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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1/21(목) "남을 정죄하는 영에서 자유로워 지는 법"
(마7:1-6) 89장 425장
오늘도 그리스도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한다. 오늘아침 주께서 다루시는 주제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관하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신다. 비판하지말라 하셨다. 판단의 죄를 다루셨다. 이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 많이 범하는 죄이다. 판단을 잘하는 사람은 남을 정죄고 심판하는 죄를 범한다. 이는 남은 정죄하는 영의 다스림 받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의롭다는 영이다. 모든 것이 영에서 나옴. 자기 우월감이다. 판단,비판은 비난으로 발전되기 일수고 남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삶의 태도를 항상 준비하는 악습이다. 타인을 경멸하려는 영이 내안에 움직인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긍휼없는 심판을 받았다. 인간관계가 어렵다. 자신이진실로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탓이다. 제대로 십자가를 만나면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못한다.
참된비평은 사회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악평은 비판의 죄를 낳는다. 더 나아가면 남의 결점을 즐기는 상태로 영이 자란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유쾌하지 못한 말을 들었을 때 유쾌해진다. 늘기억해야한다. 타락한 심령엔 남의 죄가 잘 보인다. 오늘 주님은 진짜염려가 하나님 나라염령로 기도하는 것처럼 진리로 자신을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ㄱ다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자리 범하지말고(괘씸죄) 자신의 들보를 먼저 보라 그러면 다른 사람을 혹평, 정죄하는 영에서 해방될 것이다.
비판과 책망에 관한 영적 규칙들 7:1-6
우리 주님은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관하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신다.
1. 판단하는 일에 대한 주의(1,2)
주께서는 판단하는 일을 금하신다. 비판하지 말라(1절).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하지만 우리의 형제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말이 모든 사람에게 법이 되는 재판석에 앉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경멸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롬 14:10). 우리는 경솔하게 비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앙갚음의 정신과 해를 끼치려는 마음으로 무자비하고 몰인정하게 비판해서는 안된다. 특별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의도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는 일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는가? 그에게 조언을 해주고 도울지언정 그를 판단하지는 말라. 주께서 이러한 금지를 강조하신 이유는 네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 만일 우리가 감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고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또한 판단받게 된다는 것을 당연히 예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일에 자비를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이 또한 자비가 없는 판단을 받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것이고 그로부터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약 3:1).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 그는 겸손히 참고 견디는 자는 원하시고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그에게 상당한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둘째,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에 온유하고 자비를 보이며 그들을 비판하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제들을 용서하는 자를 용서하시듯, 그는 그의 형제들을 비판하지 않는 자를 비판하시지 않을 것이다. 자비를 보이는 자가 자비를 얻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에 대한 비판은 보응의 법칙이 따르는 것이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2절).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심에 자주 비율의 법칙을 준수하신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다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이 잘 못하는 것을 철저하게 성경은 채점자가 되지 마라 만일 그렇지않으면 그렇게 채점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 책망을 들었다. 우리도 바리새화 되지 않도록 각별히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바로세워 가야 한다.
2. 책망에 대한 주의(3-5)
남을 비판하는 일이 큰 죄이기에 남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다 책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들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잘못을 자기들도 범하고 있거나 나쁜 잘못을 짓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들이 책망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은 남을 책망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 말씀에는, 자기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에 대해서는 조그만 잘못을 가지고 다투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예민하게 감시하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트집 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비난이 있다.
죄에는 정도가 있다. 어떤 죄들은 상대적으로 티끌만한가 하면 다른 죄들은 들보만하고, 어떤 죄들은 하루살이만한가 하면 다른 죄들은 낙타만하다. 다른 사람들의 죄는 경감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죄는 심각하게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그것을 생각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와, 심각한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은 회개나 개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
자신은 아주 큰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책망하는 일에는 가장 앞서며 마음 놓고 그 일을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처럼 엄격한 것이 곧 외식의 표이다. 너희 외식하는 자여(5절).
