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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2 백두대간 큰재-중화지구대-신의터재
0. 일시 : 2007. 07. 21.
0. 위치 : 경북 상주시 공성면 외 5개면
0. 코스 : 큰재-회룡재-왕실재-백학산-개머리재-지기재-신의터재
0. 산행 : 6시간 40분
0. 날씨 : (상주지방) 22 ~ 26도C 하루 종일 흐림(구름 많음), (대전지방) 22 ~ 28도C 아침 약간의 비 후 흐림.
금년은 서둘러 일찌감치 여름을 맞는 것처럼 법석을 떨며 더위가 찾아왔다. 지난 6월 중순에 이미 강원도 홍천지방은 36.1도를 넘어서 최고치를 기록하며 한여름에 들어섰다. 그로부터 한 달이 흘러 이제 삼복인 초복을 지나 中伏으로 달음질치며 절정에 치닫고 있다. 그러나 장마철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날씨는 일주 내내 쨍하는가 싶으면 구름으로 뒤덮였다가 가끔 비를 뿌리며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후텁지근하다.
그래도 날짜는 흐르는 강물 흐르듯 한 치의 양보나 어김없이 잘도 지나간다. 이를 놓칠세라 초목은 결코 머뭇거림 없이 왕성한 의욕을 보이며 가지가 쭉쭉 잘도 뻗어나고 열심히 당분을 모아 열매를 키워가고 있다. 몹시도 덥지만 이도 잠시일 뿐 다시 머잖아 다가올 가을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벌써 밀잠자리 떼가 하늘 높이 날개를 펴고 비행하고 있다. 마치 창공에서 에어쇼라도 하는 양 부산하다.
집을 나서니 가량비가 내린다. 일기예보에 가끔 비가 내릴 거라 하여 준비는 단단히 하였지만 출발부터 그러니 좀은 난감하다. 보문산에서 흘러내린 안개는 버드내까지 내려와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어찌 망설이랴. 지금 대간을 가는 길이라며 서둘렀다. 버스는 지난번 큰재의 폐교 운동장에 내려놓는다. 8시 45분,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린다. 운동장은 물이 고여 논바닥처럼 질척거린다. 울타리를 돌아 산길에 접어든다. 아침부터 풀을 뜯던 검은 염소 세 마리가 화들짝 놀라 바라본다. “에에헤헤~~”, 특유의 울음소리도 잊고 멍하니 서서 좋은 산행되라고 환송이라도 하는 것 같다.
푹신하게 깔린 낙엽을 밟으면 물기가 찔끔찔끔 흘러나온다. 소위 스폰지 효과다. 물기를 양껏 흡수하였다가 서서히 흘려버리기에 물 흐름도 조절이 될 것이다. 어지간히 답답하였던지 눅눅한 날씨에 지렁이도 나왔다. 두더지가 지나갔는지 흙을 들쑤셔 놓았다. 그만큼 토양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따금 시내외곽 길바닥에서도 지렁이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햇볕이 들면서 지렁이는 수분을 잃어가며 포장도로에서 그대로 아스팔트 구이가 되어가는 모습에 안쓰럽기만 하였다. 한 번 밖으로 나오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서둘러 다시 흙속으로 찾아들고 싶어도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호젓한 산길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이 외진 곳에서 사람을 만나니 왜 그렇게 반가운지. 마치 좋은 소식이라도 안고 마중을 나오는 사람 같다. 생전 처음 대하는 사람이지만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활짝 웃어 보이면 “예, 안녕하세요?” 그도 무척이나 반가운가 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오시는 길입니까?” 란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아, 예 기지재에서 오는 데요” 서로 비껴가면서 “즐거운 산행 되십시오” 하며 너스레를 떨지만 뭔가 훈훈함이 감돈다. 어찌 보며 이런 마음이 사람의 본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평소에는 전혀 느껴볼 수 없는 짜릿하고도 인간미가 뚝뚝 떨어지는 아주 정겨운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간이라고는 하지만 평범한 산골이나 다름없었다. 논도 일구고 밭도 일구고 그냥 수시로 넘나들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진정한 주인들의 터전이었다. 큼직한 회룡목장에는 질 좋은 한우가 쑥쑥 자라고 밭둑을 가다보면 사과밭에 담배밭 고추밭이 있는가 하면 주렁주렁 포도밭이 줄을 이었다. 야트막한 산길은 마치 바다에 작은 물결이 밀려오고 밀려가면서 만들어낸 물이랑 같다. 