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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 이에는 이”
출 21. 22-25
지난 한 주간 동안은 모든 분들이 뒤숭숭한 가운데 지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미국에 충격적인 테러가 있던 지난 11일 (화) 밤에 새벽 2시가 넘도록 3시간 이상 되는 시간을 텔레비전을 지켜보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은, 동시다발이라는 전개 양상 면에서나, 피해 규모 면에서나, 주체가 바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에서나, 그 치밀성이나, 파장에 있어서나, 유례없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대하는 입장은 주로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테러는 “어떤 명분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이자 비인간화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러는 용납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아랍권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들이 이번 참사에 대해 위로와 함께 반-테러리즘에 대한 공동대응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테러를 규탄하고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시하지만, 그러나 테러를 자행하게 된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멀게는 이스라엘의 독립 이래로 미국이 아랍권에 대해 왔던 태도를 들고, 가깝게는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힘의 우위에 의한 세계 지배를 꼽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을 기독교권과 아랍권의 “문명 충돌”로 해석하려는 견해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출판되자마자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최근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이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 1위에 올라섰다고 전합니다. 이런 시각과 함께 아랍의 강경파들이 신봉하는 소위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해설도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테러분자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뉴욕에 사는 교민 한 사람은 사건이 일어난 지 10여시간만인 우리 시각으로 9월 12일 오전 8시 반경에 “from US”라는 제목으로 한겨레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집 전화가 불통되고 거리마다 앰뷸런스가 나다닌다.
사무실엔 한국의 친지들로부터 전화메시지가 많이 와 있지만
사무실 전화도 불통이다. 주변에 크게 다친 사람은 없으나
티브이에 나오는 무역센터 건물의 연기와 펜타곤 앞에서
보고하는 리포터들이 긴박하게 상황을 전한다.
거리에 매일 만나는 청소부와 같은 빌딩의 미국 애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조용히 침통한 표정으로 다닐 뿐이다.
하지만 이 침묵이 곧 엄청난 분노로 폭발할 것임을 나는 안다.
미국에는 자국민이라도 경찰이나 군인에게 총을 쏜 시민은 반드시
죽여버리는 고유의 공권력 정신이 있다.
민간인들을 상대로 비행기를 납치해 공공기물을 파괴한
테러 세력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누구던지
미국의 처절하고 잔인한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에는 상대를 밝혀낼 능력도 상대에게 복수할 힘도 있지만
여러가지를 고려해 지금까지는 목표의 80% 선에서 자제해 왔다.
이번 선거에서 나는 앨 고어를 찍었지만 앞으로 부시의 강경 정책을
무조건 지지할 것이며 그가 누구에게든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초강경 정책으로 보복해 피와 눈물을 수천 배로 흘리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공화당 정권은 두 번 다시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켜
주겠다.
이번 사태로 논란속의 정치는 타격을 받았고 불안하던 경제는 아예
작동을 멈추었다. 울트라맨의 self defensed와 복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앞으로 세계가 보게 될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세계 지도에서 아예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 정부는 앞으로 확실히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대다수 미국 시민들의 정서이다.
모국인 한국민들의 피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살펴보니까, 9월 12일자 Washington Post 웹 사이트에는 “ U.S. Sets Stage for Possible Retaliation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올랐습니다. 우리말로, “미국은 보복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고 있다”고 새기면 무난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New York Times 웹 사이트에는 “Bush Vows to Avenge Attackers”(부시는 공격자들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는 제목으로 기사가 올랐습니다. 부시는 이번 테러를 “전쟁 행위”(Acts of War)로 규정했는데, 이것은 전쟁 수준으로 응징을 가하려는 멍석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부시는 전쟁을 천명했고, 의회의 인준과 예산까지 얻어냈고, 국제사회의 동조와 함께 전쟁 준비를 거의 끝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대응책과 분위기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보복이 아니라 테러범들을 사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성급하거나 과도한 군사적 대응은 “피의 보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또 3차 대전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견해들도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아랍간의 뿌리 깊은 반목을 해소하는 것이 근본적이라는 주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언론은 미 국무장관 파월이 “군사적 대응은 보복이 아니라 정당한 조치”라고 말했다고 전하지만, 준비 중인 군사적 대응이 보복이라는 것은 다 아는 일입니다.
서론이 좀 길어진 듯 합니다만, 시국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목적은 아니고, 이번 사건을 놓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retaliation, 보복이라는 것을 성경 말씀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가봅시다. 24절 아래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조문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은, 구약 출애굽기 21. 22-25, 레위기 24. 17-22, 신명기 19. 15-21과 신약에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가운데(마 5. 38-42) 나타납니다. 구약학에서는 이 법조문을 “탈리온 법”, lex talionis라고 부릅니다.