네 자신은 고치기를 주의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네가 부끄럽게 네 형제에게 나로 하여금 너를 고치게 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말씀에는, 책망하는 자들에 대한 훌륭한 규칙이 있다(5절). 올바른 방법을 쓰라는 것이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먼저 내 자신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 형제를 고치도록 도울 수 있고 그를 책망할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남을 나무라는 사람들은 스스로 흠이 없고 악의가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책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것은 개에게 주지 말며(6절). 이 말씀은 제자들의 복음 전파에 관한 규칙으로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 마음이 강퍅해지거나, 복음을 모독하거나, 복음 전파자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헛된 수고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보라. 그러면 돼지는 마치 네가 그에게 돌을 던진 것처럼 골을 내어 진주를 밟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개나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 좋은 충고와 책방이 곧 거룩한 것이며 진주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규례이며, 귀한 것들이다. 악한 자들 가운데는 그렇게 오랫동안 죄인의 길에서 행해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비웃는 자의 자리에 앉아서 공공연히 교훈을 미워하고 멸시하며 그것에 반항하는 자들이다. 교훈의 책망이 그와 같은 자들에게 잘못 주어지면, 그것은 책망하는 자를 개와 돼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멸시와 해악에 빠뜨린다.
이같은 죄는 구제할 길이 없다. 치료받으려고 하지 않고 도움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누가 치료하고 도울 것인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안전에 대해 지극히 염려하셨으며, 그들을 찢고 상하게 할 난폭한 사람들에게 내맡기시지 않으셨다. 스스로 자멸하지 않으려면 지나치게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참고 약2:13
16회-1/22(금)
17회-1/24(토) “내게 좋게 여겨지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자”
(마7:12) 35장 364장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주님의 가르침의 주제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여기서 참된 신앙의 본질적인 가지인 사람들에 대한 의와, 보편적인 의의 본질적인 가지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우리에게 강조하신다.
우리는 이 의를 우리의 규칙으로 삼고 의에 복종해야 한다(12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이것을 너의 원칙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하늘의 삶의 방식이다. 우리가 복될 수 있는 축보그이 말씀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알고 믿어야 할 것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오셨다. 공평의 황금률이란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해서도 안 되며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가하려고 하는 악을 다른 사람들에게 끼쳐서도 안된다.
오히려 우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을 그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이 법칙은 '너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대강령에 기초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지녀온 똑같은 애정을 우리의 이웃에게도 지녀야 하는 것처럼 또한 그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 자신이 이치에 맞으며 적절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삶을 어기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행하지 않음으로 오는 결과는 모두 우리의 몫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삶의 갈등은 관계에서 온다. 다른 삶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가 중요하다. 주님은 나와 이웃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생명을 귀히여기듯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슬픔이 있다면 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이 충돌한다.
주님의 생각이 밀려나 있다. 자아중심, 자아만족,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집단적 이기주의다. 정말 어느 상황에서든지 주님의 생각이 우선되야 된다. 주님 말씀이 생명으로 들려질 때 모든 것이 살아난다.
황금율을 실천하는 비결은 이웃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성결을 보고 전능하심을 보고 창조의 능력을 보기 시작할 때 그분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만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거기서 우리의 죄성과 비참성을 직면한다. “나는 부정하다, 나는 죄인이다”의식없이 하나님의 존전에 제대로 설 수 있는자 없다.
