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산행일지
07:30 영원사 밑의 표지석에 주차를 한 다음 차에서 내리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고어를 걸치자니 그렇고 어중간하게 내린다
에이, 그냥 가자
출발
표지석에서 길따라 30여미터 밑에 타이어를 몇 개 걸쳐 놓은 곳이 있다
길이 얼어붙으면 차가 쭈욱 밀리니 파손 방지책으로 걸쳐 놓은 것 같다
그 타이어 있는 곳에서 계곡을 건너야 도솔암으로 가는 길이다
계곡을 건너지 않고 바로 능선길(등산로 아님이라 써있음)을 타면 영원령으로 가는 길이다
<산행 후 13:20경 인월 개인택시 기사와의 대화>
실상사에서 인월 개인택시를 콜 했다(마천택시는 전화를 안 받음)
영원사에 거의 도착하여...
기사 : “도솔암 가는 길이 어딥니까?”
나 :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리로 내려가서 저 계곡을 건너면 길이 훤하게 보여요”
기사 : “아, 그렇군요 저는 여기 올라가는 길이 도솔암 가는 길 인줄 알고 얼마 전에 도솔암에서 합류하기로 했다는 아가씨 한 명을 태우고 와서 자신있게 알려줬다가 나중에
혼났습니다. 아가씨 혼자 3시간을 헤맸다네요“
산죽을 깨끗하게 베어 놔, 필요이상으로 널찍한 길을 간다
고도가 1,000m가 넘는데도 가랑비가 내린다.
12월 지리산에서 고도가 1,000이 넘는데 비라니.....
아직 어둡기도 하거니와 비가오니 카메라는 배낭 안에 두었다
07:57 도솔암
깔끔하게 싸리와 대를 섞고 엮어 쳐놓은 울타리에 싸리문이 굳게 철사로 감겨져 있다
녹슬고 엉겨 있는 모양으로 보면 아예 사용을 하지 않는 문이다.
우회해서 뚫고 들어간다
조릿대를 베어 놓은 모습이 마치 ‘기문 둔갑진’을 쳐 놓아 환상을 볼 것 같다
인기척도 없고 풍경마저 고요를 깨는 게 두려운지 흔들리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울음을
참고 있다
곳곳에 ‘수양정진중’이라 써 놓은 팻말이 숨소리마저 죽이게 한다
조심조심 본 법당 마당을 지나 산방의 마루에 달력 2부, 치약 2개, 고무장갑 1개를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그 적막을 찍을 요량으로 카메라를 꺼내 앵글에 담으려는 순간,
‘에라이 먹어죽이 밥통!!!’ 차속에 드글드글 굴러다니는 필름인데 필름을 안 가져온 것이다
한편으론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 조용한 엄숙함을 깨뜨리는 셔터소리, 죄스러울 것 같다
推敲(퇴고)의 고민을 실제 이렇게 경험할 줄이야....
발길을 돌려 다시 영원사로...
08:30 영원사 표지석에 다시 도착, 정확히 1시간 걸렸다
가랑비에 젖은 영원사 표지석 옆에서 하품하고 있는 나의 ‘새도팍스’
이번엔 필름을 확실하게 챙기고 영원사로 올라간다
도솔암에 비하면 영원사는 시장바닥 같다.
나무 베는 기계톱소리, 기름타는 냄새, 굴삭기 움직이는 소리....
영원사 법당 (운치 없는 현대식 건물 등이 난립해 있어 최소한으로 법당만..)
영원사는 구전으로는 신라 때로 거슬러가지만 조선중기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토방도 마루도 없는 산방 안에서 라디오인지 TV소리인지 잡음이 들린다
유리문을 똑똑~ 두들겼다
‘누구세요?’ 하며 문을 여는데 와~~~ 깜짝 놀랐다
40대 정도의 아담한 여보살이 모습을 보이는데, 아침인데도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상당히
어여쁜 얼굴이다 바지가 승복만 아니었다면 도저히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자태이다
‘쩝 요즘은 산사도 퓨젼시대이군’
“이거 우리 주시는 거예요?? 너무 감사해요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라는 말을 뒤에 두고
여우에게 홀리지 않으려는 듯 황급히 상무주로 발길을 재촉
비는 이제 그쳤는데 개스는 자욱하다
넓게 다듬어진 길 옆 곳곳에 ‘토벌루트’ ‘산죽비트’ 등등의 설명이 있다
영원사에서 상무주 가는 길
09:04 영원령 능선에 도착
개스가 시야를 가리니 답답하다
적당한 빛과 조망만 있으면 사진이 괜찮을 텐데 오늘은 포기 해야겠다
그래도 여느 능선보다는 운치가 더 있다
삼정산으로 가는 길을 왼쪽 위로 보내고 산허리를 돌아 상무주로....
고사목의 학무(鶴舞)
09:23 상무주
고려때 지눌선사가 2년여 머물렀다는 상무주
법당과 산방을 겸하는 문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달력 등을 꺼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스님이 나오신다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 굳어있는 무뚝뚝한 얼굴 너머로 감춰진 고마움을 나는 이내 발견한다
나도 최대한으로 생색을 감춘다
다시 배낭을 조여매고 지려는데 부엌에서 ‘삶은호박‘을 접시에 내오신다
아...난감, 난 간식을 안 먹는데 더구나 저건 너무 먹기 싫다 그러나 어쩌랴 성의를
무시해서도 안 되겠고, 한 입을 베어 무니 너무 달다 으휴, 난 단 것도 싫은데
(그거 억지로 먹고 오후 6-7시 저녁술 먹을 때까지 부대꼈음)
설상가상으로 “목메이니 같이 자슈”하며 설탕 탄 커피까지.....
