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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문학통사(p.15~)
1. ‘통사’의 의미를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양쪽만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것만으로 두는 것은 너무 좁은 의미가 아닌가요?
- ‘통사’를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눈 것은 시대구분에 불과하다. ‘통사’라는 의미를 표면적으로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양쪽만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정의했을 뿐, 그 의미가 제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문학사’ 전체를 다루는 것이 ‘통사’의 다른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통사’의 의미를 변질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박하영>
2. 구비문학, 한문학, 국문문학의 비중이 대등한 가운데, 국문문학의 비중을 키워 문학사 서술의 새로운 과제의 주역으로 앞세우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 지금은 연구 실정이 많이 발달되어 구비문학과 한문학도 국문문학과 대등한 연구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구비문학의 구실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한문학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국문문학만이 문학사 서술의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구비문학과 한문학의 유산을 국문문학이 계승하면 그 성과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박하영>
** 근대의 조건과 목적. 근대는 민족국가의 형성이 과제. 민족언어를 바탕으로 한 민족문학의 성립이 시대적 과제임.
1.2. 문학의 범위(p.19~)
문학의 범위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부분에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맨 처음의 문학은 범위가 컸고, 후에는 축소가 되었고, 거기서 다시 확장되었다는 서술은 너무 무책임한 듯 보였습니다. 책을 읽어보면 시대 상황이나, 그리고 문학을 다루는 계급 등이 바뀌는 요소들이 원인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단순히 범주의 넓은 영역과 좁은 영역으로만 서술한 것은 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거기에 16세기 이황의 글을 삽입한 것은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자신이 하려는 얘기에만 이용하기 위한 발췌의 느낌이 너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국문과 이제훈>
** 그러시게. 근데 이황은 언급되지 않음. 이이 said, “사람이 내는 소리 가운데 뜻을 가지고, 글로 적히고, 쾌감을 주고, 도리에 합당한 것”이 문학. 쾌감과 도리는 형상에서 얻는 즐거움과 문학적 인식의 다른 표현이 아닌지. 자신의 문학관으로 보았을 때 유용한 대목을 끌어 오는 것은 논증의 방법임.
Q1.긴장된 질서란?
나의 답변- 무엇을 만들어서 내보이면 형상이다. 형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or 현실에서 떠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 말이나 글이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에는 지니지 않던 긴장된 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그 때문에 관심을 끈다면 현상으로 인정된다. 비유, 상징, 사건의 구성, 인물 대립의 구조 같은 것들이 모두 그러한 질서의 예이다. <11 노은혜>
** 잘 이해했네. 긴장(緊張)이란 뜻은 조이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것. 일상어에서도 찾을 수 있는 바, 자신의 어문생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1.3 문학갈래(p.27~)
Q2. 갈래체계란?
나의 답변- 체계란 낱낱의 부분이 짜임새 있게 조직된 통일된 전체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갈래의 체계는 낱낱의 갈래들이 짜임새 있게 조직된 전체를 말한다. 따라서 문학갈래의 체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인식하려면 문학의 범위를 넓게 보고 큰 갈래 넷으로 나누는 관점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Cf) 자아와 세계의 관계로 구분 짓는 것을 기준으로 서정(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 없이 이뤄지는 세계의 자아화), 교술(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뤄지는 자아의 세계화), 서사(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뤄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 희곡(작품외적 자아의 개입 없이 이뤄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으로 나눠지는 4분법을 제시했다. <11 노은혜>
** 갈래 체계는 역사적인 변천을 겪기도 함. 따라서 갈래 체계의 변화를 보는 것이 역사 시기의 특징을 파악하는 유용한 방법이 됨.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화와 전설, 소설의 차이를 이야기한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김주현>
** 본인이 더 찾아보려 노력해야 함.
Q. 갈래체계와 생극론은 조동일 선생님이 만들어낸 고유의 개념인가요? 아니면 원래 있던 개념에 조동일 선생님의 의견을 덧붙인건가요?
A. 자신의 힘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국문11이동우>
** 조동일 선생님이 주역의 논리를 끌어와 만든 새로운 방법임. 역사를 기술할 때 큰 관점이 있어야 하는데,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데서 관점 차이가 있음. 조동일 선생님은 역사란 점차적인 발전이나 내재적 본질의 외현이 아니라 확~ 바뀌는 거라는 입장에 있는 듯.
<국문10김유진>
** 이건 설명 했지? 이해했다고 믿고.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란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주인공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갈등을 극복한다는 뜻 <국문10김유진>
** 극복을 못할 수도 있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세계를 자아가 아닌 모든 외물(外物)로 파악하기를. 갈등 없이는 서사 전개가 어려우니까.
갈래체계 중 교술의 범위에 대해서. 한국문학통사에서 제시한 갈래체계 중 서정, 서사, 희곡의 경우 비교적 그 범위가 명확하다. 그러곡의교술의 경우 가끔 그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질호하관 경다. 교술이란 자아의 세계화다. 고전문학에서 가사곡의수필, 경기체관 등이 교술의 범위에 속한다고 할의수 경다. 그러곡의소설의 초기단계인 가전체의 경우는 그 경계가 조금 애매하게 느껴진다. 가전체의 기본적인 분류는 서사지만,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부분곐가 모호갈래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가전체는 기본적으로 교화를 목적으로 한다. 하게 느이야기기체관가 단순한 교술의 많고 갈등 요소가 눈 느띄지 않는 것의 많다. ‰고전이야기기체관 자체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기보다 다른전문람들의 교화를 위한 자아의 세계화에 가깝게 여겨진다는 것의다. 갈래체계를 분명히 세우고 이해를 돕기 위해 적절한 예시가 더욱 필요할 것 같다. <조한기>
** 교술, 이 갈래의 문제는 논쟁적임. 가사는 교술이 아니라 서정이다, 가전체는 교술이 아니라 서사다, 라는 주장이 있음.
근대문학이 시작되면서 왜 교술이 몰락했을까요? -교술산문에서 수필만 문학에 속하게 된 이유는 서정, 서사, 희곡만 발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수필도 발전했지만 다루는 비중이 적어서 배제된 것 같습니다. <영상11황유진>
** 흥미로운 질문. 과학적, 실증주의적 담론이 오히려 우세하기 때문에, 굳이 문학 갈래에만 갇혀 있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함.(검증되지 않은 바임.)
질문: 서정과 교술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 여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탐구: 제가 생각하기에 서정이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 같고, 교술은 개입이 나타나기 때문에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추가> 질문) 중세 전설과 민담이 시대정신의 서사적 표현을 맡았다는데, 시대정신의 서사적 표현이 무엇을 뜻하나요? <이진호>
<11이가람>
** 굳이 사회를 반영하지 않아도 되지. 우리는 사회라 하면 너무 실재적인 것으로 생각해. 그러나 사회란 공유되는 지식, 사회적 통념을 의미할 수도 있음에 유의.
1.4. 시대구분 (p.34~)
Q. 37p. 문학담당층으로서 사회의 지배층, 그 비판세력, 피지배 민중이 모두 나름대로의 구실을 하며 서로 경쟁했다고 하는데, 비판세력은 지배층도 피지배층도 아니라면 어떤 계층인가?
A. 계급제 사회여서 지배계층 피지배 계층의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였으나, 근대로의 이행기 사회체제가 약화되며 등장한 실력과 자본을 갖추었지만 계급의 한계로 사회 상류층에 진출하지 못한 부르조아 계층이나 신흥세력이 비판세력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김민수>
** 비판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져야, 즉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나 여론 형성의 능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지배층 곁의 비판 세력도 있잖아. 요새는 누구일까? 나꼼수?