거기서 이웃의 죄도 보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내몸같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긴다. 내가 큰 은총을 입은 것처럼 그도 한없는 사랑을 입은자로 존귀한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인류를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바라본다. 주님처럼 그들을 보고 느끼려고 힘쓴다. 무엇에든지 대접 받고자 하는대로 대접하고자 한다. 그래서 서로가 행복해진다. 주께하듯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며 사랑하므로 주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
골3:12-17, 23-25
18회-1/25(월)“내 나라의 삶의 유형은 이러하니 너희가 선택하라”
(마7:13-14) 80장 359장
황금율 마7:12절을 지난 토요일 살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내 게맞추라, 내방식을 취하라 왜 나와 다르냐 의견이 갈라지고 맘이 상함. 차이의 존중이 잘 안됨. 부부간의 의견충돌 가장 빈번함. 나한테 맞추라 . 너 생각 내 생각 사이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을 붙드는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내게 해 주기를 원하는 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 가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천국시민의 삶의 원리인 산상수훈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분이 세우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주님은 내 나라는 이런 유형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다.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폭이 좁고 협착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쪽에 넓고 관대한 문이 있지만 그건 내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속적인 것과 함께 하지 못하기에 좁다. 자아가 살아서는 함께 갈 수 없기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성령에 의지하여 가야만 하는 삶이다. 때론 핍박당함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내 안에 이미 좌정하시고 계시지만, 내 생각과 삶을 진정으로 의탁하여 성령님께서 나를 임의로 주장하시도록 내어 드림으로 전진해 가는 세계이다.
복음의 본질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길 원한다. 모든 것의 지배는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지만 복음의지배 말씀의 지배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신앙을 본업으로 삼아 신앙에 힘써야 한다(13,14절).
죄의 악한 길과 거룩함의 선한 길에 대한 설명이 다. 단지 두 길, 즉 바른길과 그릇된 길, 선한 길과 악한 길, 천국에 이르는 길과 지옥에 이르는 길만 있다. 우리 모두가 그 중의 어떤 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장래에도 중간지대란 없으며 지금도 중간 길이란 없다.
넓은 길은 말한다. "너희가 그 길에서는 마음껏 자유를 누릴 것이다. 너는 네게 있는 모든 욕망을 가지고 이 문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 길은 너의 욕구와 격정들을 결코 저지하지 않는다.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할 수 있다." 사람들은 죄악의 길들에서 각각 자기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좁은 길은 말한다.
첫째, 그 문은 좁다. 옛 것은 지나가야 하고 새 마음과 새 영이 있어야 한다. 영혼의 경향이 바뀌어야 한다. 밖으로부터 오는 많은 반대와 싸워 뚫고 나가야 한다. 사람이 자신과 싸우기보다는 온 세상과 싸우는 것이 더 쉽다. 그럴지라도 개심에 있어서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좁은 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굽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하며, 그 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좁다. .
둘째, 그 길은 협착하다. 우리가 좁은 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광야를 지나야 하며 매우 넓으면서도 그 길을 좁게 만드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을 여행해 가야 한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매일의 시험들을 물리쳐야 하고 우리의 성향에 거스리는 의무들을 이행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움을 견뎌야 하고 고통과 씨름하며 지내야 하고 모든 일에 주의하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의지가 더욱 자라고 견고해질수록 그 길은 더욱 더 열리고 넓어지며 즐거워질 것이다.
셋째, 그 문은 그처럼 좁고 그 길은 그처럼 협착하다 . 그러므로 그것을 찾고 선택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주의하기 때문에 그 문을 지나쳐 버린다. 그들은 그 문을 애써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찾는이에게는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누리게 되는, 우리 영혼의 생명인 위로를 선물한다. 그리고 영원한 복, 즉 우리의 길 마지막에 이르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의 모든 난관과 불편들을 달게 받게 할 희망에로 인도한다.
2)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 각자의 중요한 관심사와 의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걸을 길을 선택하라.
진실하고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으로 그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은혜의 도움 없이는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 길로 계속 나갈 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므로 은혜를 찾고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결코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19회-1/26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다”
(마7:15-20) 535장 420장
오늘도 우리 생각에 변화가 이시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실 때 생각에 기름을 부으시며 변화를 가져옵니다. 가을 추수하면 같은 열매라도 상품가치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좋은 열매가 있고 나쁜 열매가 있습니다. 자연세계에서도 품종이 좋지 못한 나무는 값이 나가고 맛이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젓붙임을 통하여 고비용을 지불하고 품질을 개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종자를 만들어 좋은 열매를 얻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좋은 열매, 나쁜열매(corrupt[k
거짓 선지자에 대한 주의 7:15-20
우리는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주의를 받는다. 선지자란 본래 장차 될 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다. 구약에, 아무런 보증도 없이 선지자인 체하다가 결국은 그들의 허위가 드러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선지자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삼았다. 그래서 여기 거짓 선지자들은 곧 거짓 교사들을 말한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이며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가르침들 속에서 거짓 교리를 전하며, 사실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조심하며 그들에게 혐의를 두고 그들을 시험해 보라.
