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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나머지 시간의 윤곽]의 뒤표지(좌)와 앞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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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시간의 윤곽]
배정숙 시집 / 시로여는세상 시인선 018 / 詩로여는세상(2012.04.25)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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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시간의 윤곽
배정숙
그때 그들은 나를 축복해 주었다 바람이나 구름하고 도란도란 제법 너나들이하기도 했고 서낭당 몇 마장 앞까지 마중 나온 아버지는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 뱃속에서는 무엇을 잉태하건 무럭무럭 잘도 자라주었다 내가 밤의 속자락을 잠깐 동안 확실하게 밟고 지나갈 때는 신통하고 대견한 아침을 거느리고 왔으니 찰진 날들이었다
이쯤에서 나도 수고한 이들의 등을 토닥거리며 바치고 있던 돌 하나 내려놓아도 좋았다
알토란 같은 속 알맹이가 빠져나가고 꾸덕꾸덕하게 말라가는 가을 껍데기를 베고 휴식하는 사이 다른 얼굴로 등 뒤에서 낄낄대며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곳에서 주절대는 속울음이 어눌하게 스며들었다
빈집 앞에서 며칠을 허드렛일이나 맡아서 어정거리는 사이 쓸개와 찬밥그릇이 사생아처럼 물 위에 떠 다녔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쉬쉬하며 말하지 못하는 시간이 깊어 갈수록 소문은 어둠속에서 흉흉하게 자랐다
밤은 쉽사리 찾아왔고 구차하게 노숙하던 자리에 덧씌워지는 것 중에는 쓸 만한 슬픔도 있어 공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의 숨구멍을 열어주고 있었지만 내년을 약속하는 것 따위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동짓달 초하루쯤 그렇게 종일토록 내리는 비, 컴컴한 뒷방에 눈시울 가득한 외로움과 추적추적 죽이 맞는다
80년 깎아내고 남은 뼈가 벽 속에 갇힌 적막 잎에는 티끌이다
숟가락 무게를 달다
배정숙
우리의 심장은 둥글고 소박하지만 한 생이 통째로 매달려도 끄떡하지 않는 힘도 가졌으며 본심과 달리 매운 맛이나 쓴맛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연이란 없으며 우리의 노예가 되는 사람에겐 명징한 족쇄가 되고 주인이 될 때 꽃이 됩니다 그러나 가장 객관적인 이력을 좋아합니다
태어나 우리를 잡는 법을 배울 때 맹종도 따라 배우게 되는데 드물게는 저를 거부하는 자가 시위의 도구로 삼기도 합니다 인간은 우리 앞에서 숙연하고 겸손하게 눈금을 읽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저를 놓고 신기루 같은 착시현상에 무너지기도 하고 좀생이처럼 타협하는 세상 이야기를 저녁 상머리에서 주워듣곤 하여 제 귀는 아주 밝답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듣기 좋은 말은 우리를 하나 더 놓는다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이 우리의 피돌기를 따뜻하게 합니다 보리죽뿐인 소반 위에 할머니 꺼 삼촌 꺼 먼촌 고모뻘까지 우리가 놓이던 그때가 그리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밥그릇과 화친하는 관계인데요 사람들은 밥그릇을 가지고 싸움을 하지만 우리들 앞에서는 흉악한 이도 높은 분도 둥글게 입을 엽니다
이승을 떠난 삶의 오랜 진술도 저를 닮은 부드러운 곡선입니다
13월의 카네이션
배정숙
어머니는 이유離乳를 위한 마지막 사랑으로 13월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둠으로 가는 긴 여행 전 간이역 어디쯤이었나요 침묵은 침목처럼 이어지며 13월역에서 얼마간 머무르셨습니다
25시부터 시작되는 하루를 고요보다 더 고요한 함구로 채우고 32일부터 시작한 한 달을 저승꽃에 앉은 나비의 꿈으로 채워 앉지도 날지도 못하고 떠 있는 공空입니다
칼날 같은 절벽도 벽이 아닌 꿀샘으로 만들던 당신의 더듬이로 찾던 꽃은 창밖에 있었고 날갯짓에 자근자근 먹혀가던 어깨는 얼키설키 꽂아 놓은 냉담한 쇠붙이를 견디는 또 다른 수행의 진행형입니다.