Q. 39p. 김시습의 뒤를 이은 방외인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방외인이란 무엇인가?
A. 지배체제 안에서 주어진 위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을 보이며, 이념적으로 이단을 택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한탄스럽기만 한 세상을 초탈하고자 현실을 도피한 대표인물로는 홍유손, 전우치 등이 있으며, 이념적인 반발보다 신분상의 차이가 주된 이유가 되어 반발한 문인은 조신, 어무적 등이 있다. <김민수>
** 됐네. 근데 어무적 아나? 노예 출신으로 자기 생활에서 비롯된 생활 감정을 한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 그런데 왜 이념적인 반발이라 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3권서 자세히 살피기를.
<추가> 신화를 유지해나가는 사람은 결국 일반민중인데, (소수의 몇 명만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이 긴 세월동안 전해지기 힘들 것이므로) 신화를 통치자의 일방적 특권으로 치부해 버리면서 신화 시대는 자아와 세계가 동질적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06김상현>
--> 샘이 의견 : 다른 부분인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계가 동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자아’는 신화 속 ‘신’을 말합니다. 그 ‘신’은 통치자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신은 일정 부분에서 인간과 차별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은 보통 인간들과 다르게 세계와 동등하게 겨룰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통치자의 권능이 꽤 높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신화시대에서는 통치자의 권능을 높이 사기 위해 신화를 향유하였고, 통치자뿐만 아니라 일반민중들도 그런 사회구조를 깨기 힘들었으며 그 구조를 유지하는 것만이 평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반 민중이 나서서 ‘자아와 세계가 동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신화라는 갈래를 유지하고 보존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추가> 질문) 불교신화를 신화라고 믿는 것은 불교를 믿는 사람뿐일텐데 왜 전설이 아니고 신화라고 하는지요? <이진호>
1.5. 생극론의 관점(p.44~)
저는 '한국문학통사'라는 책을 이번에 처음 읽어보았습니다. 그 전에 많은 선배 및 후배들이 얘기하는 내용들로 인해서 책에 대해서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도 얘기하셨듯이, 이번에 읽었던 부분에서의 서술 내용들은 너무 요약이 많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생극론의 개념을 끌어들인 것에 대해,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좁게만 바라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극론'의 개념이나 그것이 내포한 의미는 무궁무진하고, 간단히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바라봅니다. 책을 읽으면서 필요한 요소들과 부분들만을 발췌하여 그것이 '생극론'이 말하는 세계와 같다는 듯의 서술은 고쳐져야 하지 않을까요? 앞부분에 '생극론'의 어떠한 개념을 끌어와서 설명하고 있다는 단순한 몇 문장만이라도 적어놓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국문과 이제훈>
** 어렵다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당연하잖아~!’하면 쉬움. 음양에 대한 주역적인 세계관을 보자. 겨울에 모든 것이 죽어 있는 듯하지만 생명을 품고 있지? 남자인 듯 보이나 속에 실은 여자가 있지? 많은 드라마에서 보여주듯,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듯하나 이면에 파멸의 기운이 있지? 이렇게 서로 대립적인 것을 품고 있음. 중세적 가치관을 여러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고 하는 구운몽에도 여성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조화로울 수 있는가 하는 진보적 계기가 있고,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애정 관계를 통해 결합하는 남녀라는 진보적 제재를 가진 춘향전에도 열(烈)이라는 중세적 가치가 있어. -> 1) 음은 양을 품고 있고, 양은 음을 품고 있다. 또, 음양이란 역(易), 즉 자리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거야. 그 자리 바뀜도 쉬운 거야[易]. 문학사의 변화, 역사의 변천도 그렇게 찾아오는 것. 선진이 후진되고, 후진이 선진되는 자리 바뀜의 논리는 민족주의적 사관(본질의 현현), 변증법(대립적인 것의 투쟁)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극론이란 거지. --> 2) 음양이 자리 바뀜을 하는 방식으로 역사는 진행된다. 그리고 대결 자체의 승부도 마찬가지. ‘지는 게 이기는 거야’라는 말이 있음. 부부 싸움만 그런 게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 --> 3) 극하려면 생해야 되고, 즉, 이기려면 상대를 살려주어야, 받아들여야 하는 것. 나아가 생극론이 생할 수 있으려면 그 자체를 극해야 하는 것임.
생극론을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 적용하면 어떤 예가 있을까요?
저는 스포츠 경기에 생극론이 적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립적이면서 상보적이고, 투쟁하면서도 화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11황유진>
** 좀 아님^^.
2.2. 신석기시대로의 전환 (p.54~)
Q. 57p. 대별왕 소별왕 싸움에 등장한 이승 차지하기의 사회가 잘못된 내력을 설명하는 말이 후대에 첨가된 게 아니라 몽골의 창세신화에 같은 내용이 있어 오랜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한다.
A. 인간사회에 보편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신화에 언급되어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김민수>
** 그렇지.
2.3. 민족 형성의 연원과 과정(p.59~)
Q1. 민족은 민족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시대에 따라 민족의식이 바뀌고 민족이 다시 정의 된다면 현대의 우리가 우리민족이라고 배우는 민족문학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의 답변. 정확하게 분절돼 있지는 않지만 신석기 시대부터 지금의 남,북한 땅과 그 주변을 무대로 같은 우리말을 써왔고 역사적으로 변화를 겪으면서도 우리의 특징적인 문화를 이어왔다면 민족문학으로서 배울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문명권 안에서의 민족문화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한편, 지금의 우리국가가 우리에게 예전 이땅에 살던 사람들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도록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11 배준영>
* 맞는 얘기. 단군민족주의의 유구함과 유력함. 그러나 여러분들이 찾아야지. 민족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꼭 민족을 찾아야 하나? 나는 왜 민족을 찾으려 하나?
3.2. 고조선(p.70)
질문 : 후대에 단군신화가 전해지면서 환인과 환웅의 언급이 줄고 단군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신의 답변 : 단군신화를 현실에 가깝게 하고 이를 전파하여 인식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인 환인과 그의 아들인 환웅은 중세, 근대로 넘어오면서 허구성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환웅의 아들인 단군 또한 허구성이 짙은 인물이다. 그러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함양하는 과정에서 이를 현재의 시점으로 해석하고 보려는 일련의 노력이 있었기에 환인과 환웅에 대한 부분이 줄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었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단군 역시 신의 자손이지만 보다 인간에 가깝게 재창조시켜 해석하는 것으로 전승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국문과 안효섭>
Q. 북한은 단군신화를 어떤 눈으로 볼까?
A. 그동안 북한은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역사적 유구성과 우수성을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라 생각해왔다. 1993년 평양의 단군릉을 발굴하고 개건하고 나서는 단군전설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전설이란 말에 포함된 뜻은 단군을 실제의 역사적 사실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북한은 단군문학을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으로 이어진다고 해 북한 정권(김일성)의 정통성 확보 수단으로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10 윤미현>
Q. 71p 태백산신단수는 생명의 나무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세계수 ‘이그드라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A. 이그드라실은 줄기와 뿌리가 세계를 관통하여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와 인간의 세계인 미드가르드 모두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태백신단수역시 환웅의 강림으로 천계와 지상계를 잇는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형상징으로서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김민수>
* 단군신화에 대해선 선생님 발표^^
3.5. 탐라국 건국서사시 (p.91)
질문: 책을 읽다보니 제주도의 신화가 굉장히 타 지역에 비해 방대하고 참신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 그 맥락이 궁금합니다.
