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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세계 주요 종교 알아보기
정석준(법사)
1.서언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이들 종교는 대체로 신을 믿는 신본주의(神本主義)종교와 인본주의(人本主義) 종교로 대별할 수 있다. 신본주의 종교는 다시 유일신교와 다신교로 구분 되는데, 유일신교로는 조로아스터교ㆍ유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 등이 있고, 다신교로는 인도인들이 믿고 있는 힌두교와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신교(神敎)가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신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재자(主宰者)이며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신은 절대자이며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종(인간)은 주(하나님)를 믿고 따를 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본주의 종교로는 불교ㆍ유교ㆍ도교ㆍ천도교 등을 들고 있으나, 불교ㆍ유교ㆍ도교ㆍ천도교를 인본주의라고 단정하기에는 이론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불교는 인간 뿐 아니라 일체중생과 모든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이며, 유교 속에는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성사 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짙게 베어있으며, 도교는 옥황상제 신앙이 있고, 천도교는 ‘한울님’을 사람을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동시에 사람 속에 내재하는(侍天主) 그 무엇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세 종교는 신본주의 종교와는 다르게 인간을 중시하고,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인본주의 종교라고 하여도 크게 어긋나지 않으리라 본다.
2. 신본주의(神本主義) 종교
① 다신교(多神敎)
㈀ 힌두교 : 인도에는 고대에 드라비다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인도 북서부에 살던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리아인(Aryan)들이 침입해 들어와 원주민을 정복하고 그들의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카스트제도를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의 자손’이라 하여 브라만임을 자처하고, 그들 아래 크사트리아(왕족, 무사)ㆍ바이샤(평민)ㆍ슈드라(노예)의 세 계급을 두고, 피정복자인 드라비다족은 슈드라에 편입시켜 봉공과 일만 시킬 뿐 아무런 특권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이 4성 계급을 조직하기 위해 브라만은 범천의 입에서 태어나고, 크샤트리아는 범천의 옆구리에서 태어나고, 바이샤는 배, 슈드라는 허벅지에서 각기 태어났다는 설화를 만들어 내고 자기들은 소나 말ㆍ양ㆍ사람을 희생하여 신에게 제사 지내고, 도덕적 교훈과 계율적 규칙을 가지고 민중을 교도할 뿐, 만일 슈드라가 경전을 펴보거나 찬가를 부르면 눈을 빼고 귀를 막는 엄한 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상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석가는 동물을 희생하여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거부하고 살생을 금지함으로서 혁명적 새 종교의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4세기 전반 굽타(Gupta, 320~520)왕조 시대에 브라만교의 사제들이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와 브라만교의 사회윤리체계를 다시 세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신앙과 대승불교 교리를 일부 받아들여 새로운 대중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종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힌두교이다.(‘힌두’라는 말은 ‘인도’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힌두교란 인도인의 종교라는 말이 된다) 이후 힌두교는 불교와 함께 인도의 주류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슬람이 인도를 침범하여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졌으나 힌두교는 살아남았다.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불교가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고, 힌두교는 살아남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원인을 학자들은 불교는 사찰과 승려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였기 때문에 이슬람에 의해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태국ㆍ버마ㆍ티벳트 등으로 피신해 버렸기 때문에 불교의 구심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며, 반면에 힌두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힌두교는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생활자체가 종교였기 때문에 비교적 종교적 박해를 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힌두교 속에는 불교적인 요소도 많이 남아 있으며, 힌두교에서는 부처님도 하나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힌두교에서 특히 강조되는 신은 브라흐마ㆍ시바ㆍ비쉬누 신인데,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이며, 시바(Siva)는 파괴와 죽음의 신이며, 비쉬누(Vi-snu)는 보존의 신인 동시에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신이기도 하다. 또 힌두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암소 숭배 신앙이다. 간디는 “암소 숭배 모든 힌두교도들의 공통되는 믿음이며, 힌두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암소 숭배.”라고 말하였다.(간혹 인도의 길거리에서 소가 어슬렁거리고 차들이 이리저리 소를 피해다니는 것을 TV을 통하여 보게 되는데,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는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가 접목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성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주 최근까지도 암소를 살해한 자는 카슈미르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를 신성시 하는데, 몇 년 전 무슬림(이슬람교의 교도)들이 암소를 잡아먹다가, 그것이 불씨가 되어 힌두교와 무슬림 간의 심각한 종교분쟁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 신도(神道) : 다신교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신도이다. 신도는 일본인이 받들던 전통 신앙이다. 근대 일본 군국주의에서 초강경 민족주의 이념의 근간이 된 것도 바로 신도이다. 현재 일본에서 신도 신자라고 선언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3~4%인 약 4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신도는 일본인의 정체성과 정신을 꼴 지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고, 아직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어느 면에서 신도를 이해해야 일본이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본 정신의 뿌리가 되는 종교이다.
신도란 ‘신의 길’이라는 뜻으로, 일본어로 ‘가미노미치’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신도에는 신이 많다. 원가 예사롭지 않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가미(神)로 받들었다. 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산천초목도, 역사 인물도 모두 가미가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는 800만의 가미가 있다고 한다. 신도에서는 가미와 조화롭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신도는 이런 면에서 기본적으로 정령숭배에 기원을 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사회가 산업화되고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도같은 종교는 없어질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일본인의 상당수는 평소에는 종교와 무관한 것처럼 살다가 곤란한 일을 당하면 가미를 찾기도 하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처리할 때 가미에게 빌곤 한다.