고독으로 횡단하시는 13월은 그렇게 낮도 어둠이고 밤도 어둠으로 검은 바다로 걸어가는 소실점은 미궁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달나라 항아님을 증오하는 꿈을 꾸었다고, 히포크라테스가 주는 기적 같은 기별은 믿을 수 없다고 함부로 몇 개의 절망을 건져 올리고는 비어 있다 해도 우리의 중심이었던 당신의 심연에 도저한 13월의 카네이션을 달아드립니다
심폐소생술 포기 각서에 서명하고 병원을 나오는데 서녘 하늘의 불덩이 하나 가슴으로 확- 천벌보다 뜨거운 천불을 받았습니다
초경
배정숙
가장 신성한 발음이다
불그레 동쪽 하늘이 풍덩 빠진
비릿한 둠벙
누구도 범하지 않은 최초의 살냄새 속으로
미명의 가루가 풀어지며
비밀스러운 혼숙을 시작한다
그래서 장미는 붉다
가늠할 수 없는 물안개
풋향기
늘어지게 기지개 켜는 물풀들의 분홍 살점
탱탱한 세포들은 폐활량도 커서
부력 > 중력의 공식이 성립된다
그래서 두려움과 망설임을 비벼 먹고 나면
어쩌면 날 것도 같다
눈치 빠른 물잠자리 소금쟁이 방개들
달콤한 더듬이는
덩달아 사춘기의 끈끈한 즙을 빨아먹고
만월 이전부터 색칠한다
이제 황홀한 통증이 욱신거릴 것이나
진지하게 꿈을 핥아야 할 시간이다
수면 위로 퍼지는
자지러지는 웃음의 연속무늬
실핏줄까지 환히 보이는
얇고 낭창한
단 한 번의 순결
아 첫 달거리
퉁퉁 튀는 생명의 물길 따라
헐거워진 관절 사이
말랑한 연골 차오르자
수런대며 반란하는 바람의 흔적
단풍의 정의定義 또는 정의正義
배정숙
한곳만 바라보는 죄
기우뚱 한쪽으로 울음 우는 죄
낯선 꿈을 믿지 않는 죄
배후를 감춰 놓은 죄
신열에 포박당한 채
밤새 문초당하고도
입을 열 수 없는
저 그리움의 유배
제 살점 물들이며 외길로 가는 인연
그 본색의 기억은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다가
분신焚身 중이다
풍경 소리에 영글다
배정숙
깨알 같은 새소리 산사를 깨우고
저녁예불에 몸을 누인 밤나무는
아찔한 꽃내로 아침 공양 올린다
유월이 다 가도록 가사 자락에 휘감기던
밤꽃 향이
마곡사 내려오는 길목에 반질반질 영글었다
인심 한 되
갈볕 한 되
알밤 한 되가 덤이었는데
아뿔싸!
멀쩡한 껍데기 속으로
벌레들이 내고 있는 여러 갈래 길
밤에도 깨어 있던 풍경 소리
자비의 목어가 산문을 넘었나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가시 안에 가둔
다디단 속살을
미물들 양식으로 적선한 길
멀쩡한 껍질을 벗겨야만 보이는 득음
그 속 깊은 도량을 풀어 읽을 수 없는 우리는
에이 밤이 썩었네
그렇게 말할 뿐
소문
배정숙
어쩌나
이미 홀몸이 아닌데
옴지락, 태동도 시작했는데
시작과 끝의 외길에 팽팽히 당겨진 하늘
뜯겨진 솔기 사이로 거친 호흡이 샌다
입 간지러운 꽃눈들
무너지는 경계에 몸을 사리고
요리조리 눈치 거둬
잎조심한다
3월은 아무래도 불안해 저 혼자 허둥대면서
간신히 냉골에서 몸을 푼 강물에
분분한 봄눈이 칭얼칭얼
한쪽 귀로 들어와 한쪽 귀로 녹는다
어떤 영토로 걸어갈 건지
안착하지 못하는 네 이름을
무엇이라 불러 줄거나
밟고 선 금을 넘어서지 못해
안달하다 발설하는 사랑쯤일지
시린 어금니 사이로 농담처럼 빠져나가는
저 눈팔매질이
숨 가쁘게 몸 던지는 저 말보라의 손톱들이
가뭇없는 시간 너머로 던져질 때
지배하던 일상이 먼지가 된다
뒷걸음친 겨울의 발자취 위에
스산한 말들이 잠시 쌓였다가 녹는다
봄비
배정숙
어젯밤 잘박잘박 비가 내렸다
바싹 다가앉은 산
조선소나무 이마가 훤하다
쏴쏴 바람에서 박하 향이 나고
두견이도 어제 미리 목청을 다듬어 두었다
겨울 부스러기를 쓸어내는
몽당빗자루 소리가 싹싹
자연에 입술을 묻은 원어민의
본토 발음들이다
나비의 날개마냥 양쪽 귀가 가볍고
입맛이 칼칼하다
가까스로 고개 가눈 마늘잎
젖배 부른 옹아리에
오물오물 선잠을 깨는 것들도
늦부지런 났다
마른땅에 뿌려놓았던
시금치 씨앗
막 껍질을 깨고
놀란 땅속에선
지렁이, 땅강아지, 개구리, 배꼽을 내놓고
인기척을 살피는
맨살이 촉촉하다
발가락 끝까지 봄비의 지문이 선명하다
- 엄마 비와서 추워?