흐흑~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어쩌면 나 싫어하는 것만.....
스님이 내 오신 찐 호박
<우문현답 1>
나 : (호박 먹으면서) “여기 혼자 계시려면 적적하지 않으세요???”
스님 : “사는 게 다 적적한 거지요....”
나 : “................”(머쓱~)
<우문현답 2>
나 : “이거 껍질까지 다 먹어요???”
스님 : “무공해로 여기서 기른겁니다”
나 : (쩝, 그니까 먹어도 되는거야? 안되는거야?)
<우문현답 3>
나 : (쌓여진 장작더미를 가리키며) “나무도 스님이 다 하세요???”
스님 : “나무는 일꾼들이 하지요....”
(에고 산 속 스님이라고 내가 너무 우습게 봤나보네...)
너무 급히 먹어 답답한 가슴을 쓸며, 작별을 하고 문수암으로 재촉
슬슬 해가 나기 시작한다
남에게 뭘 준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상무주의 주지스님
09:54 문수암에 다가가자 못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수암, 바위 뒤가 법당
새로 지은 화장실이 멋지다
바위 밑 요새 같은 문수암에 올라서자 주지스님은 의자를 딛고 부엌 창에 비닐로 바람막이를
하고 계신다
↑ 바람막이를 하고 있는 주지스님
법당 옆에는 임진왜란때 천여명이 피신해 있었다는 千人굴이 있다
(여기서는 우문현답을 않고 말을 아껴야지...)
선물을 드리자 상무주 스님과는 다르게 아주 즐거워하시는 표정이 완전 동안(童顔)이다
혹시 또 뭘 먹으랄까봐 서둘러 배낭을 들쳐 멨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자 스님왈
“마침 나도 차 한잔하려고 불에 얹어놨는데 지금쯤 따끈해 졌을거요 잠깐만요”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아예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등산화 풀려면 힘드니 그냥 여기서 먹겠다고 하고 한번 더 고문을 당한다
에고 오미자인지 뭔지...암튼 난 물하고 술만 먹는데....
아쉬워하는 정 많은 스님을 떨치고 삼불사로 간다
하나하나 지날수록 배낭이 가벼워지는 것 또한 재미다
이제는 개스도 많이 걷혔다
문수암의 바위모습
10:18 삼불사
삼불사
비구니가 두 분이 계시는 삼불사다
진돗개 종자 같은 강아지가 사납게 짖어댄다
주지스님은 강아지를 달래고, 키 150에 80키로는 나감직한 다른 한 분은 약간 실성기가
있는 듯 자기 그림자와 뭔 말인가를 주고받으며 욕했다 윽박질렀다 한다
짖는 개를 달래는 주지스님
주지스님에게 선물을 드리자 달력이 몇 부냐고 물으신다
2부라 했더니 그럼 1부만 있으면 되니 1부는 문수암에 주란다
핫하~ 끔찍이도 생각하시는군 이미 들러서 오는 길이라 하니 삐식이 웃으신다
“차 한 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문수암서 많이 먹었다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는 마을까지 내려 가야한다
돌로 정성들여 길을 가꾸어 놨다
급한 경사로 내려 온다
삼불사에서 내려오는 길
10:42 문수암, 삼불사 삼거리
마을에 가까워지자 새로 임도를 냈는지 완전 진흙이 신발에 쩍쩍 달라 붙는다
11:00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오니....
11:15 도마마을이다
마을을 관통하여 오르니 사태지역이 가로막고 있다
길이 애매하다 밭으로 가는 길, 묘소로 가는 길, 길 천지다
8부능선 쯤을 돌아나가는 약수암 길을 찾아 속도를 낸다
도마마을에서 약수암까지 가는데 사태지역이 정확히 6군데나 길을 막고 있다
도마마을에서 약수암 가는 길
11:47 한결 정돈되고 안정된 느낌의 약수암이다
한눈에 봐도 비구니 절인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약수암
봄날 같은 날씨에 컹컹~ 여유롭게 짖는 백구가 비발디4계 ‘봄’ 중 2악장을 떠올리게 한다
법당 옆쪽에 나 있는 산방으로 다가가자 문을 여는 두 비구니......
착각일까??? 한 분은 전형적인 여승모습인데 반하여 다른 한 분은 4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둥그런, 상당한 미인형의 얼굴인데 눈 화장을 했다는 느낌이 불쑥 든다. 아니면 화장문신이나..
(오늘은 미인으로 시작해서 미인으로 끝나는군..)
또 ‘차’라는 말이 나올까봐 얼른 인사를 하고 법당 뒤란 탱화보물을 몇 커트하고 약수를
시원하게 몇 주박 들이킨 뒤 실상사로 하산 길을 서두른다
13:40경 음정의 ‘선비샘 민박집’
‘만복대’의 부탁으로 달력 등을 전해주려 왔는데 인기척이 전혀 없다
강아지만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반긴다.(내년 여름에 딱~! 좋겠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문 앞에 놓고 왔다
선비샘 민박집을 홀로 지키는 ‘샘돌이’
<쓸데없는 몇 가지 생각>
1. 비구니 산사에는 개가 있다
2. 큰길가의 절(실상사)은 백화점이다
3. 차가 닿는 절(영원사, 약수암)은 상설시장이다
4. 차가 닿지 않는 절(상무주, 문수암, 삼불사)은 오일장이다
5. 도솔암은 오일장 구석에 서있는 고장 난 무인 판매기다
(근데 나는 고장 난 무인 판매기가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