탐구: 아무래도 제주도가 그 특수적인 위치나 독립적으로 떨어진 특성 등에서 다른 나라들과 조금 다른 신화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11이가람>
그렇긴 하지.
4.2. 전설ㆍ민담시대로의 전환 (p.100~)
p.103 에서 전설을 자아의 패배를 귀결로 삼으며 합리성을 추구하다가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불합리에 부딪히고 마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무슨 의미일까? 자아의 패배만을 귀결로 삼는 것이 왜 합리성이며 그렇게 해서 부딪히는 감당할 수 없는 큰 불합리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 올립니다. <11 부은아>
** 나름의 합리성은 있는데, 그걸 좇으려 하다가 파멸되고 말았으니. ex. 해명태자는 스스로 해명은 했으나 제대로 해명도 못하고.
<추가>p.108 에서, "노래는 원래 길어지고, 이것저것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짧은 노래가 몇 편 따로 등장해 한역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오히려 유리왕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황조가> 처럼 감정이 잘 드러나는 짧은 노래들이 많이 한역되어 불러졌을 것 같은데, 한역된 짧은 노래가 많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장형준>
<추가> 유리왕, 시련의 근본이유가 신화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가치관의 전반적인 혼란이 일어난데 있다. 자아와 세계의 동질성이 흔들려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지 못함, 사랑노래로 해결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다 <황조가>와 위 설명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이해되지가 않는다.
신화 세계의 몰락이 신화적 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화적 인물이 개인적 서정을 가졌음이 자아와세계의 동질성이 흔들리는 것인가? <박혜미>
<국문10김유진>
4.3. 짧은 노래 몇 편 (p.104~)
3. <구지가>가 굿노래 대목이지만 굿을 하지 않을 때 무당이 아닌 예사 사람도 부르는 노래로 떨어져 나오지 않았나하고 추측하였는데, 다른 굿노래와 다르게 추측한 그 근거가 무엇인가요?
- <구지가>는 다른 굿노래에 비해서 짧은 편이다. 첫 번째 근거이고, 구지가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주술성을 요구할 때 그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 불렸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상황에 따라 변형되면서 무당이 아닌 예사 사람이 변형하여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박하영>
** 굿노래라고 추정될 만한 노래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서...
5.1.1. 한문 사용과 중세화(p.109~)
Q2. 기층문학이 뭔가요?
나의 답변-(잘 모르겠습니다ㅠ 알려주세용)
Ex) 한문이 공동문어로, 한문학이 상층의 공식적 문학으로 등장하고, 우리말 문학은 기층문학으로 격하된 시대가 중세이다.<11 노은혜>
** 미묘한 언어 사용의 문제. 상하층이라 하지 않고 상층과 기층(基層), 사회를 떠받드는 기초가 되는 층이라고 한 거지. 한문학이 공식 문학이 되니 우리말 문학은 하층 사람이나 쓰는 문학이 되어 버린 거야. 그래도 하층이라고 하면 비하하는 표현이 될 수 있으니 기층이라는 용어를 쓰는 센스!
중세의 목적은?
중세 문명의 발전
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와 세계종교를 받아들여, 인류는 서로의 지혜를 나누며 고대의 폐쇄성, 불평등, 비논리를 시정하는 사회 변화를 겪고, 이념적, 예술적 향상을 이룰 수 있었다.
Q2. '공동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민족어를 국어로 육성할 수 있었던 곳은 하나도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나의 답변, 공동문어는 민족어를 말살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공동문어를 사용함으로써 보편적으로 민족어를 통합, 재정비할 수 있게 되었고 민족어가 더 발달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는 뜻이라 생각한다. <11 배준영>
** 민족어 글자 체제가 아니라 사상적인 면을 말하는 것.
1. 공동문어문학으로서의 한문의 사용은 이해가 되지만, 공동문어가 민족어를 말살하거나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았다는 데에는 의문점이 듭니다. 한문을 중시하는 풍조로 인해 민족고유 언어의 창제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중세를 천자와 왕이 구분되는 시대로 명명하면서 이것이 정치적 주종관계는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신라등이 취한 자세를 보면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김주현>
1. 공동문어문학을 사용하는 문화 내에서는 이질성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공동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이 각각 네 세계제국문명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공동문어를 사용하는 국가 내에서는 공동문어를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각국의 특성과 그들이 이미 사용하던 언어에 맞게 조금씩 고쳐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될까요? <11 김수연>
질문: 구결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시를 보고 싶습니다. 책을 보니 <임신서기석>에 적힌 우리말 표기와 혼란이 오는데 서로 같은 것인지요?
