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연구회가 연초 계획에 따라 9월 정기 답사로 구천면 일대를 답사하였다. 항상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고정되어 있는 답사일 이지만 벌초 등 개인 사정으로 13명의 적은 회원이 참가했다.
9시 조금 넘어 군청에서 출발 구천면에 들어가기 전에 휴게소에 잠시 들러 차 한 잔씩 하고서 바로 위성 1리 고인돌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발갛게 익어가는 대추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제비떼가 반갑게 우리를 마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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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성리 고인돌 일산회원이 성혈에 대해 설명 |
고인돌 성혈에 대해 일찍부터 연구해 오신 일산 박위호 회원께서 오늘 하루 안내를 맡아 고인돌에 얽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위성1리는 옛 지명이 상구이며 구천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이기도 했는데, 돌기둥과 돌담 등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내 차를 몰아 미천 2리 샘골에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저 건너 관어대와 부흥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일산 회원이 “관어대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안에 고인돌과 성혈이 집중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성혈은 민간 신앙의 자취인가? 별자리를 말하는가?,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어디서나 고인돌 옆에는 민간 묘가 있는데, 여기서도 예외 없이 민간 묘가 있고 둘레에 7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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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무덤보고 내려오는길, 손에들고있는 풀꽃으로 천연염색하면 아주고운 붉은색이, 된다나 ... 풀꽃 이름아시는분 댓글 부탁 |
멀지 않는 곳에 말 무덤이 둥그렇게 솟아있는데 도굴된 상태라고 했다. 고인돌 중 한 기에는 돌에 길게 그은 흔적과 정으로 판 듯한 흔적이 있어 포크레인 흔적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가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음 답사지, 군수 임병두 선정비와 봉시(奉侍) 강석호(姜錫鎬) 송덕비를 찾았다. 이 두 비는 마을 사람이 아무렇게 흩어져 있던 것을 약 15년 전쯤에 이 곳에 옮겼다고 했다. 비 옆에는 동네 쉼터로 정자가 잘 지어져 있었고, 비석은 토란과 키 자랑 하듯 어울려 있었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선명했고 보관 상태도 좋았다. 이 비는 갑진년 1904년에 세워졌으며 이 곳 저수지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그 공로로 당시 주민들에 의해 세워 졌다고 미리 답사하여 원고를 정리한 일산 회원이 설명했다.
또 다시 네 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의성군에서 담수량이 가장 많다는 조성지를 끼고 돌아 내산리 석불좌상을 찾았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산 속으로 조금 들어가니 소나무와 불두화 에 둘러싸여 있는 석불 있는 곳은 잘 정리되어 있어 깔끔한 인상을 받았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이 석불은 약사여래로 약사발을 들고 있는 모습은 앉은 방향이 조금 바뀐 듯 어색해 보였다. 석불좌상 오른 쪽, 조그마한 석불좌상이 있었으나 머리 부분은 없고 네모진 돌이 올려져 있었다. 주위에는 주춧돌과 석등 받침 등이 흩어져 있어 여기가 아마 큰 절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불상의 높이가 170센티미터로 사암질로 조각되었고 고려 중엽의 것으로 추정된다. 누군가가 잘 관리하고 있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마음이 흡족하였으며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 조각 3개와 자기 조각 하나를 주웠다. 이렇게 모은 기와 조각 하나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연구 자료가 될 것이다.
이어 지금은 폐교가 된 청산분교 옆 자연석 암벽에 새겨져 잇는 ‘백운동문(白雲洞門)’을 확인하였다. 나무에 가려 글씨가 잘 드러나지 않아 나무 일부를 회원 몇 분이 제거하고‘백운동문’으로 읽어야 하나‘백운통문’으로 읽어야 하나를 두고 잠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곳 마을 사람들은‘백운동문’이라고 했다.‘백운동문’무슨 뜻일까? 이 자연석 바로 옆 주막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와 상관이 있는 걸까? 숙제로 남겨두고 폐교된 학교 앞을 돌아 2003년6월 방송 프로그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영된‘한 몸뚱이 두 얼굴’모과나무를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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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년된 모과나무가 말채나무를 품고있는모습 |
정말 신기했다. 모과나무 속에 말채나무가 싱싱하게 같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어찌 이런 수가 있을까? 모두가 감탄했다. 하지만 어떤 회원은 이런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늙은 모과나무의 가운데 줄기가 텅 빈 공간이 됐고 여기에 말채나무의 씨앗이 바람에 날려 들어가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400년 된 모과나무가 어머니처럼 말채나무를 품에 안아 키워 온지 40년, 두모녀 아직까지 한번도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모과나무 집주인 박씨(79)할머니는“이것은 사랑나무야! 사랑 없이 그토록 오래도록 자기의 배속에 남의 씨앗을 품고 있을 수 있을까‘사랑', 할머니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어서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이 정수사 였다. 정수사 에는 탱화 두 점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지금은 사찰 개축 관계로 봉정사에 보관 되어 있어 아쉽게도 볼 수가 없었다. “개축공사가 끝나면 곧 가져올 것”이라는 대운스님의 말씀을 위로로 삼았다.
아직 현판이 없지만 극락대전에 모셔져 있는 세 불상 가운데 주불 오른쪽은 세지보살이며 왼쪽은 관음보살이라고 하는데 두 보살 머리에 얹혀 있는 모자가 워낙 특이해 스님께 여쭈니 중국의 영향이라 했다. 절은 정비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 같았고, 돌 축과 건물 배치가 안정감 있어 보였다.
점심 시간을 넘기면서 오늘 마지막 행선지인 선산읍 도개리 모례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회관 입구에 한글로 ‘신라불교초전마을’이라고 큼지막한 나무 현판이 걸려있었다.‘초전’이 무슨 뜻일까 궁금하였는데, 기념관을 찾아가니 한자로‘初傳’임을 알고 이 곳이 신라 불교의 첫 전래지라는 것을 알았다.
첫 전래자는 고구려인 묵호자로 1600년 전 신라로 건너와 포교활동 중 신변에 위험을 느껴 이 곳 모례장자 집 굴속에 숨어 살면서 낮에는 머슴으로 밤에는 불교교리 전파를 하였다고 하였다. 모례장자 집터에 있었다는 우물(모례정)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최근까지 이용한 흔적이 있었다.
바로 옆 기념관, 이시용 관리장님의 안내를 받으면 들러보았다. 여기에서 얼마가지 않으면 도리사(桃李寺)라는 절이 있다. 신라에 처음으로 세워진 절로 묵호자가 모례장자의 시주를 받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 불교가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우여곡절이 몸에 전해지는 듯 하였다.
오후2시가 되어서야 부근‘묵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향토사연구회 관련 광고와 현령비 발간에 대한 협의를 한 후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매번 답사 할 때마다 느낌이지만, 의성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이 때까지 내 고향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를 모르고 현재만 알면 소경이며, 과거만 알고 현재를 모르면 물에 빠진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옛 말이 생각난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풀꽃이름은 "자리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