② 유일신교(唯一神敎)
㈀ 조로아스터교 :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는 조로아스터(Zoroaster)는 페르샤의 동부 메니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660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여러 전설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가 성인이 되어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그 해답을 얻으려고 방랑의 삶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서른에 이르렀을 때, 크기가 사람의 아홉 배나 되는 거대한 천사장을 만났다. 그 천사장은 세상에 오로지 한 분 참된 신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아후라 마즈다이고, 조로아스터는 그의 예언자라고 일러 주었다. 그 후 8년 동안 아후라 마즈다의 나머지 다섯 천사장들이 하나씩 나타나 그에게 진리를 전해 주었다.
조로아스터가 그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지만, 모두 그를 미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사촌 중 하나가 그를 믿고 제자가 되었다. 조로아스터와 그의 4촌은 왕에게 진리를 전하러 갔으나, 투옥되어 2년을 보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왕과 온 조정이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이 세상에는 한 분의 참 신이 있는데, 그 신이 바로 아후라 마즈다로서 세상을 창조한 신이다.(아후라는 주(主)라는 뜻이고, 마즈다는 지혜라는 뜻이므로, 아후라 마즈다는 ‘지혜의 주님’ 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다른 잡신은 모두 거짓 신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주위에 있던 모든 종교가 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였음을 감안하면 이렇게 철저한 유일신관을 선포한 것은 당시로서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유대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침입으로 왕국이 멸망하고 그들의 포로가 되어 바빌론에 끌려가 노예로 살았는데, 기원전 538년 고레스 왕이 일어나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메도-페르시아 왕국을 건설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허락한 ‘메시아’였다. 조로아스터교는 바로 고레스왕과 그 제국이 신봉하던 종교였기 때문에 유대인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586년 포로로 가기 전 유대교와, 538년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의 유대교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포로 이전에는 천사장ㆍ사탄ㆍ육체부활ㆍ심판ㆍ낙원ㆍ지옥ㆍ세상 종말 등의 개념이 없었는데, 포로 이후에 쓰이거나 편찬된 문헌에는 이런 것이 등장한다. 그러다가 예수 당시에는 이런 개념이 유대교 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되고, 초기 기독교인도 이런 개념을 그대로 도입했다. 이슬람교도 유대교와 기독교를 통해 무리 없이 이런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재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에서 이런 것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싶을 정도로 조로아스터교가 이들 종교에 끼친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히 획기적이었다. 조로아스터교는 현재 신도수가 고작 25만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종교사에 끼친 영향력 때문에 세계 종교를 이야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신성시하므로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한다. 현재 봄베이 지역에 신도들이 많이 살고있고, 인도에서는 이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하여 파르시(Parsis)라고 부른다.
㈁ 유대교 : 유대를 히브리, 또는 이스라엘, 팔레스티나라고도 한다. 히브리란 명칭은 아브라함의 6대조의 이름이 헤버였는데, 헤버의 자손이란 의미에서 생긴 이름이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별명인데 야곱의 자손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요, 유대는 이스라엘의 아들 중 장자의 자격을 가졌던 유다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유다는 본래 이스라엘의 장자는 아니었으나 12형제 중에 대표자 노릇을 한 데서 중요한 지위를 얻었고, 또 12지파를 총칭하여 유대 민족이라고 부르기까지 이르렀다.
이스라엘 나라의 국조는 이스라엘의 조부인 아브라함이었다. 그는 기원 전 약 1800년 경, 지금 시리아 지방에 해당되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갈대아 우르에 살았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아버지의 땅, 아버지의 신앙을 떠나 그가 ‘지시한 땅’으로 가면 거기서 그를 통해 큰 민족이 일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유대교에서 말하는 유대교와 여호와 하나님의 첫 약속이요, 이 약속에서 유대교가 시작된다.
유대교는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이렇다할 특정한 인물을 창설자로 지적해 낼 수 없다. 유대교는 신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선조로 하는 유대민족 전체의 공통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교의 텍스트는 신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몇 백 년 동안에 걸쳐서 유태인등이 공통적인 작업에 의해 만들어낸 것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유태민족 전체의 오랜 역사를 통한 체험의 기록이요, 희망의 표현이다.
유대교를 일반적으로 율법적 유대교, 예언자적 유대교, 포로 시기 이후의 유대교, 그리스도 이후의 유대교로 나누어 말한다. 율법적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왕국 수립 이전까지 율법으로 통치하던 시기를 말하고, 예언자적 유대교는 기원전 11세기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한 후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 포로생활을 하기까지 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왕과 백성을 교도하던 시기이며, 포로 이후의 유대교는 기원 전 536년 페르샤왕의 호의로 이스라엘 백성이 석방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라를 세우고, 다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기까지를 말하고, 그리스도이후의 유대교는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유대교를 말한다.