탐구: 이는 제가 탐구할 수 있는 부분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11이가람>
** 임신서기석 살핌.
5.1.2. 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금석문 (p.118~)
질문1 : p.114에 '한문을 수용해서 한문학을 일으킨 것이, 우리말 문학에 의한 자기중심주의가 기층문화의 영역으로 내려가서 한문학을 상대로 힘겨운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점에서는 불행이었다.'라는 본문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 문학에 의한 자기중심주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이 내용 전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탐구1 : 이것이 '기층문화 깊숙히 우리말이 박혀있어서 공동 문어인 한문이 빠르게 정착되지 못하고 방해를 겪었다.'라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의 내용인지에 대하여 다른 학우분들이 이해한 바를 듣고싶습니다. <10김선>
질문2: <중원비>(中原碑)의 내용이 이두가 섞인 변격한문으로 적혀있는 것에 대하여 저자인 조동일 선생님께서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자부한 고구려가 변격 한문을 쓴 것은 뒤떨어져 있는 신라의 수준에 맞추려고 한 처사였을 수 있다.'라고 의견을 제시하셨는데,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탐구 2 : 제가 생각하기에 고구려가 변격한문으로 비문의 내용을 적은 것은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자부심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높고 상대방은 낮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에게 맞춰 격식을 낮추기 보다는, 오히려 '나는 이렇게 잘났다.'를 보여주기 위하여 더 격식에 맞고 수준 높은 형식을 보여주고자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변격 한문을 사용한 까닭은 비문의 내용인 '고구려와 신라의 상하관계'를 더 많은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추측합니다. 나라에서 세운 비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형식은 갖추어 한문을 사용하되, 격식이 엄격하지 않은 변격한문인 이두를 섞어 사용하여 널리 알려지도록 했을 것입니다. <10김선>
<추가>질문) 한문학의 갈래에서 시(詩), 사(辭) 또는 부(賦)로 구별되어 왔다고 하는데, 시, 사 그리고 부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 시는 말 그대로 서정적 시인것 같고, 일반적으로는 사(辭)와 부(賦)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와 부를 사부라고 통합하여 불렀다. 그러나 사와 부를 구별하여 부를 경우에는 부는 웅대하거나 독특한 사물들을 아름답고 멋지게 표현하려고 애쓴 서사적 작품이고 사는 우수와 격정 같은 것을 남방가요의 아름다운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부의 경우가 비교적 산문의 수법을 많이 운용하였다고 한다. <11오한별>
<추가> Q. 책에서 '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와 세계 종교를 이룩하는데 어느 민족의 조상이 주도적인 구실을 했던가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우리 선조가 일찍이 커다란 활약을 보였으면서도 그 둘을 스스로 이룩하는 기회는 왜 갖지 못했던가 하고 안타깝게 여길 수 있다' 라는 것에서 '커다란 활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국문10손소영>
<추가> Q. 그리고 공동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민족어를 국어로 육성할 수 있었던 곳이 하나도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필리핀, 아프리카 예를 들었는데...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어요. 침략당한 국가들은 공동문어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민족어를 국어로 육성하지 못한게 아니라 애초에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제 생각이 맞는 것인지 궁금합니다.<국문10손소영>
<추가> 조동일 선생님께서는 몇번에 걸쳐서 우리의 옛 선조가 중화 문명과 한문은 공동문어로 받아들인 것을 당시로서는 당연한 결과였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문화권 제반 안에 들어서며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문명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으로 여기는 것을 근대인의 잘못된 시각이라고 보시는데, 만약 우리가 능력이 되었다면 우리 나름의 발전이 더욱 나은 선택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에 우리가 중화문명에서 보고 배울 것이 많아 중화 문명의 많은것들을 보고 가지고 온 것들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말씀하셨던 것처럼 고대에서 중세로써 살아남기 위해) 굳이 책에서와 같이 공동문어권 발전에 대해 무조건적인 긍정은 과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06김상현>
5.1.3 국내외의 정치문서(p.126~)
Q. p.128) 문무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바친 <걸죄표>: 자세한 시대적 정황은 무엇이며 왜 보내야만 했을까, 이처럼 국서에서 한 말과 실제 행동을 다르게 하는 양면작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A. '걸죄'란 자신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달라는 뜻이며, '표'란 제왕에게 바치는 공식문서를 말한다. 〈삼국사기〉 권7 신라 본기의 문무왕 12년 조항에 실려 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철수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는 문무왕 11년 6월 죽지의 통솔 아래 백제 가림성의 벼를 짓밟고, 석성에서 당 군사와 싸워 적 5,000여 명을 죽이고, 장군 6명을 사로잡았다. 다음해 1월 다시 백제의 고성성을 공격해 이겼으나, 가림성을 공격해서는 지고 말았다. 백제가 당에 군대를 청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같은 해 9월 급한 김에 당에 알리지도 않고 토벌했다. 그래서 당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원천·변산 등을 당에 보내 걸죄표를 올리게 된 것이다. 백제가 당에 군대를 청해 신라를 공격하자 어쩔 수 없이 백제의 잔당과 당의 파견군을 공격했다고 설명하고,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생각해 관대하게 용서해달라고 했다. 여기서 문무왕은 자신을 당 황제의 신하라 일컬었으며, 전편에 애걸하는 글을 씀으로써 비굴한 자세를 보였다. 3년 뒤 문무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황제의 용서를 받고, 과거 신라 왕에게 주어졌던 관작을 돌려받았다. 사대문장의 전형적인 문체인 사륙변려문으로 씌어졌으며, 671년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장편의 글과 함께 당시 한문장의 높은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는 당나라와 쟁패를 시작했지만, 국서로는 이렇게 치욕적인 걸죄표를 보내야만 했던 이유는 아직은 당나라와 정면승부를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대외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 문무왕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10 윤미현>
5.2.1. 고구려 노래 (p.135~)
질문: 고구려의 음악적, 문학적 경지가 삼국과 비하면 월등하게 높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탐구: 이는 중국과 접하고 있는 고구려의 지리적 특성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선진문물의 도입이 신라와 백제보다는 빨랐을 것입니다. <11이가람>
고구려는 당대 음악계의 최고였다는데, 왜 민간의 노래를 끌어다 궁중음악으로 썼습니까?
자체 개발해도 되는 것 아니었나요. 게다가 '하층민의 노래와는 다른 (구별되는) 국가의 질서와 위엄을 상징하는' 예악을 힘써 이룩했다는데 (136p.) 왜 자체개발이 아닌, 민간의 구비 전승되는 노래를 궁중음악으로 계승시켰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궁중음악과 민간층의 노래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같은 작품을 계승했다는 전제 하에) <이효원>
고구려는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많았다고 하는데, 왜 고구려 사람들이 부른 노래에 관한 자료는 <고려사>악지에만 남아 있나요? (=왜 이렇게 소수의 자료만이 남았나요) <이효원>
5.2.2. 백제노래(p.139~)
Q. p142) 백제 노래의 특징이 여성의 노래라는 데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와 그 시기의 대표적 여성 문학은 무엇일까?
A.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 잡아 온화한 기후와 풍요한 풍토의 혜택을 누리던 백제에는 주로 서정적인 문학이 융성했다. 그래서 여성들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여성의 노래들이 많았고, 국정을 담당했던 남성들이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여 후대까지 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시대 이전의 여성 문학을 살펴보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후인의 작자를 ‘여옥’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많은 여성 시가들이 배출되었겠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도천수관음가;작자 희명, 신라>, <원왕생가;작자 광덕의 처, 신라>, <정읍사;백제>가 있다. <10 윤미현>
삼국 중 유독 백제는 불교문학, 한시, 놀이와 연극, 금석문 등의 여러 분야에서 자료가 부족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금석문의 경우는 백제가 3세기 전후에 고구려나 신라보다 앞서서 영토를 크게 확장한 시기에는 한자로 비문을 써서 그 공적을 알릴만큼 한문 사용이 일반화 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계속 패하기만 하여 금석문을 남기지 않았다고 추론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 자료에서는 일본과의 외교문서 등이 조금 남아있을 뿐 유독 많은 분야의 자료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본에 다양한 문물과 문화를 전해준 것으로 보아 백제는 매우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 점령국의 고의적인 훼손인지 아니면 백제가 문학 자료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국문10김유진>
5.2.3. 신라 노래, 이른 시기의 모습 (p.143~)
<명주>는 춘향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춘향가에서는 과거급제로 당당히 돌아오는 결말을 맺고 있는데 반해, <명주>의 경우, 약속했던 과거합격여부와는 상관없이, '물고기를 통한 신비로움'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에는 당대 사람들의 의식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효원>
5.2.4. 향가ㆍ사뇌가 (p.149)
Q1. 사뇌가는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나의 답변- 향가 가운데 상위의 것을 말합니다. ‘사뇌’는 “뜻이 말에서 정교하므로 뇌라고 한다”는 뜻이나 ‘사뢰다(웃어른께 말씀을 올리다)’ 와 어원이 같아 존엄한 대상을 향해 격조 높은 말을 사뢰는 노래를 ‘사뇌가’라고 했을 수 있다. <11 노은혜>
Q3. 한시와 대등하게 맞서는 민족어시의 율격을 마련하기 위해 동아시아 여러 민족은 어떤 방식을 택했는가?
