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족구의 유래
1) 삼국시대부터 해방후까지(태동기, 생성기)
옛 문헌에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부터 짚따위나 마른 풀로 공을 만들어 중간에 벽을 쌓고 공을 차
넘기는 경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아 족구의 역사는 1300년도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간스포츠 93년 5월 8일자 참조)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이미 장비된 시설과 규칙을 가진 규모있는 공차기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구문을 설치하는 방법에 따라
나뉘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운동장의 중간에 하나의 구문을 세우고 양쪽에 갈라서 서로 공을 마주 차 넘기는 것이다. 운동장 중간에 두
기둥을 세우고 기둥의 아래부분에는 그물을 건너 쳐서 공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두 기둥사이로 차 넘기는 방식이며, 차 넘긴 공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바로 상대편으로 넘어가야 점수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오늘의 족구와 비슷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북한문화예술 1
"조선의 민속놀이" 푸른숲 출판에서) 2) 1960년대(과도기)
우리나라는 8.15 해방 및 6.25 사변이후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재건을 위한 국방력의 보유가
절대적으로 요망되고 있었으며 1953년 7월 휴전 이후 1960년대 이전까지 군에서는 군 재정비 때문에 장병의 여가 차원의 체육활동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으므로 체육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① 우리 군의 재정비가 어느 정도 진행된 1966년 공군 제11 전투비행단 제101 전투비행대대
조종사들이 비상대기 업무를 수행하면서 간편히 조종복을 입은 채 할 수 있는 운동을 착안하여 대대 배구장에서 배구네트를 땅에 닿도록 내려놓고
축구공이나 배구공으로 인원에 제한없이 축구와 같이 손만 사용하지 못하고 몸 어느 부위나 다 사용하여 배구와 같이 3번에 상대편으로 차 넘기는
규칙으로 경기를 시작한 것이 최초의 군의 시작이었으며 1968년 5월 당대 소속 대위 정덕진(98.4.12 작고), 중위 안택순(98년
공군예비역소장)이 경기룰을 창안하여 국방부에 상신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국방부 장관표창 및 부상(당시 30만원)을 받았고 국방부 산하 각
육군, 해군부대에 전파되었으며 국방부 발간 국군체육이란 각종 경기규칙을 기록한 책자에 족구라는 경기가 최초로 기록되었다.
② 육군에 전파된 근원이 당시 공군에서 운영하는 AGOS(공지합동작전학교)에 육군작전장교 및 하사관이
년 1,000명 정도 수료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휴식시간 및 점심시간에 족구를 하였다. 경기장이 필요없이 맨 땅에 물주전자로 금을 긋고 축구공이나
배구공 하나만으로 인원에 구애없이 간단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장병이 선호하다 부대에 귀영하여 전파되었다.
③ 해군은 당시 공해 합동작전회의라는 명칭으로 해군의 함장과 공군의 조종사 편대장 이상과의 년 1회
해군작전사령부 주최로, 1회는 공군작전사령부 주최로 친선모임을 실시하던 중 공군에서 족구하는 것을 관람하고 또 해군 함장과 공군 편대장들이 함께
시합을 하였고 사관학교 기수별로 또는 해군 대 공군으로 나누어 경기를 하였으며 해군 함장들이 해군에 귀영하여 족구 경기를 좁은 공간의 함상에서
또는 육지에서 실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군에 보급된 족구는 군복무를 마치고 각 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이(대표적으로 대기업 :
대한항공, 삼성, 대우, 현대 등) 군에서 하던 족구를 휴식시간에 아무런 준비없이 족구를 함으로서 오늘과 같이 전국의 700만 족구인 을
확보하게 되었다.
족구룰 창안자 |
예비역 공군 소장
안택순 |
|
공군사관학교비행교수 정덕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