㈂ 기독교 : 기독교의 창시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스스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의도도 없었고 스스로 유대민족의 종교로부터 분리되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전 선지자들의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새롭다고 하였고 이전의 가르침을 완성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 그는 자기 자신을 유대민족들이 대망(大望)하고 고대하던 메시아, 곧 하나님 아들로서 인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비록 기독교가 사도 바울이란 인물을 통해 역사 속에서 제도화 될 수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에 근거하여 새로운 종교로서 기독교가 창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모든 것의 결정적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使役)속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의 남부지역인 유대지방에서 태어났다. 수백 년 간이나 이민족의 지배 하에 독립을 잃은 유대인들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 줄 구세주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예수였다.
예수의 출생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보통 마태복음의 기록에 따라 기원전 4년으로 보고 있다. 4복음서중『마태복음』과『누가복음』에서만 예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 복음서는 공통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미혼 상태에서 성령으로 임신을 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마리아의 남편은 목수인 요셉이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자라나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4복음서 모두가 공통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잠간 언급된 것 이외에는 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12세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갔다가 부모가 집으로 가는 것도 모르고 성전에 남아서 종교 지도자들과 토의를 했는데,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고 한다.
예수는 30세가 되어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고, 40일 간 금식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요즘 말로 고치면 일종의 종교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사탄의 유혹을 모두 물리친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가 외치기 시작했다.『마태복음』에 따르면 가장 처음 외친 복음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최초 기별이자 중간기별이며 마지막 기별이었다. 그야말로 초지일관된 기별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기별이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아무튼 예수는 천국 복음을 가르치며 3년 정도를 보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을 따르면서도, 유대교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신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따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으며, 신의 나라는 믿는 자의 마음속에 있으며, 또 그것은 최후의 심판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요 교사여서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 속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인 유대교의 사제나 율법학자들은 그가 민중을 잘 못 가르치는 자라 하여 미워하고, 민중들 또한 그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을 약속할 뿐 유대인들의 현실적 해방과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점에 실망하여, 그를 오히려 로마 관헌에 고발하여 33세의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30년 경).
예수가 끝내 십자가 위에서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그의 가르침 역시 그것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 3일 만에 부활하였음을 확신한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그들의 교단을 조직하여 그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죽기 전에 두려움 때문에 그를 외면했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그의 부활과 그의 가르침의 진실됨을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전도와 순교는 기독교를 세계적 종교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 했다. 원래 유대교의 율법학자이며 헬레니즘의 학자로서 기독교를 박해했던 바울은 예수의 사후에 계시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소아시아ㆍ시리아ㆍ그리스ㆍ로마 등지의 이방인에 대한 전도에 전념하는 한편, 그 교리를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자 로마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본시 외래의 종교에 대해서 관용했던 로마는 기독교의 전파에 대해서 처음에는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게 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로마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아 황제에 대한 예배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帝國)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라는 정치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이를 우상숭배(偶像崇拜)라 하여 거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들은 은밀하게 자기네들끼리만 모여 그들의 신에게 기도하여 로마인들은 이들이 내밀히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이리하여 네로황제 이래 그들은 거듭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3세기부터는 그것이 본격화되어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러한 박해를 통해서 기독교는 하층시민이나 노예들 사이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상류층에도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각지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한『복음서』와 초대 사도들의 행적을 서술한『사도행전』이나 사도의『서한』들이 수집되어 신약성경으로 편찬되었다. 이리하여 4세기에 이르러서는 그것은 국가권력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콘스탄티누스황제(306~337 在位)는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으며, 4세기말 테오도시우스황제(379~395 在位)는 마침내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다른 종교를 금하기에 이르렀다. 순교자들이 뿌린 씨가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후 기독교는 전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인의 중심종교가 되었으며, 중세 1000년간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신본주의 사회로, 로마교황의 권위가 왕권 위에 군림할 때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일으킨 서구열강은 그 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ㆍ아시아ㆍ아메리카 등 세계 각처에 진출하여 식민지로 삼고 기독교를 전파하여,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신도 수가 많고, 영향력 있는 종교로 자리매김하였다.
㈃ 이슬람교 : 이슬람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알라(Allah)의 계시를 받아 형성된 종교로, 유럽인들은 마호메트가 일으킨 종교라 하여 마호메트교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슬람교도들에 의하면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마호메트가 시작한 것이 아니고, 옛날 인류의 시조인 아담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담 이래 많은 예언자들이 출현했으나 마호메트가 최고의 위대한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이다.
또한 이슬람교를 중국에서는 회회교(回回敎) 또는 회교(回敎)라고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슬람교도들이 부르고 있는 명칭인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이슬람이란 아랍어 ‘쌀람(Salam, 평화)’에서 파생된 아슬라마의 명사형이다. 즉 모든 피조물인 무슬림(Muslim)들이 알라에게 완전히 복종과 순종을 할 때만이 완전한 평화가 깃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이라는 말은 이 같은 문자적 의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종교뿐 아니라 그 종교사상을 토대로 구축된 문화 전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슬람 문화란 과거 약 1300여 년간 이슬람교도들이 형성해온 종교는 물론이고, 그 정치ㆍ법률ㆍ과학ㆍ예술, 그리고 교도들의 풍속과 관습도 함께 포함된다.
