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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장과 향도 ------------------------------------------------ 문숭리
필자가 군 복무를 한 시기는 1978년 11월 17~81.8.20 일이었다. 젊은 시절 첫 번째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과 더불어 본가에서 농사일을 서너 달 거들다가 겨울이 시작되는 문턱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향토사단에 입대를 했다.
정상적으로 입대를 하려면 병무청에서 실시하는 신체검사를 받고 국방부 입영일자에 맞추어 입대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어차피 갔다 와야 할 군대이기에 일찍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학업에 열중해 보려는 의도에서 조기 입대를 신청하게 된 것이었다.
같은 나이의 친구들은 그 후 필자보다 1년 이상 세월이 지난 다음에 입대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입영방식이 본적 기준으로 생년월일 순으로 입대를 하게 되어 있는데 대개는 같은 해에 입대를 하고 생일이 빠른 사람부터 해당 입영부대 군번을 부여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개별입대 형식으로 병무청이 아닌 병무청 지정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향토사단에 정상입대가 아닌 편법으로 필자보다 나이가 빠른 사람들과 더불어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입대를 하는 경우는 내 고향에서는 충남 논산에 있는 육군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 홀로 입대를 한 것이었다. 함께 입대한 친구들은 십중팔구 같은 지역단위였기에 초중고 동창들이 대부분이었고 서로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그들 간에는 서로 신분 확인이나 친분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이 군대 규율에 적응을 하면서 서로에게 도움도 주고받을 수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 속에 이방이었다.
그런데다가 필자가 58년 개띠인데 그 나이에 농촌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다니다가 군 입대를 하는 친구가 신병교육대 입소자들 중에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그들도 필자와 마찬가지로 조기 입대나 대학을 마치고 입대를 하는 경우라 역시 이방인 취급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중졸, 고졸위주의 학력 속에 대학을 다녔거나 다니다 온 것도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이방인 조건으로 늘 질시의 대상이 되다시피 하였다. 소위 이유 없는 배척 감을 느끼고 그냥 왕따의 대상이었다.
거기에다 향토사단에는 그 지역을 잘 알거나 향토애가 많은 그 지역 출신들이 신병교육대 조교나 내무반장이 대부분이었는지라 고향에서는 선후배 관계였다. 말이 필요 없이 느낌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한 달간의 향토사단에서 1차 신병교육 기간이었지만 다소의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이 군대조차 불평등하다는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늦가을이라 아직 본격적이 추위를 느끼는 시기는 아니지만 마음이 추위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눈 코 뜰 새 없이 신병으로 군기가 들어가고 있을 즈음에 다시 열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이제 바로 3년간 세월을 보내게 될 자대로 배치를 받는가 싶었다.
열차를 타고 용산에 있는 용사의 집에 하루 밤 머무르고 또 다시 전방으로 이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용사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서울에 있는 어느 여자 대학에서 빵과 커피를 나누어 주어 최전방으로 국토방위를 위해 끌려가는 장병들을 위문해 주는 것이 상례인 듯 싶었다. 그 다음날 다시 용산에서 열차를 타고 의정부에 있는 소위 000보라고 하는 병력 예비 집결지에 다른 신병교육대 장병들과 더불어 필자를 내려놓았다.
그곳이 바로 각 부대에서 필요로 하는 병력을 공급받는 장병 인수 장소이자 배송지이였던 것이었다.
이미 서울 이남의 후방에 근무할 인원은 1차 신병교육대에서 선별이 되고 의정부나 춘천에 있는 병력 예비 집결지는 최소한 서울 이북으로 하는 전방 근무를 위한 장병들이라는 것은 훗날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이제 직접 배치되는 자대가 되었던 자대배치를 위한 2차 신병교육을 위한 각 사단 내 신병교육대로 이동을 하는데 무엇을 타고 이동하느냐? 에 따라서 그것도 근무지가 다르다는 것을 또한 훗날 알게 되었다.
45인승 안락한 관광버스를 타면 그야말로 최전방이 되는 것이고, 다음으로 군용트럭이나 버스를 타면 철색선이 아닌 민간인을 접하는 곳이었던 것이었다. 필자는 처음에 관광버스를 타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제 제대로 인간대접을 받는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런 생각으로 잠시 눈을 붙이고 한, 두 시간 시간이 흘렀을까?
