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시에티카 하반기 양효숙 수필(지리산 통학버스).hwp
지리산 통학버스
일흔 한 살의 엄마가 취직했다. 이번에는 학교 통학버스 보조원이다. 유치원생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닌다. 에어컨 켜놓고 기다리는 이십 대 기사에게 유치원생처럼 인사하고 버스에 오른다.
첫 출근을 앞두고 간밤 뒤척였단다. 그 옛날 안내양이 생각나 오라이 연습도 하면서 단꿈에 젖어들었다. 열일곱 살에 시집와서 해보고 싶은 것 못해보고 엄마가 돼 버렸으니 억울한 생각도 든다. 내가 엄마 발목이라도 잡은 것처럼 미안하기도 하다.
어쩌다 신세타령은 들어봤지만 나이타령은 하지 않았다. 일만하다가 죽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이 나이에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며 웃는다. 논밭일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알았고 생계와 생활을 위한 일이 다르게 체득됐다.
엄마에게도 꿈이 있고 진짜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무심했다. 지리산을 떠나 제 자리 찾고 제 살기 바빴다. 지리산이 거기 있었던 것처럼 엄마도 그렇게 다가왔다. 늘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요즘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엄마 목소리가 낯설면서도 새롭다. 생기 넘치는 봄 산을 닮았다. 엄마는 늘 그러면 안 되는 존재였다.
누군가 하는 일에 대해 부러워하다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또 다른 누군가가 엄마를 부러워한다. 어떻게 해서 들어가게 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과 내가 좋아하는 일의 차이를 되묻도록 만든다.
하루 종일 매여 있지 않아서 좋다. 엄마의 말이기도 하고 내 말이기도 하다. 지리산 개울가 집이 어쩌면 엄마의 말뚝 아니었을까. 때론 고삐 풀려도 훌쩍 떠나지 못한 채 풀려있는 엄마의 보따리다. 여든한 살의 아버지와 놀지 않고 스물다섯 총각과 하루 두 번씩 꼬박꼬박 바람 쐬기 바쁘다. 이제는 당신보다 열아홉 살 어린 내가 엄마처럼 거꾸로 잔소리 한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할 테니까.
언제나 엄마 생각을 좇을 뿐 따라갈 수가 없다. 항상 저 만큼 앞서가는 엄마 발자국을 들여다보며 쪼그린 채 앉았다. 엄마 립스틱을 몰래 바르고 헐렁한 신발 신어봤던 어린 나로 가끔 돌아간다. 엄마 흉내만 내볼 뿐 엄마처럼 살지 못한다.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들다는 취직을 했으니 새 옷 한 벌 사 입으시라고 돈을 내려 보냈다. 엄마 취향에 맞는 가방도 사 보낸다. 가방 많다고 사지 말라던 엄마가 보라색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몇 년씩 같은 가방 들고 다닌다는 것도 알았다.
애들이 할머니라 하지 않고 선생님이라 부른다. 세상에 애들한테 선생님이란 말도 들어보고 이전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바뀌었다. 그 안에서 전율이 느껴진다. 사실 교사 직업이 아니어도 선생님이란 말이 보통명사처럼 이곳저곳에서 통용되는 세상이지만 뭔가 다르게 와 닿는다. 선생님이란 직함이 보라색 옷처럼 보란 듯이 엄마를 휘감는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고 주변 환경과도 어우러진다.
등하교 안전지도를 하다보면 변수와 돌발 상황이란 것도 이따금씩 일어난다. 늦잠 자는 아이를 안아서 차에 태우기도 한다. 그나마 초등학생들은 낫다. 통학버스 안에 자기 자리가 있고 알아서 하는 맛이 있다. 앉던 자리에 앉다보면 자기 자리처럼 편안하다.
본능적으로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누군가 앉으면 싫다. 익숙한 걸 좋아하고 낯선 풍경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사람은 성장한다. 경험이 풍부하다고 안심하기 힘들고 모든 확률과 통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또한 엄마라는 안전벨트를 매고 오늘도 출퇴근한다. 엄마의 기도로 이 정도 살고 있구나 고백한다. 산등성이 너머 더디고 느리게 흐르던 그 길을 통학버스가 달린다.
지리산에서 나고 자라 스스로 나무가 되고 작은 산이 된다. 논밭에서 부르면 언제든 뛰어간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게 어디 곡식뿐일까. 생산적인 선순환이 일어난다.
밭곡식처럼 통학버스 안에서도 새싹이 자란다. 정채봉 동화작가가 어디선가 말해주는 듯하다. 콩씨네 집안 아이들은 온실 속에서 콩나물이 되기도 하고 광야로 내보내 콩나무가 되기도 한다고. 신기한 스쿨버스가 따로 없다.
월급을 주려는지 이름을 쓰라는데 한꺼번에 쓰느라 힘이 들었나보다. 이름 석 자 모두 쓰지 말고 성씨 하나만 쓰면 안 되겠냐고 말했단다. 태어나 이름을 제일 많이 쓴 날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흔 너머의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