이슬람의 신앙대상인 알라는 우리말로 하나님을 뜻하며, 영어로 가드(G0d), 인도어로 데바(Deva), 라틴어로 데우스(Deuss)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알라신이라는 말은, 마치 다신교적 관념을 염두에 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이슬람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알라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마호메트에게 계시한『코란』과 마호메트의 언행록인『하디스(Hadith)』를 근간으로 하는 신앙과 실천체계이다.
이슬람을 창시한 마호메트(Mohammed, 570?~632)는 메카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마호메트가 태어난 때에는 아라비아 각지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메카에도 그 영향이 미쳐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그들을 ‘하 니프(Hanif)’라고 불렀다. 하니프들은 세계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때는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유일신은 곧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다신교(多神敎) 신당에 빠져, 돌ㆍ천체ㆍ샘ㆍ수목 등을 숭배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검 은 돌’을 모신 카아바(Kaaba) 신묘(神廟)였다. 이 돌(검은 돌)은 공중에서 떨어진 운석이 아니었을까 생각 된다. 옛날에 큰 돌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돌은 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안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마호메트가 태어난 지 얼마 후에 어머니가 죽었으므로 어린 마호메트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그 후 숙부의 손에 양육되었으며, 청년이 되자 연상의 부유한 과부에게 고용되어 대상생활을 하면서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그는 팔레스타인이나 시리아 등지의 기독교나 유대교도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종교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 후 부유한 그의 여주인과 결혼하게 됨에 그는 사업보다는 명상생활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610) 이슬람력 9월말 경 “읽어라 창조주의 이름으로…한 덩어리의 응혈에서 인간을 창조하시도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감사한 분이시니라.”(코란 69장 1~5)라는 첫 계시를 알라가 보낸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것이다. 첫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그가 바로 예언자로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신으로부터 그 이상의 계시를 받지 못해 그는 한동안 불안과 회의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그에게 알라가 일을 시작하라는 제2의 계시를 받고 힘을 얻은 그는 613년 메카에서 알라의 뜻을 따를 것, 즉 이슬람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는 그의 가족을 비롯하여 일단의 개종자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이교적인 여러 신앙에 대한 그의 공격의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메카의 유력자들은 이슬람의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622년 메카 북쪽의 도시 메디나(Medi -na)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내부적 파쟁에 휘말려 있던 이 도시가 그들의 싸움의 조정자로서 모하메드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마호메트는 종교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이며 입법자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슬람교는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마호메트의 메디나로의 피신을 ‘헤지라(Hegira)’ 라 하여 후에 이 해를 이슬람의 기원 원년으로 삼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메디나에서 마호메트는 신의 예언자이며, 지상에서 신의 뜻의 집행자로서 하나의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세웠다. 이리하여 메디나를 중심으로 교세를 키운 그는 메카로 쳐들어가 카아바의 ‘검은 돌’ 이외의 모든 우상들을 파괴한 후, 카아바의 신묘(神廟)를 알라의 신전으로 삼았다(630). 그는 계속하여 아라비아반도의 통합에 주력하여, 632년 그가 타계하였을 때는 반도의 거의 전 지역을 통일하였고, 신자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마호메트에 의해 창설된 이슬람교는 그의 추종자이 이란의 사파워 왕조, 인도의 무굴제국, 발칸 반도까지 뻗어나간 오스만 제국 등 수많은 왕국을 건설, 이슬람교를 널리 전파하고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유럽 열강들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이슬람국가가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하게 되었다.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유일신교 중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는 한 뿌리에서 나온 종교이다. 그러나 세 종교의 역사는 반목과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그 1차적 원인은 신학적 이견(異見) 때문이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유대교는 오로지 유대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배성,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둘째, 천당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유대교에서의 천당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갈 수 있는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이 지구에서의 이상적 삶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천당은 이곳에서의 삶이 아닌 또 하나의 삶, 두 번째의 삶이 갈 수 있는 곳으로 지구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가리킨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신의 구현이 아니며, 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지금도 구세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아예 선지자나 예언자로서도 인정하지 않는데 반하여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여러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예언, 참된 계시는 마호메트를 통해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마호메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전달하는 예언자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 뜻을 결정적으로 전달하는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이다.
넷째, 기독교에서는 성부ㆍ성자ㆍ성신, 즉 하나님ㆍ예수님ㆍ하나님 말씀이 하나라는, 3위일체설(三位一體說)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이러한 3위일체설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철저한 유일신론에 입각해 있다.
3. 인본주의 종교(人本主義 宗敎)
① 불교
불교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하고, 어떤 사람은 성불(成佛)의 종교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의 한 단면만을 보고하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깊고 오묘하여,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딱 꼬집어서 설명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불교를 범어로는 붓다 다르마(Buddha dharma)라고 하는데, 붓다를 음역(音譯)하여 불타(佛陀, 이를 줄여서 佛)라고 하였고, 우리나라에 전래되어서는 부처(님)라고 하였으며, 이를 의역(意譯)하여 각자(覺者) 또는 지자(知者)라 하였으며, 다르마를 의역(意譯)하여 법(法, 진리)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붓다 다르마를 음역하면, ‘불타의 법’ 즉 ‘불법’이 되고, 의역하면 ‘깨달은 사람(覺者)의 법(진리)’이 된다. 불교를 파알리어로는 붓다 사나(Buddha sana)라고 하는데, 사나는 가르침(敎)이란 뜻이므로, 붓다 사나를 음역하면 ‘불타의 교’ 즉 ‘불교’가 되며, 의역하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敎)’이 된다.