우리나라는 향가에서 민요의 형식을 따라가는 방향을 택한것 같고 한국은 정보량, 일본에서는 음절수를 맞추를 것을 택했다. 이는 상층시가 창조자가 한국에서는 기층민중과 동질성을 많이가져 민요와의 관계를 다시 형성하면서 개편되어간게 민요와 한시 사이의 우리만의 율격을 만든것 같다. <11 배준영>
1. 향가는 불교라는 종교 지도자들만이 지을 수 있었던 것인가요? 향가는 중국시가에 대한 우리나라 고유의 시가였다고 하는데, 책에 있는 내용만 읽었을 때 향가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11 김수연>
향가와 사뇌가의 차이? 향가 중 단순히 10구체 향가만을 사뇌가라고 한 것인가요? '높고 정한 뜻을 사뢰'지 않는 것은 향가인가요? <이효원>
Q1. 도솔가가 갖춘 차사사뇌격이란?
A1. 향가 가운데 10구체만을 이르는 말(조윤제 박사 학설) <국문11박가영>
Q2. 향가는 화랑 집단의 스승이 아닌 누구라도 지을 수 있었으나, 꼭 불교를 믿어야 했나요?
A2. 창작 향가는 숭고한 이상을 갖추어야 하니까 불교를 믿어야 한다고 했으나 필수적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국문11박가영>
Q. 유리왕 때의 도솔가는 차사사뇌격을 갖추었다는데 차사사뇌격이란?
A. 차사사뇌격은 차사와 사뇌격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차사는 감탄구라고 볼 수 있다. 사뇌격은 사뇌가 형식으로 10구체 또는 다섯줄 형식을 말한다. 즉, 차사사뇌격은 감탄구를 갖춘 10구체 또는 다섯줄 형식의 가악이라고 볼 수 있다. <국문11이동우>
155쪽 (향가의 율격) "언어 구조의 차이 때문에, 한시와 민족어시 한 줄의 음절수와 정보량을 다 대등하게 하지 못하고 택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서로 같고, 선택한 것이 반대가 된다. 우리는 정보량을, 일본에서는 음절수를 택했다."라고 나오는데,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어떤 차이가 생겼는지 실제 예를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현대의 시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도 궁금합니다. <이효원>
5.3.1. 민요계통의 노래(p.158~)
향가 ‘서동요’에서 당시 중세 시대와는 다른 이질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문학적 상상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민중들의 무의식적 욕망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답 : 중세보편주의가 존재하였지만 여전히 계급이 분화되고 왕과 일반 백성들과의 간극이 존재하였다. 특히 마를 팔아서 생활하는 서동이 선화공주와 사랑을 맺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민중들의 무의식적 욕망. 즉 계급이나 다들 장벽을 넘어서 순수하게 남자와 여자로서의 욕망을 표출하는 데 그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가깝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장치로서 실제 존재했던 왕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라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서동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질 수 있는 노래로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국문과 안효섭>
Q 서동요에서 신라왕이라고 하면 사실이 아님이 바로 드러나니 백제의 무왕이 등장했다고 했다. 무왕 역시 실존인물이었는데 백제왕이라고 하면 거짓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책에 이렇게 언급된건지?
A 당시 백제는 왕조를 기록하는 기록문화가 없거나, 그런 문화가 덜 발달했다면 백제왕이라고 해도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김민수>
158쪽 (향가의 작품세계) "백제의 총각이 신라로 가서 이 노래를 지어 퍼뜨려,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나 유래설명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원래는 민요였던 것이 향가에 편입되지 않았던가 한다. 민요와 직접 닿고 있는 향가의 영역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라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 유래설명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민요였던 것이 향가에 편입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무엇이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지가 궁금합니다. <이효원>
160쪽 (향가의 작품세계)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배제할 것은 아니다. 이중의미에서 이 노래가 향가에 편입된 경위를 알아내는 단서를 찾아도 좋겠다. 예사 일노래라면 민요의 영역에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다. 양지스님이 불상을 만들 때 부른 토목노동요가 불교신앙요로도 이해되어 향가로 기록되었을 듯하다." 라는데, 그렇다면, 향가로 기록하는 기준이 있었다는 것 일텐데, 그 기준이 무엇인가요? <이효원>
"주술과 교훈이 하나이게 하는 작전을 비유와 상징을 중첩시켜 의미의 층위가 여럿이게 하는 서정의 수법으로 수행했다. 그래서 최초의 사뇌가가 고도로 복합적인 심상을 갖추게 했다."라고 하는데, 서정이 비유와 의미의 층위가 여럿이라면, 상대적으로 그에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인가요? <이효원>
<추가>1. 향가를 보면 유독 화랑을 주제로 한 향가가 많음을 알 수있는데, 이러한 향가가 많은 이유와 그 향가들이 문학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A.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화랑은 신라시대의 청년 수양 단체로 귀족의 자제 중 뛰어난 자들을 뽑아 심신 수련과 학문 수양 등을 연마시켰는데, 그들이 있던 시대에 향가가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들도 많이 공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향가는 불교와 관련된 부분이 많은데, 화랑의 세속 5계 또한 원광법사가 지어준 것으로 보아 그들도 불교에 많이 관련이 있었고 그 때문에 향가를 짓는 데에 소재로써 많이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장형준>
<추가>2. p.150 를 보면, "'향가'는 사뇌가라고도 했다" 라고 서술하면서 향가와 사뇌가의 차이를 향가 중에서 뜻을 높이 사거나 표현이 뛰어난 것을 사뇌가 라고 하는데, 책을 읽다 보면 향가와 사뇌가의 구분이 잘 가지 않습니다. 뜻을 높였다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책에서 사뇌가라 일컫는 <원왕생가>, <도천수관음가> 등은 표현이 뛰어난 향가를 사뇌가라 일컫는다는 앞의 설명과는 다르게 "시상이나 표현이 단순하다" 라고 서술되어있습니다. 향가와 사뇌가를 구분하는 정확한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사뇌가는 향가의 원래 명칭이었다는 견해와, 다만 신라의 노래라는 뜻, 또는 10구체형식의 향가에 대한 명칭, 시나위의 의음설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연구하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주장이 여러가지라 정확히 구분짓기는 어려우며 이외에도 다른 주장들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의 정설로 굳어진 것은 지금까지 없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조동일 선생님이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쉽도록 약간의 주관적 기준이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형준>
<추가> 국선지도의 지도자들이 창작한 향가는 집단적 개인작이고 주술적 서정시라고 나와있는데 자신의 감정을 담은 작품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예로 들 수 있는 작품도요!~ <11홍정수>
