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속칭"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돤 진영에 1400~1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법을 독자적으로 처형할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성내에 있는 두채의 옥터와 호야나무는 많은 교우들이 옥사 또는 교수형을 당한 곳이다.
첫 순교자는 1797년 의 정사박해로 체포돠어 1800년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프란치스코] 이다.
해미 서문밖 순교지
해미읍성 안에서 저잣거리를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를 떨처내는 문"
서문이 있다. 이눈의 누각에는 지성루라쓰여있는데 치명자들이 가시밭과 같은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문을 나가면 그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잡아들일 때 빼았던 십자가와 묵주등을 이 문의 난간에다 넣어놓고 지나가며 밞게하여천주학을 버리고 배교하도록 하였다.
이곳은 처형하는 곳으로 그 방법은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도 하였다. 또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부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게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