불교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붓다(Buddha)의 이름을 중심으로 응집되어 있는 사상ㆍ실천ㆍ조직들을 총칭하고 있다. 불교 고유의 용어로 표현하면 불교는 그 개조(開祖)로서의 불(佛, buddha), 그의 가르침인 법(法, Dharma), 그리고 그를 따르는 공동체인 승(僧, samgha), 이러한 3보(三寶)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는 기독교나 이슬람과 같이 붓다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을 그 개조로 갖고 있으며, 붓다가 깨달은 우주와 삶의 진리(法)는 그의 교설을 통해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종교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단순히 붓다 자신의 각성에서 끝나지 않고 그를 따르는 무리(僧家)가 형성되게 됨에 따라 실질적인 종교의 모습으로 구체화 되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히말리아산 기슭에 샤카(Sakya)족이 세운 카필라(Kapila)국의 왕자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카필라국의 왕 슛도다나(淨飯)였고, 어머니는 마야 왕비였다. 전설에 의하면 결혼 후 오랫동안 아기가 없다가 40세가 넘어서 힌 코끼리가 오른 쪽 겨드랑이로부터 태내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였다 한다. 왕비는 나라의 풍속에 따라 아기를 해산하기 위하여 친정으로 가는 도중에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 가지를 잡으려는 순간 아기를 낳았다. 이 왕자의 이름이 고우타마 싯다르타(Gotama Sidharttha)이다.(고우타마는 姓이고 싯다르타는 이름임).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야 왕비는 싯다르타의 생후 7일 만에 이 세상을 떠났고, 싯다르타는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 왕비에 의해 양육되었다.
부처님이 태어난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부족국가에서 고대 통일국가로 이행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브라만 계급의 권위가 상실되고 왕족․무사계급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재력가〔장자〕들이 생겨났으며, 사상적으로는 전통종교인 바라문교에 반기를 들고 신흥사상가들이 등장하였다. 불교경전에 이들의 사상적 경향을 64종으로 분류하고, 그 대표적인 사상가를 육사외도라 칭하였다. 이들 중에는 푸라나처럼 도덕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지타처럼 쾌락주의에도 있었다. 또 산자야는 불가지론을 주장했고, 니간다푸타는 물질과 영혼을 분리시키고 고행과 극기를 지향하였다. 훗날 자이나교의 시조가 된 마하비라도 이 무렵의 사상가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태어난 시대는 정치ㆍ경제 등 사회전반에 걸쳐 급격하게 변화하던 시기였으므로 정치적으로는 전륜성왕(轉輪聖王, 고대 인도의 이상적인 왕), 종교적으로는 붓다를 갈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탄생하신 분이 부처님이시다.
싯다르타는 7세부터 학문과 무예를 배웠다. 19세에 같은 석가족 콜리성의 성주 수프라 붓다의 딸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을 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싯다르타는 화려한 궁중생활을 즐겼지만, 그는 일찍부터 인생의 고뇌에 의문을 품고 자주 명상에 잠기게 되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싯다르타가 29세가 되는 해에 외아들인 라훌라가 태어나자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고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었다.
싯다르타는 6년간 뼈를 깎는 수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드디어 35세 되든 해의 12월 8일, 새벽의 명성(明星)을 바라볼 때 ‘위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얻었다. 이로부터 싯다르타는 붓다(Buddha, 부처, 覺者)ㆍ석가모니(석가족의 성자)ㆍ세존(世尊)ㆍ여래(如來)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붓다는 열반할 때까지 45년간 법을 설하여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고, 80세 되든 해 쿠시나가라의 성 밖의 사라나무가 두 그루 나란히 서 있는 사이에 누워 마지막 순간까지 가르침을 펴고,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이 때가 기원전 543년경 이었다.
석가모니에 의해 성립된 불교는 2,500년의 긴 역사를 통해 그의 가르침은 발생지에서는 오히려 빛을 잃게 되지만 인도 밖의 동남북 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완전히 지배적인 종교로서 자리 잡고 뿌리를 박으며 오늘에까지 이른다. 이러는 동안에 불교는 단순히 하나의 체제 혹은 제도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그 지역의 모든 문화의 측면에 반영된다.
② 유교
중국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종교 사상은 하늘(天)에 대한 숭배였다. 중국인들은 하늘을 인격화하여 상제(上帝)ㆍ제(帝)ㆍ호천(昊天)ㆍ민천(旻天)ㆍ황천(皇天)ㆍ황천상제(皇天上帝)ㆍ유황상제(惟皇上帝)라고 불렀다. 천자(天子)는 국가의 원수를 가리켜 말함인데, ‘하늘의 아들’이란 존칭이었다. 천자는 매년 동짓날에 남교(南郊)에 나가서 둥근 제단인 환구(圜丘)에서 천제를 지냈다. 그 밖에도, 우사(雨師)ㆍ풍백(風伯)ㆍ운신(雲神)ㆍ뇌신(雷神)ㆍ하백(河伯)ㆍ산령(山靈) 등의 신을 믿었으며, 질병과 재난 등을 위하여 많은 미신이 성행하였다.
