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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벌의 3대 성장 엔진[1]-LG 그룹의 구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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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그룹의 창업주 구인회는 1907년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출생했다.
구인회는 호남의 우성(優性) DNA를 지닌 능성구씨로 명가 출신 기업인이다.
1931년 부친이 건네준 2000원의 사업자금으로 경남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이란
포목점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잘못 된 선택이다. 이것은 삼성의
단골 품목이기 때문이다.
구인회는 연때가 맞지 않는 품목에 손을 대서 모든 투자금을 날려 버렸다.
포목이란 원래 신라 여인들이 한가위 날 삼베 짜기 경연대회의 단골 품목이기도
했다. 이것을 호남 사람이 흉내를 내다가는 자본금을
말아먹기 십상이다.
그 후 1941년 '주식회사 구인상회'란 간판으로 운수업과 무역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제 길로 들어 선 분야이다. 구인회는 기러기나 봉 모양 날아다니는
특성을 지닌 호남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운수업이나 무역업을
진작 손을 대야 했다. 구인회는 1945년이 되는 해에 장인과 6촌간인
허만정씨의 아들 준구와 3:1 정도의 출자금 비율로 부산에서
동업을 시작했다. 이것도 호남 정서에는 무난한 편이다.
영남 기업은 이런 식으로 동업을 하면 손해 보기 쉽다. 영남 사람들은
고지식하며 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동업을 하여 손해 보는 경우가 많다.
호남은 전술 전략적인 두뇌 회전이 빨라서 동업을 하면 망하는 확률이
영남 사람보다 낮다. 호남 사람은 시작과 종결 시점을 정확히 판단 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 영남 사람은 의리와 도리만 따지다가 당할 확률이
높다고 본다.
구인회는 미 군정청이 승인한 무역업 허가 제 1호 업체 '조선흥업사'를
설립하였다. 원자재 등을 수입하여 락희화학을 일으켜 세웠다.
이것은 진일보다. 호남의 신출귀몰하는 특성을 살린
착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은 미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북적이었다.
영남 사람들은 시끌시끌한 시장 바닥을 원래 좋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남 사람들은 이것을 호기로 삼는 장기가 있다.
구인회는 화장품을 팔아 사업을 성장시켰다.
영남 기업의 이병철은 화장품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인회는 '락희화학공업사(현재의 LG화학)'를
통해 화학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영남 기업의 이병철은
화학이나 수학 등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화학을 황당한
학문이라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보면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장난으로 치부한다.
호남인은 변화무쌍한 분야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신바람이
곧잘 난다. 구인회는 화장품 용기 뚜껑을 플라스틱으로 갈아 치웠다.
화장품 뚜껑을 화학제품으로 바꾸면서 화학산업의 황제가
되려는 꿈을 키워났다.
드디어 부산에 플라스틱 가공제품 공장을 세우고 미국에서
사출성형기를 발주해서 수입한 기계로 비눗갑, 칫솔, 빗 그리고
플라스틱 식기류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럭키치약'을 개발해 대히트를 치게 되었다. 영남 사람들은
그 길쭉하게 생긴 플라스틱 용기에서 허연 액체가 질질 나오는 제품을
보고는 상스럽다고 생각한다. 영남의 이병철이 주로 양반스러운 품목에
전력투구하고 있을 때 호남 DNA를 가진 기업 구인회는 시장 바닥이나
유흥가에서 신바람이 나는 품목에 투자를 확대하였다.
화장비누와 세탁비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안양에
합성세제공장을 건설하고 국내 최초로 가루비누 '하이타이'와
‘샴푸’를 개발해 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였다.
구인회는 계속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품목의 일종인 전자사업에 손을 댔다. 1950년 후반 국내 최초의
전자공업사인 금성사를 설립하고 1959년에는 국내최초의 라디오를
개발하였다. 이에 특히 영남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상자 속에서 귀신의 소리가 난다고 난리가 났다.
1960년에는 국내 최초로 선풍기를 생산했고 이어서 국내 최초로
자동전화기를 출시하였다. 점입가경이다. 또 국내 최초로 냉장고를
개발했고 흑백TV(66년), 에어컨(68년), 세탁기(69년) 등을 쭉쭉 내놓아
국내의 전자전기부문의 사업에서 드디어 황제가 되었다.
이 금성사(Gold Star)가 지금의 전자회사인 호남의 DNA를
가진 LG전자다. LG는 현재 국내 재계 2위를 자랑하는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능성구씨, 구인회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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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집안은 조선조 후기의 최고 엘리트 그룹 174개[부록편 참조]
중에서 3대 무반 벌족[이하 무벌이라 칭함]의 하나에 든다.
