 9.5 8.6 진황도는 북경, 천진과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다. 동북3성과 경계를 지닌 도시의 성격상 지리적 교통 요충지이다. 자동차로 북경 시내와는 3~4시간, 천진 시내와는 2~3시간, 심양까지는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교통편이 원활한 지리적 위치지만 철도를 이용할 때는 경유지란 역 성격상 기차표 구하기 쉽지 않다. 통상 진황도에 배정되는 침대열차 표는 3~4장 정도가 배정된다고 한다. 중국의 명절이나 휴가철에는 진황도 현지 여행사에서도 기차표 구하기가 힘들다고 난색을 표하고 있다. 다음 장에 진황도 교통편에 대해 상세히 다뤄 보기로 하겠다.
진황도 해변의 주요 관광지 진황도란 지명은 진나라 시황제가 이곳을 순시한 고사(故事)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맹강녀 전설, 진시황 행궁터, 진시황 장생 불로초 이야기의 무대가 이곳 진황도로 진시황제와 관련된 유적이 많은데서 비롯되었다. 진황도 도시를 이루는 3개구(해항구, 산해관구, 북대하구)는 나름대로 독특한 행정 지역 산업적 특징을 지녔다. 해항구는 진황도의 행정 산업의 중추 신경을 맡고 있다. 2007년 중국 도시 지역 중 부동산 값이 가장 많이 오른 지역이기도 하다. 해항구는 진황도 도시 지역 중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도심과 거대한 부두를 지닌 항만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중국의 경제 개방전 진황도 항구는 석탄 철광석의 집산 항으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물동량을 자랑했다. 그러나 진황도 배후에 커다란 공업단지가 없어서 이후 급부상하는 다른 해안도시에 밀려, 2006년 현재 산동성 청도항에 이어 6번째 항구로 내려앉았다.
위에 사진들은 수년전에 발간된 진황도 책자에서 스캔한 사진이다. 진황도는 3년 전보다 도로 정비 작업 아파트 열기등으로 도심 전체가 전보다 많은 부분에서 발전하였고 밝아진 분위기다.. 진황도항은 발해만 유수 항구 중에서도 부동항으로 유명하다. 발해만의 주요 항구들은 중국의 주요하천에서 밀려들어 오는 민물에 해수 염도가 많이 떨어져서 추운 겨울에 자주 결빙된다. 1880년대 초 당산의 카이롼 탄광이 개발되면서 여기서 채석된 석탄이 중국 각지역으로 보내졌다. 천진의 탕구항을 통해 운송하였으나 겨울철에 자주 결빙되어 대체 항구로 진황도 지역이 선택되었다.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카이롼 탄광의 채굴권을 가진 영국회사에 의해 진황도항이 개발된다. 진황도항은 여러 개의 섬을 메워 탄생한 항구이다.
진황도항은 석탄 철광석등 1차 광물의 집산항이다. 부두 곳곳 석탄을 산적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산해관구는 1949년에 진황도시와 산해관(山海關市)가 설립되었다가, 1953년에 진황도시와 산해관시가 합병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산해관에 대해서 후에도 언급하겠지만 만리장성이 산해관구 전체를 휘감고 있을 정도로 역사적 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3개구 중 매우 낙후 되었지만 2008년 북경올림픽에 맞춰 장성을 중심으로 한창 재개발 중이다. 중요산업으로 유리제조와 조선수리산업이 활성화 되어 있고, 유적 관광수입이 주 수입원이다.
이 사진은 최소한 5년전 사진으로 보인다. 내가 3년 6개월전 방문하였때도 이모습은 아니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에 맞춰 주변 재개발이 한창이다. 주로 고풍스로 중국 전통 가옥의 모양새를 장성과 맞춰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뒤편에 산해관편에 자세한 내용을 올려 보겠다. 북대하구는 레저 휴양 산업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북대하의 해변은 중국 전국에서도 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8월의 북경> 또는 <여름수도>로 불릴 정도로 국가기관의 여름 사무지와 연수원등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북경 유명 간부들의 별장이 집중적으로 형성된 곳이다. 2002년 까지 이곳에서 중국 인민회의인 북대하(베이다이허)회의가 열렸으며 당시 일반 교통까지 통제된 지역이다. 후진따오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성장에 따른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없애고자 상징적으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북대하 인민회의를 2002년에 중지시켰다. 이후 북대하는 일반인에게 여름 피서 휴양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하북성과 동북3성은 바다를 면한 곳이 그리 많지 않고 이곳 진황도를 빼고는 해변시설이 없거나 그리 발달 되어 있지 못하다. 7~8월 한여름에 약 600백만 명의 인파가 북대하 해변을 찾고 있다. 진황도시의 진짜 부자는 북대하에 있다고들 한다. 북대하 해변, 노호석 해변시설이 유명하고 전문대학 교육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
북대하는 건물 모양새도 다른 지역에 비해 아름다운 편이다. 여름에는 600만명이 넘는 인파로 북적거리지만 겨울에는 대부분의 건물이 비워있을 정도로 한가하다. 산호초 진주목걸이 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지만 산동성 보다 비싸다 창려현에는 북대하 해변관 연결된 남대하의 휴양 오락시설이 특히 발달되어 있으며 황금해안, 비치도등이 뛰어난 풍치로 유명하다. 특히 중국 8대 해변으로 선정된 비취도는 대사막 해안풍경을 가지고 있다. 넓은 백사장과 백사장 뒤로 커다란 사구 언덕이 조성되어 있어서 어는 중동지역의 해안가에 있는 느낌이 든다. 근래 들어 비취도가 세상에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부대시설은 미비하나 아름다운 풍경과 백사장에 비해 아직은 인파가 적은편이다. 승용차를 이용해 한나절 이용 하면 이곳 보다 더 좋은 해수욕장은 없으리라 본다. 특히 북경의 한국 교민들에게도 알려져 교민들이 버스를 임대해 자주 내려오고 있다.
남대하 주변에는 여름철 휴양시설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특히 해양놀이 시설이 뛰어난데, 넘쳐나는 인파로 이용하는데 짜증이 난다.
비취도이다. 중국 8대 해안 비경으로 불릴 정도로 특이한 풍광을 지녔다. 이외 요즘 새롭게 부상되고 있는 곳이 갈석산으로 흥산문화 유적 발굴로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밖에 청룡만족자치현에는 가을철에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조산이 있다. 1984년, 진황도는 중국에서 최초로 대외개방한 14개 연해도시 중의 하나이다, 1998년 중국에서 최초로 "중국 우수여행도시"로 선정되었다. 최근들어 진황도와 한국의 경제문화교류가 매우 활발해 지고 있다. 한국 평택과 자매도시를 맺었으며, 인천과는 2004년 초에 국제여객 항로가 개통되었다. 글이 지루했나요...이제 어는 정도 진황도란 도시에 대해 이해가 되었으리라 본다. 슬슬 여행을 떠나 보자~...어제 과음한 술은 아직도 머리와 몸을 혼미하게 한다. 그래도 여행의 첫발이 중요한다. 여행의 첫 번째 목표인 산해관성 성벽과 천하제일관, 사실 수차례 가 본 지역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산해관성을 연구하는게 있고. 진황도-승덕-북경을 잇는 배낭여행 상품으로 개발하고자 다시 한번 산해관성 천하제일관 부터 여정을 잡았다. 진황도 국제여객 터미널에서 산해관을 가려면 택시를 대절하거나 시내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산해관성까지 천하제일관과 노룡두를 함께 보는 시간과 출발지를 되돌아오는 시간까지 합하여 3년전에는 약 60~80위안 정도였으나 요즘 중국 물가가 급등하고 있어 대체로 120위안 정도 줘야 택시를 대절할 수 있다. 나는 시간이 촉박하지만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국제여객터미널에서 길을 따라 북쪽으로 150미터 정도 올라가면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2路 중국에서는 시내버스 번호를 2번이라 하지 않고 路로 표기한다. 2路 버스를 타고 진황도 도심인 진두(金都)백화점이나 진황도역에서 33路로 바꿔 타면 된다.
나는 6미리 비디오 테잎을 구입하고자 진두백화점 건너편 전자상가에 들어섰다. 25위안(한화 3000원정도)에 비디오 테잎을 구입하였다. 이 건물은 컴퓨터부품과 소형 가전제품 그리고 DVD타이틀이 주 판매 상품이다. 물론 복제 DVD가 주류를 이룬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 올 때 다시 들렀는데, 태왕사신기 불법 DVD가 나올 정도로 사이클이 매우 빠르다. 나는 진두백화점에서 33번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산해관성 천하제일관으로 향하였다. 5, 진황도 산해관성 천하제일관을 둘러보다 (상) (1) 한민족과 산해관 요녕성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산해관은 동북지방의 부족이 중심이 된 동북3성과 중국 한족들의 중심이 된 하북성이 맞닥뜨리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당시 전쟁터의 주 무대가 산해관부터 유성, 지금의 조양시까지였다. 당시 수나라의 수도는 장안으로 지금의 서안(西安市 시안)부근이다 수당시절 대 고구려와 전쟁 때 수-당군들이 집결한 곳이 임유관으로 지금의 산해관 서북쪽에서 모여 출발하였다고 한다. 현재 산해관 서북쪽 무녕현에 금용(金龍 진롱)온천이 있다. 뒤편에 고려촌 고구려성터가 남아있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돌무덤 고분과 돌로 쌓은 성터가 남아있다. 이것을 확실히 증명해 줄 사람은 현지에 남아 있지 않다. 한분의 조선족분이 계신데 타지에서 들어오신 분이다.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2005년도에 진황도 현지 신문사에서 고구려 유적이라고 취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고구려성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이곳 산해관에서도 고구려 유적이 창려현의 고조선 흥산문화와 더불어 우리 조상의 숨결이 숨 쉬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북성과 요녕성의 경계 지도이다. 하북성 최동단에 진황도시 산해관구가 요녕성과 마주 보고 있다.