유교는 공자에게서 비롯된 사상체계이다. 그러나 유교는 공자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창시된 것이라고 보다는 은ㆍ주(殷周)시대 이래의 문화적 전통이 공자라는 인물을 통해 집대성되어 하나의 체계로 정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자 자신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고 했다. 요ㆍ순의 임금으로부터 문왕과 주공을 통해 내려오는 가르침을 전수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공자는 ‘창조적 전수자’였다.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이 공자에 의해 집대성되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공자가 태어난 시대는 주나라 말, 춘추시대로 정치ㆍ사회ㆍ경제적인 여러 변혁과 발전으로 구제도ㆍ구질서 및 전통의 혼란과 붕괴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격동은 여러 사상가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제각기 독창적인 학술과 사상을 전개하여, 격변으로 인해 출현한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각국이 부국강병책을 시행하면서 신분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자 학술과 사상은 더욱 발전하여 중국 사상의 연원이 되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라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이 출현하였다. 한서(漢書)의『예문지(藝文志)』에는 유(儒)ㆍ도(道)ㆍ음양(陰陽)ㆍ법(法)ㆍ명(名)ㆍ묵(墨)ㆍ종횡(縱橫)ㆍ잡(雜)ㆍ농(農)의 9가(家)와 소설가(小說家)를 더한 10가가 거론되고,『사기(史記)』에는 유ㆍ도덕ㆍ음양ㆍ묵ㆍ명ㆍ법의 6가(六家)가 거론되고 있다.
공자는 기원 전 551년 춘추시대 노나라(지금의 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다. 세 살쯤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홀로 키웠다. 19세 때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공자는 19세쯤 관리로 일했는데, 23세에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곡을 하느라 관직에서 물러났다. 26세쯤 다시 공직을 잡았지만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50세쯤에는 노나라에서 오늘날의 법무장관이나 재상 비슷한 대사구(大司寇)의 벼슬에 올라 2~3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임금이 이웃 나라에서 보낸 미인계에 넘어가 공자의 간언을 듣지 않고 정사를 게을리 하므로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뜻을 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68세쯤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서 가르치는 일과 글쓰기에 전념하다가 72세에 죽어,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림(孔林)에 묻혔다.
공자의 본래 이름은 공구(孔丘)이다. 구는 언덕이란 뜻인데, 이마가 언덕처럼 튀어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자라는 이름에 들어간 자(子)는 공자ㆍ노자ㆍ맹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논어(論語)』에 나오는 “내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삼십에 일어서고, 사십에 흔들림이 없어지고,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육십에 하늘의 뜻을 쉽게 따를 수 있게 되고, 칠십에 하고 싶은 바를 해도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그의 삶을 집약하는 말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간단히 말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나 부하고 귀한 모든 운명이 다 천명(天命)이라 하여 하늘에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또 인도(人道)로서는 효ㆍ제ㆍ충ㆍ신(忠孝悌信), 인ㆍ의ㆍ예ㆍ지(仁義禮智), 지ㆍ인ㆍ용(智仁勇)의 덕목으로 교훈하였다. 공자 자신은 미신이나 마술, 괴상한 언행을 일체 좋아하지 아니하고 제자들에게 금지 시켰다. 신을 섬기는 방도를 묻는 제자에게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무슨 귀신을 위하느냐?”고 경계하였으며, 죽음에 대하여 묻는 제자에게 “사는 것도 모르면서 죽는 것을 왜 묻느냐?”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주역을 애독하고 점치는 이치를 연구하여 후세에 음양술수(陰陽術數)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을 널리 펴고 계승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으로 맹자와 순자를 든다. 맹자(孟子, 468~390)는 공자가 죽은 지 100년 후에 태어난 사람으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공자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나라로 다니면서 선성(先聖)의 도를 선포하였다. 그의 가르침이『맹자(孟子)』에 남겨져 있는데, 후세에 맹자를 아성(亞聖)이라 하여, 공자와 함께 배향(配享)하고, 공자와 맹자를 합하여 공맹이라 하며, 유교를 공맹의 교라고도 칭하고 있다.
유교는 일찍부터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여러 나라의 사회문화와 가치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어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으므로 정치ㆍ사회ㆍ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유교 이념이 근간이 되었다.
③ 도교
도교(道敎)는 엄격하게 따져서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도가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도교 신앙이다. 중국 사상사에서 도가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로서의 도교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사상적 유파로서, 노장(老壯) 계열의 사상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노자(老子)는 도가의 시조로서 춘추 전국시대 사람이다. 노자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570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어머니가 별똥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임신한 후 82년이 지나 태어났는데, 태어난 아기의 머리는 뱃속에 오래 있어서 이미 늙은이처럼 하얗게 되었고, 이 때문에 노자 곧 늙은 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노자는 ‘존경스러운 스승’이라는 뜻의 존칭일 수도 있다. 한(漢)의 사마천이『사기(史記)』에서 노자가 누구였는지 여러 이설을 들고, 주나라에서 도서를 관장하던 이이(李耳)라고 결론을 내렸다.
