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박'이라는 닉으로만 여러 선배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렸는데, 제 등단작을 올립니다.
저는 분당 서현에서 오교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오교수님 밑에서 글공부를 한 지가 만 2년이 되어 가는 햇병아리입니다.
등단작 '감자'는 공부 시작한 지 석달 정도 지나서 쓴 글인데, 교수님께서 과분한 격려를 하시며 등단을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수필이라고는 대여섯 편 밖에 써 보지 못한 상황에서 등단을 한다는 것이 너무도 민망하여 미루어 오다가,
작년(2008) 봄호(창작수필 67호)로 등단을 하였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제 부족한 점만 보이고, 글 공부가 너무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많은 도움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감 자
이 화 용
나는 감자꽃이 노란지 흰지 모른다. 감자밭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텔레비전의 농촌 체험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탐스럽게 줄줄이 딸려 나오는 감자를 캐내는 장면을 보고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 고작인 별 수 없는 도시인이다. 인터넷 검색 창에 들어가 서너 번 클릭을 하면 감자에 대한 모든 것을 선명하게 알려 준다. 원산지는 어디이고, 심는 시기며 수확하는 시기는 물론 감자 꽃이 노랑이 아니라 흰색이나 연보라색이라는 것에서부터, 감자 요리도 당장에 몇 가지는 해낼 수 있을 만큼 상세한 정보를 준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근대적인 단편소설인 김동인의 ‘감자’를 더불어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감자의 맛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감자의 맛은 활자로 표현되기에는 너무 담백하고 특색 없는 맛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밋밋하고 아무 자극이 없는 맛, 그래서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릴 수 있으니 너그럽고 친근하다. 늘 질리지 않는 것은 감자의 그 질박함과 무미(無味)함 때문이 아닐까?
시장에 벌써 햇감자가 나왔다. 하긴 감자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농산물에 시기가 따로 없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여름철로 접어드는 요즈음의 햇감자의 맛은 각별하다. 겉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박박 솔로 문질러 씻어서 압력솥에 쪄내면 금방 포슬포슬한 햇감자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감자의 맛은 껍질을 벗겨 소금물에 삶은 감자이다. 우선 너무 크지도 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크기의 감자를 골라 껍질을 벗긴다. 칼 끝으로 오목한 감자의 눈을 말끔히 파내고, 우유 빛 보다 조금 노란 빛이 도는 감자의 뽀얀 속살 빛을 눈으로 즐긴다. 냄비에 소금물을 넣고 가운데 주먹만한 종지를 엎어 놓는다. 껍질을 깐 감자를 종지 둘레에 빙 돌려놓고 불에 올린다. 물이 끓기 시작해 몇 분이 지나면 딸깍딸깍, 끓는 물에 종지가 들썩이는 소리가 난다. 감자가 익기를 기다리며 딸깍이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 거의 다 익어 가면 슬슬 구수한 냄새가 난다. 이 때쯤 불을 약하게 줄이면 졸아든 물이 종지 안에서 끓으며 감자의 뜸이 들여진다. 신문이라도 집어 들면 좋다. 아니 짤막한 꽁트라도 읽으며 마음의 뜸도 함께 들이면 더욱 좋다.
비 오는 초여름의 오후는 한가하다. 문득 학창 시절, 지방에 집을 둔 친구가 비가 오는 날 학교 파하고 집에 돌아 가 보면, 늘 엄마가 감자를 쪄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며 쓸쓸해하던 기억이 난다. 추억 속의 음식은 메마른 우리의 정서를 촉촉이 적셔주곤 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나 어머니가 해 주시던 소박한 먹거리가 새삼 그립다. ‘슬로우 푸드’는 마음까지도 순화시켜 주는 힘이 있다. 단지 공복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는 것 자체를 즐기고, 먹는 것의 소중함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식습관을 보면 그 집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곧바로 다음 행동으로 돌입하는 속전속결의 시대에, 이젠 먹는 것에 공을 들이고 여유를 부려 봄직도 하다. 꼭이 값 비싸고 기름진 음식이 아니더라도.
왜 그리 종종걸음을 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리는가? 기다림에 인색하다. 여러 단계를 거쳐서 얻는 것에 짜증을 느끼고 가장 빠른 길, 가장 손쉽고 간단한 길만 찾아 가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더 편해야 하고, 더 자극적이어야 하고, 더 화려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고 있다.