이 옷 저 옷 꺼내놓고
출근 준비 부산한 딸 아이 머리에선
봄비에 헹궈낸 능수버들 향기가
낭자하다
그래 제일 예쁜 봄을 입어라
3월에 쓰는 반성문
배정숙
얼어터진 양버짐나무
피부 밑에 부풀기 시작하는 모세혈관
하룻밤 사이 길을 넓혔다
입술에 묻어 있는 푸른 수액
새벽에 쓴 문장에 새눈이 트고
커지는 동공 안으로
3월이 들어앉는다
산고 끝에 살구꽃 몸 푸는 소리
홍매화 볼그레 숨 고르는 소리
사각사각 쟁기밥 넘어가는 소리
천둥지기 마른갈이 물 먹는 소리
스물 네 시간 깨어
목젖까지 찌르는 이 소리를
내 짧은 혀로는 발음하지 못한다
무딘 붓끝으로
받아쓰기는 더더욱 글렀다
꼬르륵 넘어 갈 때까지
화답花答을 찾아
나머지 공부를 해야겠다
식목일
배정숙
사람들이 한 그루씩 나무 심는 날
산벚나무는 환하게 꽃등을 접고
나는 한 그루 나무를 파내느라
쩡하고 가슴에 금이 갑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
배정숙
네 고향 담장 없는 초가에 가서
초례청에 설 거야
신접살림 차릴 거야
반듯한 길을 조금 구겨서 도랑을 내고 물길을 돌릴 거야 두런두런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하구로 흘러 둥근 저녁상을 차려 놓을 거야 내 안에 잠자던 교태를 깨워 올망졸망 토끼 같은 새끼들 낳아 그 상머리에 죽 앉혀야 해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오래전에 녹슨 바람이지
건성으로 지나쳤던 들꽃들의 속내를 끌어다 모종하고 제 몫의 뿌리가 착근하는 동안 늙지 않는 땅 이름을 지어주면 되지 낮게 엎드려 깊어지는 땅심과 약속의 손가락을 걸면 되지
오장육부의 비릿한 독소가 불온한 화음으로 노래하는 따위에 눈물을 쏟지 않아
굳어가는 혀로 말하는 것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어 가장 앳된 언어의 봉오리에서 옹알이로 묻고 답하려면 얼음물에 목욕재계하고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걸린 신당에 들어야 해
아슬아슬한 그림자 외줄에 매달고 부채만으로 허공을 나는 신 내린 삐에로는 가장 아찔한 박수에 깃발을 꽂고 무르익어가는 고독을 섬길 거야
쓰디쓴 설탕, 하늘을 나는 발바리, 노래하는 자작나무, 염기서열을 바꾼 절창의 게놈으로 날 신으로 설계할 수도 있어
곡진한 거짓말의 원소들과 혀 밑에 고인 느낌표와의 모의 공작을 슬쩍 눈감아 주었다가 그들의 복잡하고 치밀한 행각을 낱낱이 파헤치고 말겠어
낙지를 먹다
배정숙
물 나간 중왕리 바다
허름한 횟집
소금기 밴 햇살에 몸 단
뻘밭 훔쳐보며
낙지를 먹는다
살아남기 위해
흡반으로 모아진 본능
사방으로 뻗어보지만
어쩌랴
끓는 물속에서 격렬한 몸짓으로
두어 줄 글 남기고
조용해진 물 위에 찍히는 마침표
뻘 속의 어둠이 빛이었네
뻘 속의 은둔이 화려한 삶이었네
흡판처럼 달라붙어 씹히는
느낌표
뒷모습
배정숙
쉼표와 마침표가 또렷하게 어울리는
무당벌레의 꽃등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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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사계로 나눈다면 가을 어디쯤
이제야 소박한 밥상 하나 차려 봅니다.