“탈리온 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러합니다. 주전 450년경에, 문화사에서 흔히 “십이동판법”이라고 부르는 로마법이 편찬되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이의]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렸고, 그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똑같이 하라.” 여기서 “똑같이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피해자가 팔이 부러졌다면 가해자의 팔을 부러뜨리라는 것입니다. 이 “똑같이 하라”고 규정된 말이 talio esto인데, talio라는 말에서 lex talionis라는 법의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탈리온 법이란, 눈을 상하게 했으면 똑같이 눈을 상하게 하고, 이를 못 쓰게 만들었으면 똑같이 이를 못 쓰게 만들도록 하라는, 신체상의 상해에 대해서 똑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한 고대의 형법을 말합니다. 가장 오래된 법조문은 주전 18세기의 “함무라비 법”에 나타나지만 이것에 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문제 삼겠다고 한 retaliation이 이 tali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talio는 “똑같이 행한다”는 의미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복이나 복수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retaliation, 우리말로 “보복”이라는 뜻이지요? “보복” 또는 “앙갚음”이 가장 알맞은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talio의 법정신을 과연 보복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스베덴보리 선생은 성경의 탈리온 본문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레위기 24. 17-21을 소개하면서 “lex juris talionis라고 부르는 법이 있는데, 그것은 레위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새 교회인들조차 보복 개념이 들어간 retaliation을 사용해서 이 말을 the law of retalia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보복 개념이 없이 번역한다면 영어로는 the law of talion이 될 것입니다. 우리 학계에서는 lex talionis를 “동태보복법” 또는 “동해복수법” 따위의 복수, 보복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말로는 “상해보상법” 또는 “탈리온 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두 남자가 싸우다가 곁에 있던 아이 밴 여인을 쳐서 아이가 나온 경우입니다. 다른 해가 없으면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보상금을 주고, 다른 해가 있으면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내용입니다. 학자들은 이 단락을 풀이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22절과 23절 하반 아래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태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문 “베야츠우 예라데하”는, 문자적으로는, “그가 나와서 그녀가 낳았다면”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명확해 보이지 않는 이 어구를 수많은 번역들이 전통적으로 “낙태” 또는 “유산”으로 번역해 왔습니다. 우리말 공인역들인 한글개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이 모두 그렇습니다.
탈리온을 복수나 보복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어구의 곡해와 직접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서 “낙태”나 “유산”은 모두 아이가 죽었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본문의 뜻은 아이는 죽었어도 산모만 이상이 없다면 금전적으로 보상하면 된다는 식이 됩니다. 그리고 산모에게 이상이 있으면 이상이 있는 것과 똑같이 보복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어 역본들 가운데 NKJV와 NIV가 birth prematurely 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달이 차지 못하고 나왔다”는 뜻일 터인데, 이것이 “조산”을 뜻하는 말인지 아닌지는 부족한 영어 능력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이 어구를 “조산”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선생도 이 어구를 분명히 “조산”으로 읽었습니다. 그는 조산을 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보상이 필요하다고 풀이했습니다. 물론 영적인 내용을 다루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조산”으로 고쳐서 집중해서 읽어보면 가르침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조산을 했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양육을 위해서 보상금을 지불하고, 그렇지 않고 생명에 이상이 있으면 생명이 필요하고, 눈에 이상이 있으면 눈이 필요하고, 이에 이상이 있으면 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법의 법정신은 생명을 중시하는 데 있지, 결코 보복에 있지 않습니다.
레위기 24장의 탈리온 규정은 더욱 분명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면 입힌 것과 똑같이 갚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면 죽어야 하고, 가축을 죽이면 가축으로 갚아야 합니다. “손해를 입힌 대로 갚는 것,” 이것이 이 법규정의 법정신입니다.
