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1호는 남대문이 아니다.
-국보도 없는 나라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3.1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할 만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민족의 웅지(雄志)를 모아 분연히 일어선 독립운동,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하여 실패한 운동처럼 보였다.
1910년 강제로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총칼을 든 무단정치를 했으나 3.1운동 이후 조선족을 달래기 위해 문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3.1운동이 실패한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일제가 통치방법을 바꿀 만큼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외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다른 나라에게 큰 반향을 끼쳤다. 그 이면에는 민족지도자를 색출하기 위한 술책이 숨어 있었지만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고 문학과 예술활동이 살아나 일단은 외형적인 결실을 거두었다. 그래서 일제 침략기를 보통 1910년부터 1919년까지를 무단통치시대의 1기, 1920년부터 1936년까지를 문화통치시의 2기, 1937년부터 해방까지를 황민화 정책의 3기로 나눈다.
2기에 해당하는 문화통치시대의 1933년에 일제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했다. 이 법은 유물의 발굴, 조사, 반출, 전시 등 모든 권한이 조선총독부에 있음을 밝혀 사실상 문화재 약탈을 위한 법이었다. 특히 살펴봐야 할 것은 법의 명칭이 국보가 아니라 보물이라는 점이다. 조선은 이미 나라가 망했으니 국보는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한 명칭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는 1929년에 제정 공포한 「국보보존법」이 있었으니 우리 문화재의 명칭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민족적 차별을 받았다.
- 남대문은 전승기념물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인접국과 영토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에 산에 성을 많이 쌓았다. 곳곳의 전망이 좋은 산에 있는 산성들이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평화시대에 행정을 담당하는 읍성을 중심으로 성을 쌓았다. 낙안읍성, 고창(모양)읍성, 해미읍성, 병영읍성 등이 그것이다. 이에 비해 한 나라의 도읍지에 쌓은 성은 도성(都城)이라 한다. 한양의 성곽을 통틀어 도성이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도성은 각 지역에 있는 모든 성보다 그 규모나 장식 면에서 대표적인 역할을 한다. 서울 성곽은 길이가 보통 4km내외의 다른 읍성이나 산성에 비해 무려 18km에 이르며 규모나 장식 등도 웅대하고 화려하다. 그런데 성문을 다른 읍성의 명칭인 남문, 서문, 동문에 대(大)자를 접두어로 사용하여 남대문, 동대문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 대(大)자를 좋아하는 행정가들이 한강의 모든 다리에 大자를 넣어 한강대교, 동작대교, 반포대교 등으로 작명한 것처럼 중앙의 도성 문에도 그렇게 대자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한양의 성에는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등 모두 8개의 문이 있었다. 그 중 東西南北中에는 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접목하여 철학적으로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동쪽 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 북쪽 문을 홍지문(弘智門), 서쪽 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했다. 북쪽의 정문은 원래 숙청문(肅淸門 나중에 숙정문으로 바뀜)이었으나 북쪽의 산이 음기가 강하기 때문에 열어두면 여자들의 음기가 세진다거나, 그 음기로 인해 한양에 해로운 일이 벌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평소에 닫아두었다. 그러다가 비가 오지 않으면 문을 열고 그 음기를 빌어 기우제나 기청제 (祈晴祭)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방향을 나타내지 않고 중심을 이루는 信은 보신각(普信閣) 종을 세워 모든 방향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렇게 동양 사상을 반영한 멋진 이름을 일본인들은 격을 낮춰 1943년에 남대문, 동대문으로 개명해버리고 돈의문은 헐어버렸다.
숭례문과 흥인지문도 교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헐릴 위기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한양으로 진입할 때 두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 문을 통해 입성했다는 이유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그렇게 전승기념물의 의미로 보존되었으나 이와 관련이 없는 문은 사정없이 헐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헐고 개선문을 세우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다.
- 왜 숭례문인가.
인의예지 중 예(禮)는 남쪽을 가리키며 남쪽은 화(火)를 상징한다. 그런데 한양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쪽의 관악산이 다름 아닌 화산(火山)이다. 남쪽에서 들이치는 이 화기를 막아야 경복궁이 온전하고 백성들의 삶이 편안하다. 그래서 남쪽의 문을 통해서 불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불과 같은 모습의 숭(崇)자를 택했다. 崇자 위에 있는 山은 산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상징한다. 이로보아 숭례문(崇禮門)은 불로써 불을 막기 위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불이며 예(禮)는 오상의 철학적 뜻이 담긴 이름이다. 그 뜻은 곧 ‘예를 숭상한다.’는 그 의미이니 얼마나 숭고한 이름인가.