이 주의를 주시는 좋은 이유(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왜냐하면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겉치레가 아름답고 그럴 듯해서 충분히 속일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옷과 외모를 보고 속는 일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허울 아래에 감추인 그들의 계획이 매우 악하고 유해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외식하는 자들은 모두가 양의 옷을 입은 염소이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 우리를 속여 우리에게서 진리를 빼앗고 우리를 잘못으로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자들은, 그들이 어떤 모습을 가장하든지 간에 우리 영혼에 해를 끼치려고 한다. 바울은 그들을 '흉악한 이라'(행 20:29)라고 불렀다. 속기가 아주 쉽고, 속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므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이 주의 속에서 표준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16-20)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일들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살전 5:21). '너희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것이다(16절) 이러한 대조의 실례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려 주는 그 열매에서 보게 된다. 우리가 나무 껍질이나 잎사귀를 가지고 언제나 나무들을 다 식별할 수는 없다. 또한 가지들의 뻗어 나간 모양을 가지고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열매로 그 나무들을 알게 될 것이다.' 열매는 나무에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을, 즉 나무와 열매 사이의 일치성을 주장하고 계시다. 만일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안다면 그 나무에서 어떤 열매가 맺힐지를 알 수 있다. 아무도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나무들이 그와 같은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타락하고 사악하며 불결한 마음은, 죄로 말미암아 마침내 불에 던져질 가시나무와 엉겅퀴와 같다. 둘째, 선한 행실들은, 포도와 무화과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좋은 열매이다. 셋째, 이 좋은 열매는 깨끗한 것이 불결한 것에서 나올 수 없는 것처럼 결코 악한 자에게서 기대될 수 없다. 반면에 만일 그 열매가 어떤것인지를 알면, 그 열매로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으니라(18절). 그러나 이때 그 나무는 그 열매로, 즉 평소의 열매로 평가되어야 한다. 사람은 특별한 몇 가지 행동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의 과정과 방향에 의해서 그리고 좀 더 잦은 일상 행동들에 의해서 알려진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16절).
첫째,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들 생활의 과정에 의해서 그들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행실이 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든가 아니면 불리한 증언을 하든가 할 것이다. 그들의 생활이, 사실을 증언한다. 하나님께서 보배를 질그릇 속에 넣어 두시나 그처럼 더러운 그릇에는 두시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교훈의 열매에 의해서, 즉 선지자들로서의 열매에 의해서 그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사람들을 이끌고 무엇을 사랑하게하며 어떤 것을 실천하도록 하는가? 만일 그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다른 은혜들과 더불어 진실된 경건과 겸손, 자비와 거룩함 그리고 사랑을 증진시키기를 지향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반대라면, 이 선지자들이 전하는 교훈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하고 세속적이며 다투기 좋아하고 불의하거나 무자비하게 만들며, 엄격한 규칙으로 가족을 떠나게 만드는 뚜렷한 경향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훈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갈 5:8)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다'(약 3:15).
이상에서 중요한 결론 도출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자기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의 지향점을 갖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자신과 이 땅의 죄와 연약성 아픔들을 보며 애통합니다. 온유하지 못해 몸부림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향을 가집니다. 화평을 도모하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죽이려 힘쓰며 마음에 청결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정결함과 거룩함의 통로로 서길 갈망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때때로 고난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령에 의지하여 그분의 인도함을 받고자 애씁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세속적이고 교만을 부치기는 영은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진정성부분을 다루시며 삶의 지혜적인 차원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접붙임의 은혜를 기억하며 속지 않는 은혜로 날마다 악한 세상으로부터 출애굽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0회-1/27(수)“주님이 아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은 이것이다”
(마7:21-23) 211장 213장
아무리 선한 행위의 삶을 살았더라도 주님께 접붙임을 받지 않으면 결국 찍어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오늘 새벽에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 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참된 것이 아니면 도무지 연결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가르침은 진정함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주(퀴리오스)라고 부르는 것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주라 부를 수 없는 자는 물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주라 부른다고 해서 천국에 모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렵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열정도 감정도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적인 진정한 열정과 육적인 열심히 함께하는 열광과 구별하십니다. 약2:19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하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믿음이 아님을 반증하는 예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대로 살지 못해 애통하며 거룩한 자기불만을 지니고 몸부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에서 나오는 믿음만이 유효합니다.