진황도시 도심(해항구,산해관구, 북대하구) 전도이다. 현재는 지도는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지만, 아래 지도와 같이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진롱온천 뒷편에 있는 고구려 성터이다. 현지 언론에서도 고구려성터라고 취재를 나왔다고 한다. 이 사진은 2년전에 찍은 사진이다. (2) 산해관성을 따라 연암 박지원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버스는 산해관의 만리장성에 다 달았다. 산해관 만리장성의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천하제일관 보다는 산해관 만리장성의 외곽을 집중적으로 탑방 해보기로 했다. 택시로 바꿔타고 동쪽의 끝문인 홍예문부터 산해관성의 탐방을 시작하였다.
만리장성 주변의 지도이다 파랑색은 내가 택시를 타고 돈 거리이다. 성의 둘레가 4.3km에 이르는. 커다란 성이다.택시 요금이 18위안 정도 나왔다. 산해관성은, 명나라 홍무 10년(서기 1381년)에 세워진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해관성은 만리장성과 이어져 있다. 성에는 문이 4개 있는데 동문은 관외로 향해서 鎭東(진동)문이라 부르고 , 서문은 관내로 향해서 迎恩(영은)문, 남문은 바다로 향해 望洋(망양)문, 북문은 北疆(북강)에 접해 있어 威遠(위원)문이라 부른다. 네개 성문중 제일 기백있고 보존이 잘된 鎭東문 바로 천하제일관이다. 산해관을 여행할 때 개인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책이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기초로 현재 현대 한국인으로 다시금 걸어본 기행문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와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이다. 특히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에 산해관 만리장성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있어서 많이 참고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산해관 견문기에서 진동문은 3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고 적고있다. “첫째 관문은 옹성으로 누각은 없었다. 옹성은 남쪽 북쪽 동쪽 세 곳을 뚫어 문을 내고 쇠문짝을 달았는데 홍예 이마에는 ‘위진화이’라고 새겼고, 둘째 관문은 4층의 망루인데 홍예 이마에는 ‘산해관’이라고 새겼고, 셋째 관문은 삼첨 누각으로 되었는데 편액을 세워 ‘천하제일관’이라고 써 붙였다.” 분명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동문의 외문이다. 성곽에는 위에 글을 토대로 한다면 누각은 없어야 하고 옹성으로 사방으로 문이 나 있어야 하는데,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라 그런지 출입문은 찾아 볼 수 없다. 현재 공사의 형태로 보아도 사통으로 문이 생기기는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둘째 문이라고 표현한 4층 망루는 현재 보이지 않는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표현된 진동문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산해관성은 20세기 들어 세월의 격정과 풍랑속에 파괴되기 시작했고, 1945년 8월 퇴각하는 일본군과 중국 팔로군과의 격전지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간의 내란 당시 산해관성을 중심으로 대치하였다. 당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고, 이후, 6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부분들도 방치되거나 많이 부분이 소실되었다. 이후 철저한 고증으로 복구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윗 그림은 천하제일관에 걸려 있는 산해관성 그림중 산해관성 동나성에 해당되는 그림이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내용과 그림이 다르다. 박지원은 홍예문 위에 전각이 없다고 기록했는데, 그림에 전각이 그려져 있고 실제로도 아래 사진을 보면 전각이 웅장하게 서있다. 그리고 박지원 있다고 기록한 동나성 중간에 4층 망루는 없다 이 그림은 1986년에 새로 그려진 그림이다
동나성 외문인 홍예문이다. 박지원의 기록과는 성의 모양이 많이 다르다 산해관성 1945년도 일본군과의 격전과 내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어섰다. 현재 동문 동나성 외곽의 성벽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성벽아래는 공사를 알려주는 흙더미 산재해 있었지만, 성벽은 공사의 끝을 알려주는 둣 다시금 복원되어 흠 잡을 데 없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그러나 성의 명칭과 위치를 가르키는 편액이 없어 아쉬움을 달래 수 없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동문을 떠나 북쪽 성벽과 서문인 영은문을 지나 망양문에서 내렸다. 2년전에 찍어 놓은 사진도 있었지만 요즘 한창 복원공사로 그때와는 많이 정돈된 모습이다.
산해관성의 남쪽문인 망양문이다. 시계는 언추 3시를 가르키고 있다. 운전기사에게 천하제일관을 가자고 지도로 가르켰다. 차는 드디어 산해관성 내로 들어섰다. 산해관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동쪽 내성 내문인 진동문에는 “천하제일관”이란 대형 편액이 걸려있었다. 연암 박지원은 천하제일관을 지나며 열하일기에 기록하기를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천하제일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이제부터 만리장성과 천하제일의 관문이었던 산해관성을 면밀히 찾아 나서 보자~ (3)중국왕조와 만리장성 그리고 산해관성
위에 그리중 동나성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한 부분을 차용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1986년에 그려졌고 당시 시대상황을 재연한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란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제대로 복원되었는지 궁금증을 가져본다. 산해관성은 명나라 홍무 10년(서기 1381년)에 세워졌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진나라 이전 전국시대부터 북쪽에 짓기 시작했다. BC221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진시황제는 북방 민족에 대한 견제와 두려움으로 만리장성을 북서쪽으로 더 쌓게 하였다. 대부분 혹자들은 만리장성이 진시황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들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많은 부분들은 진나라 이전 전국시대부터 왕조가 교체되면서도 꾸준히 장성은 동서남북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거의 대부분은 명나라 때 만들어 진 것들이다. 만리장성을 쌓게 된 동기는 북방민족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만리장성은 제대로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요, 금, 원의 북방민족의 지배하에 놓인 중국의 만리장성은 무의미 해졌다. 명나라가 들어서고 만리장성의 필요성이 다시 크게 대두되어 동쪽지방에 거대한 장성인 산해관성이 완성되었다. 청나라 만주족 누루하치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지만 중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견고하였다는 산해관성은 청나라와 제대로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이자성의 반란으로 지리멸렬해진 명의 운명과 함께 관문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가고 있었다. 산해관성을 지키던 오삼계는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에 북경이 함락되자. 고민에 쌓인다. 이자성의 반란군의 군세에 눌려 투항을 생각하였으나,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오삼계의 애첩 진원원을 취한다. 이에 격분한 오삼계는 이자성과의 대결을 택했다. 그러나 세가 불리함을 어쩌지 못한 오삼계는 청의 만주족 팔기군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웅대하고 굳게 닫혀 있던 산해관성 관문을 열어젖힌다. 오삼계와 청의 팔기군은 산해관 근처에서 이자성의 군대를 대파한다. 이자성은 북경으로 황급히 회군하고 기세등등한 청나라 팔기군은 북경까지 쫓아 올라가니 이자성은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 오삼계도 나라의 운명이 다했음을 인정하고 청나라 순치제의 섭정이었던 예친왕에게 나라를 받친다. 이로써 명은 왕조에서 지워졌다. 저명한 중국사 연구가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청이 중원을 정복했을 때 병력은 약 18만명. 만주족 전체 인구는 약 100만명인데, 중국 인구는 1억을 넘었다고 한다. 성을 아무리 적들이 범 족하지 못할 정도로 견고히 쌓아도 왕조가 내실을 다지지 못하면 거대한 성도 무용지물이란 일화를 남긴 곳이 산해관성 천하제일관이다. 청은 만리장성의 허실을 알았다. 청은 북방 이민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북방 이민족과 청 만주족의 교차점으로 만리장성의 외곽에 승덕(열하)를 제의 2의 수도인 부도를 만들어 북방 이민족을 자신들의 관리 하에 두었다. 그리고 이러한 능동적인 사고방식으로 북방 이민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만리장성의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청나라는 만리장성을 하나의 경계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진황도에서 구입한 그림 엽서중 천하제일관의 위용이 잘 나타나 있어서 스캔 해 보았다. 명나라가 세운 산해관성, 그들이 세상에 둘도 없다고 자랑하던 천하제일관은 편액을 경계외곽, 동문 외문인 홍예문에 세우지 않고 동문 내문인 진동문에 세움으로써 동북지방의 이민족들에 대한 두려움에 벗어나지 못하였다. 산해관성은 적들의 공격을 견실히 막아 줄 수 있는 방어책 구실을 했다. 그러나 외부 적들에 대한 경계의 목적도 있겠지만, 내부 단결과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명나라의 상징적 관문이 아니였을런지~!
