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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전 도경국장 "시위진압[경찰권한]이미 벗어나"
계엄공수 민가등 난입해 "무차별 구타" 성난 시민, 통금무시 자정후까지 대항
시민·학생 4백5명 연행…68명 두부외상·자상·타박상 입고 12명은 중태 빠져
18일 오후 4시를 전후해 시작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은 일순간 광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다. 상가가 철시하고, 시내교통이 사실상 마비되고 금남로 일대에서 안타까운 눈으로 학생시위를 바라보던 시민들도 뿔뿔이 귀가한다.
잡히면 죽는다, 더이상 몸서리치는 상황을 볼 수 없다며 서둘러 귀가한다.
오후5시께 노동청앞 시위를 마지막으로 학생들도 자취를 감춘다.
신군부의 공수부대투입의도가 [무력시위에 의한 공포감 조성]과 공포감에 의한 [시위참여저지]였다면 작전은 일단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신군부의 의도와 평가가 얼마만큼 잘못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확인된다.
비록 금남로일대에서는 쫓겨 나왔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가슴가슴 속에서 치솟아 올라 이심전심으로 전달된다.
전화를 붙잡고 경찰당국에 항의하는 시민, 동네주민들에게 시내에서 목격한 상황을 전하며 울분을 토로하는 시민등 골목골목, 주택가 곳곳에서는 또다른 시위열기가 되살아 난다.
시민들 시위 전면에 나서
당시 가톨릭센터에서 근무하던 이영수신부 (현재 소수선원동성당)의 회고. [18일 영광에서 사목회 모임을 갖고 광주로 들어오다 광주공항등에 수송기가 계속해서 내리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무자비한 상황이 시내에서 진행되고 있으리라곤 상상을 하지 못했다.
직접목격하고 혹은 주위분들의 얘기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까.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 안병하도경국장에게 항의전화를 했다. 그러나 도경국장의 답변은 힘이 없었다.
군인들이 하는 일이니 경찰 권한 밖이라는 것이었다.]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이 있는지 두시간후인 오후7시께 시내일원에는 한때 자취를 감췄던 시위대가 또다시 나타난다.
모습을 나타낸 시위대는 이날 낮에 보았던 시위대와는 근본적으로 몇가지 차이를 보인다.
겨우 박수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던 일반시민들이 학생들을 뒤로 보내고 시위대열의 전면에 위치한다.
보도블록 조각에 의존하던 시위대의 손에는 어느덧 각목과 쇠파이프 심지어는 식칼이 쥐어진다.
최초로 시민시위대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계림동 광주고등학교에서 계림파출소사이. 3백여명의 시위대는 이곳에서 공수부대에 대항, 백병전을 연상케하는 공방전을 벌인다.
당시 시위 참여자들이 기록한 시위상황. [오후 7시께에는 계림동 광주고 부근에서 청년, 시민, 학생등 3백여명 또다시 공수부대와 충돌,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 시내에서 몇차례 공수부대원들의 적극 방어를 경험한 시위대의 손에는 무기가 될만한 각목과 쇠파이프등이 쥐어져 있었다.
치열한 공방이 20∼30분 거듭된 끝에 공수부대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산수동 오거리 방면으로 밀려가자 시위대는 계속 추격, 증강된 공수부대의 반격에 맞닥뜨려 이부근은 한순간 공포지대로 돌변했다.
공수부대는 밤새워 인근 주택가를 뒤져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연행해 갔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윤재걸저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종합)
이시각 전남도청 인근 노동청앞과 지산동, 광주공원, 금남로 일부에도 20∼30여명씩 그룹을 지은 시위대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민주주의가 말살됐다], [공수부대가 부녀자의 유방을 도려냈다]는 등의 구호와 호소를 앞세운 시위대 숫자는 순식간에 불어난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이같은 분위기를 예상치 못한 신군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광주지역의 통금연장 방침을 정한다.
통금연장 이유는 학생난동. 계엄공고 4호로 통금시간이 밤9시로 앞당겨진다. 하지만 통금연장 발표가 불붙기 시작한 시민학생들의 시위열기를 잠재우진 못한다.
시내일원에서 산발시위를 하던 시위대중 7백여명은 이날 밤8시15분께 한일은행 뒤쪽과 가톨릭센터 인근에 집결한다.
