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종구 시집 《우리들의 삶이 아름답지 못할 때》 발문
해맑은 얼굴 뜨거운 열정, 여종구를 기리며
고인의 유작 뭉치를 받아 일별을 하니 벌써 저 만큼 지나갔던 세월이 다시 되돌아온다. 흔히 하는 비유이지만 흑백영화의 화면처럼 20년 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고인의 대학 선배이자 문단의 선배이다. 생전에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고인의 면모는 그의 많은 부분 가운데 단편에 불과할지 모른다.
80년대 초반,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대학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지방대학이 지금처럼 쇠락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의 낭만과 멋과 풍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화운동과 역사변혁의 와중이어서 허구한날 데모가 끊이지 않던 때이기도 했다. 요즘은 대학이 곧바로 취직공장으로 변해버려 살벌한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취직에 필요한 영어나 컴퓨터만 공부한다. 그만큼 학생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빈곤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8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생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자각하고 있었고, 개인의 성공보다는 공동체와 역사의 의미에 대해 소홀하지 않으려고 했다.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읽으면서 어떤 게 나 자신과 민족에 기여하는 삶이 될 것인가에 대해 그야말로 실존적인 고민을 밤새워 통음을 해가면서 치열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여종구 시인과 우리는 만났다. 고인이 다녔던 당시 계명대 국문과에는 그가 특히 따랐던 똑똑하고 세련된 매너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고전시가의 최미정 선생과 문학평론가 민현기 선생이 있었고, 불문과에는 이성복 시인이 알게 모르게 제자들에게 깊은 문학적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나는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국문과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 고인과 함께 어울려 문학을 이야기하던 친구들의 면모는 쟁쟁했다. 고인을 비롯해 지금은 시단의 중견이 되어있는 경제학과의 이원규, 영문과 박상봉 시인, 국문과 이동엽 시인, 의대의 노태맹 시인, 지리산에 거주하고 있는 신문기자 출신 이상윤, 현재 경북 문경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진환, 최동섭, 박정미, 불문과 신이현 소설가, 당시 그녀와 애인 사이였던 소설가 장정일 씨와 지금은 기억에 떠올리지 못하는 그 밖의 많은 선후배들이 어울려 계명대의 빛나고 자부심 높던 문예부흥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문학과 변혁운동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학교부근 주점에서 많은 막걸리를 축내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들의 청춘은 맑고 순수했고 우정 또한 친 혈육 못지 않게 깊었다. 물론 우리들을 이렇게 엮어준 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열정과 조국애, 촌놈의식 같은 어떤 것들이었다.
이 시집에 실린 고인의 작품을 보면 이런 당시의 정황들이 잘 드러난다. 20대의 청춘이 모색하는 정신적인 이데아의 과정에서 갖게되는 특유의 방황과 좌절, 외세와 군사 파시즘 아래서 신음하는 민족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에 대한 절망, 이성복 시인의 영향을 받은 듯한 이미지 구사 등이 이 시집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경북 예천이 고인의 고향인데, 시골 출신답지 않게 곱상하고 귀티나던 외모와 웃을 때면 보조개가 패이던 해맑은 얼굴,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던 모습이 그립다. 알고 보니 외동아들이었다. 《문학과 비평》 신인상에 당선되어 기뻐하면서 앞으로 시를 열심히 쓰겠다고 다짐하던 모습도 생각나고, 어느 해 여름 동해안 감포에서 열렸던 대구민족문학회 해변문학제에 갓난 아들 인산이를 안고 함께 참석한 늘씬한 키에 눈매가 서글서글한 미인 부인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대취하던 고집 등이 새삼 그립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던 그 해 추석이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신문사 커피숖에 고인이 나타났다. 직장이 지척간이라 처음에는 그냥 명절을 앞두고 고향 가기 전에 커피나 한 잔하고 헤어지자는 걸로 생각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가 슬그머니 봉투를 한 장 내밀었다. 그 속에는 5만 원권 구두 티켓이 한 장 들어있었다. 아마 명절을 맞아 거래업체에 선물용으로 장만한 것 가운데 한 장을 빼돌려(?) 선배인 나에게 준 것이 아닌가하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따뜻한 마을을 가진 고인이 그 추석 다음날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미정 교수와 함께 정신없이 달려갔던 구미 순천향병원 영안실 풍경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아, 정말 세월이 덧없구나!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달리는... 차들은 불안하다」는 작품을 보면 고인이 아마 자신의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한 게 아닐까하는 확신이 들 정도로 교통사고에 대한 정황을 예견하고 있다.
"행여나 일방통행인 이 길을 추월이라도 한다면/아 그것은 정말 절망적일거야 그렇게 되면/우리 모두 파멸일뿐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에 오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시인이 죽음에 관한 시를 한두 편 쓰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독일 학생운동을 차용한 제목의「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나 「죽음에 관하여」등을 읽어보면 뭔가 죽음의 그림자가 고인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을 낳게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월남전에 파병됐던 삼촌이
한 줌 재로 돌아왔을 때도
이디오피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갔을 때도
학우 하나가 물고문에 죽어갔다는
신문 보도를 통해서도
또는 매일 아침 사회면을 가득 채우는
죽음들에 관해서
늘상 죽음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밖에
우리들이 잠들어 있을 때도
늘 깨어있는 죽음은 전쟁과 기아와 폭력과 독재의 탈을 쓰고
우리들의 오관을 통하여 끊임없이 대화를 하지만
나는 죽음의 실체와 형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이 보내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 내가 알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나의 행복의 척도를 가늠하듯이
타인의 부재를 통해서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
-「죽음에 관하여」전문
이 시 1연은 사회적인 죽음에 관한 성찰이다. 오늘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세계 도처에서 살육과 테러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때 고인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반전시를 썼겠는가하는 아쉬움은 나 혼자만의 아쉬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실체와 형태를 알지 못"한다던 그는 뜻밖의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만났다. 그리하여 타인의 부재가 아니라 자신의 부재를 통해 우리의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다시 한번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빈다. 마지막으로 이 시집을 내는데 고인의 친구인 이상윤과 이원규 시인 등 많은 이들의 조력이 있었다. 선배로서 별 도움을 주자 못한 나 자신을 민망해하며 그들에게도 두루두루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