사단에서 나온 선임하사의 호각소리와 더불어 선착순 연병장에 도열을 했는데 하늘만 보이 는 첩첩산중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온통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민간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이제 나 죽었다 싶은 심정이었다. 그곳이 다시 한 달 동안 자대에서 근무를 할 실무교육을 받는 사단 신병교육대였던 것이었다. 필자와 더불어 그곳에 배송된 인원이 2개 내무반 120명이었다. 인솔을 해온 선임하사가 그 인원을 두 개 내무반으로 분류를 하고는 병장계급을 단 각 내무반장에게 인계를 했다.
그 내무반장을 따라 내무반에 들어가 개인 의류와 소지품을 보관할 수 있는 칸막이 선반을 지정받고 그 곳에 군대 이동 배낭(소위 따블빽이라고 불리는데 가방이 등에 질 수도 있고 들 수도 있는 큰 가방, 그러니까 보통 가방의 두 배도 넘은지라 영어의 Double Bag. 이것이 일본식 발음으로 따블빽으로 굳어진 것이 틀림이 없다.)과 더불어 정리가 끝나고 교육생 중에 반장격인 내무반장 대리를 뽑는 절차가 있었다.
흔히는 1차 신병교육대에서 선임이라고 불리던 자가 다시 그 직책을 자연스럽게 맡는 것이 상례였는데 당시 필자가 속한 내무반장은 다시 선출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도 흔히는 추천 형식으로 뽑는데 당시 신병교육대 내무반장은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이었다.
내무반장 왈, 이 중에서 스스로 향도를 해 볼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순간이다 싶어 손을 번쩍 들었다. 다른 동기들이 생각을 해보고 옆 사람을 추천할 기회조차 없이 전광석화 같은 동작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큰 소리로 저요~ 하고 소리를 쳤는지 그 소리에 감히 다른 동기생들 중에 손을 들 엄두를 못내는 듯 싶었다.
그런데 내무반장의 표정이 묘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60명 중에 키도 가장 작아 보이고 체격이 호리호리한 필자가 자신보다 두 배나 체격이 좋아 보이는 동기들 중에 향도를 하겠다고 자청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내무반장이 하는 말, 너 후방에서 선임을 해 보았느냐? 는 것이었다. 아니라고 했다.
그랬더니 너보다 키도 크고 힘이 센 동기들을 통솔할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향도를 하는데 키와 힘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이다.
하면 하는 것이고 안 될 것도 또 무엇이냐? 고 말이다. 시켜만 주면 자신 있다고 하니까.
그 대신 소대원이 네 말을 잘 안 듣거나 잘 통솔하지 못하면 너는 나한테 맞아 죽을 줄 알고 그래도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미 주사위를 던진 상태인데 그쯤에서 꼬리를 내릴 수가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필자는 정말 키나 체격에 관계없이 똑 소리 나게 향도 임무를 수행했다.
향도라 해 보았자. 기상과 취침 전에 인원파악과 훈련전후 이동 간에 인솔, 식사시간에 질서 정연하게 신속하게 식사를 마치고 청소를 시키는 일이었다. 필자 세대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시절에 학도호국단이라고 이미 학교식 군대훈련을 통해서 향도가 해야 할 임무를 보고 듣고 체힘을 하다시피 한지라 그렇게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다.
필자에게는 만화책 한권 읽는 것보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나머지 59명을 내 손아귀에 넣고 따르게 하려면 키도 작고 체격도 작지만 당차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멀찌감치 내무반장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 중에서 키도 가장 크고 힘이 있어 보이는 동기생을 한 명 트집을 잡아 그냥 이단 옆발 차기로 죽사발을 내는 것이었다.
내무반장이 가까이 있었기에 내무반장 지시인줄 알고 감히 항변도 아프다고 반항도 못하는 동기생 한명을 58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반 개 패듯 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 그 친구 불침번을 대신 서주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샀다. 향도는 불침번을 안서고 명단을 짜거나 순서를 변경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취침 후 한 시간이 나 기상 전 한 시간에 배치를 하면 정말 잠이 부족한 훈련병에게는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을까? 그런데 분명 자신이 불침번 명단에 이름이 있었는데 자고 났는데 불침번을 안 섰고 그것을 향도가 대신 서주었다는 것을 알면 그 다음부터는 그 친구는 향도 편에서 도와주는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향도는 식당에서도 다소 밥과 반찬을 더 먹을 수도 있는 취사반장의 배려가 있었다. 향도를 하니까 고생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 특권을 다소 양이 부족하다 싶은 동기에게 필자의 식판에 가득 담아다가 덜어주는 날이면 그냥 그 친구는 분명 군대 매점인 피엑스(PX)에서 자신의 팬티 속에 꼬불쳐 준 돈으로 음료수와 빵 을 몰래 사와서 향도에게 먹으라고 주는 것이 인간만이 가지는 마음인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한 달은 정말 그리 긴 세월이 아니었다. 그 기간 중에 내무반장에게 향도 독단으로 너무 자유분방하게 제멋대로 보고도 안하고 행동한다고 정말 한번은 동기생 59명 앞에서 개처럼 얻어맞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동기생들은 향도도 저렇게 맞을 수 있다는 것에 기가 질려 향도 말과 명령이 내무반장의 위력 그 이상이었다.
