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거슈인 - 유명한 재즈그룹인 ‘존 피자렐리 트리오’가 미 의회 도서관을 방문했다. 그 곳에는 조지 거슈인 Gershwin, George의 악보와 음반 등 많은 자료들이 있었고 조지 거슈인이 사용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전시되어 있었다. 트리오 멤버 중 하나인 재즈 피아니스트 ‘레이 케네디’는 본능이 발동해 피아노에 앉아 건반을 만지기 시작했다. 도서관 직원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 피아노로부터 당장 떨어지시오." 그러나 이미 음악적 영감을 받은 레이 케네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라이어 캐리의 히트곡인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를 쳤는데 함께 한 멤버들조차 감탄할 만큼 감동적인 연주였다. 연주가 끝나자 도서관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혹시 I've got rhythm 압니까?"
재즈와 클래식, 같은 뿌리에 열린 다른 열매
피아노나 바이올린 협주곡을 감상하다 보면 오케스트라가 먼저 주제부를 연주하고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뒤따라 연주하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오케스트라가 딱 멈추고 독주가 나온다. 이때의 독주 부분을 ‘카덴차’라고 하는데 연주자가 자신의 실력을 돋보이기 위해 미리 준비하거나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말 그대로 즉흥연주에 맡겼으나 베토벤 이후로는 이 부분까지 작곡자가 미리 작곡을 하는 풍조가 강해졌고 현대에 와서는 연주자가 작곡자의 악보에 충실할 것을 요구 받고 있다. 카덴차, 즉 즉흥연주를 중요한 음악적 요소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재즈는 클래식, 그것도 근대 음악이 아닌 고전주의 클래식과 서로 통한다. 거슈인은 러시아에서 이민 온 유대계의 가난한 장사꾼의 아들로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그는 13세 때에 화성학을 공부했고 16세 때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에 있는 리믹 악보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손님들에게 피아노를 쳐주는 것으로 밥벌이를 삼으며 한편으로는 대중음악을 작곡했다. 19세 때에는 극장의 쇼 같은 데서 일한 적도 있었고 그가 25세 때에는 마침내 제1급에 속하는 대중음악 작곡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재즈 왕이라 불리던 ‘화이트먼’이 그에게 심포닉 재즈를 작곡할 것을 권했고 1924년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를 작곡하여 절찬을 받았다. 마침내 뉴욕 교향악단에서 그에게 협주곡을 부탁하기에 이르렀고 그제야 거슈인은 고전음악 형식을 공부해가면서 작곡을 했다. 낙관적이면서 명랑한 반면 깊은 우수가 깃들어 있는 재즈 같은 그의 음악이 클래식의 마지막 계보를 잇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일까.
우울한 광시곡, 그러나 우울하지 않은 뒷맛
1924년 2월 12일 뉴욕의 에올리언 홀에서는 폴 휘트먼 악단 주최로 '근대 음악의 실험'이라는 이름의 연주회가 열렸다. 이 프로그램 중 한 곡이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였다. 거슈인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 초연이었던 음악회에는 크라이슬러, 엘만, 라흐마니노프, 스토코프스키, 멩겔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쟁쟁한 음악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 곡에 대해 "작품이라 말할 수 없는 음악이다. 밀가루와 물을 섞은 묽은 풀로 칠하여 엮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곡이란 선율을 그냥 적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고 혹평했지만 정작 랩소디 인 블루는 번스타인의 어떤 음악보다 더 널리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이 곡은 클라리넷의 낮은 음에 꿈틀거리는 듯 트릴이 연주되고 두 옥타브를 약간 넘는 사이렌처럼 올라가는 포르타멘토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놀라운 효과였다. 이어서 서정적이고 매력 있는 멜로디와 미국의 통속적인 리듬이 융합되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모해 나가는데 여기서 블루Blue란 말은 동굴과 같은 어두움과 도시의 우울한 면을 표현한 것으로 근대 기계 문명의 불안감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감각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 해석된다. 이러한 음악적 성격은 2000년 월트 디즈니의 만화가들이 영상으로 묘사한 ‘판타지아 2000’ 판에서 가장 잘 묘사되고 있다. 피아노를 아무리 잘 친다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들도 이 곡에 관한 한 제 맛을 내는 연주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곡은 베를린필하모니 같은 유명 오케스트라의 연주 때에도 재즈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을 선호한다. 재즈로 보기에도 클래식으로 보기에도 애매한 이 곡의 장르를 결국 ‘심포닉 재즈’라는 신조어로 명명했다.