신명기 19장은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무언가 형제에게 해를 입히려고 의도했던 대로 그에게 행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서, 그런 잘못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법정신은 이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너희 가운데서 악을 없애라... 그렇게 한 뒤로는 너희 가운데서 그러한 악을 다시는 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악의 근절이라는 교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세 곳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의 뜻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임이 분명합니다. “해를 끼치지 말아라! 악을 행하지 말아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행한 것과 똑같은 해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거꾸로 읽어온 것입니다! “해를 입으면, 그대로 보복하라, 앙갚음을 하라...”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은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영적인 생명의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 선생은 이 탈리온 규정을 “질서의 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탈리온 규정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이것이 ‘너는 네 이웃이 너에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그에게 행하라, 곧 네가 다른 이에게 행하는 바가 너에게 행해질 것이다’ 하는 질서의 법칙을 의미한다는 것은 ‘생명에는 생명을,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이라고 한 것이 네가 다른 이에게 행한 그대로 너에게 이루어질 것임을 가리킨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이 법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러한 것이 영계의 법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다른 이에게 선을 행한 사람은 똑같은 선을 받는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다른 이에게 악을 행한 사람은 똑같은 악을 받는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온 선은 그것의 보상에 연결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악은 징벌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에게는 하늘[천국]이 있고, 악에게는 땅굴[지옥]이 있다.”(하늘의 비밀들 9049)
한마디로 말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온 규정의 가르침은 “네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 12, 눅 6. 31)는 대강령과 같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 말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에 저항하지 말아라...” 이것은 그동안 사람들이 탈리온 규정을 보복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온 것을 정면으로 뒤집어엎으시는 말씀이십니다. 사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탈리온 규정을 폐기하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법을 실제로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폐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단 두 사람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탈리온의 엄밀한 적용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법정신을 그 근본이 되는 영적인 원리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옛 사람의 말씀을 너희가 들었다”는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내적인 완성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바로 구약 성경의 문자적인 가르침에 대한 “영적인 이해와 그것의 실천”이라는 보완이고 또 완성인 것입니다. “악에 저항하지 말아라” - 이 말씀은 보복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하는 가르침입니다. 천사들은 악한 자들과 맞서 싸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에 해롭게 굴지를 못한다는 것이지요. (계시록 풀이 556.9)
“오른뺨을 치려고 하면 그에게 다른 쪽을 돌려대라”, “법에 걸어서 네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을 줘버려라”, “억지로 천 보[일 밀리온]를 가게 하면 그와 함께 그 배를 가라”는 원문의 교훈은 사실 난해합니다. 스베덴보리 선생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자뜻에 따라서는 이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없겠는가?” 오른뺨을 때리겠다고 하는데 왼쪽으로 돌리면 오른쪽이 맞겠습니까? 스베덴보리 선생은 묘사하게도 속옷이라는 말은 tunica를 썼고, 겉옷이라는 말은 pallium을 썼습니다. 튜니카는 로마인들의 옷이고, 팔리움은 희랍인들의 옷입니다. 어떻든 이것은 영적 뜻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오른뺨을 치려고 하면 그에게 다른 쪽을 돌려대라” - 누가 내적 진리에 대한 이해나 깨달음을 해치려고 하면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성경의 문자적인 진리밖에는 손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네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을 줘버려라” - 누가 내적 진리를 빼앗고자 하면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외적 진리만 빼앗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악한 자들과 있을 때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보호 때문에, 악인들은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 적개심, 복수심으로 불탄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일 밀리온를 가게 하면 그와 함께 그 배를 가라” - 강제로 진리에서 거짓으로 인도하고, 선에서 악으로 이끌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자,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소위 “자살 테러”는 그 뿌리가 깊습니다. 구약에 보면 여러 곳에 도피성 제도가 나타나는데(출 21. 13, 민 35. 9-34, 신 19. 1-13, 수 20. 1-9), 그것은 과실로 살인을 한 사람이, 원어로 표현하면, “고엘 핫담”을 피해 은신해서 살 수 있는 제도입니다. “고엘 핫담”은 우리말로 “피의 보수자”, “피를 보복할 친족” 따위로 번역됩니다. 우리말에 “거두어준다”는 말이 있는데, “고엘”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거두어 주는” 가장 가까운 친척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룻기에 나오는 다윗의 증조부 되는 보아스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피에 대해서까지도 거두어 주는데, 그것이 “고엘 핫담”입니다. “고엘 핫담”은, 쉽게 말하면, “원수 갚아 주는 사람”입니다. 그 내용이 소위 “피의 보복”입니다. 중동 문제에 얽혀서 “자살 테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유목민족의 삶 속에 수천 년 동안 깊이 뿌리내린 이 “고엘 핫담”이라는 문화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해서 허용된 “고엘 핫담” 역시 탈리온 법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원수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시”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살림살이에는 보복하고, 복수하고, 원수 갚고 싶은 크고 작은 경우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악에 맞서지 말아라”, “네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그에게 대접하라”는 대강령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2001. 9. 16. >
첫댓글 다시 9.11을 맞으면서 올립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