<추가> 질문) 사뇌가와 일반 향가의 구별 기준으로 ‘높은 뜻’이 있는데, 높은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이진호>
5.2.5. 향가의 율격
<추가> 향가의 율격 : 구와 명에 대한 구분에서 구와 명이 무엇인가? <박혜미>
<추가> 질문) 향가의 율격이 이해가 잘 안됩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진호>
5.3.2. 정치상황과 관련된 노래 (p.164)
1) p.166에서 <혜성가>를 ‘혜성이나 왜군 자체를 물리친다는 노래는 주술이다. 혜성과 왜군 때문에 조성된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를 말해주는 노래는 교훈이다. 그 둘이 하나이게 하는 작전을, 비유와 상징을 중첩시켜 의미의 층위가 여럿이게 하는 서정의 수법으로 수행했다‘고 표현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11 부은아>
p169 신충의 <원가>가 최고관직에 오른 진골 귀족이 지은 향가 중 유일하다고 합니다. 이 이유가 진골 귀족층이 향가에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진골이 지은 향가는 많았지만 기록이 남아있는 향가로 유일하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향가는 문학 갈래로서 한시, 불교의식과 구별되는 우리 고유의 우리말 노래입니다. 또한 국선지도의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들이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면서 창작한 작품이 향가의 본보기라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월명사와 충담사 들 수 있는데, 월명사는 기득권을 가진 쪽(진골귀족)의 반발을 누르기 위한 구실로써 경덕왕이 부른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때 월명사는 “저는 국선지도에 속해 있으므로 향가만 알 뿐이고 범성은 모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 속에서 진골 귀족은 범성을 부르면서 거행하는 의식에 관심이 많은 기득권 쪽이고 월명사가 향가를 부르는 국성지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이때의 진골귀족들은 향가보다는 범성 쪽에 더 힘들 쏟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국문10김유진>
5.3.3. 월명사와 충담사 (p.170~)
고승담은 불교를 민족문화이게 하고 대중화하는 데 이용되었다는데, 다른 역할은 없었을까요? -대중화와 같은 말이지만, 사람들에게 교훈과 재미를 주는 데 이용되었을 것 같아요. 특별히다른 역할로 무엇이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영상11황유진>
향가 가운데 왜 <도솔가>만 한역시가 함께 전해지나요? <이효원>
(향가의 작품세계) 향가 가운데 왜 <도솔가>만 한역시가 함께 전해지나요? <이효원>
173쪽 (향가의 작품세계) 일찍부터 해독이 잘 되어 있었다는 <제망매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작품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기에 일찍부터 해석이 잘 되어 있었나요? <이효원>
5.4.1. 불교사와 문학사 (p.183)
불교가 우리나라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비구니와 같은 여성승려는 그 당시 불교에서의 지위는 어땠나요?? <김형태>
불교는 말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으면서 말을 극도록 불신했다고 합니다. 불타가 깨달은 근본 이치는 말로 나타낼 수 없고 글로 써도 어긋나기만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불교가 이룩한 저작이 양과 질 양면에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 월등하다고 했는데 이는 시대적인 측면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인가요? 어떻게 설명이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도연>
불교의 이상은 현실과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동안 종교가 지속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만물은 평등하다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는 불교이지만 지배체제는 존속했었죠. 그러한 갈등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마음에 위안을 얻어서 불교가 유지된 것일까요? 구체적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영상11황유진>
5.4.2. 원효 (p.187~)
1. 원효가 이언진여에 이르기 위해 의언진여를 방편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요. 말로써 말을 없애는 말을 계속해 글로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네요. a로 a를 없애기 위해 a를 계속 한다는,,,?!?!?!?!
나름의 답변.
1. 진실을 떠난 말을 없애기 위해 말에 진실을 담기 위해 노력하며 글을 썼다.
2. 진실을 떠난 말인 헛소문과 같은 말을 없애기 위해 말이 아닌 글을 전하려 노력했다. <11 이정수>
원효는 말을 신뢰하지 않아서, 말로써 말을 없애는 말을 계속해 글로 나타냈다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언진여'와 '의언진여'의 정확한 의미도 알고 싶습니다. <11 김수아>
<추가> 질문) 이번 과제 부분에서 특히 고승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원효의 이야기가 주로 다루어 졌는데, 원효의 동료이자 라이벌로 추앙되는 화엄학의 대표자 의상에 관한 고승담은 없을까요?
답변) 간단하게 조사해본 결과 선비화의 일화가 있었습니다. 의상조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지팡이가 있었는데 조사가 열반하실 때 예언하기를 "이 지팡이를 비와 이슬에 맞지 않는 곳에 꽂아라. 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면 우리나라의 국운이 흥왕할 것이다"고 하매 문도들이 조사당 축대에 꽂았더니 과연 음력 4월 초8일께 버선 모양의 누런 장삼빛 꽃이 피었다. 그 후로 국운이 흥하고 나라가 태평할 때는 늘 잎이 피고 꽃이 피었으나 한말(韓末)에서 일제 때는 잎은 피어도 꽃은 피지 않았던 것이 8.15해방과 함께 30여년만에 꽃이 피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樹齡)은 1300여년이라 하나 높이는 불과 1m 30Cm정도로 이지방의 고로(古老)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장의 변화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의 잎과 가지를 애기 못 낳은 여인이 다려 먹으면 임신한다해서 몰래 꺾어 가지고 나무가 자랄 여가가 없었다고도 한다. 일제 때 철책을 하여 방지하다가 그래도 피해를 면치 못하므로 지금은 쇠 그물을 처마까지 쳐서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참고문헌] 구 영주군지 .영남의 전설, 유증선 저
한가지 더 어째서 원효의 이야기가 의상의 이야기보다 더욱 유명하고 익숙할까요?
원효의 일화가 더욱 재밌어서? 의미있어서? <김성목>
5.4.4. 게송과 염불 (p.197~)
게송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게 나오는데 염불에 관한 설명은 자세히 나오지 않네요. 현대에 염불이라고 하면 스님들이 염주를 굴리며 외는 그 말들을 말하는 것인데 게송 중 스님의 수행에 관련된 게송을 염불이라 하는 건가요?<11 이정수>
1. 게송은 불경을 풀이하는 글을 쓰면서 지을 수도 있고, 깨달음이나 서원을 나타내는 노래까지도 포괄하는데, 게송과 일반 한시는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는다고 나와있던데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게송과 한시를 보았을 때 어떤 게 게송이고, 어떤 게 한시인지는 구분할 수 없는 건가요? 아니면 조금이라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1 김수아>
Q3. 불경과 게송은 같은 의미인가요?