한여름에 자장가를 남겨 두고 잠들다
‘여름시절에는 삶이 평온했지. 물고기들은 뛰어 놀고 목화 농사는 잘 되었어. 너의 아버지는 부자였고, 어머니도 아주 미인이셨단다. 그러니 예쁜 아가야 울지 말거라. 어느 날 아침 넌 다 자라서 노래를 부르겠지. 그땐 네 날개를 활짝 펼 거야. 하지만 그 날이 오기까지 아무것도 널 해칠 것이 없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네 곁에 있는 한…중략…’ 거슈인의 마지막 작품인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유명한 자장가 '서머타임'의 가사이다. ‘랩소디 인 블루’와 ‘파리의 미국인’ 등으로 이미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거슈인은 1935년 어느 날 ‘듀보스 헤이워드’라는 작가가 신문에서 한 흑인 장애인의 살인기사를 보고 영감을 얻어 쓴 소설 ‘포기’를 읽고 자신도 음악적 영감을 얻어 공동 작업을 제안한다. 그 해 여름을 함께 보낸 끝에 내놓은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불후의 명곡 ‘서머타임’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페라라기보다는 뮤지컬에 가깝다고 해야 할 ‘포기와 베스’는 1935년 9월 30일 뉴욕의 콜러니얼 극장에서 초연한 후 대호평을 받아 몇 달간 연장공연을 하기도 했다. 무대는 1930년대의 더운 여름날 저녁, 흑인 빈민가인 캐트피쉬로우. 남자들은 고깃배를 타거나 목화밭에서 일을 하고 아낙네들은 가사를 하며 아이들을 키우는데 일이 끝난 저녁 코카인으로 된 '행복의 가루약'을 파는 자들이 나타난다. 로빈스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름에 합세하고 불구이며 거지인 포기도 거든다. 여기에 술이 잔뜩 취한 크라운이 베스와 나타나는데 로빈스와 시비가 붙어 싸우다 결국 크라운이 로빈스를 찌르고 달아나고 경찰에 쫓긴 포기는 베스의 방으로 숨어든다. 비로소 친해지는 포기와 베스… 이후 계속되는 베스를 둘러싼 크라운과 포기의 갈등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처절한 스토리에다 단역배우 한 사람을 제외한 등장인물 전원이 흑인으로 설정된 이 작품은 무대에서의 끊임없는 갈채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백인사회의 냉대로 아무런 상조차 받지 못했다. 거슈인은 그의 유작이 된 ‘포기와 베스’를 남기고 1937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일생을 마친다. 그가 자장가에서 노래한 것처럼 ‘다 자라서 노래하고 날개를 활짝 편 후’ 삶이 평온한 한여름인 7월 11일에…
거슈인은 브로드웨이의 알빈 극장에서 뮤지컬로 각색한 ‘포기와 베스’가 최초로 공연된 후 뉴욕타임즈에 이렇게 쓰고 있다. "포기와 베스는 대중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대중적인 음악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내가 처음 이 음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민요라는 개념은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총체적인 음악을 원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 스스로의 영혼이 담긴 노래들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는 작품배경이 되는 남부 캐롤라이나 빈민구역을 수 주일간 시찰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폴리아일랜드에 임시로 거주하면서 문명의 혜택 없이 외딴 섬에서 셔츠도 신발도 없는 반바지 차림으로 목화농장과 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의 애환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이 곧 오페라 사에 새 장을 여는 ‘포기와 베스’를 낳았던 것이다. 이 땅에도 대중의 삶을 체험하며 이를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거슈인 같은 음악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글 김근식/교양음악서<오페라가 왜?>의 저자. 현재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서 고전음악카페 더클래식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