결론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길고 탁월한 설교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필요성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로 기술되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외적인 신앙 고백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 고백에 상응하는 생활이 없다면 그러한 고백 자체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평범한 충고로써 보여 주십니다.(21-23절) 왜냐하면 삶이 따르지 않는 고백은 진정ㅎ마이 결여된 거짓된 고백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7:21절로 그리스도의 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즉 은혜와 영광의 '나라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말과 혀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인정하고 그에게 요청을 하며 그에게 합당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가 충분히 천국에 이를 수 있으며, 또 마음을 아시고 마음을 요구하시는 이가 이러한 겉모습에 그렇게 쉽사리 속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여 주여하지 말며 주의 이름을 부르거나 담대히 고백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경건의 능력은 없으면서 모양만 가지고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안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에 이르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뜻, 사실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 곧 그의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 곧 이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말과 행동은 종종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가겠소이다"하고 말한 자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마 21:29).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일을 그의 명령에서 하나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발람과 가야바는 예언하도록 강요받았었고, 사울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선지자들 중에 있었으나 그 사실이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의 이름을 사용한 것 뿐이다.
"주여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도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유다가 귀신을 쫓아내었으나 그는 멸망의 자식이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서도 자신에게 귀신이 씌우거나 귀신의 종노릇하며 일생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방언과 병고치는 은사는 사람들을 세상에 알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참된 거룩함과 성화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산을 움직이거나'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보다 더욱 탁월한 길입니다.(고전 13:1,2). 은혜는 권능을 행함이 없어도 사람을 천국에 데려갈 것이나, 권능을 행함은 은혜가 없이는 결코 사람을 천국에 데려가지 못합니다.
무익한 탄원이 거절됩니다. 입법자이신(21절) 그분이 여기서는 법에 따르는 재판장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절).
그리스도는 왜 그리고 어떤 근거로 그들과 그들의 탄원을 물리치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이 훌륭하다는 큰 명성을 얻으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일 수가 있습니다. 지금 그러한 자들은 장차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거절의 표현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즉 만일 그가 주께서 그의 백성들을 아시는 것처럼 그들을 그의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사랑하셨다면 그는 그들을 알아보시고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입술의 고백뿐이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봉사에는 나아가지 않는 자들을 주님은 받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에 그들을 인정하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21회-1/28(목) “지혜로운 영혼의 건축자로 이 땅을 살아가라”
(마7:24-29)
예배전 359장,301장 예배후 204장
오늘 아침 주님은 우리네 인생을 집을 지어 가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두 가지 형태가 되며 이는 전혀 다른 결말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반석 위에 지은 집입니다. 두집은 평소에는 잘 구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이 오고 바람이 불어오게 되면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눅6장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땅을 깊이 반석이 나올 때 까지 파고 자기집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전혀 파지도 않고 기초를 닦는 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축대도 쌓지 않고 집은 빨리 갖고 싶어 아무데나 기초를 쌓았습니다. 모래 위에 지었습니다. 홍수가 나고 창수가 나니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부류는 들은 바를 행하는 자들이며 다른 부류는 듣고도 행치 않는 자들입니다. 오늘 아칩 주님은 이 두 부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고 제안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합니다. 비교적 소수일지라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듣는다는 것은 겨우 그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너희 귀는 복이 있도다'(마 13:16,17). 그러나 만일 우리가 듣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제정하신 율법뿐만 아니라 계시하신 진리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린 매일 주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는 길 밖에는 살아 남을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듣는 것에만 만족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겔 33:30,31 사 58:2). 그것은 마치, 씨는 뿌려졌으나 도무지 싹이 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만 하거나 행치 않는 자들은 천국에 이르는 길 도중에 앉아서 여행의 목적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청중들은 두 건축자들의 비교 가운데서 그들의 참된 성격과 상태가 잘 드러납니다. 한 건축자는 지혜로와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 건물이 폭풍우에 견디고, 다른 건축자는 어리석어 모래 위에 지었기 때문에 그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이 비유가 일반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우리의 영혼과 영원에 대한 행사를 확실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주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에 복종하여 '그의 발 아래 앉은' 마리아처럼 좋은 편을 굳게 붙잡는다.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 비유의 특별한 부분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들을 가르쳐 준다.