6, 진황도 산해관성의 천하제일관을 둘러보다 (하) (4) 산해관 만리장성 천하제일관의 규모와 크기 택시는 진동문으로 들어서고 있다. 내문에 3층 전각이 확연히 들어왔다. 입장료는 40위안이었다. 출입문에 들어서자 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내가 천하제일관을 처음으로 발을 밟은 시기는 만 3년 전이었다. 2004년 11월이었다. 당시에도 천하제일관은 보수 공사로 겨울에도 공사를 했는데 지금도 주변의 재개발 작업이 한창이라 천하제일관의 모습은 만 3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천하제일관 입장권 산해관성 진동문 천하제일관 광장이 넓게 자리하고 천하제일관 편액은 서쪽 내관을 향해 걸려있다.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란 책에서는 편액의 크기를 길이는 6m 너비는 1m50cm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연암과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에서 지은이 최창도씨는 이 편액의 글씨를 쓴 붓의 크기가 1m60cm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 어느 누구가 자기만한 붓을 힘차게 내려 쓸 수가 있는가!”라고 중화주의에 빠져 세계 최고 최대를 논하는 중국인의 허장성세를 비꼬았다. 선대에 대한 존경은 표할만 하나 과대한 과장은 고귀한 선대의 뜻도 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산해관성을 목도하면서 천하제일관의 크기와 견고성에 놀라고 편액의 크기에 다시 한번 놀란다. 천하제일관의 당대 최고의 관문이었으며 최대 편액이 걸려있던 중국의 상징이다. 편액에 낙관이 없어 누구의 글씨체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명나라 때의 소현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이 편액의 필체는 진나라 재상 이사의 글씨로 구전되어 내려왔지만 연암 박지원은 그 서체가 해자(楷字)임을 보고 진나라 때에 해자가 없었음을 들어 이사의 글씨가 아니라고 고증했다. 이덕무는 명나라때 요동의 진사 소현이 편액의 글씨를 썼다고 확신했다. 이사는 해서가 나오기 전 사람이니 이를 주장하는 것은 무식한 소견이라며 마땅히 서달이 성을 개축한 뒤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마침 서거정의 <사가집>에서 그가 광녕에서 소진사의 산해관등루시에 차운한 시 구절을 보고 확신하게 되었다.
천하제일관 편액 “천하제일관”이라 진동문에 걸린 편액은 일단 크기에서도 그 위용을 자랑하지만 일반적인 편액과는 3가지의 상이점을 갖는다. 첫째, '第'자가 잘못 쓰여있다. 원래 '第'자 위에는 '풀 초(艸)'자가 있는게 아니라, '대나무 죽(竹)'자가 있어야 하는데 글자의 균형을 위해서 '풀 초'자를 썼다고 한다, 둘째, 현판에 쓴 사람의 낙관이 찍혀있지 않다. 그 이유는, 저 글씨를 쓴 사람이 명나라의 대 서예가 소현이란 사람이었는데, 다른 글씨는 다 썼는데 '한 일(一)'자는 아무리 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음식점에 갔는데 식당 종업원이 탁자를 치운다며 걸래로 쓱 하고 한번 닦았다. 딱는 걸레질의 움직임이 자기가 찾던 '한 일(一)' 의 느낌과 같아, 한 일자로 갖다 썼다. 그래서 이 글씨는 나 혼자서 쓴게 아니라 자기의 낙관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낙관이 없는 관계로 후세에 천하제일관의 편액을 쓴 서예가가 누군지 혼란을 겪었다. 셋째는, 각 글씨의 크기를 달리 했다. 그 이유는 조금 경사가 져서 건물이 조금 기울어져,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드디어 산해관성 천하제일관에 올랐다. 밑에서 본 웅장함 보다는 여기가 그 유명한 성이구나 밖에서 느꼈던 성의 위용보다는 위에 올라와 성을 보니 생각보다 아담한 느낌이 든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관내는 일반인들의 무분별한 살림집들로 차다보니 어디가 성인지 어디가 주택가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이다.
천하제일관에서 바라 본 진동문 앞 광장
산해관성은 2008년 올림픽에 맞춰 재개발중이지만, 아직도 구 걸물이 장성과 혼재되어 있다. 솔직히 올해 정비되기는 힘들것 같다. ‘천하제일관’은 내외관 면 양쪽을 벽돌로 쌓고 중앙은 흙으로 다진 웅장한 관성으로서 높이는 14m, 두께가 7m, 길이가 4.3km로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언뜻 무너진 성벽의 성체를 보아도 성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산해관성을 지을 당신 모자란 벽돌은 산동성에서도 뱃길을 통해 보충하였다고 한다.
성벽을 구성한 오리지널 벽돌이다. 세월의 냄새가 난다. 현재 대대적인 보수 공사로 보기는 산뜻하지만 밋밋한 모양새로 역사을 흔적을 놓칠까 아쉽다. 성을 둘러싸고 성 안팎을 조망하였던 전각과 망루가 성을 둘러싸고 있어 성의 크기는 어느 정도 조망할 수 있다. 산해관성은 고구려성의 전형적인 양식인 ‘치’가 있다. ‘치’는 고구려가 수당 등 고구려의 적군과 수성전을 벌일 당시 탁월한 효용성을 높였던 고구려성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군을 측면에서 활 등으로 저지하였던 고구려성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고구려 패망 이후 중국에서는 성을 쌓을 때 성 구조물로 ‘치’의 양식을 들여와 성을 건축하였다. 산해관성도 성벽에 ‘치’의 확실한 모양새가 있다.
시간이 촉박하여 천하제일관의 대충 보았다. 솔직히 천하제일관의 전경을 찍으러 올라 왔기 보다는 천하제일관 전각 속에 그려진 산해관성의 그림을 찍기 위해서이다. 전에 찍어 두었던 사진이 화질이 낮고 어두워서 쓰기에 부족함이 너무 많았다. 진동문을 빨리 빠져나왔다. 오토바이 택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난 급히 올라탔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계는 3시 20분. 먼저 성 중앙에 있는 망루로 향하였다. 요금은 2위안 이지만 왜 이리 쿠션이 없는지 덜컹거리는 의자에 시달리며 목적지에 들어섰다.
망루는 성 중앙에 위치에 있다. 망루에는 대형 종과 북이 걸려있어 전란시 위험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서 있는 망루답게 문은 사통으로 열려있다. 급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마직막 목적지인 영은문에 도착했다. 시계는 4시를 가르키고 있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영은문 전각의 파란 단청과 성벽의 붉은 노을이 물들어 져 아름다운 자태를 뽑냈다. 가을에 찍어 놓은 동영상도 있어 끝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한 컷씩 스틸 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진황도 고속터미널로 내 달렸다. (6)산해관성으로 보는 명-청의 영역은~ 천하제일관은 화북지방에서 동북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였으며, 산해관성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600여 년간 다변했던 역사의 산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 왕조, 그리고 중국 왕조 중 북방 이민족들의 왕조들도 중국을 지배 할 당시 그들의 진원지인 동북지방에 대한 지배와 관할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의 이민족 지배자들은 다수 한족들을 지배하는데 버거움을 느꼈고 자신들과 다른 부류의 동북지방 부족들이 일어나 자신들을 공격할까! 두려움에 동북지방과 북방지역에 거주하는 타 부족들에게 항상 부담감을 가졌다. 중국 북방 이민족들의 왕조들(요,금,원,청)은 돌아가며 중국을 통치하였지만 항상 중국 한족들에 비해 숫적으로 부족하여 동북지방에 있던 자신들의 부족들을 중원으로 불러들였고 자신들의 고향은 봉금(봉쇄)하였다. 어떤 중국의 왕조들도 중원 즉 산해관성을 벗어난 동북지방에 대해서는 지배의 버거움을 느꼈다. 자신들의 역량으로 통치할 수 있는 곳을 산해관성까지만 본 것이다. 현재 중원과 동북3성, 내몽고가 중국에 편입되면서 국경의 위치는 바뀌었지만, 천하제일관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하북성과 요녕성을 나누는 관문의 지표 역할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혹자들은 이러한 중국왕조의 국경 통제에 대해서 동북지방 특히 요동벌판(요양성) 을 조선의 땅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큰 오류라고 생각한다. 1627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청은 조선에 대한 통치를 굳건히 다졌고 군신의 관계를 맺었다. 더불어 청은 임진왜란으로 7년간의 전투에서 국력이 나약해질 때로 나약해 진 조선의 군사력을 인지하였다. 다른 북방지역의 부족들보다도 허약한 조선의 국력을 느꼈을 것이다. 요동벌판의 봉금조치는 북방지역의 이민족들의 부흥도 막고자 했지만 위에서 밝혔듯이 가장 큰 목적은 100만명의 만주족으로 1억만명의 한족을 지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능한 많은 만주족을 중원으로 끌어드려 청 왕조의 통치를 굳건히 하려 했던 것이다. 산해관성이 청왕조가 들어선 이후 중요성이 많이 떨어진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만리장성의 하나인 산해관성, 산해관성의 중심인 천하제일관, 이 관문은 중원과 동북지방을 가르는 경계였으며, 중국인 자신들이 한정 짓고 살아가려 했던 경계의 끝이었다. 만리장성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하고 자신들의 영토를 확정짓는 경계선인 것이다. 1800년대 만들어진 서양의 지도들도 청나라의 국토를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국경을 그려놓고 있다. 조선의 연행사들도 산해관성 천하제일관에 입성 하였을때 실로 중국에 왔다고 술회하였다.