밤8시20분 현재 시내전지역에서 산발시위를 벌이고 있던 시위대 숫자는 모두 2천여명. 야간시위의 열기는 이날 오전 공수부대투입
이전상황과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밤이라고 하는 시간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 낮상황보다는 더 치열한 시위양상을 전개한다.
당시 공용터미널인근 시위에 참여했던 박삼수씨 (당시 24세·양동복개상가에서 노점상)의 증언. [이날까지만해도 학생시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18일오후 양동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중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접목격했다. 너무도 비참한 실정에 말문을 열수가 없었다. 장사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은뒤 공용터미널 인근에 나가 2백명쯤되는 시위대에 합세했다.]
유동삼거리 인근에서 밤늦게까지 학생시위를 지켜본 김종태씨 (당상 27세·자동차정비공)는 이날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20일부터 시위에 합류한다.
광주전지역 통금 연장
[수창국민학교 인근에서 학생시위와 공수부대의 무지막지한 진압을 목격하고 잠시 몸을 피했지만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밤늦게까지 유동과 신안동 일대에서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공수부대가 지나가면 구경하던 시민들 조차도 돌멩이를 던지며 시위대를 성원했다.]
시위상황이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자 신군부는 밤8시40분께 공수부대를 시내중심지 시위에서 빼내는 대신 경찰병력을 가톨릭센터인근에 투입, 시위대 해산을 시도한다. (계엄사 상황일지) 곧이어 시작된 통금으로 시위대는 외곽지대 주택가로 장소를 옮긴다. (계엄사 작전상황일지는 이날밤11시까지 시내각처에서 군중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통금시작과 시위대 분산으로 18일 밤 상황이 종료된것은 아니었다.
시위대의 목숨을 건 저항에 밀려나거나 혹은 곤욕을 치른 공수대원들의 [광란]이 시위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주택가 혹은 여관등 곳곳서 밤이 새도록 진행된다. 젊은 사람들을 찾는다며 가정집을 쑥밭으로 만들고 여관에 난입, 투숙객들을 곤봉으로 후려치고 연행하는가하면 골목길을 걷는 젊은이들을 붙잡아 하수구 속을 포복하게 하는, 오후상황보다 더한 만행이 어둠속에서 진행된다. [친구3명과 18일 오전9시 무등산장을 돌아 무등산 중봉에 올랐다. 밤8시께 증심사쪽으로 내려왔다. 산을 내려와 당산나무 있는곳에 왔을때 군인들이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총을 쏴 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임은석씨 증언 당시46세)
[시내에 나갔다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간다는 얘기를 듣고 할 수 없이 황금동쪽에 있는 여관에 투숙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일어나보니 계엄군들이 그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 정신없이 지붕을 타고 도망쳤다. 지붕한구석에 숨어 있다 새벽녁이 돼서야 신안동쪽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풀빛간,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이규홍씨증언 - 당시 26세, 트럭운전사)
[저녁7시30분께 남동 소재자택에 M16착검 상태의 공수대원이 문을 부수고 침입, 개머리판으로 전신구타, 피신학생 찾는다고 유리창 문을 박살내는 등 집 파괴] (돌베게 간, [광주민중항쟁] - 5월18일의 부상자 사례, 김명호씨 당시44세 증언내용 재인용)
시내36개지점 공수배치
밤11시께 신군부는 시내 36개 주요지점에 공수부대원 10명과 경찰병력24명씩을 배치한다.
그들에게 맡겨진 것은 주요지역 경계임무였으나 젊은 이들만 보면 구타하고 연행하는 만행은 여전히 계속된다.
조선대공대 인근 자취방에서 광란의 밤을 목격한 박세영씨 (당시21세, 양화공 전5·18광주의거청년동지회장)의 증언. [집에서 놀다 돌아가던 친구들이 조선대공대옆 건널목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동네엔 공포감이 감돌았다. 밤이 깊어 지면서 검문은 더욱 심해졌고 젊은 사람들은 건널목을 건너 오려다 봉변을 당했다. 무조건 뒤통수를 갈기고 하수구를 낮은 포복으로 기도록 만들었다. 밤새도록 살려달라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이날 하룻 동안 광주지역에서 연행된 사람은 학생1백55명 (대학생 1백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과 시민2백50명 (재수생 66명, 민간인 1백84명)등 모두 4백5명. 이들중 68명이 두부외상타박상, 자상등을 입었고 이들중 12명은 중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