노자가 나이 들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서쪽으로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대에는 이 기록에 따라 그가 인도로 갔으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사기』에 따르면 노자가 서쪽으로 가다가 함곡관이라는 재를 넘게 된다. 재를 지키던 윤희라는 사람이 전날 밤 꿈에 한 성인이 물소를 타고 재로 넘어 오는 것을 보았는데, 노자를 보고 분명 꿈에 점지 받은 성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 세상을 등지느냐고 말렸지만 쓸데없는 것을 깨닫고, 그르면 후세를 위해 글이나 좀 남기고 가시라고 간청했다. 노자는 이 간청에 따라 3일 동안 머물면서 간단한 글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도덕경(道德經)』5,000자라고 한다.
물론 현대 학자들은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글의 성격이나 구성이나 나타난 사상 등으로 보아 어느 한 사람이 한자리에서 쓴 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자(莊子)의 생존 연대를 보통 기원전 369~286년으로 본다. 이 연대를 받아들인다면 맹자(孟子, BC 371~289)와 같은 때 사람이다. 그러나 장자도 맹자를 몰랐던 것 같고, 맹자도 장자를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의 책에는 상대방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장자는 전국시대 송(宋)나라 옻나무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장자』는 그가 남긴 책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가에서는 자연에서 궁극적인 것을 찾으려 하였다. 도가는 ‘저절로 그러한 것’을 자연(自然)이라고 하고,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닌 것’을 무위(無爲)라 하여,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유교가 인위적인 정치제도와 도덕을 당위(當爲)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데 대해, 노자는 인위적인 덕목이 아닌 무위를 본받으라고 요구했다.
도교(道敎)는 장도릉과 갈흥에 의하여 성립된 도교 신앙이다. 일종의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는 노자와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만, 그 목적은 노장 사상과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가 사상이 죽음과 삶의 문제마저도 초월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반해,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는 육체적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 육체적 불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종교이다.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는 방법으로 올바른 음식물과 약초의 섭취, 한번 들이마신 숨을 오래 지속하고 천천히 내보내는 호흡 조절, 될 수록 많은 젊은 여인과 성교를 하되 사정을 하지 않고 그것을 온 몸으로 순환하게 해 정신을 맑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는 방중술, 연금술로 만든 금단 등 선약 복용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여태까지 신선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④ 천도교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경주의 서북쪽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수운이 태어날 당시의 국내외 사정은 극도의 혼란과 불안 속에 놓여져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대한 열강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고, 광동사건(廣東事件)ㆍ영불군(英佛軍)의 북경침입 등 대사변이 연달아 일어났으며, 그러한 소식들은 우리나라에도 속속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국내사정 또한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헤어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세도정치의 폐해가 날로 심해져 정치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 졌다. 3정(三政)의 누적된 폐단에 의해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거기에다 계속된 흉년에다 괴질마저 창궐하니 민란은 3남(三南) 지방에서부터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에 부채질을 가한 것은 사상의 혼란이었다. 즉 서교(西敎)라고도 불리는 천주교의 유행과 그 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지나친 탄압이 그것이었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사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천주교의 포교와 교세의 확충은 확실히 하나의 충격이며 동요의 요인이 될 만 했다. 수운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사상적인 이질감으로 인하여 사회가 극도로 동요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옥[근암]은 유학에 능했다고 하나 벼슬은 하지 못했다. 두 아내를 사별하고 후사를 두지 못해 고심하던 중, 마침 이웃 마을에 살던 과부 한씨를 뒤늦게 맞아 그리던 아들을 보니 이때 근암공의 나이 63세였다. 그러나 한씨 부인도 6년 만에 사별하고 만다. 따라서 모친없는 수운은 할아버지 같은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나이가 70이 넘은 근암은 수운의 나이 13세 때 울산 출신의 박씨와 결혼시키고 자신은 4년 뒤에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를 배웠지만, 서자로 태어났으므로 그 재능을 펼 길이 없었다. 갖가지 장사도 하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청년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그의 나이 30세쯤 되자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당면한 인류 문명의 총체적 붕괴에서 오는 것이라 믿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인간을 두루 구할 수 있는[輔國安民 廣濟蒼生]’길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다. 주유(周遊)하는 동안 어떤 알 수 없는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이서(異書)를 받고 3일 만에 터득하는 일이 있었다.
수운은 전통 종교인 유ㆍ불ㆍ선이 이제 기운을 다 해 새로운 시대에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없고, 서학인 천주교도 그 공격성이나 흑백논리로 보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도가 못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 붕괴되는 선천문화를 개벽할 수 있는 새로운 도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전국을 두루 다니고 다시 고향 경주의 구미산 밑 용담으로 돌아와 원하는 대도를 얻기까지는 그 산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하고 구도에 정진한다. 드디어 1860년 4월5일, 37세 되던 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갑자기 마음이 차고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지면서 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두려워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하고, 이어서 “너를 세간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나니 의심치 말고 의심말라.” 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울님과의 문답『강화(降話)』가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때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는다. 그 1년은 그가 체험하여 깨달은 사실을 되새기며 체계화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진리를 널리 펴는 일, 곧 포덕(布德)을 위한 준비 기간인 셈이다.