숭례문의 이름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현판을 세로로 세워 매달았다는 점이다. 다른 곳의 현판은 가로로 매달려 있는데 숭례문만큼은 기다랗게 세워 매달았 다. 이는 불꽃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다. 불을 막으려면 막는 불이 커야 한다. 어차피 崇은 불꽃을 상징하기 때문에 세워야 불꽃이 크다. 그래서 현판을 세워 달았다. 여기에 비해 흥인지문은 다른 문이 석자인데 비해 넉자다. 동쪽의 좌청룡 역할을 하는 낙산이 기가 약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한 자를 더했다. 어디 허술하게 지은 이름이 있는가. 단순하게 동대문, 남대문으로 호칭하지 않은 것이 우리 조상의 안목이요 멋이다. 숭례문, 흥인지문에는 조상의 학문과 철학이 담겨 있는 이름인 것이다.
- 왜 국보 1호인가.
숭례문은 국보 1호, 흥인지문은 보물 1호다. 그것이 그것 같은데 어떤 기준으로 국보와 보물을 구분하는가. 보물은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일반적인 것이고 국보는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보물급 중에서 보존상태가 양호하거나 역사성과 문화사적으로 대표할 만한 것을 국보로 지정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같은 건축물인데도 숭례문은 역사가 더 오래되고 문화사적으로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보다. 그에 비해 흥인지문은 후대에 보완하고 건축 기술도 숭례문보다 후대의 것이라서 보물로 분류되었다.
그렇다면 국보 2호, 3호, 보물 2호, 3호는 무엇인가. 조상이 남겨준 문화재의 중요도에 경중을 가릴 수는 없지만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 석탑’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에 있는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더구나 알지 못한다. 누구나 국보 1호는 2호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도 그 이유다. 그래서 한 때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운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국보는 그 자체만으로 모두가 소중한 것이다. 번호가 빠르다고 해서 더 소중하고 늦다고 해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국보1호, 국보2호의로 지정했을까.
1933년 일제는 조선의 보물을 지정했다. 그런데 조선 보물의 소중한 정도를 가리지 않고 총독부에서 가까운 것부터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울의 보물들이 번호가 빠르고 멀리 변방의 보물이 번호가 늦다. 해방 이후 1962년에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할 때 기존의 것을 무시하고 다시 정했으면 훈민정음이 국보 1호로 지정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나 국가에서는 일제가 남긴 것을 모법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기 기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2008년 2월 10일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탔다. 유럽의 유구한 문화유산에 필적한만한 우리의 자존심이 무참히 불타버렸다. 일본인이 국보의 존재를 부인하던 시절에도 우뚝 서서 세월을 지켜온 숭례문, 이를 기화로 우리는 우리의 문화의식을 점검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야 한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그래서 남대문은 남대문이 아니라 숭례문이다. 우리 문화재의 품격을 저하시킨 일본인의 비열한 술책에서 비롯된 남대문을 버리고 이제는 숭례문이다. 반드시 숭례문이라야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속칭 남대문이라 하긴 했으나 본래의 뜻을 지닌 이름표를 버젓이 내걸고 있는데도 일본인이 얏잡아 남대문이라 한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다.
숭례문을 찾기 위해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기차 편을 이용해야 쉽다. 서울역에서 내려 동쪽의 정문으로 나오면 바로 정면의 오백여 미터 앞에 보인다. 서울 시민은 지하철 4호선 서울역이나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숭례문은 암막에 가리워진 몰골로 길손을 맞는다. 4호선 회현역에서 내려 재래시장의 대표격인 남대문 시장을 돌아보고 가는 것도 괜찮다. 10분 정도 이내의 거리에 있다.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찾기 위해서라도 숭례문을 찾아보기 바란다.
강기옥
한국문인협회회원. 펜클럽남북교류위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화백문학 편집위원. 내외일보논설위원.
서초문인협회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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