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 봉미산 신륵사 성지순례 2 驪州 鳳尾山 神勒寺 聖地巡禮 二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 ~ 1376)
나옹선사(懶翁禪師)는 고려 공민왕 때 왕사(王師)로 이름은 원혜(元慧)이며, 법명은 혜근(慧勤)이고, 호는 나옹(懶翁), 당호(堂號)는 강월헌(江月軒)입니다.
창수면 가산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20세 때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어른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품고, 곡덕산 묘적암에 가서 요연(了然) 스님에게 출가하였습니다.
요연 : "여기에 온 것은 어떤 물건이냐?" 나옹 :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거니와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요연 :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느니라. 다른 스님에게 가서 물어라."
스님은 그 곳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동안 좌선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중국 원나라 북경에서 지공선사(指空禪師) 를 뵙고 깨달은 바 있었고, 2년 동안 공부하였습니다. 다시 남쪽으로 가서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서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았습니다.
복룡산에서 천암(千巖)의 선실에 들어 갔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선지식을 찾은 뒤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지공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전해 받았습니다. 법의와 불자를 전해 받는 다는 것을 법을 전해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1358년 귀국하여 가는 곳마다 법을 설했고, 1360년 오대산에 들어갔습니다. 공민왕이 청하여 내전에서 법요를 듣고, 신광사에 있게 하였습니다.
1371년 왕사가 되었고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뒤에 회암사(檜巖寺)를 크게 중건하고 문수회(文殊會)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회암사에 엄청나게 대중이 모이자 위기를 느낀 조정에서는 이것을 문제 삼아 왕이 밀양의 영원사로 가게 했는데 스님들과 불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부디 힘쓰고 힘쓰시오. 나 때문에 하던 공부를 그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 걸음은 여흥(驪興 여주) 땅에서 멈출 것이오."
그리하여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神勒寺)에 머물게 되었는데 여기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때 세수 57세며 법랍 38년입니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며, 목은 이색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있습니다.
이날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오색의 고운 구름이 산봉우리를 덮는 것을 보았고, 다비를 마치고 뼈를 씻을 때는 구름도 없는데 빙 둘러 수백 걸음 안에 비가 내렸으며, 스님의 사리가 150과가 나왔는데 이 사리에 기도를 드리니 다시 558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또한 스님들과 불자들이 잿속에서 사리를 몰래 빼내어 모셔간 수가 부지기수라 합니다.
스님의 사리에서 신령한 빛이 나왔는데 사흘만에야 그쳤다고 합니다. 달여라는 스님은 꿈 속에서 스님을 다비한 터 아래에 용이 서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생김새가 마치 말과 같았다고 합니다.
스님의 위패를 모신 배가 회암사로 돌아올 때는 비도 오지 않았는데 강물이 넉넉히 불어나니, 보는 사람마다 이것은 여흥 땅을 지켜주는 용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해 팔월 한가윗날 회암사 북쪽 언덕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정골사리는 스님께서 열반하신 신륵사에 모셨는데, 탑 위에 돌종을 만들어 덮은 것은 감히 망가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간곡히 알리는 뜻이라 합니다.
신륵사 보제존자(普濟尊者) 석종(石鐘) 보물 제228호
조사당 우측으로 산으로 올라가면 보제존자 나옹스님의 사리탑이 나옵니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 중간에 2단의 계단이 있고, 탑신은 위로 갈수록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수평을 형성하고, 그 위에 보주(寶珠:연꽃봉 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했습니다.
이 부도의 형식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와는 다른 것으로 라마 탑계에 속하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이러한 계단탑 형식의 부도는 통도사와 금산사 등에 있는데 이러한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전개 되는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예라 합니다.
돌아가던 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 그의 제자들이 각신과 각주가 절의 뒤편에 있는 봉미산 중턱에 묘역을 마련하고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라 합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제 229호
보제존자 석종비에 대한 글을 옮겨 봅니다.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
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보제존자(普濟尊者) 석종(石鐘) 앞 석등(石燈) 보물 제 231호
설명을 옮겨 봅니다. 석종 앞에 서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
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 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안내판을 읽는 법우님
판돈녕(判敦寧) 김병익(金炳翼) 송덕비(頌德碑)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나옹(懶翁) 스님이 입적 전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 합니다.
신륵사 다층전탑(多層塼塔) 보물 제 226호
설명 전문을 옮겨봅니다.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
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 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
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길상님을 찍으니 탑이 제대로 나오네요.
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 230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신륵사 홈페이지 내용을 옮겨 적어 봅니다. 이색은 고려말의 삼은(三隱) 중 한 사람으로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영숙 (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2328년(충숙왕15) 영덕군 영해읍에서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41년 성균관시에 합격한 이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 발전을 꾀하였다. 1377년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배되어지고 이후 석방된 후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고 1396년 신륵사에서 죽었다.