1800년대 중국을 그린 서양의 지도 북쪽과 동쪽의 경계가 만리장성과 흡사하다. 그러나 만리장성과 산해관성, 이것은 청나라 당시에는 심리적 국경이었지 실질적 국경지대는 아니었다. 청 왕조가 라마교를 숭상함하였고 몽고족 회족 등을 우대하며 회유하였다. 제2의 도성인 열하를 만리장성 밖에 세워 강희 건륭제 등은 1년 중 5개월을 열하에서 숙거하며 중국을 통치하였다. 청나라의 북방 민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몽고족에 대해 강력한 압박과 회유를 통해 그들의 예봉을 사전에 꺽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국이었던 조선에 대한 군사적 압박은 그리 염두 해 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스페셜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방영중 제기된 봉금지대이다. 그러나 이 지대를 조선의 땅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청나라 당시 봉금지역 조선의 땅 이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청이 요동 만주벌판을 포기하였다 하더라도 조선은 심리적이라도 지배할 목적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병자호란이후 청의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특히 소현세자는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복합문화를 견지하는 청 문화의 강대함과 서양문화의 신선함을 느꼈다. 조선도 개방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에 돌아온 그의 사상이 벽에 막혔고 끝내 의문의 죽음을 맡고 만다. 당시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끝없이 제기 되었지만, 실질적 북벌론이라기 보다는 국내 당파에 의하여 정략적으로 이용된 수단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후에 준비되지 않은 북벌론의 무모함을, 허생전을 통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꽤 오래전 사진으로 보인다. 진황도에서 엽서로 구입한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노룡두 주변도 정돈되지 않아 최소한 6-10년 이전으로 모습으로 추측해야 할 것 같다.
2007년 12월에 찍은 가장 최근의 노룡두 모습이다. 이번여행의 일정이었던 진황도 여행을 마쳤다. 아쉽게도 노룡두 관람을 시간상 놓치고 말았다. 오후 반나절 산해관성 구석구석을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진황도가 한국과 깊은 유대를 맺는 관광지 없어서 그런지, 한국과 진황도간에 국제 페리 여객선이 왕래하고 있는데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진황도를 모르거나 그냥 스쳐 지나간다. 자~ 이제부터 진황도에 있는 관광지를 하나씩 설명해 보고자 한다. 노룡두(老龍頭) 1980년대까지 노룡두는 유실되어 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후 지속적인 복원작업으로 지금의 웅장한 영해성 노룡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노룡두는 현대적 건물이다. 노룡두는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산해관성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안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만리장성이 북쪽의 몽고족과 돌궐족을 막기위해 쌓았던 장성이 후에 거란족과 만주족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동남쪽으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산해관성은 원이 멸망하고 고비사막으로 후퇴하자 동북의 여러 부족으로 부터 위협을 막고자 명나라가 만든 만리장성 최후의 성터이다. 노룡두라 불리는 영해성은 만리장성 맨 끝자락인 산해관성 남쪽 방어를 맡았다. 성을 만든 시기와 위치가 만리장성의 맨 끝자락인데 이곳을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 말하는 것은, 만리장성의 모양새가 흡사 한 마리의 거대한 용에 비유되기 때문이다. 영해성이 용의 머리와 같고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하여 만리장성의 기점이 되었고, “노룡두”라 불리는 것이다. 노룡두는 만리장성의 중요한 구성부분 중의 하나로, 성 북쪽의 각산장성과 성 동쪽의 위원성(威遠城)과 함께 톡특한 각도를 이루어 산해관성을 둘러싸고 있다. 청대에 와서 나라가 만리장성 안팎으로 모두 통일되자, 노룡두는 군사방어의 역할 대신 황제, 왕후장상, 문인, 협객들의 관광 명승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청나라가 건립된 후, 강희,옹정, 건륭 등의 황제가 여러 차례 노룡두를 다녀갔으며, 그 중 건륭황제는 4차례에 걸쳐 이곳 누각에 올라 바다를 조망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노룡두의 천개해악(天開海岳)비는 당대(唐代)의 것이라 하는데, 이 네 글자는 “放眼天际,苍茫一碧,天适地设”라고 하는 절묘한 경관을 읊고 있다. 노룡두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이 유일한 해상 만리장성의 웅장한 자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옛사람이 “长城万里跨龙头,纵目凭高更上楼,大风吹日云奔合,巨浪排空雪怒浮”라 읊기도 했던 아름다운 경관은 여행자로 하여금 무한한 감상에 젖게 한다. 그러나 현재의 노룡두는 과거의 세월을 찾아 볼 수 없는 현대적 양식으로 새롭게 개축되었다. 주변의 풍광이 웅대하고, 만리장성과 백사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뽐내고 있지만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란 점을 빼고는 매력이 그다지 없다.
이사진 노룡두를 정면에서 찍은 사진으로 그림엽서에서 스크랩한 것이다.
노룡두 입장권 50위안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여름에는 이곳에서 해수욕도 즐기수 있다. 이것만은 기억하자 발해만이 상당히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해질녁 노룡두 해신묘이다. 석양과 어울려 올려 보았다. 맹강녀묘(孟姜女廟) 맹강녀묘는 정녀사(貞女祠)라 부르기도 한다. 산해관성에서 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봉황산(鳳凰山)에 위치해 있으며, 송나라 이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맹강녀 고사는 중국의 민간 4대전설 중의 하나로, 후세 사람들이 맹강녀의 충절을 본받고 기리고자 사당을 지었다. 현존하는 맹강녀묘는 명나라의 건축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사당 앞에는 108개의 계단이 있어 맹강녀가 지아비를 찾는 여정에서의 고통과 우여곡절을 상징하고 있다. 정녀사라는 현판이 걸린 산 입구를 지나면 사당에 이른다. 기묘하기로 유명한 대련“海水朝朝朝朝朝朝朝落”,과“浮云长长长长长长长消”가 눈에 띄인다. 이 대련을 끊어 읽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이를 천천히 음미해보면 그 미묘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당 내 중앙에는 진흙으로 된 맹강녀 상이 세워져 있다. 맹강녀는 당시 만리장성 축조에 공역으로 동원된 지아비를 찾아 천리길 여정과 진시황제 앞에서 죽음으로써 조강지처의 순애보를 남긴 전설속의 주인공이다. 1992년 9월 산해관구 정부는 맹강녀묘 북쪽에 맹강녀 전설을 근거로 대형 문화원인 맹강녀원(孟姜女苑)을 건설하였다. 맹강녀원 내에는 ‘지아비를 위해 천리길을 울며 장성에 도착하였다’는 전설을 위주로 하여 ‘밤새 겨울옷을 만들고’, ‘만여 장정의 장성축조’와, ‘망부석’, 등 스무 개의 장면을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맹강녀원의 시설과 조각들은 너무 조잡하여 전설 속에 잠긴 아름다움 마져 상쇄시킨다. 글 속에 남겨진 맹강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면 맹강녀원 관람은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네이버 블러그 아르파종의 중국견문기에 http://blog.naver.com/arpajon/140004823017 맹강녀 전설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각산장성(角山長城)
만리장성의 묘미를 맘껏 만끽하려면 각산산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아쉽게도 각산장성을 찾아가기에는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한다. 각산장성은 진황도시 산해관구에 자리 잡고 있지만. 여행객들에게 그리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산해관이란 지명 상 각산산성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산해관 평야 지대가 각산장성과 발해만 사이에 끼워져 있어 명칭이 산해관이라 불리운 것이다. 각산장성은 입장료가 약 3개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관광코스가 장수산 연새호와 케이블로 연계되어 있다. 각산장성만 이용할 경우에는 입장료는 30위안 케이블카로 장수산까지 연계되어 이동할 경우에는 150위안 이다. 가을에는 연새호와 어우러져 경관이 장관을 이룬다. 난 끝가지 장성의 끝자락까지 올라가지 않아서 겨울에도 운행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각산산성 등정은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 된다 장성은 높지는 않으나 상당히 가파른 편이었다. 몸이 불편하신 분은 장수산 연새호 케이블카로 각산장성으로 이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날씨가 청명한날 각산장성 장대에서 바라보는 산해관과 발해만은 정말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왔다면 굳이 북경의 만리장성 팔달령을 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지만 산해관의 청명한날이 가을에 집중되어 있어 각산장성을 찾기는 그리 녹녹치 않다. 연새호(燕塞湖) 연새호는 산해관시의 서쪽으로부터 3.5km 떨어져있고, 연산산맥의 주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양쪽기슭의 가파로운 절벽, 층층이 겹쳐진 산봉우리가 호수에 비껴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면적이 15㎢인 호수는 거울마냥 청천을 담아 맑고 푸르게 빛나고 있다. 생태환경이 아름다워 장수산(長壽山) 국가삼림공원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다. 연새호는 석하(石河) 저수지 라고도 하며, 산해관이라는 군사요지의 천혜의 요새이다. 수(隋), 당(唐), 요(遼), 금(金) 시기의 군사충돌은 대부분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연새호는 그림 같은 풍경과 해안절벽의 천변하는 자태 등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북방의 “소계림(桂林)”,“소삼협(三峽)”이라 불리고 있다. 연새호 풍경구 내에는 조어림(鳥語林)이라는 조류들의 낙원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두루미 등 백 여종, 2천 여 마리의 희귀조류가 살고 있다 진황구선입해처 秦皇求仙入海處