필자는 소총 반이었는데 개인화기인 소총을 기본무기로 무장한 기본적인 군인으로 교육을 받는 반이었다. 화기소대는 7명이 1조가 되어 기관총을 개인화기와 더불어 공용병기로 하는 병력이라 자대배치를 받으면 중대에서 화기소대로 배치를 받는 신병교육반이다.
필자가 속한 소총반과 더불어 화기 반은 12월과 1월에 걸치는 강원도 강추위 속에서도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전원 2차 신병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다. 1차 신병교육대에서는 선임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고 무관심했었는지 교육을 마치고 선임이 표창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2차 사단 신병교육대에서는 향도에게 사단장 표창이 주어진다는 것을 교육기간 중에 내무반장이 일러주면서 별 사고가 없으면 필자도 당연히 받게 되고, 그 다음 자대배치 후 한 달이 지나면 포상휴가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요즈음으로 말하면 100일 휴가를 받게 되는 것인데 필자가 군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일 년이 지나야 휴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 남들은 12개월 전후에 고향집에 오는데 군대를 가자마자 휴가를 나온다는 것은 요즈음이 아닌 그 당시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소설 속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훈련 기간 중에도 내무반장의 배려로 훈련모습을 흑백 사진으로 서너 장 남길 수 있는 행운도 있어서 같은 소총수 동기들이 사진속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물론 당시는 이름을 다 외우다 시피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원점검과 근무를 정하고, 식판 세척조를 편성하다 보 니 그래도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를 간 필자에게 60명의 이름을 암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식은 죽 먹기나 다를 것이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맨위 좌측 첫번째가 향도 였던 필자, 다섯번째 흰 장갑을 끼고 있는 사람이 황진 탁 병장/내무반장... 맨 아래 좌측 첫번째가 30년만에 연락을 해온 동기생이라고 하는데 철모 그늘에 가려 기억속에 그대의 모습이다. 생각하건데 같은 동기생 향도인 필자에게 본보기 희생아가 맨위 우측에 소총을 들고 있는 덩치 큰 사나이 가 아닌가 싶습니다. ㅎㅎㅎ...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필자는 향도로서 악명을 남길 만큼 악랄하게 그들을 대했는데 그 사이에 정이 들다니 말이다. 하긴 전혀 정이 들지 않은 구석이 없는 것만도 아니었다. 불침번을 동기들 순번에 대신 서기를 밥 먹듯이 하고 내 식사를 다 주다시피 하여 어느 날은 정말 한, 두 끼 식사를 못한 날도 실제 있었다. 그리고 동기들이 조교에게 얻어맞을 일이 있으면 먼저 내가 조교에게 맞는 한이 있더라도 매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내 얼굴 과 목소리에 동지에를 느끼고 남자들만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정이 한 달 정도에 불구하고 비에 옷이 흠뻑 젖은 것이나 다름없이 들었던 것이었다.
필자가 속한 소총 반은 주로 1차 경남 창원/부산 지역에서 올라온 중졸이었고 공용화기인 기관총은 다소 지식을 필요로 했던지 주로 필자의 향토사단에서 1차 교육을 받고 올라온 고졸이상의 학력으로 반이 편성되었던 것이었다. 많이 배우고 안 배움에 따라 인간의 심성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경상도 사나이로서의 순수한 구석을 많이 지니고 있었고 성격들이 원만하다 보니 정말 마음은 여자들 보다 더 여리면 여렸지 말과 행동과는 달리 착한 심성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수료식을 하루 앞두고 훈련종료 회식하는 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다음날 수료식을 마치고 각자 근무지로 떠나기 전 서로 붙들고 얼마나 울었던지 여자들이 보면 성기를 바꾸자는 말을 나올지도 모를 그런 광경이었다. 그 당시 어느 가수가 불렀는지, <잊지는 말아야지>로 시작하는 노래가 사회에서 유행하던 시기라 그 노래를 수 십 번도 더 불렀으리라. 그래서 정말 잊지 말자고 모두가 서로 종이 한 장에 본가가 있는 주소를 다 적어서 주고받고는 전역 후에도 연락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각자 자대에서 나온 군용 트럭에 실려 그 후 31개월을 근무할 현지로 인간 소, 돼지처럼 실려 갔다. 그 중에는 몇 명은 같은 중대에 소대에 대대에 연대에, 아니면 사단으로 더 나아가 후방으로 전출되는 동기생도 있었다. 필자는 자대를 배치 받고 정말 한 달 만에 포상휴가를 나와 고향을 다녀가는 행운아였다.
