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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넓은 여울 원문보기 글쓴이: 朱木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 위치.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밧모스 섬에 귀양가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쓴 책이다. 37~42년에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자 바오로 사도는 3회에 걸쳐 소아시아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54~59년의 3차 전도여행 때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에페소에는 이방 종교 중심지로서 사람들은 젖가슴이 수없이 달린 다산의 여신 아테미스를 주신으로 섬겼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에페소인들의 신앙을 디란노 학원 출신 12제자들로 뒤엎어 놓았다(사도 19장 8-41절). 에페소는 사도 바오로에 앞서 아폴로,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 등이 전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 에페소교회 외에 소아시아 지역에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 등 6개의 교회를 더 세웠는데, 이들 일곱 교회를 아시아 7교회라 한다. 그러나 에페소교회는 어느 한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에페소 지역에 있던 모든 교회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요한 묵시록에는 이들 7교회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에페소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졌었다 원형극장에서 항구로 향하는 길을 따라 100여 미터 내려가면 오른편에 5세기 초엽에 지은 '마리아교회' 터가 있다. 이 터는 동정 마리아께서 사도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옮겨와 살던 곳이라고 전해 왔는데, 431년 이 마리아교회에서 에페소 공회의가 열렸고, 동정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451년에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는 이를 재확인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동정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선언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결부된 근원을 제공하였다. 64년 바오로 사도가 죽은 뒤에는 사도 요한(John)이 뒤를 이어 이 지역에서 선교를 하면서 복음 전파에 힘을 썼으나, 갈수록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면서 극단적으로 흘렀다는 기록이 '에페소서'와 '요한의 묵시록' 등에 쓰여졌다. 이 지역에는 당시의 교회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지금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마리아교회의 제단으로 보인다. 마리아교회의 세례소 성 요한 성당의 주 출입구 431년 경에 에페소 공의회가 결정한 바를 토대로 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를 사도 요한과 동정 마리아는 AD 37~48년 사이에 에페소로 왔고 그들의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의 가장 사랑하던 제자 요한에게 그의 어머니를 맡겼다. 그 이후에 이 제자가 동정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으며 이 두 사람은 이후 서로 헤어진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도 요한이 에페소에 올 때 동정 마리아도 같이 왔으며, 사도 요한이 AD 67년 이 후에 소아시아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오로 사도가 AD 55~58년 사이에 에페소에 와서 새로운 교회를 세웠고, 사도 요한은 AD 67년 이 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두 번이나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사도 요한은 후에 밧모스 섬에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요한의 묵시록을 썻으며, AD 95년 경에 에페소로 다시 돌아왔다. 사도 요한은 에페소에 있는 아야사룩산에서 그의 마지막 생애를 보냈고, 그 곳에서 복음서와 서신들을 썼다. 그는 거의 백 세가 되어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 사도 요한의 무덤이 성당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독교가 공인되어 전파되던 시기(3~4세기)에 그의 무덤 위에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세워졌으며 5세기에 있었던 심한 지진으로 이 교회가 무너졌다. 이 자리에 유스티아누스 황제(527~565년)가 6개의 둥근 돔으로 된 거대한 성당을 세웠다. 에페소가 아랍인들의 지배 하에 있었던 7, 8세기에 성 요한 성당은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쌓이게 되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 시절 당시 경기장 내의 사자 먹이가 된 기독교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인 듯 성벽 축조에 사용 된 돌은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성당은 110m X 140m 크기의 십자가 형상으로 세워졌고, 그 시대의 가장 인상적인 종교 건축물 중의 하나였다. 이 성당은 중세기 때에는 순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십자가 성당'이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사데는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는 허무스(Hemus) 강 계곡 평야의 한 복판에 있다. 그 평야 북쪽으로는 트몰루스(Tmolus)의 긴 산맥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산맥에서 여러 구릉과 작은 산들이 톱니바퀴살 같이 뻗어나가고 있다. 그 산 줄기들은 각기 좁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이 천혜의 요새 같은 곳에 다산과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AD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재건 된 이 신전은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원주기둥이 늘어선 웅장한 규모다. 지금도 수십 개의 기둥들이 도열해 있고, 특별히 이오니아식 기둥 2개가 18m나 되는 높이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채로 남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신전 뒤의 산이 바로 트몰루스 산이다. 산 정상 왼쪽 끝자락은 마치 사람이 손을 들고 손가락을 하늘을 가리키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형상의 산으로 보인다. 기둥의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기중기도 없던 시대에 엄청난 크기의 돌을 잘라 빈틈없이 쌓아 올린 기술이 경이롭다. 사르디스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세워졌다고 보고 있다. 사르디스 교회는 이 지역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자의 숫자가 적어져 신전 담 밖에 돌담을 쌓아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자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묵시록 3장 1절)란 책망을 받았다. 사르디스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많았고 또한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르디스 교회의 유적은 아르테미스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아담한 교회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편지로 보낸 아시아의 7교회는 현재 터키 남부 지역 일대에 위치해 있다. 당시 7교회 이외에도 골로새, 갈라디아, 히에라볼리 교회등이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 당시 이 도시에는 트림나스라는 무당이과 무녀(巫女)들이 많아 기독교인들을 유혹했고 또한 시장 조합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거리 두아디라 염색 기술,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이 뛰어난 곳으로 빌립보의 루디아도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주 옷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왕국 데메테르신전 버가모왕국에는 토지와 풍산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터가 남아있는데 기원전 3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로마시대에 개조 되었다. 이곳에는 "알지못하는 신에게"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제우스 신전터 버가모왕국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제우스 신전(로마명으로 쥬피터)은 주전 180년에 유메네스 II세에 의해서 건축된 신전으로서 세계 7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 이 신전은 길이 27m, 높이 12m나 되는 웅대한 신전으로 온통 고대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이 곳의 유물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신전의 유물들은 모두 동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헬라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은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고 전 인류의 통치자이며 기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제우스 신의 출생지가 바로 버가모라고 알려지고 있다 버가모왕국 아테네 신전터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버가모 디오니소스 신전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볼 수 있다.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 버가모왕국 트라얀 황제신전,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버가모교회(후 세라피스 신전) 버가모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버가모교회 버가모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버가모 심리치료하던 텔레모스 신전 세계 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한 아스크레피온(ASKLEPION) 병원이다. Asklepions은 아폴론의 아들로 건강과 약의 신이었다. 버가마에 있는 Asklepion는 이 신의 이름의 딴 의료센터를 말하며 초기 에게문명을 꽃 피웠던 페르가몬의 중요한 의료센터였다. 이 곳은 다른 병원들과는 치료방법이 다르다. 물과,진흙,스포츠,연극 그리고 도서관 등으로 병을 고쳤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현재도 매년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입구 근처의 좌측 건물은 Asklepions 사원이다. 이 사원은 AD 150년에 건강의 신의 이름으로 기증되었다. 지붕은 돔으로 되어있으며 신전의 벽은 무려 3M나 될 정도로 두텁다. 내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뭄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폭 20m, 길이 820m로 길 양편에는 15m의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다.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오면 우선 맨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을 한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목욕이 끝나면 환자는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 가는데 80m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에서 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 오면서 작은 소리를 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정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이 작은 소리로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또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해몽해 주기까지 하는데 이 경우도 역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한다.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한다. 버거모왕국(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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