진황구선입해처의 6m 진시황 석상이다. 사진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진시황이 신선에게 장생불사를 기원하던 곳 사실 진황도의 명칭이 진시황제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은 앞장에서 말하였다. 진황도에서 진시 황제의 행궁터가 발견되었고 그 유명한 맹강녀의 전설이 진시황제와 연관되어 지금도 산해관에서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려고 사신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보낸 곳이 이곳 진황도로 현재 도시의 명칭을 진시황제와 맞혀 이름을 따 온 것이다. <사기-진시황 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215년 진시황이 갈석(碣石: 지금의 진황도) 지방을 순시할 때, 이곳에 이르러 바다에 제사를 지냈으며, 여생(廬生), 후공(侯公), 한종(韓終) 등의 방사들과 동남동녀들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신선에게 장생불로의 약을 기원하였다. 명 헌종 성화 13년, 이곳에 “진황구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라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명승지가 되었다. 진황도는 예전에는 갈석(碣石)지역에 속해있었으나, 진시황이 순시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진황도구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 풍경구’는 전국시대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과 전설을 내포하고 있으며, 진시황제가 바다에서 신선에게 장생불사를 기원하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신선에게 제사 지내던 곳에는 높이 6미터,무게 80톤의 진시황 입체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진나라 시절과 연관된 유적과 유물은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고 현대적으로 해석된 진시황제의 모습과 중화주의에서 잉태된 거대한 진시황제의 석상이 21C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일관과 어우러져 있을 뿐이다.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갈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였다. 주변 해변가에 고급 해삼물 요리집이 즐비하다. 중국요리에 관심을 갖는 분이시라면 겸사겸사해서 찾아보기에는 안성맞춤인 코스이다. 그리고 진황구신입해처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일품이다. 2006년 연합뉴스에 진황구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와 관련된 기사가 있다. 이해하는데 참고하고자 일부분을 옮겨 보았다. <요서지역 고대문화탐방> ③'진시황행궁지' 2006년 3월 2일 -중략- 진황도시 해변가에는 시황제가 이곳에 왕림해 바다에서 신선(神仙)을 찾았다는 전설이 어린 '진황구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라는 곳도 있다. 나아가 위치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그가 올랐다는 갈석산(碣石山)도 이곳에 있다. 이 지역 '진시황제 벨트'는 그 기반을 역사기록과 전설에 두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고고학이 가세하면서 그런 전통이 한층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 일대에서 이른바 '진황행궁지'(秦皇行宮址)라는 유적들이 연이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답사에 앞서 이들 진시황 행궁지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벌써 중국학계의 '자가당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황제가 머물렀다는 행궁지가 어찌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또 어찌하여 행궁지는 왕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유물을 자랑하는가? 나아가 어째서 이들 행궁지는 한결같이 전한(前漢) 중기 무렵(BC 100년 무렵)에 폐기되고 말았는가? -중략- 찾아가는 법 진황도 시내 진두(金都)백화점 건너편에서 8번을 타면 진황구선입해처를 찾아 가는데 불편이 없다. 미리 지도를 구입해 버스안내양이나 택시기사에게 진황구선입해처 사진을 가르키면 목적지에서 내릴 수 있다. 시내구간이라 진황구선입해처에서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기차역에서 승차해도 20위안 안쪽으로 택시비가 나오고, 시내버스 요금은 1위안이다. 갈석산(碣石山) 개인적으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다. 2008년도에 조산과 함께 가볼 예정이다. 근래 갈석산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흥산문화와. 주변에 중국 측에서 주장하는 진시황제의 행군 터가 발견되었다. 고대 진시황제와 한무제, 당태종 이세민 등 중국 당대 최고의 황제들이 갈석산에 올라 왕조의 부흥을 기원했던 곳, 1800년 전 조조도 갈석산에 올라 선대의 진시황제와 한무제 같이 황제의 꿈을 그렸던 곳이 갈석산이다. 진황도에서 한국사람에게 새롭게 부각되는 곳이 이곳이다. 고조선 흥산문화의 출원으로 신세대 역사학자들이 갈석산을 중심으로 난하(롼허)를 요하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비취도(翡翠島) 비취도는 창여(昌黎)현 여행국과 자연보호구 관리처가 생태환경 보호를 위해 합작설립 한 관광지이다. 비취도는 황금빛모래와 푸른 숲이 결합된 반도로서 항금해안 국가해양자연보호구의 중심지다. 총면적이 7㎢에 달한다. 반도에는 모래산의 가파로움과 평탄함이 교차되어 기복을 이루고 그 독특한 자연지리환경으로 하여 중국에서 유일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해안 대사막 풍경을 이루고 있다. 관광구역 부근에는 전국 1/3이상 종류의 조류가 날아들고 있는데 그중 국가 중점보호조류가 68종이나 된다. <살아있는 생화석>으로 불리우고 있는 문창어가 이곳에 대량으로 분포되어 있다. 독특한 바닷가의 대사막 풍경 이외에도, 모래썰매, 윈드서핑, 낙하비행, 해수욕, 백사장에서의 배구 축구와 같은 구기운동, 낚시 등의 참여성 프로젝트를 지향하고 있다. 이 밖에도 야외에서의 바베큐, 캠프파이어 등 장외활동은 젊은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늦가을에 비취도를 개인적 다녀왔다. 비취도에 대한 감회를 적은 글을 동영상과 함께 블러그에 올려보았다. 동영상을 참고해 보시면 비취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5) 청용민족자치현의 조산 가을 풍치가 매우 빼어난 곳이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진황도만 여행한다면 권할만한 곳이다. 하루일정을 쏟아야 한다. 이외에 진황도에 관련되어 있는 유명 여행지들이 있다. 아랫 글은 진황도 홍보책자에 소개된 글을 그대로 옮겨 담았다. 개인적인 사견을 달지 않았다. 진황도를 여행하실 때 참고가 되셨으면 한다. (1) 진황도 야생동물원 5,000여 무(畝) 규모의 진황도 야생동물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북대하 해빈(海濱)국가산림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현재 아시아에서 면적과 산림의 규모가 가장 크며, 자연환경이 우수한 야생동물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진황도 야생동물원은 바다와 녹지에 함께 접해있다는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각종 야생동물에게 안락한 생활낙원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때문에 야생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진황도 야생동물원은 현존하는 자원을 보호하고, 이를 충분히 활용한다는 방침 아래 넓은 공간에 자유 방목하여 기르는 방법을 채택하여 자연으로 되돌아온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동물이 서로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동물원 내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100여 종, 5,000여 마리의 동물이 방목되어 있으며, 그 중 대다수는 세계 희귀동물 혹은 국가에서 1,2급 보호동물로 지정된 것들로, 아시아의 코끼리,아프리카의 사자,동북지역의 호랑이 등이 있다. “과거 동물원에서 사람들이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을 관람하였다면, 오늘날에는 동물들이 차에 갇힌 사람들을 구경한다”는 말에서도 진황도 야생동물원의 생동감 넘치는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2) 신오(新澳) 해저세계 진황도 신오 해저세계는 중국, 싱가포르, 이탈리아가 합작하여 건설한 해양생물 위주의 전시관으로, 과학교육, 환경교육, 음식,쇼핑, 휴양시설 등이 단일화된 현대적인 대형 종합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해양생물을 관람할 수 있으며, 다채로운 산호어군과 상어를 비롯한 귀여운 해마와 재미있는 바다표범 등을 만날 수 있다. 100미터 길이의 해저터널에서는 오색찬란한 산호군과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각종 물고기들을 접할 수 있다. 이 해저세계에서의 여행은 지적욕구를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꿈과 같은 해양세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3) 거쯔워(鸽子窝) 공원 거쯔워 공원은 응각(鷹角)공원 이라고도 한다. 지층단열로 형성된 바닷가 절벽 위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위풍당당한 매와도 같이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응각석(鷹角石)이라 부른다. 이 바위의 높이는 20여 미터로, 과거 비둘기가 무리를 지어 모여 있거나 혹은 여기에 둥지를 튼다 하여 거쯔워(鸽子窝)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거쯔워 공원은 바다에서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바다가 한여름의 태양을 맞이하는 새벽, 이곳은 ‘막 해수욕을 끝내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감상하려는 수만 명의 관광객들로 장관을 이룬다. 1954년 여름, 모택동(毛澤東) 주석이 이곳에서 멀리 바다를 조망하였는데, 그 감상을 <파도가 모래사장을 적시는, 북대하: 浪淘沙,北戴河>라는 시에 담아냈다. 모택동 주석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북대하구 정부는 시비(詩碑)와 그의 조각상을 설립하였다. 1985년 공원 동남쪽 해안언덕에 50미터 길이의 옛 모양을 본떠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긴 회랑을 세웠으며, 100여 점의 전통벽화로 채색하였다. 회랑 남쪽에는 서각을 설립하여 유명인사 및 여행객들의 시작과 그림을 진열하였고, 서각의 서쪽에는 비랑(碑廊)과 비정(碑亭)이 있다. 공원 바닷가에는 인공호수가 있는데, 호수 가운데에는 물을 뿜어내는 다리가 있으며, 600여 마리의 비둘기를 풀어 놓아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회랑에서 드넓은 바다를 향해 서면, 석류처럼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5) 산해관 씨월드파크 산해관 씨월드파크는 현재 중국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바다특색이 있는 해상놀이 터이다. 