그 후 대학을 다니다가 왔고, 사단장 표창에, 그리고 군대 정훈 교육 중에 그냥 무심코 써 낸 시 한수가 연속 3년에 걸쳐 현 국방일보(당시는 전우신문)에 동일하게 게재되고 이런 저런 글들이 육. 해, 공군에게 한정된 신문이지만 60 만 명 장병이 보는 신문에 필자의 본명이 오르내리자 유명인사는 아니지만 사단 내 많은 전우에게 이름이 알려지고 지휘관의 눈에 보여 남들은 거의 동일한 전우와 전우애를 쌓아 가면서 또 다른 정이 들고 인연을 맺는데 필자는 그야말로 한 가지 보직도 아닌 3년동안 8가지나 하면서 파란만장한 어설픈 군복무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신병교육대를 제외하고는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면서 잠시 정이 든 전우들이라 깊은 정이 들지 않고 스쳐가는 인연정도였다. 선임으로부터 정을 받아 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후배 전우에게 정을 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얼굴만 전우로 남아 있고 기억하는 이름도 다른 동기생들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거나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런 이름들과 추억뿐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거의 3개월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짧은 기간의 인연인 것 같은 말년에 가까웠던 내무반장이 있었다. 그 후로 그가 전역을 하고도 이름을 겨우 기억할 정도로 말이다.
속된 말로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그렇게 해서 33개월이 조금 넘는 세월을 보내고 전역을 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와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과 더불어 20년 지나고 난후 이 이야기의 본론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불혹을 넘기고 전국을 꿈속이나 전생에서조차도 생각해 보지 못한 농부들을 상대로 의류판매를 하던 날에 충남 부여 세도면 어느 수박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부부에게 다가가 옷을 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필자를 보자마자 누군가 구분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필자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농부가 "너! 전방 어느 부대에서 근무를 했던 아무개가 아니냐?" 는 것이었다.
갑자기 웬, 농부가 일을 하다 말고 필자를 알아보는가? 싶어서 어떻게 저를 아시냐며 누구시냐고? 되물었다.
"나야, 나, 내무반장이었던 조 아무개"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필자는 이름과 20년 전의 그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스쳐갔던 내무반장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필자는 한 눈에 내무반장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 내무반장이야 말로 거의 필자를 기억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는데 이름까지도 기억하면서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역시 내무반장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 내무반장이 필자를 비롯해 또 한명의 같은 소총 반 동기를 오랜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었던 단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무반장은 고졸 출신이었고 소대원들이 대부분 초등학교 출신과 중졸이 거의 다고 고졸도 중대인원 120명 중에 20여명도 안 되는데 대학을 다녔거나 다니다 온 신입 소대원이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희귀동물과 같은 존재였기에 오랜 기억으로 한번에 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하지 못했다. 우연히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필자가 근무했던 사단 카페가 링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한국전쟁 당시 최초 승전지에다 당시 모교 여교사의 공로로 그런 전과를 올린 곳이라 기념관과 전승비가 있는 곳이고 해마다 전승행사를 모교에서 해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연대만 다르지 필자가 3년간 군복무를 했던 같은 사단인데 그와 관련하여 내가 근무한 연대 카페가 개설되어 있었고 대대 단위까지 항목이 만들어 져 있었다.