작은 언덕 같은 봉우리를 올라서면 내려서고 내려서면 다시 올라서기를 반복하면서 굽이굽이 그 줄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쫓아가다 보니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도 갔고 방향이 뒤바뀌며 마치 미로게임을 하는 양 순간순간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탕~~!” 느닷없이 대포소리가 들려왔다. 산자락을 요란하게 울리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된다. 사냥꾼이 있어서가 아니라 새를 쫓기 위해 조작해 놓은 공포의 총소리였다. 이 산속에 벌써 새들이 농작물을 헤집고 있나보다. 지금쯤 무엇을 탐내고 있을까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저 먹을 만한 것이면 마구 달려드나 보다. 그 옛날에는 허수아비만 보아도 질겁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다가 점점 약아져서 지금은 안중에도 없이 오히려 놀이감으로 여기는데 영악한 저 녀석들에게 언젠가는 이 굉음의 대포소리마저 한낱 속임수라는 것을 눈치채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놈들아! 너희도 소위 “서리”라는 것을 하는 것이냐. 서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순간적 호기심에 심심풀이처럼 지나다가 참외 수박 몇 개, 혹은 복숭아 사과 몇 개 슬쩍 하였느니라. 그래서 마음씨 좋은 주인은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며 아량을 베풀었느니라. 그렇지만 지금 너희가 하는 짓은 한낱 서리가 아니라 도적질이다. 고얀 녀석들 같으니라고 너희 힘으로 가꾸지 못하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떳떳하게 먹이를 해결할 일인데 왜 하필이면 남의 농작물에서 손쉽게 먹이를 구하려 하는 거냐. 가뜩이나 어려운 농민들을 너희들까지 괴롭히고 있는 거냐.
밭을 일구어 오랫동안 생명줄로 움켜잡고 열심히 가꾸며 살아오던 터전을 하루아침에 내동댕이쳐 버렸는지 묵은 밭엔 풀만 무성하게 돋아나 금세 다시 산으로 돌아갈 성싶었다. 그런데 그 버려진 땅에는 어쩐 일로 유난스레 망초꽃 그도 개망초가 그렇게 많이 피어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아마도 농사를 망쳤다고 나무라던 그 꽃이었나 보다. 선인들의 한숨의 눈물꽃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이제 아예 버려 버렸으니 이를 어찌 하냐고 한탄하는 절규의 모습은 아니었을까나 싶어 어쩐지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나무둥치에까지 시퍼렇게 이끼가 돋아나 삶의 노래를 구가하고 있다. 가끔 원추리 꽃도 보이고 싸리꽃에 산초꽃도 예쁘게 피었다. 동네뒷산으로 찔레며 산딸기넝쿨에 억새가 무성하게 우거져 맨살을 긁어댄다. 칡넝쿨이 무성하게 뻗어나고 있다.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안하무인이다. 닥치는 대로 휘어잡고 올라선다. 아예 온통 휘덮어버렸다. 남이야 질식하거나 말거나 배려라고는 조금치도 없이 오직 저만 살아보겠단다. 그래야 혼자는 결코 일어서지도 못하며 바닥을 기어야 하는 주제인데 꽃향기만을 독특하다.
속리산으로 뻗어 내려오던 백두대간 마루금이 천황봉에서 갑자기 꼬리를 낮추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화령재에서 꼬랑지마저 접고 숨겨버린다. 속리산에서 덕유산에 이르는 구간 중 50~60km가 고원 중에 저지대로 이번 구간을 특별히 중화지구대라 부른다. 그만큼 큰재에서 화령재까지는 백학산(615m)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50m~400m 내외로 평탄하여 백두대간 마루금은 잠시 쉬어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높고도 웅장한 산세에 맛들인 사람들에게는 좀은 싱겁고도 때로는 따분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곳이다.
여기서 지구대(地溝帶)란 지구로 이루어진 띠 모양의 낮은 땅을 말하는데 지구(地溝)는 거의 평행을 이룬 단층 사이에 지반이 꺼져서 생겨난 낮고도 길쭉한 골짜기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지구대로는 마식령산맥과 광주산맥 사이에 있는 추가령지구대가 가장 유명하며 그 외에도 길주명천지구대, 형산강지구대 등이 있다. 이곳 중화지구대는 고원의 저지대로 평지보다 기온이 온화하여 평균기온이 3~5도 정도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곳 상주는 당도가 높은 양질의 사과와 포도 그리고 감과 같은 과수가 각광을 받는다.