내게 있어서 당신은
비움이며 채움이고
어둠이며 밝음이었습니다.
구속이면서 자유였고
물음이면서 답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저항의 역주행도 서슴지 않았지만
당신으로 인해
삶의 보폭을 조절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만큼 숙성되었나요?
이제 당신에게 詩라는 이름을 지어 드립니다.
2012년 4월, 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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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숙 詩集 [나머지 시간의 윤곽]
[ 해설 ] -
글의 속살이 만져지는 시
이기철(시인)
시는 나 아닌 모든 사람에게 자기 방식의 말을 거는 행위다. 이때의 말은 음성이 아닌 문자로서의 말 걺이다. 음성으로 전달되는 말 걺이 아닌 문자로 전달되는 말 걺은 문자라는 매체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간접적이고 우원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그 전달의 자장과 파문은 전자보다 후자가 더 크고 오래간다. 우리가 대화나 웅변을 통하지 않고 시를 택하는 이유도 이러한 문자언어의 한 역할과 효능에 믿음을 두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고 엘리엇이 말했듯, 애써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읽으면 저절로 가슴속에 남는 시의 여운이 있다면 그것은 에누리 없이 좋을 시라고 해도 될 것이다. 배정숙의 시를 읽으면, 그나마도 정독을 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손바닥에 분말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꽃가루 같은 여운을 만날 수 있다. 꽃가루같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 그것은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글의 속살이거나 모닥불처럼 따뜻하게 번지는 글의 체온이다.
신열에 포박당한 채
밤새 문초를 당하고도
입을 열 수 없는
저 그리움의 유배
-「단풍의 정의定義 또는 정의正義」에서
인심 한 되
갈볕 한 되
알밤 한 되가 덤이었는데
아뿔싸!
멀쩡한 껍데기 속으로
벌레들이 내고 있는 여러 갈래 길
-「풍경 소리에 영글다」에서
위 두 시의 마지막 행에 이슬처럼 맺혀 반짝이는 구절, “그리움의 유배”나 “벌레들이 내고 있는 여러 갈래 길”은 실상 형상으로 말할 수 있는 유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그리움에 마음을 내맡겨 본 사람이거나 남달리 예민한 자연에의 촉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찾아내기 어려운 언어 감각의 소산이다. 거기다 “인심 한 되/ 갈볕 한 되/알밤 한 되”이니 얼마나 소담하고 정겨운가. 이 말 한 마디에 우리는 금세 잃어버린 고향, 오래 잊고 있는 지난 옛날을 마음속 저장고에 되찾아 오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 재생의 언어는 근원적으로 상상이기보다는 체험의 소산에 가까운데 그것은 상상이 아닌 체험의 소산이었을 때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울림은 상상의 영역보다 더 크고 절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감각이나 어휘들이 고식적으로 읽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겠지만, 배정숙은 또 다른 시에서는 능란한 어휘와 발랄한 감각의 언어 동원을 아끼지 않는다.
만월과 손톱달이 밀고 당기며 썰물이 왔던 길을 막막하게 되돌아 나가고 마모된 세월의 모서리 너머 다시 떠오를 하루치의 태양도 그렇게 무덤덤할 것이다.
그래도 하루 뒤에 백 년이라는 말 붉게 탄다는 말 신비라는 말들과는 이명이 섞여서 두려웠다. 이제는 어렵사리 침묵을 선택하여 평온했으나 노을과 가을밤 사이에 끼어 있는 풋숫 갓 햇 등의 문자 뒤에 숨은 그리움의 촉들이 까칠까칠 목에 걸린다.
-「자각증상의 부분적 기호記號들」부분
「자각증상의 부분적 기호들」이라는 제목의 시를 한 편의 완성된 전달체로 만들기까지 시인은 아마도 많은 사색의 시내를 흘러내려 왔을 것이고, 그 사색의 시냇물에서 이 같은 시의 말을 건져 올리기까지는 고통스러운 말의 탐색과 거듭되는 생각의 더께를 보탰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당대의 시인들은 누구나 전통과 현대의 갈림길에허 한 번은 사색의 색동옷을 입고 벗는 일을 한다. 이것은 시의 안과 밖, 시의 내심과 외적 환경의 상층을 견디는 흔적이다. 뿐 아니다. 다음 시도 같은 궤에 속한다.