이 집안은 덕수이씨 이순신 장군 집안, 평산신씨 신립 장군 집안과
함께 174개 엘리트 그룹 중에서 유능한 장군과 무인을 가장 많이 냈다.
능성구씨의 시조는 구존유이다. 그는 생활근거지 능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능성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옛 지명이다. 능성구씨의 혈관에는
호남 사람의 유전자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근초고왕 무령왕 성왕 등
희대의 책략가와 견헌 흑치상치와 같이 신출귀몰하는 병법의 귀재들의
유전자가 맥맥히 고동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전주이씨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한 호남 유전자의 고동이 오늘날 LG 그룹의 창업자 구인회에게
까지 전해 진 것으로 보인다. LG 그룹은 카리스마가 있는 기업으로
삼성의 복병이다. 언제라도 삼성의 심장부를 강타할
저력을 지닌 기업이다.
구인회 집안의 파조 구순은 영응대군[세조의 아우]의
사위인 수영의 손자다. 구순은 시조의 11대손이다.
구인회의 능성구씨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저명한 벌족을
이루었으며 무장의 용맹을 떨친 전형적인 무반 계열의 집안이다.
이 집안은 특히 인헌왕후를 배출 하였다. 인헌왕후는 조선 원종(元宗: 추존)의
비(妃)이며 능성구씨 좌찬성 능안부원군 사맹의 딸이고,
인조의 어머니이다. 이 집안사람들은 구사맹이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는 더더욱 겸손하고
근신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자제는 물론이요 노복까지도 세력을 믿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영남 사람들과 다른 처세 철학에서
나왔다. 영남 사람들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겸손과 성만(盛滿)의
계(戒)에서 그렇게 하지만 호남의 DNA를 가진 구인회 집안사람들은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자기의 정체를 숨기려하는 전술전략상의
차원에서 그런 철학과 처세술이 나온다고 봐야 한다.
이것을 능성구씨의 카리스마라 일컬을 수 있다.
이것은 삼성의 인간 중심의 경영 스타일과 상반 된 철학이다.
이병철의 삼성은 문신의 피가 흐르고 구인회의 LG는 무인의
피가 흐른다. 그러기에 철학과 처세술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병철 집안은 일원체제이어서 한 눈에 다 보이고 구인회 집안은
다원체제이어서 구성이 복잡하여 한눈에 다 보이지 않는다.
구인회 집안의 사상과 철학이 다양하다. 구인회 집안은
무벌이기는 해도 용장의 피와 현상과 문신의 피가 함께
뒤섞여 흐른다.
구인회 집안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대장에 해당하는 장신(將臣)을
8명이나 배출하였다. 그 주인공은 구인후 구문치 구굉 구인기
구일 구선복 구성임 구선행 등이다. 이 중에서 구인후와 구문치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대장이 되었다. 구굉 구인기 구일은 3대가
대장을 지냈다. 구성임과 구선행은 부자가 다 대장이다.
이 집안은 오늘날 해군 참모총장 격인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가 6명이나 된다. 그리고 또 오늘날 육군 사령관 격인
병마절도사가 12명이나 배출 되었다. 이 가문은 무과급제자를
백 수십 명을 냈으며 정경급이나 아경급 장군들도 많이 배출 하였다.
구인회는 순의 후손이다. 구사민은 순의 아들이며 구사민의 형, 사안은
중종 부마 능안위이며 구사민의 질녀[조카]가 인헌왕후다.
구사민의 조카 굉은 인조반정을 한 혁명가이다.
굉을 비롯하여 사민의 종손자 인후[정사공신 2등]와
인기[정사공신 3등] 증손자 음 등의 혁명가가 이 가문에서
많이 나왔다. 구인회는 그 혁명가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았다.
구사민의 증손 음은 인회의 직계 할아버지이다.
구음은 택당 이식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장령이란 오늘날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 정도에 해당하는
요직이다. 그리고 구음은 사헌부 제2인자인 사간에까지 올랐다.
사간이란 요즈음으로 말하면 대법원장 다음의 자리인 대법원 부원장 격이다.
구음은 죽어서 파주군 광탄리에 묻혔다. 구음의 아들 문유는 고령현감을
지내고 도호주주례(圖互註周禮)를 간행하였으며 문집을 남겼다.
구문유도 인회의 직계 할아버지이다.