이 놀이터 내에는 관광, 오락, 스포츠를 결부시키고 시원한 바다, 푸른 하늘, 금빛모래사장, 푸른남무 등 해변경치를 바탕으로 하고 해저구경, 잠수, 대형해양포유류동물 관람과 문화 예술공연 등을 위주로 하는 환경생태 보호형 해상놀이터이다. 놀이터는 주로 문화광장, 물놀이장, 먹거리 골목, 해수욕장, 음식점 매점과 야영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27만km2이며. 총투자 3억 인민폐, 3년 시간을 거쳐 신설한 종합성격의 대형놀이터이다. (6) 벽라탑 벽라탑 공원은 북대하해안 동산에 위치하여있다. 벽라탑은 동산의 주요 건축이며 또한 동산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벽라탑은 삼면이 바다와 인접해있어 풍경이 아름답다. 탑에 올라가 보면 일망무제한 바다가 한눈에 안겨온다. 벽라탑공원은 북대하구 정부에서 지정한 해상 낙시터이기도 한다. 탑 내에는 또 잠수구락부를 비롯하여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 해산물 부페. 나이트클럽 공중호프집, 모래사장, 캠파이어 등 오락활동이 있다 (7) 연봉산공원 연봉산 공원은 북대하 해안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東),중(中),서(西) 연봉산으로 구분한다. 1919년 북대하의 최대 삼림공원이 이 산에 건설되었으며, 숲속에서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등산 명승지로 주목받고 있다. 공원 내에는 소나무 숲으로 덮인 세 개의 봉우리가 있고, 여러 봉우리가 연달아 겹쳐졌다 하여 연봉산(聯峰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멀리서 보면 연방(蓮蓬:연잎이 들어있는 송이)과 같다고 하여,연봉산(蓮蓬山)이라고도 한다. 최고봉인 동연봉산은 해발 153미터로, 북대하의 최고점을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정자가 있으며, 정자에 올라 멀리 바다를 조망하면, 북대하 해안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쏘옥 담을 수 있다. (9) 로후스(호랑이바위)공원 로후스 공원은 북대하 중부의 모래사장위에 위치하고 잇다. 이곳은 커다란 바위들이 바다와 이어져 있는데 ahdidd이 마치 호랑이무리가 엎드려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로후스공원”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로후스해수욕장은 북대하 해안의 중심해수욕장으로서 면적이 넓고 입해경사도가 평탄하며 모래가 부드럽고 파도가 잔잔하며 바닷물의 수질이 좋고 염도가 적합하여 무더운 여름철에 인파가 가장 많이 몰려드는 해수욕장이다. (10) 남대하(南戴河) 국제오락센터 남대하 국제오락센터는 남대하 관광구(旅行度假區) 삼림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점유면 적은 5평방 킬로미터 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제오락센터에서는 모래썰매, 잔디썰매, 보트 등의 기본 프로젝트 이외에도, 활공놀이기구, UFO 비행접시, 우주여행, 광장 분수대 등의 프로젝트를 추가하여 능동적,자극적,활동적,문화적인 대형 오락센터를 건립하였다. 이곳은 오염과는 거리가 멀고,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삼림이 빽빽하여 신선한 공기를 즐길 수 있다. 이곳 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넓고 물이 깨끗하며 모래가 부드럽고 조수가 완만하여, 바다여행의 5대요소(해양,모래,공기,태양,경관)를 고루 갖추고 있다 하겠다. (11) 남대하 해양낙원 남대하 해양락원은 중국 4A급 관광구로서 푸른 숲 부른 바다를 가진 남대하 관광휴원지, 성급삼림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관광객들은 모래위 미끄럼 타기, 풀위 미끄럼타기. 보트나기. 케이블카, 삼성돌기비행, 미끄럼룡 등 자극성적인 오락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화련꽃 화원 내에서 중국 강남의 풍속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으며 다채로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12) 남대하 선라도(수상번지점프 해상케블카) 남대하 선라도 오락센터는 남대하 관광휴가지에 위치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1000m길이의 케이블카를 타고 섬에 올라 유람하도록 되어있다. 섬 위에는 해상번지점프, 해상 열기구, 해상표류 등 오락 활동이 있다. (13) 남대하 씨월드파크 남대하 씨월드파크는 푸른 바다가, 금빛모래사장에 자리잡고 잇다. 이곳은 천연해수욕장과 융합된 자신만의 특색을 지니고 있는 유가오락장소이다. 파크내에는 라선윈드써핑, 번지점프, 커플미끄럼, 그 외 3개의 고공미끄럼놀이 사다리와 격류용진 바다구경모토보트, 수상자전거, 수상우산 등 여러 가지 수상스포츠 종목이 있다. (14) 국제할사센터 계절과 조수의 작용으로 인해 황금해안에는 줄기줄기로 생긴 모래언덕이 있다. 그 높이는 30~40m. 초생달 모양으로 조형이 특이하다.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사구 정상에 올라갔다가 활사판을 타고 모래언덕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놀랍지만 위험이 없어 국내외 관광객들이 모두 즐긴다. 8, 진황도의 한국식당들.... 진황도에는 300여명의 한국인들과 3000여명 정도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3년 전에나 지금이나 韓民族계 상주인구는 변동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진황도를 거쳐가는 한국인 유동인구는 많이 늘었다. 한국 사람들이 이국에 가면 음식 문제로 고생이 심하다. 진황도에도 한국 식당들이 존재한다. 아직도 몇 프로정도는 부족한 맛이지만 국제화 시대에 맞게 젓가락을 갖다 댈 수 있다. 중국에 왔으니 중국요리와 식당에 대해 설명해야겠지만, 내가 중국음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다음기회에 세밀히 연구하여 중국음식을 별도로 다뤄 보겠다. 우선 한국 음식점에 대해 몇 자 적어본다. 3년 전에 진황도에도 한국식당이라기 보다는 조선족식당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먼저 맛에 대한 평가 보다는 한국 분위기와 완연히 다른 중국식당들의 서비스 수준의 황당함과 실망감이 앞선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韓食堂들의 서비스 수준도 많이 향상되고 종업원들의 순발력도 많이 나아졌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진황도에는 오리지널 韓食堂은 없다. 첫째 한국인들이 진황도에서 식당을 차리기에는 난관이 많기 때문이다. 번잡한 중국식 허가 기준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 등으로 외국인이 식당을 차리기는 거의 힘들다고 봐야한다. 대개는 한국인 남편과 조선족 부인들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많다. 식당 인허가로 인해 식당을 중국 국적의 조선족 부인의 이름이나 조선족 지인들의 이름으로 식당을 개업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식당운영의 분란이 많이 생겨 없어지는 경우가 다반사고, 한국인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진황도의 韓食堂은 위의 문제들을 조화스럽게 다스려 성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있다, 그러나 다수의 韓食堂들은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음식점들이다. 내가 된장찌개와 삼겹살을 좋아한다. 단순하지만 이 음식을 기준으로 韓食堂을 평가해 보겠다. 진황도의 韓食堂들은 크게 네 개 권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진황도 국제 여객터미널 2, 진황도 중심가인 진두(金都)백화점 부근 3, 동북대학교 부근 4, 개발구 다스창 부근 1, 첫 번째 권역은 국제여객선 터미널 부근이다. 욱금향호가 입출항 하는 화(밤)-수(오전)-토(오후)-일(오전)에만 바쁘다. 이곳의 韓食堂은 국제여객선을 주로 이용하는 상인들에 맞춰 운영되고 있다. 욱금향호가 운행되고 있는지도 만 4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 맞춰 형성된 식당들이다. 세월만큼 식당들도 많이 생기고 없어졌다. 이곳 식당들은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식당운영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시간 이외에 가면 음식과 찬이 오래된 것이 많이 나온다.
국제여객 터미널 부근에 韓食堂들 a, 삼천리식당 0335-340-1919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다. 이곳의 스페셜 메뉴는 개고기 보신탕이다. 이외의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겹살, 된장, 김치. 비빔밥 등 골고루 갖춰져 있다. 중국에 있는 韓食堂처럼 밑반찬은 그다지 손이 가지 않는다. 상인들이 주로 운영하며 민박집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 민박은 하루 70위안이며 조식과 석식이 제공된다. 음시 값은 보통 12위안에서 20위안 사이이다. 주인은 조선족이다.
b, 백두산음식점0335-881-2018 전에는 명동다방이란 간판으로 영업을 하였다. 탕 위주로 영업을 하고 있으며 삼천리 식당에 비해 조금 비싼 편이다. 국제 여객터미널 바로 옆에 있어 약속 장소로 딱 안성맞춤인 장소이나 상인들이 많이 이용해 면식이 없는 일반 여행객들이라면 이용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주인은 조선족이다.
생긴지 1년남짓 되었다. 현재는 백두산식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c, 백납슈퍼 여기는 원래 잡화점이었으나 근래 들어 한국식 중화요리를 팔고 있다. 주인장님이 전에 중화요리를 하신 경험이 있어서 맛은 한국과 떨어지지 않는다. 주 메뉴는 짬봉, 자장 새우볶음밥, 잡채밥 등이다. 면은 중국 밀가루를 써서 면발이 텁텁해서 맛을 느낄 수 없다. 주 메뉴는 얼큰한 매운맛과 듬뿍한 해삼물이 어우러져 깊은 짬봉 국물 맛을 내고 있는 짬봉밥이 일품이다. 요리는 전날 부탁하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전문 식당이기 전에 잡화점 분위기여서 일반 여행객들이 음식을 먹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다. 주인장은 한국계 화교 출신으로 한국인이라 할 수 있다. 진황도에서 사업적 이야기 등 여러 정보들을 취합할 수 있다. 음식 값은 평균적으로 한가지당 20위안이며, 욱금향 입출항에 시간에 맞춰서만 운영한다. 2, 두 번째 권역인 진두(金都)백화점 부근이다. 여기는 진황도시의 번화가 가운데 한 곳으로 많은 인파가 모인다. 또한 진황도의 모든 시내버스가 이곳을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다. 버스를 많이 갈아타는 곳으로 유동인구가 많다. 한국인이 많이 이용하던 신라빈관이 없어져 새롭게 한국인 전용으로 운영되고 있는 씨엔빈관이 진두백화점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근래들어 한국인과 소상인들이 씨엔빈관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초창기에 자리 잡은 韓食堂인 오륙도, 한국 소상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세미원’, ‘한자리’가 성업 중이다.