상주(尙州)는 삼국시대에는 신라에서 경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다. 또한 삼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격심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격전지로 아주 긴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낙동강 중류지역의 중심지였던 창녕 일대가 비사벌주(比斯伐州)라면 상주(尙州)는 상류지역의 중심지로 신라의 사벌주(沙伐州)로 말기에는 아자개가 점령을 하고 그의 아들 견훤은 후백제를 일으켰으나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격화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신검에 이르러 왕건에게 몰락하게 되는 후삼국시대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뿐더러 상주는 일찌감치 삼백 (쌀,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으로 자리 잡음하며 중국의 낙양으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도 유서 깊은 곳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이에 칠백 리 물길을 자랑하는 낙동강이란 이름이 낙양(상주)의 동녘을 흐르는 강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면 조선조에 와서 경상도란 지명도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명명할 만큼 상주는 예로부터 아주 중요한 고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북 깊숙한 내륙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외지면서 발전보다는 오히려 소외든 느낌이 드는 곳이다
큰재(320m)는 추풍령 쪽에서 다가가면 평지의 고원지대 같은 곳으로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지만 상주의 옥산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골짜기가 깊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보여서 큰재라는 이름을 얻었는가 하면 회룡재(340m)는 지형이 마치 용이 뒤를 돌아보는 산세로 이루어졌다 하여 용이 회귀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개터재(380m)는 민초들에게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할 날짐승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개터재라 하는가 하면 산세의 모양이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왕실재(400m)는 산세가 왕궁과 같다 하여 당초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왕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어 사이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로 불렀으며 이 구간 가장 높은 봉우리인 백학산(615m)은 물 좋고 공기 좋던 이 산에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눈이 내린 설산처럼 하얗다 하여 백학산(白鶴山)이라 불렸다. 그러나 그도 이제는 머나먼 옛 이야기일 뿐 어디에서도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그만큼 세월은 시나브로 많은 변화를 겪어내며 자연조차 수없이 바뀌어가는 것을 탓만 하랴.
개머리재(290m)는 산세가 개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개머리재라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도 하여 소정재라 불리기도 한다. 지기재는 도적들이 많아 통행하는 민초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던 곳으로 적기재라 불렀으나 사투리를 따라 지기재로 변형되었다. 신의터재(280m)는 본래 신은현이었으나 일제암흑기에 어산재로 개명되었다가 1995년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준신이 이곳 상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장렬하게 순직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신의터재로 재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큰재를 출발하여 크고 작은 언덕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래도 마을과 마을로 발길이 이어져 수많은 애환을 담아가며 오래도록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는 회룡재를 넘고 개터재를 지나 왕실재에서 백학산을 올랐다. 다시 개머리재를 지나고 지기재에서 신의터재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을 마감하였다. 여러 곳에 포장도로가 관통하면서 차들이 싱싱 내달린다. 살짝 맥을 끊어놓았지만 그 도로를 횡단하는가 하면 개간된 농경지를 타고 넘으며 산행은 계속되었다. 팔음산포도 브랜드 광고판이 세워질 만큼 포도밭이 즐비했다.
대간이지만 큰 나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질한 잡목이 시야를 가리고 바람마저 없는데다 바닥은 수분이 많다보니 후텁지근한 한증막처럼 정말 많은 땀을 쏟아냈다. 가슴에 매댄 수건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땀방울을 찍어내며 수건을 비틀어 짜면 주룩주룩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뿐이랴 옷자락도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모두가 내 몸에서 흘러나온 무기물 노폐물이었다. 집을 나와 도로 하나만 건너면 버드내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내리는데 그곳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미련스레 스쳐 지나기도 하였다.
숲이 축축하다 보니 온갖 버섯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녀석, 노란 녀석, 빨간 녀석, 보랏빛에 흙빛으로 색깔도 가지가지지만 모양 또한 다양하다. 접시모양, 우산모양, 앙증스런 인형에 전파송수신판 이며 먹음직스러운 빵들도 있었다. 여기저기 낱개로 솟아있는가 하면 집단을 이루고 있기도 한다. 때로는 어느 조감도를 정교하게 배치한 모습을 보는 착각에 들기도 한다. 저 중엔 먹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끝내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듯싶다가도 제 풀에 사그라지는 뒷모습은 검게 끄슬려 축 쳐져 주저앉는 모습이 참으로 추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산행은 아침부터 많은 비가 올 거라는 염려와는 달리 비는 오질 않았다. 짙은 구름 속에 태양을 볼 수 없는 하루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비록 빼어난 경관은 아닐지라도 중화지구대라 일컬을 만큼 백두대간 고원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능선을 굽이굽이 돌아갔다. 밭둑을 지나고 농로에 포장도로를 따라 동네를 거쳤다. 호박밭에 복숭아밭이며 밤나무 단지에 잣나무단지며 여기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전형적인 시골의 뒷산을 답사라도 하는 듯 푸근한 마음에 정감이 들기도 하였다. 이 또한 새로움에 감칠맛이 났던 풍경으로 여기며 한 구석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어진다. - 2007. 07. 21. 文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