신륵사와 이색의 관련된 기록은 아버지 이곡이 발원하여 조성하려던 대장경을 1380년부터 3년에 걸쳐 완성하여 2층의 장경각을 지어 절에 봉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옹은 한 때 신륵사에서 교류하였으며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신륵사에 세웠다.
내부에 비석이 있는데 많이 훼손되어 있음.
설명 전문을 옮겨 봅니다.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
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
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이 비석은 장방형(長方形)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대석(臺石)을 놓고 비좌(碑座)
를 마련하여 장방형 홈을 파서 대리석 비신(碑身)을 꽂았으며 그 좌·우에 석주
(石柱)를 세워 지주(支柱)를 삼고 개석(蓋石)을 덮은 것이다.
이렇듯 양지주를 시설한 형식은 고려말(高麗末)에 보이는 것으로 주목된다.
대석에는 복련(覆蓮)과 귀꽃문 등으로 장식하고 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게 했다. 이곳 신륵사는 원래 대장각(大藏閣)이 있어서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하생(門下生)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
을 만들어서 수장(收藏)하던 집이었다.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제반
기록을 새긴 석비로서 고려 우왕(禑王) 9년(1383)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썼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명문(銘
文)이 많이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대장각기비를 살피고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강월헌(江月軒) 정자. 옆은 삼층석탑
나옹 스님이 입적하시자 이 암반에서 다비를 모셨다고 합니다. 그 후 이곳에 정자를 짓고 나옹 스님의 호를 따서 강월헌(江月軒)이라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강월헌(江月軒)은 나옹 스님의 당호(堂號)입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백화님 내외. 청산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길상님.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다정한 보화님과 길상님
저도 서 봤습니다. 물같이 바람같이...
봉향각(奉香閣) 정조 20년(1796)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된 지 1년만인 정조 21년에 봉중각 12칸 좌우 식칸 10칸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모두 유실되고 현재는 정면 3칸의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이후 법당의 기도를 맡아 보는 부전 스님의 처소인 노전(爐殿)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요사(寮舍)로 사용되고 있다 합니다. 여기의 현판은 죽로지실(竹爐止室)로 되어 있습니다.
죽로지실(竹爐止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 죽로지실이란 차를 달여 마시는 차향이 그윽한 집이란 뜻입니다. 죽로(竹爐)란 차를 달일 때 솨아~ 하는 소리가 대밭의 댓바람소리와 같다고 해서 운치있게 부르는 말입니다.
강월헌까지 돌아 보고나니 출출한데 보화님께서 공양간에 가서 공양이 되는지 알아 보니 종무소에 신고하면 가능하다고 해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종무소에서 공양비가 얼마냐고 하니 안 받겠다는 것을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며 2만원을 보시했습니다. 그래도 싸지 않습니까? 공짜는? 대머리 될까봐.. ^^ 이에 앞서 백화님께서 점심을 극구 사시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다음 기회를 보자고 했습니다. 점심 공양후 죽로지실(竹爐止室) 앞에서 백화님께서 준비한 커피 한 잔을 하고 목아박물관으로 향하려는데 여주에 사시는 지인을 만났습니 다. 예전에 절에서 합창단을 같이 하던 지인이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묘법님, 백화님은 다 예전에 함께 활동하던 맴버였습니다. 십 수년 만에 만나니 만감이 교차했네요. 그러나 목아박물관 등 나머지 일정을 같이 하자고 하니 극구 사양해서 얼굴 보는 걸로 만족하고 목아박물관으로 향했 습니다.
|
첫댓글 물같이 바람같이... 수고하셨습니다.강월헌..멋지네요
강과 어울어져 멋집니다.도 하나 떠 있으면 더 운치있겠지요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라는데... _()_
사진속에서 반가운 법우님들을 뵈니 좋습니다. ^-^
님 속에 정수님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_()_
좋으셨겠어요 함께 못한 아쉬움이 너무 크네요 ㅠㅠ
글쎄, 언제 함께 하실런지... 봄에나 한 번 같이 하려나... _()_
자세한설명감사합니다~~동참하지못해 못내 아쉽습니다 다녀오셔서 행복하셨겠습니다
신륵사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사전에 정보를 접하면 방문했을 와 닿는 것이 많을 겁니다. 다녀오신 분은 추억을 더듬고 못 다녀오신 분들은 사전 정보를 알아 두면 좋을 듯 해서 되도록이면 설명을 붙여 봅니다. _()_
....나무묘법연화경()()()
언제 사진을 올려 놓으시려는지... _()_
오랜만에 뵙는군요. 이렇게라도 만나니 반갑습니다.
원기님은 언제 보려나 _()_
무거운 짐 훨훨 ````````날려 버리고살았으면 좋으려만........ 역시 백우님
무거운 짐은 내려 놓아야지요 내려 놓기 힘드신가요 그러면 짊어지고... 훨훨 _()_
10년전에 다녀왔는대 감회가새롭내요 ()
10년 전과는 진입로 환경이 많이라져 있지요. 그러나 내부는 리 바뀐게 없지만 보수 공사 중이네요. 출장에서 돌아오셨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