진황도 중심인 해항구의 韓食堂들
요즘 진황도에서 한국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씨엔빈관이다. a, 세미원0335-326-9444 근래 들어 한국인 상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주 메뉴는 된장찌개, 해물찌게, 냉면 등 여러 한국 음식 등을 마련하고 있다. 주인은 한국인이고 부인은 조선족이다. 식사 메뉴인 된장찌개는 12위안이다. 된장찌개는 초창기 보다 맛이 좀 떨어진 느낌이다. 해물탕은 70위안으로 2인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맛있게 해물탕을 먹어서인지 추천하는 메뉴이다. 솔직히 삽겹살을 시켰는데 식당에서 실수해서 그런지 몰라도 불판에 중국향이 묻어나와 맛이 최악이었다. 하지만 진황도에 있는 韓食堂가운데 가장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점이다.
b, 한자리 세미원 옆에 한국인이 운영하던 동대문이란 식당이 없어지고 그 밑으로 새롭게 등장한 곳이‘한자리’란 韓食堂이 생겼다. 이곳의 특선 메뉴는 삽결살이라고 하는데 난 솔직히 그리 맛있게 먹지 못했다. 진황도에 있는 韓食堂들의 주 고객은 욱금향을 이용하는 소상인들이라 식당의 음식 준비가 욱금향호 입출항 일자에 맞춰진다. 이후에 가면 생고기 보다는 주로 준비되어 팔리지 않은 고기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작년 추석 때 이곳에서 삼겹살을 주문했는데 주인이 없어서 그런지 맛이 많이 떨어져 나왔다. 소상인들 다수가 이곳의 삼결살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배 입항 시간에 맞춰 한 잔의 소주와 한 점의 삽결살이 먹고 싶을 때 적격인 음식점일 것이다. 주인은 조선족이다.
c, 한양궁 ‘세미원’ ‘한자리’와 많이 떨어진 인민공원 중앙로에 자리 잡고 있는 韓食堂이다. 솔직히 이곳을 한번 밖에 이용하지 못해 맛을 평가하기가 그렇다. 주인은 한국인이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분은 중국 사람으로 보인다. 음식의 맛이 한국 음식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韓食堂중 가장 깨끗하고 진황도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식당이다. 주변의 자리 값이 있어선지 韓食堂중 요리 값이 가장 비싼 곳이다. 중국인 손님 접대에 안성맞춤인 곳이기도 하고. 옆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주빠 술집 ‘FOR YOU'가 자리 잡고 있어 중국 젊은 가수들의 생음악을 만끽할 수 있다. 한국에서 오신 손님을 접대하여 움직이는 동선으로 편한 곳이다.
d, FOR YOU0335-888-5050 요즘 중국에서 유행하는 주빠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라이브카페라고나 할까? 한국인 남편과 조선족 부인이 운영한다. 젊은 중국 청년들의 음악을 라이브로 직접들을 수 있다. 항상 주인 부부가 대기하고 있어서 중국어를 몰라도 이용하는데 불편이 없다. 주로 맥주를 팔고 있는데 다른 곳에 비해 비싼 편이다. 맥주는 작은 병을 기준으로 청도맥주는 10위안 하이네켄은 15위안을 받고 있다.
e, 오륙도0335-320-6458 3년전만 해도 진황도에서 독점적 위치를 자랑하던 韓食堂이다. 조선족이 운영했던 곳으로 값에 비해 음식 값이 상당히 비쌌던 곳이다. 현재는 韓食堂으로서의 위치가 많이 상실되었다. 주인도 조선족에서 중국인으로 바뀌었다. 3, 세번째 권역인 동국대학교 부근이다. 진황도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곳으로 대학가로 보면 된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오밀조밀함을 느낄 수 있고 주변에 시장 통도 있어 중국문화를 느끼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주변에 한국식당들도 많이 모여 있어 진황도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동북대학교 부근의 韓食堂들
동북대학교 진황도 분교 맞은편이다. 중국식당으로 학생들로 항상 붐빈다.
동북대학교 진황도 분교 정문 a, 한향각1호점0335-888-8819 b, 한향각2호점0335-806-1853 c. 경복궁 0335-590-9868 위의 세 식당은 태산로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한향각1호점과 경복궁은 나란히 붙어 있고 한향각2호점은 동북대학교 정문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용한 적이 2년 전으로 현재와 와서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음식 맛은 보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경복궁과 한향각1호점이다.
동북대학교 맞은편에 있는 한향곽2호점 d, 길향성0335-806-4579 길향성은 동북대학교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고 한향각에서 남쪽으로 200m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진황도에 처음으로 생긴 한국식 중화요리점으로 한국 사람이 이용하는데 불편이 없을 정도로 한국에 있는 중화요리집과 차이가 없다. 다만 백납슈퍼와 같이 중국밀가루의 한계로 면발의 텁텁한 맛을 지울 수 없다. 메뉴는 한국의 중화요리집과 같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주 메뉴는 자장면과 탕수육으로 탕수육의 육질이 일품이다. 그러나 짬봉의 맛은 많이 떨어진다. 자장면은 6위안 탕수육은 30위안이다. 자장면을 시키면 양이 적은 편이다. 주인은 조선족 부부로 인심이 후하다. 자장면을 시킬 때 양을 많이 주문하면 흡족하게 먹을 수 있다. 계절음식으로 개고기도 판매한다.
진황도의 한국식 중화요리집인 길향성이다. 탕수육이 참~맛있다.
동북대학교 태산로 북쪽 개발구 입구에 자리잡은 韓食堂들 e, 팔도강산0335-807-2199 솔직히 3년 전에 이용 한 적이 있는 식당이다.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진황도에서 꽤나 유명한 韓食堂이다. 주인은 조선족이다. f, 삼천리개고기집 0335-807-2909 개고기를 주 메뉴로 하는 식당이다. 된장찌개를 시키면 후하게 큰 대접으로 나온다. 밥값은 별도로 2위안을 받는다. 된장찌개가 맛있고 삼겹살을 시키면 미리 구워 나오는데 맛이 괜찮다. 내가 진황도에서 먹어 본 삽결살 중 가장 맛이 좋았던 韓食堂이었다. 주인은 조선족이다. g, 상품카페0335-538-0201 음식점이라기보다는 맥주집이다. 낮에는 차를, 밤에는 맥주를 판매한다. 개인적으로 자주 이용 하는 집이다. 다른 곳에 비해 맥주 값이 비싼 편이다. 낮에는 아주 한가하고 라면 등 가벼운 식사거리를 판다. 맛은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중국말을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한가한 낮 시간에 여종원업과 대화의 시간을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다. h, 포항꼬치집 개인적으로 이용해 본 적이 없다. 한국 서울방송 아침프로에도 소개된 곳이다. ‘팔도강산’ ‘삼천리개고기집’ ‘상품카페’ ‘포항꼬치집’의 위치는 동북대학교 쪽보다는 개발구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맞다. 동북대학교에서 태안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곳 식당들이 위치하고 있다. 4, 개발구 권역이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하고 있는 곳이라 한국식당들이 많이 모여 있지만 정통 韓食堂은 없다. a, 송도원 개발구에서 유일한 韓食堂이다. 맛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b, 시골보쌈집 133-1335-2606 c, 한천궁 0335-851-3110 진황도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처음이자 마직막이라고 불리는 장성이 산해관구 전체를 휘감고 있다. 산해관성이 만리장성의 처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산해관성이 만리장성 동쪽 끝자락에 세워져 있는데, 그 모양새가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용트림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산해관성 중 노룡두란 명칭을 한 곳이 있다. 노룡두란 말과 같이 산해관성의 모양새가 용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만리장성의 처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산해관성은 장성중 세워진 시기가 맨 마직막인 명나라 홍무 10년(서기 1381년)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만리장성의 맨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다.