우리들 모두에게 지어야 할 집이 있으며, 그 집은 천국에 대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코 이 점을 유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언제나 여기에 있을 것처럼 이 세상을 위해서 집을 짓고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짓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들의 배요, 유일한 즐거움입니다.
이 집을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마련된 반석이 있으며, 그 반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우리의 소망이십니다.(딤전 1:1).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위에 소망을 두는 자들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모든 것과 해와 배설물로 여기는'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함을 즐거워합니다. 반석 위에 튼튼한 기초를 놓고 짓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건축자들입니다.
천국에 가기를 소망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이 반석을 무시하고 모래 위에 그들이 소망을 세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것은 다 모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확실한 표징인양 그들의 세상적인 번영에 소망을 둡니다.(호 12:8). 건물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도 약한 모래 위에 자기 집을 건축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기초하고 있는 것을 시험할 다가오는 폭풍우가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25절). 시련은 때때로 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마 13:21)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구별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심판이 오는 그때가 폭풍우가 밀어닥치는 때 그때는 이 소망들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이 부르셔도 이 세상을 내려놓고 주님을 만나 뵐 소망 가운데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은 복됩니다. 이 땅에 사는 누구든지 그때 이 하늘나라 소망들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소망들은 폭풍우가 올 때 견고히 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위로들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확실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 같이 죽음을 이기는 능력으로 건축자의 힘과 노래가 될 것입니다.
그 지혜로운 건축자가 생의 마지막 날에 이르게 될 때 그 소망들이 그에게서 죽음과 무덤의 공포를 제거해 줄 것이며, 그 소망들은 마지막 날의 시험을 견딜 것이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 씌워질 것입니다.(고후 1:12 딤후 4:7,8). 할렐루야!!!
어리석은 건축자들이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어떤 것 위에 세운 소망들은 틀림없이 폭풍우의 날에 그들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가 '그 집을 의지할' 것이나 '그 집이 서지 못하리라(욥 8:14,15).' 폭풍우의 날에, 즉 건축자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고 그것이 그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바로 그때에 그 집은 무너집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고백을 하는 신앙생활, 말씀위에 집을 짓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가장 비통한 파멸입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화가 청중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28). 그런데 여기서 두려워할 것은, 그들이 그 가르치심을 듣고 얼마 동안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기는 했지만 그를 따르려고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훌륭한 설교를 칭찬하면서도 여전히 무지와 불신앙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놀라기는 하지만 성화되지는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놀란 이유는, 그가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자와 같이'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9절). 서기관들에게서 나오는 말에는 아무런 생명이나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듯이 그의 강화를 이끌어 가셨고 그의 교훈은 곧 하나님의 법이었고 그의 말씀은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각자가 1:1로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집을 잘 지어서 그날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상급이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벧전 5장 6-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합심기도) 우리 모두 지혜로운 영혼의 건축자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참된 소망의 영원한 집을 믿음으로 지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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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사님 수고 많으셨어요 매일 가고 싶었지만 .드문드문 함께함에 속상했어요.
고마워요. 지지와 격려.. 축복축복~ 영은가족 모두모두 집 잘 지어가길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