네 고향 담장 없는 초가에 가서
초례청에 설 거야
신접살림 차릴 거야
반듯한 길을 조금 구겨서 도랑을 내고 물길을 돌릴 거야 두런두런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하구로 흘러 둥근 저녁상을 차려 놓을 거야 내 안에 잠자던 교태를 깨워 올망졸망 토끼 같은 새끼들 낳아 그 상머리에 죽 앉혀야 해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오래전에 녹슨 바람이지
건성으로 지나쳤던 들꽃들의 속내를 끌어다 모종하고 제 몫의 뿌리를 잡는 동안 복제할 수 없는 마지막 밤인 것처럼 지성스럽게 늙지 않는 땅 이름을 지어주면 되지
(…)
쓰디쓴 설탕, 하늘을 나는 발바리, 노래하는 자작나무, 염기서열을 바꾼 절창의 게놈으로 나를 신으로 설계할 수도 있어
곡진한 거짓말의 원소들과 혀 밑에 고인 느낌표와의 모의공작을 슬쩍 눈감아 주었다가 그들의 복잡하고 치밀한 행각을 낱낱이 파헤치고 말겠어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이런 시편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배정숙이 결코 과거회귀적인 회억에만 의존해서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 시는 첫 행부터가 예사스럽지 않다. 무언가 작심한 듯, 할 말을 하고 말겠다는 듯 첫 연을 불러온다.
네 고향 담장 없는 초가에 가서/ 초례청에 설 거야/ 신접살림 차릴 거야
가 그렇고,
반듯한 길을 조금 구겨서 도랑을 내고 물길을 돌릴 거야 두런두런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하구로 흘러 둥근 저녁상을 차려 놓을 거야
가 그렇다. 그뿐 아니다. “노래하는 자작나무, 염기서열을 바꾼 절창의 게놈으로 나를 신으로 설계”한다든지, “곡진한 거짓말의 원소들과 혀 밑에 고인 느낌표와의 모의공작을 슬쩍 눈감아 주었다가 그들의 복잡하고 치밀한 행각을 낱낱이 파헤치고 말겠”다는 구절들 또한 그렇다. 읽기에 따라서는 너무 빠른 보행에서 방향을 놓치고 길 잃을까 아슬아슬한 느낌마저 드는 이런 구절들은 시인이 결코 편안한 자세로만 시를 쓰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요 표현으로 읽힌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의 시험이자 목청의 가드듬음, 자기 발견의 도저한 시험으로 보인다.
이러한 힘겹고 발랄한 시를 쓰기 위한 시도에 우리는 굳이 자제를 당부할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산문형태의 유행적인 시의 모습이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은 아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다변과 말의 시험적 운용보다는 다음과 같은 차분하고 안정된 시에 믿음을 더하게 된다. 비유컨대, 자동차 운전을 하는 사람에게 비행기 조종사가 되라는 부탁을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더기처럼 두른 앞치마에 묻어오는
풋보리 냄새
(…)
헛소문마냥 빈손으로 나서는 등굣길
사친회비 대신 받들고 가던
닭똥 같은 누이의 눈물
-「백일홍, 헐벗으며 피는 꽃」에서
보리죽뿐인 소반 위에 할머니 꺼 삼촌 꺼 먼촌 고모뻘까지
우리가 놓이던 그때가 그리운 이유입니다
-「숟가락 무게를 달다」에서
풀기 세운 옥양목 적삼
-「찔레꽃」에서
토방 아래 무성한 잡초
지루하게 늙어가는 적막을
참새 때 무리는 무시로 와서 쪼아대고
그늘 깊던 살구나무에 후드득
빗방울 던지는 저녁나절
(…)
안마당과 뒤울안
침묵이 달그락거리는 부엌
-「바람의 집」에서
시는 자기 안에 들끓는, 쉬이 잠재울 수 없는 영혼의 분출을 다독여 수놓는 언어의 십자수에 비유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이 시인이 정말 아파하고 그리워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며 시인의 트라우마 속으로 끌려들어가 시인과 함께 감동하거나 아파한다. 배정숙의 시에서는 그런 우리의 기대를 보슬비처럼 적셔주는 구절들이 없지 않다. “풀기 세운 옥양목 적삼” “침묵이 달그락거리는 부엌” “사친회비 받들고 가던/ 닭똥 같은 누이의 눈물” “보리죽뿐인 소반”의 시행들은 시간이 남긴 앙금이자 씻어낼 수 없는 기억의 은박으로 읽힌다.
