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수상자의 말
芝薰賞은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영광이다. 감히 상을 받는 것 자체가 지훈 선생께 누를 끼치는 것이고 스스로 후안(厚顔)의 허물을 짓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둔재를 오히려 애정으로 가르쳐 주신 선생님과 방대한 난고(亂稿)를 깔끔한 책으로 만들어 주신 출판사 여러분, 그리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가족과 함께 이 영광을 나눌 수 있다면 설사 허물이 될지라도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특히 지훈선생의 높은 뜻을 되새길 수 있도록 부족한 졸저를 평가해 주신 지훈상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생전에 지훈선생을 뵌 적은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志操論》을 감동적으로 읽고 대학 시절《멋의 硏究》와《菜根譚》에 심취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스스로 지조를 지키시며 지조가 멋으로 승화된 우리의 국학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치셨던 선생의 유훈(遺訓)을 다시 한번 새기고 싶다.
《朝鮮後期 宮中畵員 硏究》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되지 않았던 1,200여 책의《內閣日曆》을 찾아서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의 화원 회화를 새롭게 이해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1970, 80년대의 감당하기 어려웠던 꿈과 열정들이 깊은 상처만 남긴 채 허무하게 끝난 뒤, 설사 아무리 작고 척박한 돌산을 개간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내 땅 하나만이라도 일구어보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던 나를 강제하고 지탱했던 작업이다.
이를 통해서 조선후기의 정조대에 김홍도(金弘道)와 신한평(申漢枰) 같은 화원화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풍속화와 책가도(冊架圖) 등의 새로운 그림이 크게 발달했던 것은 단순한 계급 변동의 결과가 아니라 국왕이 새로운 궁중화원 제도를 만들어서 화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지도했기 때문이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지나치게 계급 대립적인 시각에서 편향되게 해석되어 왔던 조선후기의 풍속화와 민화에 대한 이해를 보다 구체적으로 새롭게 보완할 수 있었다.
이 낯설고 지루한 작업을 통해서 나는 조선후기를 이해하는 틀이 서구 근대의 틀과는 다르며, 인류사의 근대는 서구 근대와는 다른 틀도 있었던 매우 폭넓은 것이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조선후기가 세계사의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간과 공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꿈과 사실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도 아니고, 꿈이 꼭 사실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사실을 통해서 꿈이 더욱 넓어지고 견고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 어느 때보다 심하고, 주체와 국학에 대한 비판도 날로 거세다. 어찌 보면 정조대부터 계속되었던 미완의 숙제였고, 지훈선생 시절에도 치열하게 논쟁하며 고민했던 과제임을 전집을 다시 읽으며 새삼 느꼈다. “외래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변성시켰느냐 하는 곳에서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찾을 수 있고”, “우리의 새로운 전통은 우리 것이면서 세계문화 공동의 과제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지훈선생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한,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 실천되지 못한 혜안이라고 생각된다.
감히 후안을 무릅쓰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훈국학상을 수상하면서 선생의 유훈을 되새기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自尊’과 ‘自恃’를 다시 한번 다짐하고 싶다.
지훈국학상 심사보고
지훈상 국학부문의 심사위원은 몇 차례 모임을 갖고 심의를 거듭한 결과, 강관식교수의《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상·하)》(돌베개, 2001)를 제3회 지훈국학상으로 선정하였다. 이 책은 奎章閣 고서 중의 하나인《內閣日曆》(1,200여 책)과《奎章閣志》를 샅샅이 검색하여 정조 이후 고종대까지, 백년 동안 활동한 잊혀졌던 1백 명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밝혀낸 노작이다. 이 저작이 출판됨에 따라 미술사학계는 새로운 연구분야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저자가 이 연구에서 소개한 각종 자료와 새롭게 주장한 견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학술과 문풍을 크게 일으킨 정조는 회화에도 밝았다. 왕은 도화서(圖畵署) 화원 중에 일부를 취재(取才)시험으로 선발하여 규장각에 差定하여 이들에게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의 자격을 부여하고 왕실 및 국가 차원에서 소용되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후기 화원은 도화서와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의 이원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2. 왕은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의 직제와 운영규정을 별도로 정하여서 궁중 화원들의 예술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조선후기 화단의 융창을 가능케 하였다. 녹봉을 받기 위한 시험인 녹취재(祿取才)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화원들의 실력을 배양토록 하였다. 이 시험의 성적여하에 따라 궁중화원의 자격을 박탈하는 엄정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3.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회화의 괄목할 만한 발전은 단지 문예부흥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화가의 개인적인 재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 책의 저자는 국왕이 자비대령화원 제도를 설치하여 그들을 제도적, 경제적으로 적극 지원하고 육성하는 한편 녹취재를 통한 엄격한 평가를 실시한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자료에 의해 입증하고 있다.
4. 저자는 정조대부터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녹취재에 출제된 8개 부문의 화문과 화제의 방대한 자료를 빠짐없이 번역하여 옮긴 뒤 시대에 따라 궁중회화의 변천을 밝힘과 동시에 응시한 역대 화원들의 회화의 특성과 성적 등도 기록에 따라 공개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임금인 정조가 직접 출제하고 채점을 한 일인데 이를 통해 자비대령화원에 대한 왕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재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5. 이 연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정조대의 ‘속화’(俗畵) 화문의 화제이다. 저자는 속화를 저속한 그림이라는 일반적인 규정을 부인하고 이를 아속(雅俗)의 가치관에서 규명해서는 안되며 ‘관풍찰속’(觀風察俗)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풍속화’로 규정하여야 옳고 그래야만 정조의 의도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속화와 함께 8개 화문의 하나인 문방(文房)화문의 ‘책가’(冊架) 또는 ‘책거리’(冊居里)를 오늘날 ‘민화’(民畵) 곧 민중적 그림의 대표적인 회화로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은 ‘궁중회화’였다는 점을 여러 각도에서 입증하고 있다.
이상 요약한 바를 통해서 우리는 김홍도 등으로 대표되는 몇 화가의 예술활동만이 조선 후기 회화사를 장식했던 것이 아니라 군왕의 지대한 후원을 받았던 궁중화원들의 역할 또한 지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연구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해도 좋다고 본다.
다만 많은 자료를 누락됨이 없이 옮기다보니 불가피하였으리라는 점을 이해하나 연구서라는 제호에 걸맞지 않게 자료집의 성격이 짙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지적은 향후 풍부한 자료를 이 책의 저자가 학술적인 해석과 의미를 다시 부여하여 좀더 진전된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어 달라는 부탁이기도 하다.
심사과정에서 있었던 일도 일부 공개하는 것이 저자에게 도움이 될 듯하여 명기키로 한다. 최종심에 오른 저서 중 고전소설사에 관한 연구, 공연문화의 전통에 관한 연구, 조선후기 지세(地稅)와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 등은 수상저서에 결코 뒤지지 않은 뛰어난 연구물들이다. 특히 후자와는 막판까지 경합이 치열하였다. 그럼에도 강교수의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위에서 열거한 학술적인 장점 이외 다른 저서와는 달리 지금까지 마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궁벽한 분야의 연구이고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우리 국학연구의 고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저자와 미술사학계 인사들은 경청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제3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박노준(前 한양대 국문과 교수)
심사위원 임형택(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강우방(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