A3. 불경을 풀이하는 글부터 깨달음이나 서원을 나타내는 노래까지 포괄한다고 했으니 같은 의미라고 여겨집니다.(주관적인 생각입니다.) <국문11박가영>
Q .'게송은 불경을 풀이하는 글을 쓰면서 지을 수도 있고, 깨달음이나 서원을 나타내는 노래까지도 포괄한다. 불교와 관련된 승려의 시를 모두 게송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게송과 일반 한시는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고 쓰여 있는데, 그렇다면 게송은 염불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인가요? 또, 불교와 관련된 승려의 시를 모두 게송이라 하고 이는 한시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하셨는데, 한시의 보편적인 주제와 소재가 불교와 관련된 것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A. 불교계에서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의 한 형태를 게송이라 한다. 게송은 인도의 가타가 운이 있는 시의 형식이었기 때문에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한시의 형식에 맞추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게송은 시의 한 형태로 독립되었다. 그러나 원래는 불교경전의 산문 내용을 시의 형태로 되풀이 설명한 것이다. 염불은 불경을 외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단순히 불경을 외는 것을 염불이라 하고 이를 한시의 형태로 바꾸어 외는 것을 게송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게송과 일반 한시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점은 그 당시 불교의 위치에서 오는 결과라 생각한다. 불교는 당시 국가를 대표하는 종교이자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를 시의 주제와 소재로 삼는 것은 보편적인 흐름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불교가 한시에 미치는 영향이 컸으리라 예상된다. 하지만 엄밀히 분류하자면 게송은 한시의 한 종류가 된다. <11 이지은>
5.5.1. 신화적 상상의 유산 (p.205~)
205쪽 (설화에 나타난 상하남녀관계)"삼국이나 통일신라시대의 설화는 그 당시 문학의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큰 구실을 했다. "라고 하는데, 설화는 크게 세 가지 종류나 있다. 신화, 전설, 민담. 이 세 가지가 다 큰 구실을 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특히 어느 영역이 큰 구실을 했다는 것일까? ('설화'가 큰 구실을 했다라는 말을 그냥 받아들이기엔 너무 포괄적인 개념같아서 질문 드립니다.) <이효원>
"기록문학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구비문학의 영역은 줄어들지 않았다. 향유자의 범위를 들어 말하면 민요나 설화가 주도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민요와 설화를 비교하면 설화가 더 큰 비중을 가졌다. 설화는 상하층이 함께 만들어 내고, 살아가면서 생기는 일은 무엇이나 다룰 만큼 폭이 넓다. 소설과 견줄 수 있는 포괄성을 가지면서 지지기반이나 유통범위가 소설보다 더 넓다. 설화시대에서 소설시대로 넘어오면서 문학의 저변이 오히려 축소되었다."고 하는데. 1) 거듭 소설과 비교하는데, 여기서의 '소설'은 어느 시대를 기준으로 한 '소설'의 의미인지.2) 소설과 설화의 차이는 무엇인지가 궁금합니다. <이효원>
206쪽 '내부의 혁신자 소설'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이 어떤 소설인지 모르겠습니다.<이효원>
207쪽"신라왕권이 신성하다는 증거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건국신화 이후의 시기에 생겨났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즉, 증거물과 신화가 분리된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이효원>
5.5.3. 영웅담의 성격 변화 (p.215~)
상하층이 함께 영웅으로 믿는 김유신을 등장시켜 희화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모두가 믿는 영웅을 희화화한 것은 어떤 심리 때문이었을까요. 해학? 우월감? 친근감 유발? <이효원>
신화가 중요한 사회가 고대시대였고, 신화에 대한 불신이 일어나면서 전설․민담시대로 들어서는 변화가 나타난 시기가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라고 했습니다. 이에 전설․민담이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 중세시대였고, 소설이 등장하는 시기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라고 하였습니다. 신화․전설․민담을 설화로 통칭할 수 있는데 이 중 신화는 자아와 세계가 동질적이거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던 것이고, 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세계의 우위에 입각해서 다루어 자아의 패배를 귀결로 삼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해명태자 이야기와, 호동왕자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상호우위에 입각한 갈등을 나타내’었다고 하였는데요, 이 때 전설과 소설의 차이를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나의 답) 이 때 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 중에서 세계의 우위가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자아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세계(중세로 이행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질서를 지닌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헷갈렸던 것은 소설을 자아와 세계의 '상호우위에 입각한 갈등'이라고 표현한 부분이었는데, 표현상으로 전설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여기서 상호우위에 입각한다는 것은 전설에서처럼 세계의 일방적인 우위가 드러나거나 혹은 자아의 일방적인 승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계속되면서 치열한 갈등이 드러나는 것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갈등의 양상을 통해 작가가 지향하고자 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반면 전설에서는 혼란한 세계에서 커다란 불합리에 부딪하고 마는 자아의 모습이 나타날 뿐이다. <김주현>
5.5.4. 하층민의 소망과 시련(p.220~)
‘5.5.4. 하층민의 소망과 시련’ 부분을 보면 기본적으로 역사에서는 하층민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실려 있는 도미의 부분은 지배자의 횡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하층의 노력이라는 의미를 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조금은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첫째. 하층민의 역사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사대주의의 대표적이라 일컬어지는(물론, 해석 및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른 얘기도 존재한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내용인 것을 숙지하자. 이는 단순히 지배자의 억압을 받는 하층민이 아니라, ‘백제 지배층’의 무자비한 횡포에 대한 백제 백성들의 입장을 내세운 것은 아닌가? 삼국의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적었다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얘기를 다시 들여다보면, 주 초점이 맞춰지는 부분은 억압과 횡포이지 않은가? 겨우겨우 고난을 이기고, 도망을 친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를 바탕으로 하층민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의 천명으로 연결짓기가 고리가 약하지 않은가?<국문과 이제훈>
Q 미천왕의 경우 고아로 자라 고생하다 왕손임이 밝혀져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사기에 있는데, 책에서는 경력에 허접이 이씨 대문에 이런 민담유형을 받아들였다고 언급 되어있다. 하지만 저렇게 천한 신분으로 생활했다는 것이 왕이 되기에는 경력의 허점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진짜 덮으려던 허점은 무엇이었는가?
A 왕손임이 밝혀지고 갈등이 전부 해결되며 미천왕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어쩌면 그가 정말 숨기려던 허점은 그가 적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닐까. <김민수>
5.5.5 설화의 정착과 변모(p.224)
설화가 변모하면서 생긴 ‘전기’는 설화와 소설의 중간 형태라고 교재에서 명시하였다. 구체적인 정의는 어떠한 것일까?
자신의 답 : 설화가 민간에서 전승된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한다면 ‘전기’는 이를 좀 더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보다는 단순하게 표현하면서 설화의 원형은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구비문학인 설화를 글로 옮기면서 작자가 문학적인 표현을 다듬고 때때로 편집과 간략한 덧붙임으로 표현된 것이 ‘전기’가 아닐까 싶다.<국문과 안효섭>
225쪽(설화의 정착과 변모) "남은 작품은 세 편이지만, '전기'를 문학갈래로 인정할 수 있다."라는데. 세 편 밖에 안되는 '전기'가 독립된 문학갈래로 인정받을 만한 문학적 특수성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이효원>
<추가> <김현감호>, <조신전>으로 전기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증거라고 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화를 기록하는 행위가 문학창작으로 이해되면서 생겼다는 것인지, 문체의 변화에서 전기의 등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자를 보면 전기(傳奇)는 기이한 이야기인데 내용적인 특성이 아니라 창작 변이에서 전기의 등장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 전기의 등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혜미>
5.6.1. 중세의 굿ㆍ놀이ㆍ연극 (p.227~)
"놀이는 참가자 일동이 정해진 공동의 절차에 몰입하도록 해서 화해와 단합을 이룬다. 사회 내의 갈등을 문제 삼아 몰입이 아닌 각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연극이다. "라는데, 1) 여기서 말하는 몰입과 각성의 차이가 무엇인지. 2) 사회 내의 갈등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몰입이 아닌 각성이 필요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효원>
5.6.4. 다섯 가지 놀이 (p.237~)
2) p.241에서 ‘<오기>가 나타내는 기풍은 대체로 보아 구김살이 없고 씩씩하다고 할 수 있다. <처용극>과 견주면 그런 특징이 한층 뚜렷하다. <처용극>이 병든 도시의 연극이라는 추론을 연장시켜, <오기>는 신흥하는 세력이 그 대안이 되는 연극을 육성했다고 보고 싶다.’라고 했다. 타당한가 ?