그리움 마음에 필자가 가지고 있는 몇 장의 군대 시절 사진 중에 하나인 2차 신병교육대이었던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 중 찍은 색이 퇴색한 흑백 사지을 카페에 올려놓고 동기들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적어온 주소록은 서울에서 이사를 몇 번 다니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고 연락을 하며 지내온 동기도 없었던 지라 그냥 퇴색한 사진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이 흘렀을까? 인터넷을 통한 쪽지가 날아들었다. 자신이 누구라며 나를 아느냐? 는 것이었다. 기억이 희미했다. 어찌할 도리가 있는가?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 친구가 내 필명 옆에 본명을 보고 연락을 한 것을 보니 그 동기는 필자가 향도였기에 이름과 얼굴을 사진을 통해서 알아 본 것이었다. 필자는 사진을 통해서 몇 번째가 자신이라고 하는데 이름 기억에 자신이 없었다. 가물가물 한 것이었다. 아~ 그 명단만 가지고 있으면 금방 재확인과 더불어 사진 속에 이름을 비교해 보면 되는데 말이다. 이를 어찌할꼬? 그냥 유야무야 그렇게 기억을 되살리고 요즈음 하루에도 몇 번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군 관련 카페에서도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댓글도 확인을 한다.
하지만 희미한 사진 속에는 철모를 눌러쓴 그의 얼굴이 희미하고 근간의 그의 모습 을 알 수가 없다. 영상전화로 서로 확인을 하면 되지만 필자는 이미 개인홈페이지나 카페를 통해서 그 당시 젊은 시절 모습에서 현재까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니 그 동기생이 필자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네 얼굴을 한번 영상이나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보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여러 경로로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니까 그때 볼 수 있어도 늦지 않기에 보자고 하지 않았다. 달라진 그의 모습을 확인을 한다 한들 특별히 새로워 질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추억 속에 있던 동기이자 전우가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일 뿐 서로에게 특별한 인간적인 이해타산이 형성되지 않을 것이기에 순수한 그리움 속에 추억을 살리는 친구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당시에는 악랄함이 정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는 향도 이었을지는 모르지만 59명밖에 안 되는 동기생들을 내무반장은 한 번에 멀리서도 필자를 알아보았는데 이름조차 희미했으니 향도를 했다는 그 말이 부끄러워진다.
덧붙이는 말 -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30년 전 근무했던 중대 모임을 지난 2009년 5/2(토) 18:00 - 5/3(일) 12:00 충남 서대전역 근처 횟집과 노래방과 모텔에 합숙을 하면서 1박 2일간의 군 생활 추억을 되살리며 보냈고 몇 년 전에 만나고 지금은 충남 부여군 군의원이 되어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그 내무반장을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 생업차 지나면서 5/2일 오후에 다시 만났고 이런 모임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도 전해 주었다. 당시 필자와 근무를 했던 전우는 없었고 가장 선임으로서 필자의 군대 전역을 눈앞에 두고 2개월간 같이 1소대 소대장이 근무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서로에게 기억은 없지만 전임 소대장들과 후배 전우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연결 고리가 되어 잠시나마 군 시절로 되돌아가 하루간의 추억의 만리장성을 쌓을 수가 있었다. 또한 오동현 본 카페 회원이 필자가 전역 후에 같은 중대 근무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2009.5.4. 내 고향 충청도 충주 근교 문숭리 숭선 본가에서- |
이 글속에서 한번에 필자를 알아본 당시 0사단 00연대 0대대 6중대 내무반장을 거쳐간 조세연 하사가
5/3일부로 본 카페에 회원으로 한 식구가 되었으나 군 복무 시절에는 함께 찍은 사진이 없을 정도로
스쳐가는 인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격에 소질이 있어 사단 저겨수로 태능 선수촌에서 실시하던
부대간 사격대표였음.
문숭리가 군복무를 했던 사단의 한 연대가 한국전쟁 최초 승전을 기록한 전적지가 초등학교 모교가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관련된 사진들을 행복을 주는 이 사진 한장에 올려 놓았습니다.
첫댓글 필승 ! 선배님 생생한 글 읽노라면 제가 다 젊디 젊었던 그시절도 다시 돌아간다니까요. 이제 전우를 비롯 좋은 인연 많은 만남으로 많이 행복해지시겠습니다. 항상 건강 유념하시고 사업번창 기원합니다.
다음에 볼게요 시간이 ----
이제 다 읽어 보았습니다 그 군 생활이 인연으로 만나지는가 봅니다 다 들 행복하세요 그리고 이 세상 이슬로 사라지는 그 날까지 건강 하세요
조세연하사 같이근무했지요. 문숭리하고연락이 된것도다 조하사덕분이죠.제가77.6월군번이고 조하사가77.9월군번이
이엇죠. 사격을잘해서 사단대표로 파견근무하다가 제가상병때 3소대로왔지요.군생활찍은 빛바랜사진사진다음에올리겠습니다. 부여군군의원을하고 계시면서 농사를짇고있죠.