득도(得道) 다음 해 6월, 포덕(布德)을 시작했다. 스스로 다닐 필요도 없이 그의 득도에 대한 소문이 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울님을 소개하고 인간이 다 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고 가르쳤다(수운은 자기 집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노비 중에 하나를 딸로 삼고 다른 하나는 며느리로 삼는 등 신분차별 폐지의 평등주의를 몸소 실천하였다). 양반ㆍ상인(常人)의 계급과 서열이 엄격하던 사회에서 이런 가르침은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동학의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때 수운의 나이 41세였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글을 모아서『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엮었다.
천도교의 사상은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유불선(儒佛仙) 전통뿐 아니라, 민간에 퍼져 있던 무속신앙 및 새로이 전래된 서학(西學, 천주교)을 통합한 측면이 강하다. 즉 주역의 선후천 순환논리를 받아들였고, 당시 기층민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던 도참(圖讖)사상ㆍ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도 흡수하였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신선이 아니라 지상신선으로 바뀌었다. 위와 같이 여러 민중사상을 흡수하여 동학이 완성되었고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이다. 운(運)은 하나이고 도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고「논학문(論學文)」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학에 대응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동학은 여러 사상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동학은 여러 사상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조 최제우가 20여년 간의 구도 끝에 얻은 교리, 즉 한울님의 말씀은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귀결된다. 인내천 사상은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우주관 속에서 한울님을 바로 자기와 일체화시킨 인간관 제시이다. 이런 기론(氣論)에 바탕한 인간관은 그 지극한 기를 자신의 정성에 따라 내 몸 속에 영원히 모실 수 있는(侍天主), 그리하여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사상이다. 곧 인내천의 교리는 내유신령(內有神靈)으로 자신의 몸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하여 시천주(侍天主) 신앙을 유도한다. 또한 사람이 곧 한울님이므로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한울님 섬기듯 섬겨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따라서 인내천에서 도출된 신관은 편향적 유물론이나 유신론에 반대하고 오직 물심(物心)만이 근본일체라는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에 입각하여 개인과 사회의 한편만의 가치를 지양하고 사람을 본위로 한 원천으로 돌아가 개인이 곧 사회요, 사회가 곧 개인인 개전일체(個全一體)를 깨달아서 동귀일체(同歸一體)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당면한 의식주 해결뿐만이 아닌 지향해야 할 진정한 목표는 바로 우리민족을 먼저 구하고 세계인류를 구하자는 포부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먼저 나라를 구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 우선되어지고 나아가 세계 인류에게 새 생활을 가르치는 포덕천하(布德天下)이며, 이들을 구제하는 광제창생(廣濟蒼生)으로 인간의 궁극목표인 자유ㆍ평등ㆍ평화의 이상을 실현하여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셨기 때문에 응용상으로 성신쌍전(性身雙全)이 되는 것이며, 또한 성령(性靈)을 바로 잡는 교양, 즉 종교와 육신을 살리는 정치가 겸행해야 만이 참인간이 된다는 점에서 교정일치(敎政一致)를 주장하고 있어 이 두 교의를 교리의 강령으로 삼고 있다. 한 마디로 천도교 교리를 요약하면 종교적으로 신인일체, 철학적으로는 개전일체, 윤리적으로는 자타일체로서, 이 모두가 인내천에 의한 동귀일체에 비롯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상의 하나는 후천개벽론(後天開闢論)이다. 최제우는『용담유사』에서 인류 역사를 크게 두 시로 구분하여, 창도 후의 새 시대를 후천(後天)이라고 하고, 구시대를 선천(先天)이라고 하였다. 후천개벽은 선천운수(先天運數)가 지나고 후천운수(後天運數)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후천운수는 5만년이며, 공간적으로는 인간생활의 전면적 변혁이 시작될 때라 한다. 선천시대의 종교란 천계(天界)의 한울님을 순종하며 천상의 극락을 누리려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만, 후천시대의 종교는 인계(人界)에서 한울님을 모시는 지상극락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또 선천시대는 존비귀천(尊卑貴賤)의 계급주의이지만, 후천시대는 평등주의를 원칙으로 하며, 이에 따라 정치ㆍ사회의 제도까지 바뀌어져 국기(國基)가 바로 서고, 모든 사회의 불안이 제거되는 지상극락의 이상사회가 이룩된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혼란한 시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終末論)을 주창하면서도 다가오는 새 시대야말로 이상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을 주창했다. 그리고 자신이 확립한 동학사상이야말로 오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금까지의 문명을 해체시키고 다시 오만년 동안 지속될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후천개벽론은 현실사회를 부정하고 후천개벽ㆍ지상천국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정감록(鄭鑑錄)」과 같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회운동의 일면, 즉 혁명성의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도 천도교는 민족주의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동학의 힘을 빌어 전민족적 차원에서 그 침투를 막아내려는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강렬하게 노출시키고 있었다. 즉 외세의 위협에 저항의식의 발로로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염원하는 사회사상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월간 고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