시간은 오래 두어도 썩지 않는다. 시간은 오래두면 둘수록 은빛으로 재생된다. 스스로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독자에게도 가장 절실하게 읽힌다. 스스로에게도 절실하고 독자에게도 절실한 시가 공교하게 다듬어졌을 때 거기에는 시공의 격차를 뛰어넘어 공감대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절실함들이 어떻게 전달되느냐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것에까지 시인이 개입한 문제는 아니다. 설령 어떤 독자에게는 시의 본래의 무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해도 시는 그런 독자에게 절망할 이유가 없다. 전달 여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니까.
시는 변한다. 시가 변한다는 것은 시의 형태와 말의 운용과 전달 방식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변하는데도 변하지 않는 하나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고 우리는 한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고 또한 우리가 한국인의 정서로 시를 쓴다는 사실은 어떤 박래의 언어와 범람하는 유행에도 끝내 자신을 지켜 그 뿌리로 남고자 하는 희원이고 그러한 희원이 거센 외래사조에도 유연하게 자기를 견지할 때 그것이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미덕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기실 변화를 몰고 오는 태풍이 아니라 천 년 함묵으로 자기의 본래 모습을 지키는 태산이거나 죽어서도 천 년을 견디는 태산목의 돌올함과 유구함에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무리 유행에 민감한 독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모더니즘의 세례를 입은 독자라 하더라도 그 시의 원형과 바탕이 전통적인 사상이나 우리의 고유한 풍속을 정갈하게 노래하는 시를 폄하하지는 않으리라. 기실 모던한 시를 쓰는 사람, 더 나아가 해체시를 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전통을 방기하거나 고유한 풍속을 기피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고 다만 그에게 좀 더 절실한 것이 현재적인 삶이고 좀 더 전달하고 싶은 말의 방식이 돌발적이거나 해사적인 시의 방식일 따름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시에도 그 나름의 미덕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미덕이 많이 발견되면 발견될수록 좋은 시이다. 배정숙의 시에서는 이러한 미덕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의 현장을 비애라든지 열락이라든지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태도이며 그러한 삶의 현장에 대한 가감없는 목소리가 시로 태어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을 때이다. 다음의 예가 그것이다.
송홧가루 간지러운 연둣빛이
낙오된 저녁 앞에
바짝 봄을 끌어왔는데
진달래 핀 앞산 연지볼이
흥건히 번지던
스무 살 열꽃처럼 붉은데
보리감자 심던 고향집 텃밭
씨알 굵은 그리움만
밤새 절 한 채를 짓고도 남는데
레테의 강 건너에 매어둔
기억의 끈
너에게 가는 길도 다시 내게로 오는 길도
거두어지고
어둠으로 고정된 하늘이 깊어진다
덧칠하지 않아 속이 비치는 본능으로
자연과 도통한 늙은 거미 한 마리
온전한 당신의 실을 뽑아
십자수를 놓았네요
거한 잔치 벌렸네요
흔쾌히 베풀던 인생과 군더더기 없는 빈손의
수려한 합일입니다
방안에 세워지는 정갈한 팻말
-이곳은 성역입니다-
-할머니 자꾸 기저귀 빼시면 안 되지요
-나 밥 안 주는 게야
딴청 피우는 천진한 부처 뒤로
햇살도 맑다
-「하강의 기록」전문
끝물 인생이 웅크리고 앉은 요양원 신발장
절룩거리던 노역에 주석으로 단
마지막 반려의 기록이다
어스름 저녁에 장지문을 닫고
허름한 날개 한 쌍
비상의 각도를 조절하여
이제 피안까지의 거리는 몇 마장이나 될지
훠이훠이 날아와 정리한 슬픔의 깊이가
허방 한 줄
언제 다시 그와 포갤 수 있을지
지루한 자유가 형벌이 되는
하루하루가 소태맛이다
자투리 기억 속 황홀한 구속의 날들
목 빼고 바라보는
저 기다림 한 켤레 위를
암갈색 그림자가 덮어쓰기 한다
하루에 한 번씩 들르는 쇠잔한 노을빛이
잠시 신었다 벗어놓은
한 마디 유언
하얀 고무신이 고요하다
-「할아버지 신발」전문