구문유의 손자 준도 인회의 직계 할아버지로서 1770년에
경남 진양[진주의 옛 이름]에 묻혔다. 그 뒤 그 후손들이
함안 의령 진주 등지에 퍼져 살았다. 그러고 보니 구인회 집안은
경남 지역으로 낙향 한 지 약2백 수십 년 가까이 된다.
구인회의 친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그러고 보니 구인회는 당당한 옥당 선비의 손자다. 옥당은 조선조 선비들이
흠모하는 청요직의 대명사이므로 그 영예가 적지 않다. 구인회 집안은
그의 조부나 증조부대에 퇴계 이황 가문과 교유가 있었다. 진성이씨
퇴계 이황 다음으로 퇴계 집안의 인물이라고 고종이 칭송을 한
향산 이만도가 구인회의 직계 선조 음의 묘지명썼다.
구인회 일가가 살던 이 지역은 지리산 동남부 지역으로 큰 인물은
많아도 족벌 형성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울타리형 지세라서
산발성이 강한 편이다. 영남 북부 안동권은 둥우리형 지세라서
군집성이 매우 강하다. 군집성이 강한 지역 안동권은 조선조 후기에
유자 집단이 많이 형성 되었다. 그러나 군집성이 약한 영남 하도 경남지역은
그런 집단이 거의 형성 되지 못하였다.
영남 북부 지역 안동권은 경주를 시발로 하여 동국의 정통 보수파 토박이
양반들이 주류를 이룬 반면 영남 남부 경남권 가야 지역 사람들은
신라 지역보다 좀 터프한 면이 있으며 신라의 진골 성골 귀족들에게
밀리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 지역은 전통을 중히 여기고 격식을
고수하지만 가야 지역 사람은 자유 분망하며 파격을 좋아 하여
개성파 인물들이 판을 쳤다. 신라의 경주 터줏대감들은 이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영남 북부 지역 안동권은 퇴계 이황과 같이 도학 문장에 정통한
학자들이 무리로 나왔고 영남 남부 지역 경남권은 남명 조식과 같이
실천과 행의를 중히 여기는 행동파들이 많이 나왔다.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조의 영남에서는 경학 이론에 밝은
영남 북부 지역 사람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조선조 후기의
유학 전성기에는 영남 남부 지역 사람들은 영남 북부 지역
사람들에게 기가 눌려 자기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를 못했다.
현대에 와서 서양의 실용 철학이 이 세상을 풍미하게 되자
경남 지역 사람들은 활개를 치게 되었다. 지리산 동남부 지역은
이제 한국의 위대한 인물의 산실 역할을 맡기 시작하여
거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전 현직 표시 생략], 전두환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등이
이 지역에서 나왔으며 재벌 총수도 많이 나왔다. 삼성 그룹 이병철 회장은
의령군 정곡면에서 태어났고 효성그룹 회장 조홍제는 함안군 군북면에서,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 허창수 GS 회장,
허진수 GS칼텍스 사장,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등이
다 이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중량급 정치인도 많이 나왔다. 4선 의원으로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낸
권익현은 산청에서,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도 산청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과학기술처장관을 지낸 최형섭은
진주에서 나왔다.
그리고 장군도 많이 나왔다. 백석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재열 전 3군사령관, 정화언 전 논산훈련소장, 이상의 합참의장,
이갑진 전 해병대 사령관 등이 이곳 출신이다.
이 많은 인물 중 LG의 구인회 집안은 우뚝하게 솟으며 호남 특유의 DNA를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구인회 일가는 파주 등지의 경기도의 기운,
경남 진주의 기운에다가 영남 북부 지역의 태백산의 기운도
고루 받아서 신라의 정통 기질도 발현 하였으며
가야의 개방성과 강대함의 기질도 시현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남의 우성(優性) DNA의 특성을
가장 많이 드러냈다.
구인회는 동국 최고의 무벌의 반열에 오른 명가의 후손이다.
지리산 동남부 지역에서 구인회 일가가 가장 좋은 혈통을 지닌 명가의
후손이라 자부할 만하다. 동국 최고의 명가의 후손이 오늘날
한국 최고의 기업을 이룩하였으니 그 영광스러움이
어찌 크다 하지 않겠는가?
LG는 선조들의 호남 우성(優性) DNA 발현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여
새 시대의 소명에 부응해 나가고 있다. LG는 동이족의 샛별 기업으로
5천만 민족의 복리를 위한 전술전략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LG의 구인회 일가는 유교 사회에서 혁명을 주도한 선조들의 피를 받아서
한국의 유교적 자본주의의 꽃을 만개시킴으로써
명가의 성장 엔진의 위력을 세계만방에
더욱 더 크게 과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