(답) 저는 <처용극>이 병든 도시의 연극이라는 추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책은 <처용무>를 좌절과 패배감의 표출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처용무>의 처용은 진정한 승리자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모습을 한 역신이 아내와 자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 역신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신은 그의 대범함에 감동받아 스스로 물러간다고 합니다. 만약 <처용극>이 병든 도시의 연극이라는 추론이 맞다 해도 신흥세력이 그에 대한 대안으로 <오기>를 내세웠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신라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다섯 가지 놀이인 <오기>를 유행시키면 사람들이 더욱 현실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잘 드러내는 공연이 그 대안이 되었어야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11 부은아>
5.7.1. 동아시아문학의 판도 (p.242~)
p243 한자를 빌려 민족어를 표기하는 방법으로 신라의 향찰, 일본의 가명, 월남의 자남 등이 있는데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한자를 빌려 표기 했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두, 구결, 향찰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두: 한문을 우리말 어순에 따라 적는 방식으로 서술어를 맨 뒤에 놓는 것이 특징, 구결: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삽입하는 요소들을 의미, 한문 원문에 전혀 변형을 하지 않으며 어순에 변화를 주지 않고 오직 해독의 편의를 위해서 구결을 달았음, 향찰: 향가의 표기에 사용됨, 한자를 빌려 조사를 표기함) 일본의 경우 가나글자라고 하고, 월남도 자남이라고 하여 한자를 차자표기를 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음을 빌려와 표기한 음독인가요? 아니면 뜻을 빌려와 표시하는 훈독인가요? 어떤 방법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질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이두, 구결, 향찰 3가지 방법 중에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을 어떤 방법인가요? <국문10김유진>
2. 차자표기법의 종류로 이두, 향찰, 구결이 있다고 읽었습니다. 차자는 남의 글자를 빌려 자기 나라 말을 적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이러한 차자표기법들의 의의는 아직 우리나라 글자가 생기기 전에 우리나라의 말을 먼저 표현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차자표기법의 사용을 통해 우리나라의 말과 글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11 김수연>
5.7.3. 발해문학의 작품 (p.247~)
발해의 문학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전하는 자료가 많지 않은데 발해 자체의 문자로 된 문학을 알 방법은 없는 걸까요? <김형태>
<추가>질문)5.7.4. 신라문학과 대외 관계 에서 발해문학의 작품이 국내에 남은 것에서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비에 새긴 글은 고유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발해문학에는 아름답게 표현하는 격식을 너무 존중하다 창의력을 잃은 폐단이 있었다고 하는데, 두 비의 내용이 거의 같다고 해서 격식을 존중하고 창의력을 잃었다고 속단할 수 있을까요? 발해문학이 남은 것이 없어서 두 비문만 보고 발해문학의 성격을 그렇게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답변) 같은 시기의 신라에서는 이를 막기 위한 비판세력이 있었으나 발해에는 어땠는지 알 수 없고, 두 비문이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당시에 세운 공주의 비문은 같은 내용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왕족이나 귀족의 비문을 알 수 없으므로 판단을 내리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11오한별>
5.7.4. 신라문학과 대외 관계 (p.253~)
국내외 정치문서에서 유럽과 같은 서방국가와 교류한 정치문서는 없는건가요? <김형태>
5.8.2. 전성기에 이룬 작품 (p.262~)
신라의 전성기는 정말로 길었는데 그 전성기간에 비해서 현재 전하는 문학작품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모르는 작품이 많은 것 뿐인지, 아니면 그 수가 정말로 적고 그 이유가 신라가 문학쪽에 치중하여 발달하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형태>
신라 시대에 여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 작가의 작품은 전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존재는 했으나 자료로서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김형태>
<추가>질문) 263쪽에 김대문의 저서인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계림잡전> 등의 특징이 유학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있었던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신라 자체의 전통을 찾아내고자 했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답변) 그가 남긴 저서를 살펴보면 다룬 범위가 신라문화의 전반, 즉 신라의 역사, 지리, 화랑의 역사, 왕의 호칭에 대한 풀이 등의 기록으로 신라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에서 서술했음을 알 수 있고, 서술의 객관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단순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 자신의 견해까지 첨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저서는 신라의 전통을 찾아낸 것을 특징으로 한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화랑세기>의 경우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1대부터 마지막 32대까지 차례대로 기록해 놓았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그의 저서에서는 왕의 호칭, 즉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 대한 뜻풀이를 설명하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소중한 자료가 된다. <11오한별>
5.8.3. 말기의 상황과 왕거인
(이건 단순히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서... 읽다가 헷갈려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226쪽"신라 말이나 고려초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본다. 육두품 출신의 인재들이 한문학을 하는 역략을 길렀지만,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도 아니고 재야문인으로서 적극적인 발언을 할 처지도 아니어서, 전기 같은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풍조가 생길 만했다. 그러다가 과거를 실시하게 되자 정통 한문학이 아닌 잡문 변두리로 빌려난 것 같다."빨간 글씨로 체크한 문장의 주어는 '전기'가 맞는 것이지요? <이효원>
5.8.4. 최치원의 성공과 번민 (p.270~)
신라 사회는 성골, 진골 귀족에 대한 육두품의 반발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육두품들이 그 귀족들을 비난하는 문학은 없었을까요? <김형태>
한국문학통사에 나타난 최치원의 위치에 대해서.한국문학통사에서는 최치원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나, 재능을 크게 떨치지 못하고 역사의 변방에 머물러야 했던 것에 대해서 많은 부분 최치원의 삶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가 글을 쓰는데 힘쓰는 동기가 자기 영달을 위한 것이며, 자기 사상을 뚜렷하게 세우지도 못하고, 유, 불, 도의 요소를 아우르는 사상을 찾았으나, 그 정도에서 머물렀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최치원은 한국문학통사에서도 밝혔다시피 이미 망조에 가까운 신라를 위해 글을 올렸다. 또한 최치원 정도의 당대의 문장가를 다른 세력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한국문학통사에서의 지적대로 그 깊이가 깊지 않을지도 모르나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한 대담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최치원을 다른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한기>
5.8.5 최광유ㆍ박인범ㆍ최승우ㆍ최언위 (p.277~)
신라말 삼최의 행보는 각각 달랐다. 특히 최언위는 고려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고려를 건국하는 데 역할을 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는 최치원은 반면 고국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하고 마는 데 그는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까?
자신의 답 : 나의 생각으로는 최치원이 스스로 뛰어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소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당나라에서 뛰어난 문장가이고 신라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인물이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알아서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최치원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전기의 김시습처럼 방외인으로서의 모습을 원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부딪혀보지 않고 스스로 좌절을 드러낸 인물이었기 때문에 방황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국문과 안효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