‘그리움이 밤새 절 한 채 짓는다’(「하강의 기록」)거나, “-나 밥 안 주는 게야/ 딴청 피우는 천진한 부처 뒤로/햇 살도 맑다”(「하강의 기록」)에서나, “이제 피안까지의 거리는 몇 마장이나 될지”(「할아버지의 신발」) 또는 “목 빼고 바라보는/ 저 기다림 한 켤레”(「할아버지의 신발」)에서 우리는 배정숙이 생활하고 있는 현장의 모습을 핍진하게 바라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가 종사하는 사회복지, 특히 노인복지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일을 하는 현장에 가 보지 않고도 위와 같은 시행을 통해 넉넉히 읽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들르는 쇠잔한 노을빛이/ 잠시 신었다 벗어놓은/ 한마디 유언/ 하얀 고무신이 고요하다”에서 우리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마는 것이다. 요양원에 벗어 놓은 할아버지의 신발을 보면서 피안까지의 거리는 몇 마장이나 될지를 생각한다든지, 또는 그 하얀 고무신을 보면서 필생에 닿은 할아버지의 한 마디 유언을 생각하는 모습들은 이러한 극진함 위에 더 세워야 할 필설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배정숙의 첫 시집이다. 첫 시집이 한 시인의 완성일 수는 없다. 시인은 이제 장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시의 길은 처음부터 장도이며 그 장도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길이다. 그 길 위에 이제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시는 본질적으로 정서로 전달되는 양식이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양식은 아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다른 기제를 빌려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굳이 시를 택한다. 메시지의 전달은 일회적이지만 정서의 전달은 그 여운이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시에서 바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임진년(2012년) 벽두는 55년만의 추위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혹한 속에서도 시심은 식지 않고 얼어붙지 않는다. 배정숙의 시심은 아마도 혹한을 견디는 모닥불인 것 같다. 날씨는 더러 혹한을 몰고 오지만 시인의 가슴을 혹서로 끓는다. 그 끓음은 외부의 변화에도 아랑곳없다. 시인의 열정은 잉걸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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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배정숙의 시를 읽으면, 그나마도 정독을 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손바닥에 분말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꽃가루 같은 여운을 만날 수 있다. 꽃가루같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 그것은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글의 속살이거나 모닥불처럼 따뜻하게 번지는 글의 체온이다.
이슬처럼 맺혀 반짝이는 구절, “그리움의 유배”나 “벌레들이 내고 있는 여러 갈래 길”은 실상 형상으로 말할 수 있는 유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그리움에 마음을 내맡겨 본 사람이거나 남달리 예민한 자연에의 촉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찾아내기 어려운 언어 감각의 소산이다.
날씨는 더러 혹한을 몰고 오지만 시인의 가슴은 혹서로 끓는다. 이 시인의 열정은 잉걸불이다.
― 이기철 시인
배정숙 시인은 “바람과 구름의 말씀을 / 꾹꾹 눌러 받아쓰기”하면서 시의 길로 첫발을 내디뎠다. “바닥부터의 시작”을 감행한 셈이다. “뜨거운 붓끝”을 더듬으며 걸어가는 시인의 길은 빛과 향이 길이지만 동시에 무명이 어둠과 고투를 벌여야 하는 치열한 고행의 길이기도 하다. 첫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에는 시인이 살아온 생의 무늬와 노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포착한 다양한 존재의 표정들을 섬세한 서정의 언어로 그려내어 긍정과 포월의 세계를 제시한다.「숟가락 무게를 달다」에서 숟가락이라는 익숙한 사물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존재의 근원적 문제들을 곰곰 되짚어보게 하였듯이 시인은 앞으로도 존재의 심층을 탐색하는 치열한 시정신으로 생의 비의를 핍진하게 그려낼 것이다. 배정숙 시인에게 시의 ‘찰진 날’을 기대해도 좋은 이유이다.
―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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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정숙 시인∥
∙1952년 충남 서산 출생
∙2010년 계간『시로여는 세상』으로 등단
∙신성대학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현재 노인복지기관 운영
∙서안시문학회 회원
∙서산여성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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