복잡한 조리법도 진한 양념도 첨가되지 않은 감자 그 자체의 맛 때문에 나는 삶은 감자를 좋아한다. 감자의 순수한 살빛을 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감자 껍질을 까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다소 귀찮은 과정을 거쳐서 얻어지는 순수하고 담백한 맛을 즐기기 위해서다. 삶은 감자는 열무김치와 잘 어울린다. 금방 내린 한 잔의 커피를 함께 마셔도 감자의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으니 너그럽다. 그러나 삶은 감자와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오이지이다. 통통하고 짤막한 조선오이를 젖은 행주로 닦아 물기 없이 말려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고, 납작하고 묵직한 돌로 잘 지질러 놓고 소금물을 팔팔 끓여 붓는다. 사나흘 후 오이가 노랗게 변하면 소금물을 따라서 다시 팔팔 끓여 이번엔 차게 식혀서 항아리에 붓는다. 이렇게 한 번 더 되풀이하며 일주일 정도 숙성시키면 짭짜름하고 아삭아삭한 오이지가 되는데 장마철 밑반찬으로도 그만이다. 지루한 장마철 까실까실한 돗자리에 배를 깔고 엎드려 삶은 감자에 오이지를 간해서 먹으며 대하소설이라도 옆에 쌓아 놓고 읽는다면 이거야 말로 웰-빙이고, 느리게 살기의 실천이 아닐까?
한 발짝 뒤로 물러 서 자신을 보자. 조금 더 단순하게, 조금 더 느리게 , 조금 더 여유롭게, 그리고 조금 더 심심하게 세상을 살자. ( 2007. 6 )
첫댓글 말미가 정말 좋군요. 그 중에서도 '그리고 조금 더 심심하게 세상을 살자.' 란 한마디는 참 의미깊은 말이라 생각됩니다. 저도 감자를 참 좋아합니다. 지금도 가끔 아침식사로 감자를 먹지요. 주로 소금에 찍어 먹지만 김에 싸서 먹어도 맛이 있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조금 더 심심하게..."는 교수님께서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라는 것을 저희 서현 식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살아 남은 귀절입니다. 남보다 더, 남보다 잘, 남보다 먼저가 돋보이는 시대에 저는 도리어 심심하게, 감자처럼 무미하게 사는 삶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감자와 오이지' 입맛이 당김니다. 어서 여름이 오면 나도 그렇게 즐겨 봐야지.
선풍기나 에어컨이 아닌 부채바람을 부치며 드셔요. 그래야 제 맛입니다.
감자밭에 가보지도 감자꽃도 본 적이 없으시다면서 감자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셨다는데 놀랍군요. 저는 선덕여왕릉에 열 번도 더 가봤는데도 한 자도 못쓰고 있습니다. 맛으로는 아무 특색없는 감자로 이렇게 맛있는 글을 쓰시다니, 대단한 문장가가 아니면 얘깃꾼이신게 틀림없을겁니다.
대단한 문장가도 이야기꾼도 못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어디 쥐구멍이라도.....어려서 부터 감자를 참 좋아했어요. 그러나 밭에 있는 작물로서의 감자가 아니라, 시장에서 사다가 쪄서 먹는 감자였죠. 제 다른 글에 "젊은 시절, 나는 도시 태생이라는 것이 인생에서 무언가 본질적인 것에 피상적으로 밖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자괴심에 시달리기도 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감자를 통해서 삶의 방법을 나름대로 한번 사유해 보았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이지 대목에서는 군침이 돌아 혀 뿌리가 아릿합니다...으으... 너무 민감한 상상미각의 고통이여...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저도 햇병아리 입니다... ^&^
감사합니다. 머지 않아 '오이지'의 계절이 오겠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감자에는 비타민C 가 많이 함류되어 있어 먹으면 피부가 좋아지고 혈액순환을 잘시켜 질병을 근절 시키는데 지대한 역활을 하고 고혈압,암 예방은 물론 다이어트에 좋은 식품입니다.해서 육류를 많이 먹는 선진국에선 감자를 많이 먹는답니다.나쁜면도 있습니다.감자의 눈을 잘 파내여 잡수시길 잘했습니다. 그속엔 '솔라닌' 이나'차코닌'이란 독성이 있어 많이 먹으면 호흡곤란 구토 설사를 하지요.좋은글 잘 읽었습니다.건필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인에게서 오이지 담그는 법을 들었어요^^
2/3일에 올리신 글을 이제야 읽는군요. 지난 일요일이 우리 농촌에서 전통적으로 감자를 캔다는 '夏至'입니다. 이때 먹는 감자가 맛에는 제일이랍니다. 감자 얘기로 시작한 평범한 글이었는데도 읽으면서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作家의 순수한 마음을 엿보는 편안한 글이, 대목대목 읽는이의 마음까지도 순화시켜주는군요. 저도 아침에 찐감자를 껍질채 먹고 나왔답니다. 편안한 글 잘읽었습니다.
이 글을 쓸 때의 마음으로, 늘 감자가 가진 소박하고 드러나 보이지 않으며 자신의 성정을 지켜나가는 마음으로 살고자 합니다. 부족한 글을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