산해관구의 만리장성은 크게 천하제일관 노룡두 각산장성으로 분리되어 있다. 원래는 장성의 한줄기로 이어져 있었다. 모진세월의 풍랑에 장성은 찢겨 남아있는 장성이 크게 세군데로 구분되어 있다. 산해관에서 만리장성을 보려면 세 곳을 필히 보아야 한다. 천하제일관은 만리장성 중 아니 중국의 모든 성 중에 그 웅장함과 견고함을 최고로 쳤던 관문이다. 노룡두는 위에서도 밝혔듯이 장성의 모양새가 용의 머리와 같고 바다에 용의 머리를 받친 상이라 웅장함과 모양새가 어우러져 근래 들어 많이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만리장성의 묘미를 맘껏 만끽하려면 각산산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아쉽게도 각산장성을 찾아가기에는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한다. 난 진황도역에서 택시로 각산산성까지 이동하였다. 미터 요금은 약 40위안 정도 나왔지만. 사전에 30위안에 가자고 협상하여 30위안만 지불하였다. 각산장성은 진황도시 산해관구에 자리 잡고 있지만. 여행객들에게 그리 잘 알려진 곳이 아니지만. 산해관이란 지명 상 각산산성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산해관 평야 지대가 각산장성과 발해만 사이에 끼워져 있어 명칭이 산해관이라 불리운 것이다. 각산장성은 입장료가 약 3개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관광코스가 장수산 연새호와 케이블로 연계되어 있다. 각산장성만 이용할 경우에는 입장료는 30위안 케이블카로 장수산까지 연계되어 이동할 경우에는 150위안 이다. 가을에는 연새호와 어우러져 경관이 장관을 이룬다. 난 장성의 끝자락까지 올라가지 않아서 겨울에도 운행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각산장성 등정은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 된다 장성은 높지는 않으나 상당히 가파른 편이었다. 몸이 불편하신 분은 장수산 연새호 케이블카로 각산장성으로 이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날씨가 청명한날 각산장성 장대에서 바라보는 산해관과 발해만은 정말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왔다면 굳이 북경의 만리장성 팔달령을 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지만 산해관의 청명한날이 가을에 집중되어 있어 각산장성을 찾기는 그리 녹녹치 않다. 각산장성을 보고 하산하니 어느덧 시계는 5시를 가르킨다. 한국시간으로는 저녁 6시다. 해는 급히 저물고 있었다. 각산장성 입구를 나오니 주차장은 텅 비어 있어 나를 반겨주는 대중 교통편은 없었다. 난 앞에서 산해관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중국 연인들을 나침반 삼아 뒤를 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가용 한 대가 내 앞에 선다. 뭐라고 말을 해 대고 있지만 뭔지 도통 알아 들 을 수가 없었다. 대충 짐작으로 산해관까지 영업하는 사제 택시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위험을 무릎 쓰고 15위안에 진황도역으로 가는 버스편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내가 아는 몇 개의 중국단어를 쓰며 산스산루 33번 버스를 타는 목적지를 지도와 함께 가르키며 알려주자 운전사는 씩 웃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33번 버스 정류장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난 부근 지리도 모르고 날은 어두어 지고 있어서 자가용은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었다. 진황도역까지 목적지를 말하고 버스요금 2위안을 지불하고 나니 버스 창밖은 약간의 어둠을 띄기 시작했다. 피곤이 엄습해 왔다
진황도시 여행지는 중국인에게는 크게 세 가지, 한국인에게는 네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 역사의 자랑스런 흔적으로 불리는 동쪽 끝자락에 명나라때 세워진 만리장성이다. 산해관의 만리장성은 크게 천하제일관, 각산장성, 노룡두로 나눠진다. 두 번째는 진황도 북쪽에 위치한 조산을 중심으로 한 관광코스이다. 세 번째는 한국 사람에게 매우 특별한 곳으로 근래 들어 각광받는 곳이 있다. 고조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흥산문화의 중심지인 갈석산이 있다. 끝으로 발해만으로 형성된 북대하구의 북대하 남대하 비취도 등 아름다운 해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여름 관광레저시설이 백미중 하나이다. 이 네가지 중 산해관이 진황도의 역사적 자랑이라면, 북대하구는 북경과 당산등 하북성 주민들과 동북3성의 중국 주민들이 애용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해변시설이다. 진황도 북대하구 시민들은 여름해변이 개장되는 두달 동안 벌어먹고 산다는 말도 있다. 북대하 해변은 한국으로 따지면 동해안의 경포대, 남대하 황금해안은 부산 해운대와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요즘 새롭게 부상하는 진황도의 해변가가 있다. 중국 8대 해변 비경 중 하나라고 불리는 비취도이다.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근래 새롭게 떠오르는 휴양지인 비취도를 다녀왔다. 비취도는 한문으로 翡翠이다. 소개 책자나 안내인으로부터 들은 바는 없지만 이름이 비취 인 것으로 보아 발해만에서도 맑은 해변으로 소문나 있어 물 색깔에 비추어 섬 이름을 가져오지 않았나 유추해 본다.
오후 2시 진황도 이미그레이션을 지나 CIQ를 빠져 나왔다. 먼저 나오신 신사장님이 택시를 전세로 잡고 나와 가라오케 임사장님을 기다리고 계셨다. 신사장님은 5년전 비취도 부근 창리에서 냉동 낚지 사업을 하신 분이라 비취도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으셔서 일행의 안내를 맡기로 하였다. 우리는 중국돈 200위안에 택시를 계약했다. 비취도란 발음을 내기에는 우리 일행은 너무 어려웠다. 우선 창리 부두(마토)로 가자고 했다. 언추 1시간 가량 내달려 갔다. 북대하와 남대하 황금해안을 지나 차는 북대하구를 빠져나가고 있다. 차는 진황도 본시의 부속현인 창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약 10분 정도 달리자 창리 부두가 나왔다. 창리 부두는 한국의 이름 없는 부두와 같이 작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비취도는 거의 창리 부두와 맞붙어 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는 고작 50m 남짓 짧은 교량이었다. 다리라기에는 조금 크고 교량이라기에는 너무 짧았다. 육지를 건너자 갈대숲이 나왔다. 비취도가 국제조류보호중심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주변의 풍부한 갈대숲과 드넓은 해안은 국제 철새들의 안식처로 자리 잡기에는 주변 환경은 매우 풍부한 곳이었다. 도로 포장은 모래로 덮어져 있다. 차가 고속으로 움직이기에는 도로 사정은 요동이 심하였다. 자동차로 자못 4km를 이동하자 비취도 해수욕장 입구가 나왔다. 입구에는 비취도란 선명한 대리석 푯말과 입장료를 받는 안내소, 차의 통행을 막는 철문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입장료는 1인당 35위안 이었다. 중국에서 입장료를 100% 다 지불하는 중국인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 일행도 중국에서 보낸 세월이 평균 5년이 넘으니 중국의 법을 따랐다. 입장료지불액은 혹자들이 자신의 시각으로 유추해 보았으면 한다.
입구를 지나자 모래언덕(사구)이 해안선을 따라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2~3km를 달리자 비취도 해안의 주차장과 부대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첫 시선은 당혹감으로 이어졌다. 너무 열악한 주변 환경이 황당함으로 나의 눈에 비취도를 비치게 하였다. 현재까지 진황도 시내에서 비취도까지 직접 이동할 대중 교통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창리 부두에서 비취도까지 이동한다는 것도 여간 쉽지 않았다. 현재 비취도의 해변과 위락시설을 이용하려 한다면 자가용과 철저한 준비물을 지참하여야 할 것이다. 10월말이라 그런지 해수욕장은 폐장되었고 해변가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개인적으로 겨울해변가를 좋아하는지라 한산한 비취도의 해변은 나에게 더욱 정답게 다가왔다. 비취도는 드넓은 해변가를 앞으로 하고 해변과 모래언덕 중간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등이 다른 해수욕장들 보다 탁월한 입지 조건을 가졌다. 비취도는 깨끗하고 드넓은 해변보다는 사막 사구의 모래언덕이 비경이다. 아시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사막 사구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큰 모래섬에서 모래언덕은 동네의 작은 뒷동산과 같이 보이는 따뜻함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비취도는 총면적이 7km2로 여의도에 2/3에 육박할 만큼 큰 섬이다. 섬은 여의도와 흡사할 정도로 육지와 거의 면해 있었다. 언덕 정상에 올라서니 모래언덕 뒤편 육지에서 불러오는 바람이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세차게 불어왔다. 이 거대한 모래언덕은 해변과 육지에서 맞불어오는 두 맞바람이 부딪혀 고운 모래알들이 거대한 모래 탑을 쌓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세찬 바람에 흐날리는 모래알은 우리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입안과 귓속으로 축적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모래알의 깔깔함은 더 이상 모래언덕의 정상에 서있기 힘들게 하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해변가를 여행하였을 때 기억에 남는 몇 곳의 해변중 이 비취도도 내 추억의 한 자락을 남길 것이다. 일본의 이브스끼 모래온천과 함께 수십 년 후에도 기억에서 유추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은 나도 이미 비취도와 사랑에 빠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사고는 일상과 동일하지 않다. 나는 일반적인 일상보다는 다른, 내게만 특별한 입지조건과 배경을 좋아한다. 여름해변 보다는 겨울해변을. 좋은 부대시설 보다는 자연스런 배경을 지니고 내 카메라 앵글에 속에 잡혀가는 피사체가 덜 인공적인 떼가 묻어 있기를 좋아한다. 현재 비취도는 일상적인 관광 상품으로 만들기는 힘들다. 그러나 비취도에는 특별함이 분명히 있다. 비취도는 해외 유명한 유수 해안가 보다는 상품성이 많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굳이 한 여행의 테마를 잡고 동남아시아나 대양주의 유명한 해변을 찾아 나서서 느끼는 해변의 추억도 좋겠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해변의 추억담을 얻는 개인적 여행은 행복을 더욱 느끼게 한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얻는 충족감이 상대적으로 더욱 큰 것 같다.
비취도는 확연히 북대하, 남대하와 다른 장점과 차이점을 지닌 곳이다. 몇 년후 중국의 대표적인 시설로 자리 잡을 이곳 현대화의 이기가 넘실대지 않는 현재, 진황도를 찾는 분이라면 난 비취도를 찾길 바란다 다음블러그에 올라온 한 여름날의 비취도1 다음불러그에 올라온 한 여름날의 비취도2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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